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1편
시편을 몇 권의 시집 모음으로 다루는 구약학의 관점에서, 그것이 2권으로 나누든 아니면 5권으로 나누든, 시편 1편과 2편은 시집 모음의 첫 번째 권의 서론 역할을 담당하는 시이다. 그중에서도 시편 1편은 가장 앞에 위치하고 있어서 시편의 첫 번째 책의 서론뿐만 아니라 시편 전체의 서론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시편이 본래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는가를 차치하고서, 현재의 시편의 구성에서 가장 첫 번째를 담당하는 시편 1편은 시편을 기록하거나 편집했던 저자가 아마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본문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 1편을 묵상하면서 시편 전체의 주제가 가리키는 거시적인 방향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시편 23편 다음으로 시편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논하는 작가들의 펜의 잉크를 가장 많이 쏟도록 만든 본문은 이 시편 1편 외에는 없다. 특히 악인의 길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그것과 대조되는 의인의 길의 생명력,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나무와 말라서 바람에 날리는 겨의 이미지를 통한 의인과 악인의 대조는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사람이 걸어가야 할 신앙의 여정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를 기독교인들이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 시편 1편의 본문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복 있는 사람은
(אַ֥שְֽׁרֵי־הָאִ֗ישׁ אֲשֶׁ֤ר)"
개역한글 등 한글번역본에서 "복 있는 사람은"이라 번역된 본문의 히브리어는 "아슈레(אַ֥שְֽׁרֵי)"라는 연계형 명사로 시작한다. 히브리어 문장에서 이렇게 연계형 명사가 가장 처음 등장할 때에는 저자가 이 명사를 강조한 것이므로, 글을 읽는 독자는 이 부분에 마땅히 주목해야 한다. "아슈레(אַ֥שְֽׁרֵי)"는 "행복"이라는 뜻을 일차적으로 갖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기독교 문화권에서 "축복"이라 부르는 "blessed"의 뜻도 갖고 있다. 또한 이 명사 연계형은 여기서 서술적인 용법으로 쓰였기 때문에, 대략적으로 "행복하다", 혹은 "복이 있다"의 의미로 번역 가능할 것이다.
대다수의 신실한 믿음을 갖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시편의 가장 첫 마디가 "행복하다"로 시작한다는 것은 상당히 낯선 사실일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그들의 종교관에서 행복을 우선하기보다는 희생과 헌신을 우선하도록 강요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의 글에서 종종 이 세상의 행복 등을 쫓지 말라는 내용을 확인하곤 한다.
이것은 우리가 "행복" 혹은 "복" 자체를 현대인의 시각에서만 해석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우리의 사고 속에서 "행복"은 주로 쾌락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현대인들의 소위 "행복 추구"는 몇몇 기독교인들에게는 반감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르게 성경이 행복 자체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이 불행하길 원하는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우리 각 개인이 참으로 행복한 정신 상태에 머무는 것을 누구보다 깊게 원하신다.
평범한 사람들이 추구하고 누리는 일반적인 작은 행복이 있을 수 있다. 근동 지역의 고대인들에게는 자손의 번성과 명예 및 부의 안정적 획득 등이 행복의 대상이자 길이 되었다. 반면 현대인들의 행복의 대상은 이 보다는 다소 소소한 편이다. 우리의 작은 뇌는 이제는 단순한 감각에 의존하여 쉽게 만족하는 경향이 크다. 이것은 하루 중 대부분을 스마트폰을 통해 약간의 도파민을 가장 신속하게 얻기 위해 손과 눈을 바쁘게 굴리는 현대인들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혹은 좋은 명품을 하나씩 구매해서 들고 다니거나, 주말에 파인 다이닝(fine dining), 풀빌라 등을 통해 프리미엄의 기분을 느끼고자 하는 경우에도 그럴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시민운동을 하거나 어떤 특정 모임에 나가면서 소속감과 행복을 느낀다. 더욱 평범하게는 만화나 드라마나 영화, 혹은 아이돌 등의 미디어 매체의 대상을 소위 "덕질"하기도 한다.
기독교인이 일상에서 얻는 이런 종류의 자잘한 행복들은 그 자체로 나쁜 것으로 정의될 수 없다. 성경은 이런 소소한 행복에 반대하지 않으며, 오히려 좋은 음식과 좋은 환경 등을 권장하고 그것을 누리는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묘사한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행복"이란 그런 것들이 아니라 더욱 깊은 것, 곧 인간의 본질적 행복, 삶의 중심, 인생의 가장 중요한 궁극적인 행복을 뜻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궁극적인 인생의 가장 중요한 본질적 행복이 명품을 사서 모으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여기 시편 저자의 사상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궁극적 행복이 아이돌 덕질하는 것에 있다고 여긴다면, 시편 저자는 그 사람의 인생관에 사실상 반대한다. 또 어떤 사람이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스마트폰을 하는 것에 할애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참된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면 시편 저자가 제시하는 하나님의 길은 그 사람에게는 매우 불편할 것이다. 즉, 우리 인생의 전부를 설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행복이 무엇이냐, 그것이 시편 기자가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이다.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정의하는 사람이라면 시편 저자의 이 도전에 대해 각자 숙고해봐야 한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삶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자 가장 본질적인 가치라고 여기는 기독교인들에게, 참된 행복은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으로부터 나오며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가? 그리고 지금의 나는 과연 주로 무엇을 통해, 그리고 하루 중 무엇을 하면서 행복감을 느끼며 살고 있는가?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가장 큰 즐거움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시편 저자가 시편 전체의 서론을 "행복"이라는 주제로 과감하게 시작한 것은 우리의 하루를 돌아보게 만든다. 일을 하거나 먹거나 자는 등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활동 이외에 나의 취미 생활, 휴식 시간의 대부분이 어디에 쓰이고 있는가를 살펴볼 때, 우리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가장 행복하게 느끼고 있던 대상의 참된 실체가 드러난다.
우리는 간혹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좋은 물건을 쇼핑하거나 양질의 음식을 찾아다니거나 스포츠 활동, 동아리 모임을 즐기거나 영화나 드라마나 만화에 빠지기도 하고 연예인을 덕질하거나 게임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면, 가장 큰 행복감을 이것들에서 얻지는 않을 것이다. 잠깐 이같은 것들을 즐기면서도 우리는 가장 확실하고 가장 본질적이고 가장 가치 있는 행복 아래로 다시 돌아온다. 우리가 여유 시간을 갖거나 일을 마치고 휴식할 때에 틈틈이 말이다.
동시에, 시편 저자가 "행복하다"라고 서술한 것에는 기독교인이 주관적으로 감각하는 행복의 감정 외에도 객관적으로 부여 받는 "복된 상태"라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행복감을 현재 느끼고 있는 동시에, 축복받은 복된 상태에 지금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아슈레(אַ֥שְֽׁרֵי)"이다.
히브리어 본문을 그대로 직역하자면, "~한 그 사람은 행복하다(복되다)"의 의미가 된다. 이제 우리는 시편 저자가 말하는 이 "그 사람(הָאִ֗ישׁ; 하이쉬)"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이것을 설명하는 접속사 "아쉐르(אֲשֶׁ֤ר)"절의 내용을 살펴보아야 한다. 과연 시편 저자가 정의하는 행복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לֹ֥א הָלַךְ֮ בַּעֲצַ֪ת רְשָׁ֫עִ֥ים)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וּבְדֶ֣רֶךְ חַ֭טָּאִים לֹ֥א עָמָ֑ד)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וּבְמוֹשַׁ֥ב לֵ֝צִ֗ים לֹ֣א יָשָֽׁב׃)"
행복한 사람은 세 가지의 부정적인 방식의 행동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세 문장의 각각의 주동사가 부정어 "로(לֹ֥א; not)"와 함께 등장한다. 또한 세 동사가 지시하는 바가 전치사 "베(בְ)"와 결합된 세 전치사구로 표현된다. 이 각각의 동사들과 그리고 그 동사가 가리키는 바는 시편 저자가 생각하는 행복한 사람의 주요 특징을 이룬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 하지 않는 행위들, 즉 세 가지의 동사들에 주목할 것이다.
세 동사들은 "로 할라크(לֹ֥א הָלַךְ֮; 걷지 않았다)", "로 아마드(לֹ֥א עָמָ֑ד; 서지 않았다)", "로 야샤브(לֹ֣א יָשָֽׁב; 앉지 않았다)"이다. 시편 저자는 여기서 각 동사들의 점진적인 단계적 변화를 통해 점차 쇠퇴해 가는 행위를 묘사한다. 이 행위는 시편 저자에 의하면 행복한 사람이 '하지 않는' 일이며, 따라서 좋지 않은 행동일 것이다. 독자들은 이 대목에서 걸어가던 사람이 제자리에 서고, 서 있던 사람이 그 자리에 앉는 심상을 떠올린다. 그것은 많은 주석가들이나 설교자들에 의해 어떤 한 개인이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짓고 그것이 습관화되어 결국 안주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그린 것으로 평가받는다. 즉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에게 저항하는 삶의 양식의 고착화의 과정을 시편 저자의 문학적 기법에서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세 가지의 동사들은 장소적 개념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걸어가는 심상은 길의 이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며, 서 있는 심상 역시 어떤 장소를 기대하게 만든다. 자리에 앉는 것은 마치 사람이 안주할 수 있는 탁자나 의자 따위의 물건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시편 저자가 생각하는 행복한 사람이란, 무언가 좋지 않은 길, 장소, 자리에 관여하지 않는 사람이다. 즉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반대하는 어떤 공간에 함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전치사 "베(בְ)"가 이끄는 전치사구들이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이런 장소적 개념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함일 수 있을 것이다. 전치사 "베"는 목적어를 단순히 나타낼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영어의 "in"의 의미와 가장 부합한다. 이제 세 문자의 첫번째에서는 동사 "로 할라크"가 먼저 등장하였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문장에서는 동사가 문장의 뒤로 가고 전치사구가 문장의 앞에 등장함으로써 동사가 지시하는 장소들이 강조된다. 반면에 첫 번째 문장에서 "로 할라크"가 문장의 앞에 등장하도록 내버려 둔 것은 6절의 "길"의 이미지와 함께 시편 1편의 전체적인 심상이 "길"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전치사구의 내용들과 동사를 함께 연결하여 살펴보자. 동사 "로 할라크"는 전치사구인 "바아짯 레샤임(בַּעֲצַ֪ת רְשָׁ֫עִ֥ים)"을 대상으로 가리킨다. "바아짯 레샤임"은 명사 "에짜(עֵצָה)"와 형용사 "레샤임(רְשָׁ֫עִ֥ים)"으로 구성되어 있다. "에짜"는 구약성경에서 매우 빈번하게 등장하는 용어이며, "계획, 조언, 모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계획 혹은 악한 자들의 모임 등을 모두 지칭할 수 있다. 간혹 어떤 신학자들의 경우 다후드(Dahood)를 따라 "에짜"를 우가릿어와의 관련성에 호소하여 "회합(assembly)", 혹은 "회의(council)" 등의 의미로 번역하기도 한다. 쾰러(Koehler)와 바움가르트너(Baumgartner)는 『HALOT』에서 이 단어를 "advice"의 의미로 읽을 것을 제안 하면서도, 1 베르그마이어(Bergmeier)를 따라 쿰란 사본의 용례에 근거하여 사악한 자들의 "교제"의 의미를 허용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크레이기(Peter C. Craigie)는 "회의(council)"의 의미와 "교제(community)"의 의미 중 다후드의 "회의" 보다는 베르그마이어의 "교제"의 의미가 더욱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듯 하다. 2 따라서 여기서는 "에짜"를 "잘못된 교제(모임)에서 나온 조언"으로 여기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3
"레샤임"은 "사악한 자들"을 뜻하기 때문에, "바아짯 레샤임(בַּעֲצַ֪ת רְשָׁ֫עִ֥ים)"은 "사악한 자들의 조언" 정도로 번역할 수 있으며, 첫 번째 문장의 의미는 곧 시편 저자가 말한 행복한 사람이란 사악한 자들의 조언을 따라 걷지 않는 특징을 지닌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의 사고 속에서 "걷다"를 의미하는 동사 "할라크"는 상당히 중요하다. 이를테면 동사 "할라크"의 명사형 "할라카(הֲלָכָה)"는 '성경법 (613 계명)과 탈무드, 랍비법, 관습과 전통을 포함한 유대교의 종교법' 전반을 일반적으로 통칭하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시편에서 말하는 "걷다"라는 것은 물리적인 길이나 장소를 걸어가는 것보다는 인간의 삶의 방향 설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 자신의 인생길이 악한 자들의 모임에서 나오는 조언대로 휘둘리는 방향을 갖고 있다면, 이런 사람은 스스로가 주관적으로는 일시적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객관적으로는 매우 불행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를 짓기를 좋아하는 자들의 조언은 감각적 쾌락을 삶의 중심에 설정하는 무의미한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들의 모임은 일시적인 것을 위해 삶을 바치는 것이 인생의 모든 것의 핵심인 것처럼 느끼게끔 만든다. 그러나 진정 행복한 상태에 있는 자는 이런 일시적 행복을 제시하는 모임을 멀리한다. 4
이제 이런 잘못된 인생의 방향 설정이 "데레크 핫타임(דֶ֣רֶךְ חַ֭טָּאִים)", 즉 "죄인의 길"이라는 보다 직접적인 표현으로 구체화된다. 동시에 이것은 "로 할라크"를 통해서 시작되고 6절에서까지 이어지는 일관된 심상인 "길"이라는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만든다. 그런데 이번에는 걸어가는 길 위에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의 이미지가 그려진다. 마치 그는 이제 자신이 걷던 거리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려 굳게 다짐한 것 같이 보인다. 동시에 우리는 "아마드(עָמָ֑ד)", 즉 "서다"라는 동사의 다른 의미에도 집중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이 단어는 어떤 한 사람이 자신의 종교적, 사상적, 정치적 입장을 밝히는 상황에서, 곧 자신의 "position, situation, stance" 등을 묘사할 때에도 빈번하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마치 영어에서 "서다"라는 "stand" 동사를 활용하여 "자신의 입장을 밝히다"라는 숙어적 표현인 "take a stand"로 표현할 수 있는 것과 같이, 히브리어의 "아마드"도 비슷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악한 자들의 조언대로 삶의 방향을 설정하고 따르던 사람은 처음에는 이것이 맞는 것인가 의문을 갖다가도 이내 확신을 갖고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한다. 곧 악한 자들이 제시하는 거짓된 행복의 방식을 자신의 세계관의 핵심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처음에는 악한 자들의 삶의 양식이 단지 "조언(에짜)"으로 다가왔지만, 이제는 자신이 충실히 따라야 할 "길(데레크)"로 느껴진다. 서서히 이 사람은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참된 정답이 아닌가 하는 위험한 생각 속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란 이 심연으로 빠져들지 않는 사람이다.
"오만한 자의 자리"로 번역된 "모샤브 레찜(מוֹשַׁ֥ב לֵ֝צִ֗ים)"은 "비웃는 자들의 자리"로 직역할 수 있다. "레찜(לֵ֝צִ֗ים)"은 기본적으로 "비웃는 자들"이라는 의미로 번역되며, 동사 "루쯔(ליץ)"가 "막연하게 말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롤프 제이콥슨(Rolf A. Jacobson)은 이에 대해 "수다쟁이"라는 기본적인 명사의 의미에 위협적인 추가적인 뉘앙스가 들어갔다고 말한다. 5 이 때문에 개역한글 및 개역개정에서는 "비웃다"라는 의미에 착안하여 "오만한 자"로 이것을 번역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 단어가 "오만함", 혹은 "거만함"에 방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단어는 비웃고 조롱하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오만하다는 의미는 부가적인 것이다. "모샤브(מוֹשַׁ֥ב)"는 "자리, 거주하는 곳, 거주지" 등을 의미하며, 주로 어떤 사람이 머무르는 장소를 포괄적으로 지칭할 때에 사용된다. 이 자리에 앉는 것을 뒤이어 동사 "야사브(יָשָֽׁב)"가 표현하는데, 이는 단순히 자리에 앉는다(seat)는 것을 뜻할 뿐 아니라 안주하고 그곳에 살아 거주하는 것(dwell)을 의미한다. 6
그렇다면 여기서 갑자기 "조롱하는 자의 자리"가 나온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롤프 제이콥스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여기서 악한 자들이 조롱하는 것이 시편 12편 4절 등에서 의인을 말로 공격하고 비웃는 것과 관련이 있다면, 우리는 여기서 악한 자들의 인생철학적 조언이 다수의 군중에 의해 핵심적 가치관으로 부상하고 난 뒤에, 그것을 따르지 않는 의인들이 조롱과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상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참된 행복을 따르는 자들의 삶의 방식은 일시적 행복을 따르는 악한 방식의 시각에서는 무식하고 비효율적이며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런 사상을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을 소위 "멍청한 사람들"로 취급한다. 현대에도 우리는 인터넷 등에서 이 같은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다. 그들이 보기에 기독교인은 사막 잡신인 야훼를 믿는 무식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만약 어떤 사람이 정상적인 이성을 소유하고 과학적 사고를 한다면 기독교를 믿을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과학적" 사상 속에서 인류는 동물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에 오로지 자신의 개인적 만족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따라서 타인을 위해 인생을 사는 것은 가장 무식한 짓이다. 또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것도 굳이 불필요한 피곤한 짓이다. 나의 자유로운 선택, 나의 만족감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인생의 절대적 가치다. 7
시편 저자가 말하는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이러한 사상들에 저항하며 그것들을 따르거나, 지지하거나, 자신의 삶의 핵심적 가치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람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이것이 참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의 주요한 특징이다.
그리고 이제 다음 구절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참된 행복의 사람의 특징이 묘사된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כִּ֤י אִ֥ם בְּתוֹרַ֥ת יְהוָ֗ה חֶ֫פְצ֥וֹ)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וּֽבְתוֹרָת֥וֹ יֶהְגֶּ֗ה יוֹמָ֥ם וָלָֽיְלָה׃)"
드디어 시편 저자가 말하는 행복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가 여기서 드러난다. 그 사람은 곧 여호와의 "토라(תּוֹרָה)"를 즐거워하고 밤 낮으로 묵상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토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이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의미는 "교훈"이며, 하나님의 가르침 전반을 가리킨다. 반면에 행함의 측면을 강조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구체적인 어떤 "율법"을 의미한다고 여겨지는 듯하다. 그러나 히브리어에서 "토라"는 구체적인 율법집을 의미하기보다는 모세 오경을 의미하거나 혹은 더 포괄적으로 구약 성경 전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토라"는 곧 잘 타낙흐(Tanakh; 유대인들의 성경) 전체를 의미한다. 『HALOT』은 이 단어의 의미를 "direction, instruction, decision, rule" 등 "지침, 규칙, 방향"의 뜻으로 제안하며, 이 단어가 "law", 곧 "율법", 헬라어 "노모스(νομός)"의 의미가 된 것은 후대의 중세 히브리어에 해당한다고 지적한다. 심지어 이것도 "holy scripture"의 의미와 관련된다. 따라서 크레이기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에 주신 "교훈"으로 해석하며, 8 롤프 제이콥슨 역시 시편의 문맥에서 이 단어는 "율법"으로 번역하는 것이 부적절하기에 여호와의 "교훈"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9 10
이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이 하나님의 교훈, 가르침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자이다. "헤페쯔(חֵ֫פֶץ)"는 "소원, 기쁨, 즐거움"을 의미하는 명사이며, 동사 "하파쯔(חפץ)"에서 파생되었다. "하파쯔"는 중세 히브리어에서 "갈망하다(desire)"를 의미하며, 시리아어에서 "얻으려 애쓰다(try to get)", 아랍어에서는 "지키다, 주의하다(keep, take care)"를 뜻한다. 이 때문에 『HALOT』에서는 "헤페쯔"의 두 번째 의미를 "wish"로 명시한다. 『BDB』 역시 "desire, longing"의 의미를 제안한다. 11 따라서 여기서의 "즐거움"은 갈망하는 것, 그래서 얻으려고 애쓰며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즉 시편 저자가 제시하는 참된 행복한 사람, 곧 의인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의 교훈, 가르침을 끊임없이 갈망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 애쓸 정도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12
의인은 하나님의 교훈을 지속적으로 갈망하여 기뻐할 뿐 아니라 그것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사람이다. 성경에서 유명한 동사인 "하가(הגה)"는 "묵상하다"라는 뜻을 전달할 때에 주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것의 본래의 뜻은 "중얼거리다, 으르렁거리다, 낮은 목소리로 읽다"의 뜻이며, 여기서 "묵상하다"라는 의미가 파생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동사가 사람에게 적용되기보다 동물에게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둘기(사 38:14, 59:11; 겔 7:16; 나 2:8), 그리고 사자(사 31:4)의 소리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동물의 울음소리를 표현하기 위한 이 동사가 인간에게 적용될 때에는 "입으로 소리를 내다(utter a sound)", "낮은 소리로 읽다(read in an undertone)", 그리고 특별히 "묵상 중에 중얼거리다(mutter while meditating)"를 뜻한다. 13 학자들은 시편의 이 대목에서 "하가"는 단순히 내면화된 인지적 묵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특정 구절을 낭송하면서 깊게 숙고하는 것이다. 고대인들의 독서법은 일반적으로 소리 내어 낭독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독서를 할 때에 다른 사람이 함께 있느냐와는 무관하게 입으로 발성하면서 책 읽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이것은 2-3세기 시기까지도 그러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책 『고백록』에서 암브로시우스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소리 내지 않고 책을 읽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이것이 일반적이지 않은 것이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현대인들에게는 발성을 하지 않고 책을 읽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오히려 고대에는 침묵하면서 눈으로만 책을 읽는 행위가 진귀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시편의 "하가"는 고대인들이 책을 읽는 모습을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 마치 동물들이 낮은 소리로 그르렁거리듯, 하나님의 교훈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책을 중얼거리며 읽는다. 14
의인의 이런 태도와 행위를 묘사하면서, 2절과 1절의 대조는 1절에서 악인들의 조언, 그들의 길, 그들의 자리에 참여하는 것이 지금 2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교훈을 즐거워하며 그의 책을 읽는 것과 반대되는 일이었음을 암시한다. 1절에서 악인들은 자신들만의 사상과 철학을 통해 어떤 사람의 인생의 길을 설정하고 그것대로 살아가도록 만들며, 이것에 따르지 않는 의인들을 무시하고 조롱하며 비웃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절의 의인은 악인들의 이런 삶의 핵심적 가르침을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삶의 본질, 궁극적 가치의 핵심을 따른다. 그래서 악인들의 조언에 반대하는 하나님의 교훈을 그분의 책을 읽으며 묵상하는 것에서 배우고, 그 행위 자체에서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므로 이러한 대조는 1절에서 악인들이 하는 조언(에짜)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밝혀준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과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를 무시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제시하는 인생의 목표가 아닌, 인간 스스로가 고안하고 생각해 낸 자신들만의 목표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필요 없는 존재이며,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인생에 불필요한 요소를 첨가한 무식한 자들이다. 그래서 이들이 보기에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읽고 그것을 묵상하면서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는 일련의 행위를 하는 것은 정말 무지하고 바보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무식한 행위들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주관적인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본질적 원인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객관적인 행복의 상태에 머무르는 유일한 길이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וְֽהָיָ֗ה כְּעֵץ֮ שָׁת֪וּל עַֽל־פַּלְגֵ֫י מָ֥יִם אֲשֶׁ֤ר פִּרְיֹ֨ו׀ יִתֵּ֬ן בְּעִתּ֗וֹ)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וְעָלֵ֥הוּ לֹֽא־יִבּ֑וֹל)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וְכֹ֖ל אֲשֶׁר־יַעֲשֶׂ֣ה יַצְלִֽיחַ׃)"
이제 시편 저자는 길 이미지에서 잠시 벗어나, 나무와 겨의 대조를 문학적으로 표현하여 악인과 의인 간의 차이를 강조한다. 1절과 2절에서는 의인의 특징이 아닌 것을 먼저 설명하고 난 뒤 그다음 의인의 특징을 설명하였다면, 3-4절에서는 의인의 특징을 설명한 뒤 악인의 특징을 설명한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는 개역한글의 번역은 사실 만족스럽지는 않다. "펠레그(פֶּ֫לֶג)"는 일반적인 시냇물이나 와디를 뜻하기보다는 지속적으로 물을 공급하기 위한 "관개수로"를 의미한다. "펠레그"가 파생된 동사 "팔라그(פלג)"는 "쪼개다, 나누다"의 뜻이 있으며, 『HALOT』에서도 이것을 “artificial water canal이라 제안한다. 15 즉 우리는 이것을 "시냇가"라고 번역하기보다 "인공적인 수로"로 번역해야 한다.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은 북부의 경우에는 숲이 존재하기도 하였지만, 남부는 물이 매우 부족하였다.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물이라고는 우기에 급류가 흐른 뒤 건기에는 바닥을 드러내는 와디(wadi) 정도였다. 16그래서 사람들은 물을 얻기 쉬운 성 안에 모여 살았으며, 우물을 파거나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가 전달하는 이미지는 매우 강력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무는 시냇물이나 와디 주변에서 자라는 경우이다. 이런 환경에 심긴 나무들은 만약 비가 오랫동안 오지 않는다면 금방 말라서 죽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훈을 연구하고 그것이 자신의 행복의 근원이 되는 사람은 이런 나무들과는 다르다. 그는 마치 인공적으로 만든 관개수로 바로 옆에 심겨서 지속적으로 물을 충분하게 공급받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 나무는 가뭄이 들이닥쳐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즉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정원에 심은 나무를 세심하게 가꾸시키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적절하게 제공하시는 과분한 혜택을 누리는 것으로 묘사된다.
"심긴"인 "샤툴(שָׁת֪וּל)" 역시 이런 이미지를 강화한다. "샤탈(שׁתל)"은 물가 옆에서 저절로 자라난 어떤 식물의 생장을 표현하는 동사는 아니다. 그것은 이 나무가 의도적으로 이 장소에 이식되었든지, 아니면 묘목으로 심겼음을 표현한다. 하나님의 교훈을 스스로 탐구하고 그것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매우 능동적인 행위인 것 같지만, 사실 그의 상태 자체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수동적인 상태이다. 나무는 와디를 찾아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을 죽이냐 살리냐 하는 것은 그 나무가 위치해 있는 곳의 환경에 따라 좌우된다. 17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훈을 즐거워하고 끊임없이 묵상하는 사람을 본래의 위치에서 뽑아내어 옮겨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장소에 심고, 그곳을 향해 인공적인 관개수로를 터서 강제로 물을 끌어오는 묘사는 의인의 상태가 확고하며 안정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 나무는 정해진 때가 되면(בְּעִתּ֗וֹ; "베이토", "그의 때") 열매를 맺고 잎이 시들지 않는다. 나무의 성장은 매우 느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주변에서 보기에 그 사람은 확실한 변화와 반응이 당장에는 관찰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에 그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때가 올 것이다. 종국에는 그는 성과를 내고, 성취하며, 성공할 것이다. "짤라흐(צלח)"는 "번성하다, 성공하다"를 뜻한다. 이 동사가 시편 저자의 본문에서 주어가 분명하지 않은데, 아마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했을 것이다. 이 동사의 주어는 나무가 될 수도 있고, 의인이 될 수도 있다. 만약 이것의 주어가 나무가 된다면, 어떤 기후에서도 이 나무는 시들지 않고 항상 무성한 상태를 잘 유지하며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반면에 만약 이 동사의 주어가 의인을 뜻한다면, 악인들의 가치관이 유행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도 의인은 소멸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18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לֹא־כֵ֥ן הָרְשָׁעִ֑ים כִּ֥י אִם־כַּ֝מֹּ֗ץ אֲֽשֶׁר־תִּדְּפֶ֥נּוּ רֽוּחַ׃)"
악인은 의인의 이러한 확고한 상태와는 다르게 매우 불안정하다. 그들은 바람에 날아다니는 겨와 같기 때문이다. "모쯔(מֹץ)"는 "겨, 티끌, 쭉정이"를 뜻하며, 읽는 독자들을 타작마당에 휘날리는 낱알 껍질들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으로 안내한다. 혹은 이 용어는 "죽은 식물", 특히 바람에 말려진 지푸라기 같은 것을 뜻할 수 있다. 『HALOT』은 이것을 "chaff"로 제안하며, 중세 히브리어와 아랍어에서 "straw"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명시한다. 19 20
악인을 바람에 날리는 겨로 묘사하는 장면은 3절에서 의인들이 관개수로 옆에 심겨서 뿌리를 단단히 내리는 이미지와 대조를 이룬다. 이들은 뿌리내릴 것이 없기 때문에 바람이 불면 곡식 낱알의 껍질이 바람에 이리저리 날아다니듯이 무기력하게 날리고 밟힐 뿐이다. 추수할 때에 이런 것들은 모아다가 불에 사른다(마 13:24-43). 하지만 미련하게도 악인들에게 자신들이 이렇게 방황하며 날아다니는 것은 자랑거리가 될 수 있다. 의인은 어떤 면에서는 답답해 보인다. 나무는 움직일 수 없고, 지속적으로 물을 공급해 주는 수도가 없으면 말라 죽기 때문에 스스로 자립하는 것이 아니라 수로에 의존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악인들은 의인들의 이런 모습을 보며 조롱하며 비웃는다. 왜냐하면 악인들은 자유롭게 바람에 따라 떠다니며 어느 한 장소에 의존적이지 않은 독립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악인들은 뿌리가 없고, 물을 공급받지 못해서 이미 말라버린 지푸라기와 같다. 반면에 의인들은 비록 움직일 수 없고, 그 성장이 늦은 것처럼 보이지만, 때가 이르면 열매를 맺으며 결코 그 잎이 마르지 않을 것이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사실 자신이 뿌리가 없어 말라진 겨의 상태에 있는데도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교회 내에서 이런 사람은 전도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고 높은 지위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의 방향은 하나님의 교훈을 따르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보기에 교회 안에서 조용히 성경을 읽으며 앉아 있는 사람은 정말 바보이다. 아니면 적어도, 교회 내에서 크게 될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무능한 사람이라 여긴다.
그러나 사실은 그의 영혼이 이미 말라버린 상태에 있다는 것은 비극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책을 주야로 읽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탐구하는 인생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다수의 악인들에 의해 미련한 사람으로 비칠지 몰라도 실제로는 관개수로를 향해 뿌리를 뻗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다. 우리는 기독교 세계 안에서 바른 신앙을 위한 정답이라는 것들을 자주 접한다. 그것은 어떤 교리를 수용하는 것일 수 있고 선교나 불우이웃 돕기 혹은 성화를 향한 부름 등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교훈이란 그렇게 한 두 가지의 명제로 축약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복잡한 것의 총체일 수 있다. 그래서 오늘도 어떤 기독교인은 성경을 묵묵히 읽으며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조용히 듣는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성경에서 진리를 깨달았다고 쉽게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제각기 자신들이 깨달은 바가 성경의 핵심이라고 말하며 이것을 받아들여야 참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추출해 낸 이 사실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성경을 잘 모른다고 조롱한다.
하지만 묵묵히 수행하는 침묵의 중얼거림(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음미하는 즐거움이 어쩌면 행복한 기독교인의 진정한 본질일지도 모른다. 교회에서 소외된 작은 자들 안에서 진행되는 이 느린 되새김질이야말로 귀중한 가치를 지닌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사회나 교회 안에서의 평판과는 무관하게, 참으로 행복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עַל־כֵּ֤ן׀ לֹא־יָקֻ֣מוּ רְ֭שָׁעִים בַּמִּשְׁפָּ֑ט וְ֝חַטָּאִ֗ים בַּעֲדַ֥ת צַדִּיקִֽים׃)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כִּֽי־יוֹדֵ֣עַ יְ֭הוָה דֶּ֣רֶךְ צַדִּיקִ֑ים וְדֶ֖רֶךְ רְשָׁעִ֣ים תֹּאבֵֽד׃)"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가의 차이는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 예수께서 타작마당의 심상에서 심판의 이미지를 이끌어낸 것은 시편 1편의 문학적 흐름과 맞닿아 있다.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을 독립적으로 구성한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의존하는 자들을 비웃고 조롱하는 자들은 바람이 불 때에 마르고 날아가 버리는 지푸라기처럼 심판의 시기가 올 때에 견디지 못하고 멸망하고 만다. 의인의 행복한 상태를 보며 미련한 자들이라 말하고 자신의 가치관이야말로 보편적 진리이며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결론이라고 주장하던 자들이, 여기저기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고 믿던 목소리 큰 자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무너지고 사라진다.
왜냐하면 그들의 길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가 말하는 행복의 길이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길이다. "인정하다"로 번역된 "야다(ידע)"는 본래 "알다(know)"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동사는 "보호하다, 지키다"라는 의미도 갖고 있으며(Dahood), 하나님의 보호하는 섭리적 특성을 전달한다고 한다. 21 "알다"라는 동사로 이것을 표현한 것은 더 친밀한 내적인 보호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22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대상을 아시는 것은 그 대상이 하나님께 인정받고 보호받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23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주여 주여 외치는 자마다 모두 그분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아시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 심판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향해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말씀하실 것이다(마 7:23). 그리고 시편 저자가 말하는 하나님께서 아시는 자들, 곧 의인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의 특징은 바로 하나님의 교훈을 끊임없이 읽고 묵상하며 그것을 즐겁게 감각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고백이 시편 119편 23-24절에서 다시금 선언된다:
“방백들도 앉아 나를 훼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를 묵상하였나이다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니이다”
결론
하나님의 교훈, 곧 성경에서 얻을 수 있는 다양한 묵상에서 조망할 수 있는 인생의 본질적 가치를 즐겁게 여기는 사람은 어쩌면 기독교 세계 안에서 굉장히 외로운 사람일 수 있다. 시편 저자를 말로 훼방하고 조롱하는 자들은 때때로 같은 종교를 가진, 심지어 같은 공동체 안에 속한 사람이다(시 55:12-13). 그리고 이런 자들은 대개 자신의 길을 잘 알고 있고, 자신의 길이 바른 길이며, 자신이 말하는 이 길을 가지 않는 자들은 옳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실상 이들은 자신의 길을 이끌고 개척해 나가는 주인이다.
그러나 인공적으로 구성된 관개수로 옆에 묘목으로 심긴 나무의 이미지는 "하나님의 교훈의 길이 스스로를 인도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선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나는 해답을 찾았으며 너희는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자들, 그리고 자신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모욕하고 비방하는 그런 자들이 걸어가는 삶의 양식은 시편 저자가 제시하는 의인이 걸어가는 삶의 양식과 완전히 다르다. 왜냐하면 의인의 길, 의인의 삶의 양식은 자신이 찾은 가치관을 타인에게 강요하고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과연 무슨 말을 하시는가에 더욱 관심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24
의인의 길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다. 시편 저자에 의하면, 이런 사람은 객관적으로도 진정한 행복을 찾은 사람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이런 사람을 아시며, 보호하시며, 인정하신다. 이 사람은 보이지 않는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려 생명을 공급받는다. 이 사람은 움직이지 않고, 느리게 성장하는 듯이 보이며, 많은 사람들에 의해 무시받는 조용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인생의 목적과 가치와 의미를 성경에서 발견하며, 결정적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에서 큰 기쁨을 느낀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다시 시편 1편의 첫 단어, 곧 "행복한 사람"의 주제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말하며 살아가지만, 시편 저자가 말하는 유형의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느끼는 인생에서의 가장 큰 행복은 무엇인가? 시편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라고 답변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아마 그렇게 대답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아주 솔직하게 이 질문을 대하면서, 우리가 보내는 하루 중의 많은 휴식 시간을 어디에 사용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생존을 위한 시간이 있다. 그리고 이런 시간 외에 쉬면서 보내는 스트레스 해소용의 시간도 있다. 대개 이런 시간은 나에게 작게나마 만족감, 소소한 행복감을 주는 것들을 하면서 보내기 마련이다. 이 시간에 무엇을 하면서 보내느냐가 우리가 행복을 느끼는 대상의 진짜 실체를 알려준다.
하나님의 성경을 즐겁게 여기는 감각, 그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훈에 집중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기독교인들을 비웃거나 조롱하지 않을 것이다. 또 자신이 따르는 가르침이 유일한 해답이라고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옳은 길을 이미 찾았다고 오만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옳은 길을 향해 걸어가는, 계속해서 우직하게 걸어가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이단 생활!>
- Peter C. Craigie,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19 Psalms 1-50, trans. Seok Tae Son, Solomon Christian Press, 2000, p. 64. [본문으로]
- L. Koehler & W. Baumgartner, 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STUDY EDITION VOLUME I, trans. ed. M. E. J. Richardson, BRILL, 2001, p. 866. [본문으로]
- Peter C. Craigie, op. cit., p. 64. [본문으로]
- https://ko.wikipedia.org/wiki/%ED%95%A0%EB%9D%BC%EC%B9%B4 [본문으로]
- Peter C. Craigie, op. cit., p. 65. [본문으로]
- Nancy L. deClaisse-Walford, Rolf A. Jacobson and Beth LaNeel Tanner, The Book of Psalms, trans. Dae I Kang, Revival & Reformation Publishing, 2019, p. 87. 각주 5를 보라. [본문으로]
- Ibid. [본문으로]
- L. Koehler & W. Baumgartner, 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STUDY EDITION VOLUME II, trans. ed. M. E. J. Richardson, BRILL, 2001, p. 1710. [본문으로]
- Peter C. Craigie, op. cit., p. 68. [본문으로]
- Nancy L. deClaisse-Walford, Rolf A. Jacobson and Beth LaNeel Tanner, op. cit., p. 89. [본문으로]
- L. Koehler & W. Baumgartner, op. cit., vol. I, p. 339-340. [본문으로]
- Logos bible software 10의 Abridged BDB 참고. [본문으로]
- L. Koehler & W. Baumgartner, op. cit., vol. I, p. 237. [본문으로]
- Ibid. [본문으로]
- Nancy L. deClaisse-Walford, Rolf A. Jacobson and Beth LaNeel Tanner, op. cit., p. 87. [본문으로]
- L. Koehler & W. Baumgartner, op. cit., vol. II, p. 929. [본문으로]
- Nancy L. deClaisse-Walford, Rolf A. Jacobson and Beth LaNeel Tanner, op. cit., p. 90. [본문으로]
- Ibid. [본문으로]
- Ibid., p. 91. [본문으로]
- L. Koehler & W. Baumgartner, op. cit., vol. I, p. 619. [본문으로]
- Peter C. Craigie, op. cit., p. 65. [본문으로]
- Nancy L. deClaisse-Walford, Rolf A. Jacobson and Beth LaNeel Tanner, op. cit., p. 92. [본문으로]
- Ibid. [본문으로]
- Ibid.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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