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9장 2절 묵상: 어둠 속의 빛 (사 9:2) Meditation on Isaiah 9:2

성경 묵상

이사야 9장 2절 묵상: 어둠 속의 빛 (사 9:2) Meditation on Isaiah 9:2

바잇 카탄 2025. 4. 28. 17:47

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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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이사야 9장 2절

 

 

 

이사야서는 많은 부분에서 메시아적인 기대와 소망을 표현하는 구절들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구약학자들은 이사야의 메시아적인 본문들을 설명할 때 주로 히스기야 왕의 출현을 예고한 것이 일차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사야 본문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볼 때 이사야서가 그 당시의 히스기야 왕을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중요하게 여기고 강조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사야의 본문은 히스기야 왕에게서 종결되는 소망만을 말하기 위해 기록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사야의 본문들은 히스기야 왕만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고 우리가 단순하게 결론 내리기에는 역사적인 실제 시대의 사건을 뛰어 넘는 내용들을 대거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메시아적인 본문들이 당연히 더욱 나은 메시아, 곧 진정한 기름 부음 받은 왕인 예수 그리스도를 기대하고 소망하는 본문들이라고 믿고 고백할 것입니다. 저 역시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이사야의 본문들은 히스기야 왕 등을 당연히 일차적으로 지칭할 수 있겠지만, 다윗 왕조의 영원성을 설명하는 본문들이 문자적으로 취급되지 않는 것처럼 기름 부음을 받은 왕에 대한 본문들도 히스기야 보다 더 나은 완전한 왕을 우리가 기대하도록 만듭니다.

 

오늘은 이 메시아적 기대가 이제 막 싹 트고 있던 여명의 시기에 기록된 본문에 대해서 묵상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흑암에 비추는 빛


이사야의 해당 본문을 히브리어로 읽는 사람이라면 이곳에서 사용된 두 단어인 호쉑(חֹ֫שֶׁךְ)”오르(אוֹר)”에 대해 눈길이 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두 용어는 성경에서 상당히 자주 사용되는 유명한 단어들이기 때문입니다. “호쉑의 의미는 “어둠(darkness)”을 뜻합니다. 그리고 오르빛(light)을 의미합니다.

 

이 두 단어를 제가 유명하다고 이야기한 이유 중 하나는 이 단어들이 창세기 1 2-3절에서도 동일하게 찾아볼 수 있는 단어들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 2절에서 하나님께서 창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실 때, 땅의 상태는 다음과 같이 묘사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호쉑)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여기서 흑암으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호쉑입니다. 그리고 예상 가능하시다시피, 3절에서 하나님께서 을 창조하실 때 이 은 바로 오르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오르)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따라서 히브리어로 이사야서 9 2절의 본문을 읽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창세기 1 2-3절의 흑암에서 빛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떠올릴 것입니다. 마치 태초에 하나님께서 어둠 가운데 빛을 창조하셨던 것처럼, 흑암(호쉑)에서 행하던 백성들에게 빛(오르)이 비췹니다. 그리고 그 빛은 희미한 빛이나 꺼져가는 깜빡이는 빛이 아니라, “큰 빛입니다.

 

빛이 사라지는 캄캄한 밤은 고대인들에게는 두려움의 시간이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어둠이 찾아온 뒤에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사제들이 태양신 가 어둠을 이기고 다시 떠오를 것을 기원하는 예배를 새벽마다 매일 드렸습니다.

 

어둠은 인간의 의식 속에서 언제나 부정적이고 악한 것, 꺼리는 것으로 등장합니다. 우리가 어둠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죽은 것, 생기 없는 것, 색이 바랜 것, 소멸 등입니다. 빛이 하나도 없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우리는 극심한 공포와 불안감을 느낍니다.

 

어둠은 또한 제대로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무지의 상태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어둠 속에 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은 진리를 잘 바라보지 못하는 부정적인 상황에서 주로 사용됩니다. 마찬가지로 어둠 역시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을 비유할 때에 사용됩니다.

 

이사야 9 2절의 본문에서 백성들은 이런 어둠 속에서 행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들은 캄캄한 흑암 속에서 극심한 공포와 불안감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사야의 해당 본문이 가리키는 시대에는 앗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런 불안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포함하여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굉장한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바라보는 능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북이스라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앗시리아에게 멸망을 당했다고 기록합니다. 마찬가지로 남유다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남유다 역시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 당하게 되니까요.

 

말하자면, 이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는 데에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인식의 어둠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둠은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을 만들어냅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흑암을 밝히는 작은 빛입니다. 마치 혼돈과 공허가 가득하던 흑암 속에서 빛이 밝혀지던 태초의 창조 순간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창조란 의미와 목적과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일지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없이 온갖 것들이 뒤섞여 있는 공간과 물질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경계를 나누고 질서를 부여하십니다. 그리고 이름을 붙여 주시고 의미를 선사하십니다.

 

인간은 의미에 목 말라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의미, 목적, 질서가 없이는 살아갈 힘을 잃어버립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이 아무런 의미와 목적이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행동을 할 동기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처럼, 인생에서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극심한 불안감과 우울감에 빠져듭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고 해서 예외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가슴을 움직이게 만드는 그런 빛이 언제나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 위치를 파악하고 미래를 설계해 나갈, 그런 빛 말입니다. 창조의 빛, 의미를 부여하는 빛, 숭고한 목적을 향해 우리를 인도할 빛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 본문에서 이 빛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새벽

 

 


 

영원한 평강의 왕


 이사야 9 6-7절에서 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빛이 비춘다고 이사야 선지자가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한 아기, 한 아들이 이 땅에 태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사 9:6)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 9:7)

 

구약학자들은 이 왕을 일차적으로 히스기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왕의 묘사가 영원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히스기야로만 국한하여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어둡고 힘든 시기에 이사야서의 이 같은 본문들은 아마 깊은 밤의 끝에서 어둠을 몰아내는 여명의 시기를 소망하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좋은 왕이었지만 영원한 왕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작은 빛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모든 흑암을 몰아낼 창조의 큰 빛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태양이 밤을 이기고 떠오르는 것처럼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는 근본적인 창조의 빛이 필요합니다.

 

메시아 사상이 발전되어 갈수록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누구인가, 과연 지금이 메시아 시대인가 하는 물음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히스기야는 메시아 시대를 기대하게 만드는 첫 인물로 우리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강대국에 의해 점령되는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메시아에 대한 열망은 더욱 깊어져 갔습니다.

 

기원전 2세기 안티오코스 4세에 저항하여 마카비 전쟁이 발발하면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의 일부를 탈환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유다 마카베오는 하스모니안 왕조의 첫 왕이 되었으며 성전 예배가 회복되면서 구약성경이 예언한 바로 그 시기가 도래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몇몇 유대인들에게는 실제로 마카베오가 메시아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카베오가 성전을 회복한 그 날이 ‘수전절, 곧 빛의 축제로 불리는 ‘하누카’가 되었습니다.

 

하누카는 총 8일동안 진행되며 축제 기간 동안 매일 한 개의 초를 밝힙니다. 그래서 하누카 절기는 어둠 속의 빛을 상징하는 명절입니다. 빛이 어둠을 이기고 승리하는 날, 성전에 밝혀진 일곱 촛대 메노라의 빛이 꺼지지 않는 날, 흑암 속에서 빛이 떠오르는 바로 그 날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수전절의 주인공이 된 유다 마카베오는 유대인들에 의해 어둠의 자식이라고 욕을 먹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마카베오가 시작한 하스모니안 왕조는 온갖 지저분한 일과 비리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마카베오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했지만,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창조의 빛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창조의 빛, 예수


 어둠을 이겨내는 빛에 대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신약성경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요한복음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의 시작을 매우 인상적으로 그려내고 있는데요. 그는 예수님을 설명하면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이것을 시작합니다. ‘태초라는 단어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을 창세기의 무대로 옮겨 놓습니다. 창세기에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이 예수님의 등장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요한복음 1 5절은 이것을 정말 잘 보여줍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5)

 

예수께서 유대 땅에 오셨을 때 세상은 어둠 속에서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깊은 밤 중에 고통과 두려움, 목적과 의미를 상실한 불안감,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바라보지 못하는 흑암의 무능함이 모두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 드디어 밤이 끝나고 새벽의 여명이 희미하게 빛납니다. 빛은 점점 커져서 타오르는 태양이 되어 어두운 곳 구석구석을 비춥니다. 춥고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따뜻함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가진 자들에게 목적과 의미를, 어둠을 더듬거리는 자들에게 깨달음의 고양을 선사합니다.

 

이사야가 예언한대로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는 것입니다. 진정한 창조의 빛 말입니다. 무질서함과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고, 공허에 의미를 부여하며, 흑암을 이기고 승리하는 참 빛입니다. 그것은 바로 한 아기, 한 아들, 평강의 왕, 다윗 왕조의 영원한 왕,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호쉑 속에서 떠오르는 오르, 아름다운 우리의 왕입니다.

 

히스기야와 마카베오의 시대를 지나 드디어 길고 긴 밤이 끝났습니다.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아침이 이제 시작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셨던 것처럼, 새로운 창조가 다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창조의 빛입니다.

 

두렵고 공포스러운 어둠 속에서 막막한 현실을 바라보며 불안감에 탄식하고 계십니까? 의미와 목적을 상실한 채 길을 잃으셨습니까? 당신의 어둠을 몰아낼 창조의 빛,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불안하고 두려운 삶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예수님과 함께 모든 것을 다시 새롭게 시작할 창조의 역사 속으로 초대될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와 앉아서 그분의 제자가 되십시오. 그분의 말을 듣고, 그분의 성품을 음미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예수님의 넓은 사랑에 감동하게 될 때에, 흑암 속에 다니던 백성들에게 큰 빛이 비취는 것처럼,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서 빛이 창조되는 것처럼, 깊은 밤이 끝나고 새벽에 여명이 동터오는 것처럼, 당신의 가슴 속에서 빛이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 빛은 진정한 창조의 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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