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장 31절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강하고 새로운 힘을 지속적으로 불어 넣어왔던 이사야의 해당 본문 말씀은 단순히 “힘을 내라”라는 메시지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포로기 유대인들의 기대와 염원을 표현하는 신앙 고백이었으며, 종말적인 메시아의 도래를 바라보는 소망의 고대함과 갈망의 외침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미 오신 겸손하신 메시아 예수님과 다시 오실 승리의 왕 예수님을 바라보고 소망하며 하나님의 나라의 완전한 실현을 기다리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기다리는 신앙의 여정이 쉽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날마다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실감해야 한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개역한글에서 “오직”이라고 번역한 접속사 “붸(וְ)”는 여기서 “그러나(but)”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앞 구절의 30절과 31절의 내용이 서로 대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30절에서 “소년들”, 곧 “네아림(נְעָרִ֖ים)”과 “청년들”, 곧 “바후림(בַחוּרִ֖ים)”은 피곤하며 곤비하며 넘어지며 자빠지지만, 31절에서 등장하는 이 사람은 그렇지 않다.
이 사람은 30절의 건장한 청년들과 비교했을 때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 것인가? 그 특성이 히브리 동사의 분사형을 통해 드러난다. 흔히 히브리어에서 분사형 동사는 “~한 사람”을 뜻하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곤 한다. 여기서도 동사 “카봐(קוה)”의 분사 연계형인 “코베(קוֹיֵ֤)”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코베”는 뒤의 “야웨(יְהוָה֙)”와 결합하여 “여호와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만들어낸다.
동사 “카봐”는 “기대하다, 기다리다, 소망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의미 중 가장 두드러지는 뉘앙스는 소망으로 어떤 대상을 기다리는 이미지이다. 따라서 『HALOT』은 이것의 의미를 “await, hope”로 제안한다. 1존 오스왈트(John Oswalt)가 해당 용어를 “those who wait”이라고 번역한 것은 여기서 기다리는 이미지가 더욱 강조되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다. 2따라서 이 단어에는 “기다리다” 그리고 “바라다”의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고 여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떤 것을 소망으로 기다리는 것이 이 용어가 전달하는 가장 적절한 의미이다.
여기서 소망으로 기다리는 대상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야웨”)을 가리킨다. 본문의 하나님을 기다리는 이미지는 시편 기자가 탄식으로 고통 중에 하나님의 개입하심, 곧 그분의 구원을 바라고 기다리는 것과 같다. 특별히 국가의 멸망을 지켜본 바벨론 포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것이 국가 이스라엘을 다시 재건하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는 것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욱 낫게는, 이사야 전체가 바라보는 종말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바라보는 기대가 이곳에서 드러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유대교의 메시아 신앙은 이러한 기대에 가장 잘 부응한다. 하나님의 종말적 도래는 메시아 신앙을 통해 종종 고백 되었다. 이러한 메시아 신앙은 두 가지의 주된 경향성이 있었다. 현재의 세상이 점진적으로 개선되어 메시아 시대로 이어진다는 “회복의 기대”와, 대전쟁(‘여호와의 날’)이 일어난 뒤 완전한 종말과 함께 메시아가 재림한다는 “대이변적인 기대”가 그것이다. 3그리고 이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인해 기독교 신앙에서 사실상 하나의 흐름 안에 통합된 것으로 보인다.
어느 방향이 되었든(점진적인 회복이든, 급진적인 대격변이든)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왕으로 오셔서 모든 것을 완전한 회복의 상태, 곧 “샬롬(שָׁלוֹם)”의 상태로 만드실 것이라 기대하였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진정한 실현의 날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런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는 “힘을 새롭게 바꾼다”. “야할리푸 코아흐(יַחֲלִ֣יפוּ כֹ֔חַ)”는 기존에 갖고 있었던 낡은 무언가를 새 것으로 바꾸는 이미지를 전달한다. 기존에 인간이 가지고 있던 힘들은, 특별히 30절의 (자기 인생의 최 전성기에 해당하는) 건장한 청년들이 가진 것과 같은 힘들은 이제 낡은 것으로 취급을 받는다. 그 힘은 유한하고 제한적인 힘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낡아서 그것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피곤하고 지치게 만들 것이다.
이제 그것은 새로운 무언가로 바뀐다. 29절에 의하면 이것을 주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사야 저자는 이것을 제공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무한한 특성, 곧 피곤치 아니하며 곤비치 아니하며 명철이 한이 없으신 신적인 특성에 우리를 주목하게 만든다(28절). 그러한 무한한 능력을 갖고 있는 분이 만약 우리가 이미 갖고 있던 낡은 힘을 새로운 것으로 대체해 주시는 것이라면, 그것은 무한한 근원을 가진 힘을 우리가 소유하게 됨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힘을 받은 사람은 30절의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결코 지치지 않을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 그리고 보지 못하는 것들을 현재로 가져와 실제와 증거로 여기는 것이라 설명한다(히 11:1). 이것은 이사야 본문의 동사 “카봐”가 미래에 오실 하나님을 소망으로 기다리는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과 부합하는 설명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다면 산을 옮길 능력을 우리가 가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17:20). 또한 우리 기독교인들의 신앙(믿음) 역시 종말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새로운 힘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종말의 하나님의 도래를 소망의 기다림, 곧 믿음으로 고대해야 할 것이다.
반면에 우리의 신앙은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여호와를 기대하는 것”과 비교했을 때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는 사실상 이미 그 분을 만났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8절에서 빌립은 예수께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면 그가 만족하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사야서에서 나타나듯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만나길 기대하고 소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빌립의 이 요청에 대해 다음과 같은 뜻밖의 대답을 하신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그러면서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신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그러므로 실은 우리 기독교인들은 구약성경이 기다리고 소망하던 바로 그 순간을 지금 누리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고 만난다. 그리고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는 다르게 생각보다 부드럽고, 따뜻하며, 겸손하고 사랑스러웠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새 힘을” 얻었으며 얻어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이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소망하는 기독교인은, 곧 여호와를 앙망하는 그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다.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학자들은 “그들이 날개를 달고 독수리처럼 올라갈 것이요”라는 루터의 번역은 그럴 듯 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4왜냐하면 이것은 동사 “그들이 올릴 것이다”의 “야알루(יַעֲל֥וּ)”의 목적어로 보이는 명사 “날개”, 곧 “에베르(אֵ֖בֶר)”를 부사적 대격으로 취급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학자들은 동사 “알라(עלה)”를 식물에서 사용된 용례와 같이 “내뻗다”의 의미로 이해하고, 힘을 새롭게 함과 관련하여 날개의 깃털을 계속해서 새로 기른다는 것으로 독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5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날개를 들어 올린다, 곧 “펼친다”의 의미일 수 있다(“독수리와 같이 날개를 그들이 펼친다.”). 무엇이 되었든, 여호와를 소망으로 기다리는 자들은 마치 독수리와 같이 공중으로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힘을 통해서 말이다. 왓츠(John D. W. Watts)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 본문의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독수리 날개로 비유한 것은 적절하다. 높이 나는 독수리는 자기의 강한 날개 때문에 높이 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날개를 받쳐 주는 기류 때문에 떠 있는 것이다.” 6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두 개의 짧은 문장이 다음과 같이 연이어 나열된다.
“야루쭈 베로 이가우(יָר֙וּצוּ֙ וְלֹ֣א יִיגָ֔עוּ)”
“옐르쿠 베로 이아푸(יֵלְכ֖וּ וְלֹ֥א יִיעָֽפוּ)”
뛰는 것과 걸어가는 것의 이미지는 여호와를 소망으로 기대하는 것이 단회적이고 일시적인 순간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이어지는 과정임을 암시할 것이다. 7하나님을 바라는 신앙을 갖는 것이란 어느 순간에 모든 것을 종결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시편 저자가 시편 1편에서 길을 걸어가는 심상으로 시편 전체를 시작했던 것처럼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기독교인들의 신앙 역시 종말을 소망하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 관계 속에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여정으로 묘사될 수 있다. 존 번연(John Bunyan)의 『천로역정』은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들의 신앙 여행을 정말 잘 묘사한 걸작이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고린도 교인들처럼 이미 얻은 것으로 여기고 먼저 왕노릇 해서는 안 된다(고전 4:8). 다만 우리는 믿음으로 인내하며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신앙생활을 (즉, 걸어가는 생활을) 해야 한다(벧전 4:11). 우리에게 맡겨진 달란트의 회계가 아직 종결된 것이 아니란 것을 잊지 말자. 주인이 돌아와 회계할 때에 우리가 가진 종말적 신앙의 정체가 어떠한가가 드러날 것이다(마 25:14-30).
그 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날아 오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이 땅에 찾아오실 것이다. 그 날을 기다리며 소망한다(“קו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 L. Koehler & W. Baumgartner, 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STUDY EDITION VOLUME II, trans. ed. M. E. J. Richardson, BRILL, 2001, 1082 [본문으로]
- John Oswalt, The Book of Isaiah chapters 40-66, trans. Yong Jung Lee, Revival & Reformation Publishing, 2016, 80. [본문으로]
- Lawrence H. Schiffman, EARLY JUDAISM: A COMPREHENSIVE OVERVIEW, edit. John J. Collins & Daniel C. Harlow, trans. Gyou Seob Kim etc., Gameun Publishers, 2022, 707. [본문으로]
- John Oswalt, The Book of Isaiah chapters 40-66, trans. Yong Jung Lee, Revival & Reformation Publishing, 2016, 84. [본문으로]
- Rather, “They shall put forth fresh feathers as eagles” are said to renovate themselves; the parallel clause, “renew their strength,” confirms this. The eagle was thought to moult and renew his feathers, and with them his strength, in old age (so the Septuagint, Vulgate, Ps 103:5).
Robert Jamieson, A. R. Fausset와/과David Brown, Commentary Critical and Explanatory on the Whole Bible, vol 1 (Oak Harbor, WA: Logos Research Systems, Inc., 1997), 475. [본문으로]
- John D. W. Watt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25 Isaiah 34-66, trans. Cheol Seong Kang, Solomon Press, 2002, 184. [본문으로]
- John Oswalt, The Book of Isaiah chapters 40-66, trans. Yong Jung Lee, Revival & Reformation Publishing, 2016, 8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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