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선물은 그 사람의 길을 너그럽게 하며 또 존귀한 자의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
잠언 18장 16절.
흔히 전도를 우선시하는 교회, 특별히 구원파 중 하나인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이하 대침)에서는 전도를 할 때에 선물을 주면 더욱 전도가 잘 된다, 그러므로 물질을 사용하여 전도를 해야 한다 등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위의 본문을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이 본문은 사실 선물에 대하여 완전히 긍정적인 의미로 말하고 있는 구절은 아니다. 이것은 마치 두 렙돈을 바친 과부의 모습을 보고 예수께서 탄식하셨던 본문을 가져와 우리도 두 렙돈을 바친 과부와 같이 자신의 전부를 드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잠언 본문의 의미를 잘 알기 위해서는 성경의 배경이 되는 고대 세계에서 ‘선물’이라는 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가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중심으로 하여 간략하게 해당 본문을 묵상해 보겠다.
고대 세계의 선물
아마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 중에서 고대 세계의 ‘선물(gift)’이 차지하는 위치를 상세하게 고찰하고 그것을 성경의 문맥에 적용한 것으로는 그 유명한 존 바클레이의 『바울과 선물』이라는 저서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정말 좋아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전반부에 '선물'에 대한 인류학적인 논문들의 체계적인 리뷰를 담고 있으며, 은혜와 구원에 대한 역사 속의 굵직한 주요 주장들을 정말 탁월하게 요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학자들이 성경을 다루는 해석에도 관심을 두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클레이의 체계적이고 탁월한 연구가 빛을 발하는 부분이 바로 ‘선물’이 고대 세계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느냐 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클레이가 여러 고대 문헌들을 체계적으로 고찰한 연구들을 통해 발견한 것은 고대 세계에서 선물이란 우리가 현대에 아무런 대가 없이 받는다는 의미의 선물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현대의 선물이란 선물을 주는 사람이 어떠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친구에게나 가족에게 생일 선물 같은 것을 줄 때에는, 그것을 받는 사람이 그에 대해 보답해야 할 의무가 생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것을 보답할 의무를 생각하고 무언가 제공하는 것은, 현대에는 상업적인 관계에 더욱 가깝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상업적인 것과 선물을 주는 행위를, 당연한 말이지만 분리하여 생각하고 다룬다.
그런데 고대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고대 세계는 선물이란 보답해야 할 의무가 생기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쉽게 말해 상호 교환의 의무가 생기는 것을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심지어 상업적인 행동을 통해 돈을 받는 것을 선물을 주는 것과 구분하여 생각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어떤 사람이 선물을 준다면, 그것을 받은 사람은 그 선물에 상응하는 (물론 정확하게 일치하진 않겠지만, 그 고마움에 해당하는 정도의) 어떤 보답을 할 의무가 생겼다. 그리고 선물을 준 사람은 그것을 받을 것을 매우 당연하게 기대하였고,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선물을 함부로 받는 것은 경솔한 짓이었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선물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물건을 건네 받고 다른 것으로 준다는 의미를 뛰어 넘어 선물을 준 상대방과 선물을 받는 자신이 상호 호혜의 관계로 엮인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만약 사회적 평판이 낮은 사람에게 선물을 받는다면, 그 사회적 평판이 낮은 사람에게 다시 보답의 의무를 지게 될 것이고, 이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리고 만약 선물을 받고서도 보답을 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더더욱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이미 필자의 블로그 글에 익숙한 분들이라면 고대 사회에서 명예와 수치, 곧 사회적 평판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였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자신의 명예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사회적 죽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만약 아직 이것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면, 아래 필자의 글을 참고하라.
여자의 긴 머리와 너울: 기독교는 성차별적인가? (고린도전서 11장 2-16절)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구원파)는 남녀 간의 수평적 관계 보다는 수직적 관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대침에서 생활하다가 나온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여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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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선물은 보답의 의무를 지도록 만들었고, 현대 사회에 좀 더 맞게 이것을 표현하자면, 마치 상거래 계약 관계와 비슷한 무언가를 형성했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단순히 ‘저 사람이 나한테 선물을 줬으니 나중에 보답해야지’ 정도의 가벼운 생각을 하는 것 보다는 더욱 무거웠다.
그러므로 성경에 등장하는 ‘선물’이라는 용어를 우리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선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 저자가 이 본문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에 실패하는 것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선물은 분명 이런 무거운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잠언에 사용되는 ‘선물’ 용어와 문맥적 상황
잠언에서는 ‘선물’이라는 용어가 이곳 18장 16절 뿐만 아니라 15: 27과 17: 8, 23에 등장한다. 18:16을 제외하고 다른 세 본문들에서는 ‘선물’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개역한글 번역은 이것을 ‘뇌물’이라고 번역하여 부정적인 뉘앙스를 (올바르게) 포착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18:16에서는 이것을 평이한 용어인 ‘선물’로 번역하다보니, 대침과 같이 이것이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해석과 주장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학자가 지적하는 것과 같이, 이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먼저 히브리어 용어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잠 18:16을 포함하여, 4개의 본문에는 두 가지의 ‘선물’을 의미하는 히브리어가 사용되었다. 잠 17:8 및 23에는 히브리어 “샤하드(שֹׁ֫חַד)”가 사용되었으며, 반면에 잠 18:16 그리고 15:27 에서는 히브리어 “마탄(מַתָּן)”이 사용되었다. 이 두 단어 모두 ‘선물’이라는 의미를 가지지만, 학자들은 여기서 부정적인 어감을 지니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특별히 잠언 17:8 및 23에 사용된 “샤하드”의 경우에 『BDB』는 이것이 보통 정의를 왜곡시키기 위한 것으로 성경에서 다용 된다고 말한다(“usually to pervert justice”). 『NIDOTTE』는 이것을 더욱 상세하게 개괄한다. 즉, 구약성경에서 “샤하드”는 여호와께서 뇌물을 받는 것을 금지하는 경우에, 그리고 재판장들의 눈을 멀게 만드는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욥이 친구들에게 선물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사용된다.
“마탄” 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잠언 18:16에서 사용된 “마탄”은 잠언 15:27에서도 “마타나(מַתָּנָה)”로 사용되어 있는데, 문맥상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개역한글에서도 “뇌물”이라 올바르게 번역하여 이러한 의미를 제대로 포착해냈다. 마탄은 일반적인 선물이라기 보다는 어떤 값을 지불하는 것에 더욱 가까워 보이는데, 『NIDOTTE』에 의하면 하나님 혹은 우상에게 바치는 제물이나, 아니면 결혼할 때에 신랑이 장인어른에게 지불하는 신부값(Bride Price)에서 “마탄”이 사용된다. 특별히 이 ‘신부값’이라는 의미는 위의 “샤하드”에도 존재하며, 두 단어 모두 뇌물, 즉 "bribe"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학자가 표현한대로 잠언 본문에서 말하는 이 선물은 “로비 행위”에 더욱 가까웠을 것이다. 더욱이 해당 본문 전후 문맥은 이러한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지하는 듯이 보인다. 잠언 18:13에서는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라고 말하고 있고, 우리가 다루는 본문 바로 다음 본문인 18:17에서는 “송사에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 피고가 와서 밝히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여기서 말하는 ‘선물’이 재판의 상황에서 오고 가는 뇌물을 의미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많은 주석가들 역시 16-19절의 본문을 재판에서의 소송 상황인 것으로 함께 묶어서 다룬다.
결론
잠언 18:16의 선물이 사람의 길을 너그럽게(넓게)하며 존귀한 자(크고 위대한 자) 앞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그렇다면 무슨 의미일까? 선물을 많이 줘서 자기 입지를 튼튼히 만들고 전도를 할 때에 유리한 지점을 만들라는 조언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이것은 뇌물을 사용하여 자기 길을 형통하게 만들고 뇌물을 통해 사회의 지도층과 커넥션을 만들며 로비하여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부정하게 얻는 사람들을 묘사하며 비판하는 본문이다. 잠언 저자는 그런 것을 일관되게 비판적으로 그린다.
그렇다면 왜 구원파 중 대침과 같은 곳은 이 본문을 ‘전도를 잘 하려면 돈을 써야 한다’ 정도로 취급하게 된 것일까? 필자가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자면 아마도 16절의 번역 때문일 것이다. 16절은 히브리어 본문과는 다르게 “그 사람의 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16절의 본문에서 말하는 사람이 앞에서 말한 어떤 대상을 다시 가리키고 있다는 듯한 추가적인 의미를 전달해준다. 그리고 15절에는 명철하고, 지혜로운 자가 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16절의 이 사람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16절의 본문에 ‘그’라는 정관사 “헤(ה)”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아담(אָ֭דָם)”, 즉 “사람”이라는 표현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것을 앞 15절의 지식을 얻는 데 관심을 갖는 “레브(לֵ֣ב)”나 지식을 찾는 “하카밈(חֲ֝כָמִ֗ים)”의 귀라고 볼 이유는 없다. 본문은 이 “아담”이 앞에 이미 설명된 어떤 대상을 가리킨다는 암시를 하지 않는다.
또한 전도, 즉 교세확장과 성장 그 자체에 미쳐 있는 분위기에 있는 교회들의 경우 (구원파의 대침 등) 이런 본문들을 그러한 전도 위주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부당하게 바라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본문에 나오는 ‘선물’을 긍정적인 것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이 본문 그 어디에도 ‘전도’나 ‘선교’라는 용어는 등장하지 않으며 그러한 내용을 유추하거나 추론할 수도 없다. 물론 하루 종일 교회 성장만을 생각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보일 것이다.
현대에는 선물이 어떠한 거래의 의미라기보다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다소 가벼운 의미를 담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원하는 사람에게 부담 없이 선물을 전달하고, 또 받는다. 선물을 주고 받는 것은 좋은 문화이며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선물을 주는 것은 좋지 않을 수 있다. 특별히 속물적인 목표를 위해 선물을 바치고 부당한 방식으로 어떤 결과를 바꾸려 할 때에 우리는 이것을 뇌물이라고 부른다. 이런 종류의 선물은 결코 좋은 선물이 아닐 것이다.
전도를 위해 상대방에게 선물을 주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여러 교회들도 간단한 선물, 이를테면 물 티슈나 사탕 같은 것을 돌리면서 사람들을 전도하곤 한다. 그것이 반드시 나쁘다거나, 혹은 아주 바람직한 것이라거나, 그렇게 쉽게 단정할 수 없다.
그것과 별개로, 여기서 다루는 잠언 18:16의 본문은 그런 것들과 무관한 것을 말하고 있다. 사실상 이 본문의 시점에서 잠언 저자는 전도를 할 때에 어떤 방식(돈을 쓰든 안 쓰든)을 취해야 하는가 등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을 것이다. 또한 과연 우리가 좋은 마음으로 주는 선물까지도 부당한 것에 해당하느냐를 따지는 것 등에 대해서도 아무런 관심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잠언 저자가 여기서 관심을 갖는 것은 악인들이 뇌물을 통해 정의를 왜곡하고 판결을 굽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며, 그 뇌물이 부당하게도 어떤 사람을 부유하고 잘 나가도록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사회에서 우리가 쉽게 관찰할 수 있는 결코 정의롭지 않은 서글픈 현실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의 삶의 태도가 여기서 결정된다. 자신의 인생을 형통하게 만들기 위해 뇌물을 주는 부정직한 방식에 의존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정정당당하게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아갈 것인가? 그것이 이 본문에서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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