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장 12절
주로 구원파, 그 중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이하 대침)에 의해 자주 인용되며 영원한 죄 용서 교리의 근거 구절로 사용되는 이 본문은 오랜 기간 동안, 그리고 많은 교단들에 의해 자주 오해되어 왔던 말씀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경의 "속죄"라고 번역된 제사의 개념은 그 번역어가 지니고 있는 의미에도 불구하고, 죄를 속하는 것 곧 죄의 값을 치러 용서하는 것을 주요 의미로 갖고 있지 않다. 즉 해당 히브리어 "하타트(חַטָּאת)"를 "속죄제"로 번역하는 것은 "하타트"의 본래 의미를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 번역이다.
또한 히브리서 저자 역시 "하타트"의 이런 의미를 잘 알고 있는 듯 보인다. 왜냐하면 해당 본문의 전후 문맥은 "죄 용서" 혹은 "죄의 값을 치름"이라는 의미에 방점을 두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고대 유대교의 "정결"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침이 해당 본문을 죄의 용서와 관련해 이해하는 것은 그들이 고대 세계의 이스라엘 속죄제의 개념에 대해 무지하며 동시에 히브리서의 문맥을 통한 올바른 해석에도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이제 여러 구약학자들과 신약학자들을 따라, 나 역시도 이 본문은 죄 용서에 대해 중점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정결, 곧 깨끗하게 함, 부정한 것을 제거하는 것에 대해 집중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라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레위기의 속죄제사의 고대 개념 및 히브리서의 전후 문맥과 연결되어 있는 올바른 해석을 따른 것임을 보일 것이다. 이에 따라 대침의 히브리서 9장 12절 해석은 무지에 따른 오류임이 드러난다.
레위기의 속죄제의 올바른 이해
히브리어 "하타트(חַטָּאת)"를 "속죄제"로 번역하게 된 것은 이것이 동사 "하타(חטא)"에서 파생된 단어이기 때문이다. "하타"는 "죄를 짓다"의 의미이며, 성경에서 범죄 하는 모든 상황에 쓰이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하타트"는 "죄", 혹은 레위기 4장의 문맥에 따라 "죄에 대한 제물"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문제는 "하타트"를 속죄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길 때에 발생한다. 왜냐하면 레위기의 다른 제사들, 이를테면 번제, 화목제, 속건제도 죄를 속죄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하타트"를 "속죄"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다른 제사들과 다른 "하타트"만의 강조점이 희미해진다.
더욱이 구약성경에서 "속죄"의 의미를 더욱 잘 지니고 있는 제사는 레위기 1장의 번제이다. 왜냐하면 번제는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는 것이 주요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번제와 속죄제에서의 제물의 차이 역시 이것을 잘 보여준다. 번제에서는 수컷 어린양이나 숫양이 가장 통상적으로 드려졌다. 그러나 속죄제에서는 이런 제물들이 허용되지 않았다. 오히려 속죄제의 제물은 수소, 염소, 어린양, 산비둘기, 집비둘기처럼 매우 다양했다. 속죄제의 가장 표준 제물이었던 염소가 매일 드리는 번제에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에도 주목하라. 더욱이 속죄제에서는 암수 동물이 모두 드려질 수 있었으나, 번제에서는 오직 수컷 동물들만 사용될 수 있었다. 또한 속죄제는 제물의 일부를 사람이 식용할 수 있었으나, 번제는 모든 것을 태워 올려야만 했다. 즉 번제는 가장 빈번하게 드려졌고, 가장 값 비쌌으며, 오직 흠 없는 동물로만 드려져야 했고, 그 짐승은 전체를 불살라야 했다. 이것은 속죄제보다 번제가 더 본질적이고도 중요한 제사였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죄를 사한다는 일반적인 개념이 속죄제가 아니라 번제에 더욱 잘 적용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1
그렇다면 번제와는 다른 속죄제만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여러 구약학자들이 지적하는대로, 그것은 바로 "정결"하게 하는 목적이 있었다. 고대 유대교는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행위가 장소나 물건을 오염시킨다고 여겼다. 그리고 구약성경 역시 이런 부정-정결함 개념을 반영하는 여러 본문들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성막 및 성전은 매우 거룩한 곳이었으며 조금의 더러움도 없는 정결한 상태를 항상 유지할 것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어떤 개인이나, 민족이 죄를 지으면 그들의 죄의 오염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힐 위험이 있었다. 이 때문에 다양한 상황에서 "하타트"가 드려질 필요가 있었다.
이런 개념은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고대 유대교에는 분명하게 있었던 개념이다. 성경은 죄가 범해진 장소가 죄에 의해 더럽혀질 수 있다고 묘사한다(신 21:1-9). 가나안 족속의 죄는 팔레스타인 땅을 더럽혔으며, 그래서 그 땅은 그들을 토하기까지 오염되었다(레 18:24-30).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막 혹은 성전의 경우에는 더욱 엄밀하게 이것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속해서 임재해 계시는 것을 좋게 여긴다면, 마땅히 그들의 더러움을 깨끗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더럽히지 말아야 할 것이다.
히브리서 속죄제의 묘사와 기독교적 적용
히브리서 기자가 이런 유대교의 부정-정결의 개념에 무지했을 것이라 생각하기 힘들다. 히브리서의 제의적 용어들의 활용과 그 능숙함은 히브리서 기자가 이런 주제들에 대해 익숙하게 잘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해당 본문이 히브리서의 특정 주제들의 논조 가운데에 위치한 것을 살펴보면 유대교의 부정-정결의 개념이 이 본문에서도 사용되고 있음이 드러날 것이다.
먼저 우리는 히브리서의 전체 주제이자 이것이 쓰여진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윌리암 L. 레인(William L. Lane)은 이것이 "가정교회의 지치고 힘들어하는 구성원들을 격려하고 고무하고 강화시켜 하나님이 그들에게 부여하셨던 은사와 자원에 비추어 새로운 고난에 부딪혀서도 용기와 활력으로 반응하게 하는 것"이며, "청자들에게 위기의 시기에 구원의 유일한 중재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고백에 충실할 것을 촉구하고, 만약 그들이 크리스천의 헌신을 포기한다면 발생할 수 있는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라 말한다. 즉 히브리서 기자는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위기의 상황에서 보다 책임감 있는 태도로 믿음 안에서 인내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서신을 기록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7-9장의 제의적 논조들은 이런 배경에서 해석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제 히브리서 본문에서 중요한 쟁점은 "죄 용서"가 영원하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더 탁월한 율법적 성취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실천적 동기의 원동력을 제공할 수 있느냐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속죄제사를 통해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정결하게 만드는 것으로 이것을 완수한다. 2
특히 히브리서 9장 12절의 전후 문맥들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히브리서 8장 10절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예레미야 31장 31절 이하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새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의 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과 마음에 기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히브리서 9장 9절에서, 기존 유대교의 제의법들은 예배드리는 자들로 하여금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었음을 지적한다. "양심", 곧 "쉰에이데시스(συνείδησις)"는 히브리서에서 5번 등장하며, 히브리서 9장에서는 9절뿐만 아니라 14절에서도 한 번 더 등장한다. 이것의 의미는 "올바른 정신, 의식" 혹은 "마음, 양심"의 의미이다. 즉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피가 유대교의 제사법과 비교했을 때에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새롭게하고 움직이게 하는 실질적이고도 효과적인 원인이자 동기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3
히브리서 저자의 이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은 9장 14절에서도 이어진다.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는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기독교인들의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그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10장 22절에서 우리의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συνειδήσεως)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라고 권면함으로써 저자의 관심이 독자들의 깨끗한 마음과 온전한 양심에 있음을 드러낸다.
더욱이 10장 22절의 "마음에 뿌림을 받"는 이미지는 속죄제에서 정결케하는 의식을 훌륭하게 묘사한다. 본래 속죄제에서는 희생제물의 피가 성소의 휘장에, 곧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의 역할을 하는 휘장에 일곱 번 뿌려졌다. 피를 뿌리는 의식은 다른 제사들과 비교했을 때 속죄제가 가지고 있는 가장 독특한 특징 중 하나다. 왜냐하면 뿌리는 의식과 관련하여 여러 곳에서 속죄제의 제물은 정결, 특히 육체적 부정의 정결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레 12:8; 14:19). 레위기 15장 31절은 "그들 가운데에 있는 내 성막을 그들이 더럽히고 그들이 부정한 중에서 죽지 않도록" 백성들을 정결하게 하라고 말한다. 속죄일에는 특별히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제단을 성결하게 하려고" 성막의 다양한 부분들에 피가 뿌려졌다(레 16:19). 이처럼 구약성경에서 "뿌리는 의식"은 이렇게 어떤 대상을 정결하게 하고 깨끗하게 만드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제 히브리서 저자는 이것을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적용한다(히 10:22). 우리의 양심, 우리의 마음은 이제 정결한 상태가 되었다. 이것은 그리고 실질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곧 법정적 칭의만을 의미하는 본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저자는 유대교의 속죄제는 그림자이며 참 형상이 아니라고 말하면서(히 10:1), 이것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이나 제사가 섬기는 자의 "양심(마음)"을 온전케 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히 9:9). 즉 저자가 보기에 유대교의 속죄제는 예배자의 마음을 실질적으로 변화시켜서 선한 양심을 갖게 하는 능력이 부재한 것이다. 만약 속죄제가 죄를 용서하는 것, 즉 법정적인 칭의와만 관련이 있었다면 사실상 기독교의 피 뿌림도 유대교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4
반면에 새 언약, 곧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변화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실질적으로 새롭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마치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우리의 몸이 성전이므로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던 비유처럼(고전 3:16-17),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 역시 우리의 마음이 지성소의 휘장에 뿌려졌던 피가 그것을 정결하게 했던 것처럼 정결하게 되었으므로 우리가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함을 역설한다(히 10:19-22).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이다(히 13:10-16). 5
이제 매년 드려지는 유대교의 속죄제사는 그리스도의 속죄제의 정결케함에 비하여 열등한 것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이것이 일 년마다 수행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유대교의 속죄제는 마음을 영구적으로 정결케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히 10:1-2). 오히려 이 반복되는 제의들은 자신들의 마음이 지속적으로 정결한 상태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상기시켜서 직면하도록 만들었다(히 10:3).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제사는 우리의 마음을 영원히 정결하게 만드셨다(히 10:14).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새 언약에 따라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는 정결한 마음의 상태를 받았기 때문이다(히 10:16).
그러므로 속죄제가 죄 사함의 의미를 기본적으로 내포하지만, 정결하게 함을 더욱 강조하는 제의법인 것과 같이, 히브리서 저자 역시 여기서 죄 사함의 법정적 칭의뿐만 아니라 마음의 정결함, 곧 관계의 회복으로 인한 성화의 측면 또한 바라보며, 오히려 이 부분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고 여겨야 한다. 모든 제사는 기본적으로 죄 사함의 원리가 들어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여기서 번제도 아니고, 속건제도 아니고, 화목제도 아닌 바로 속죄제를 이끌어 온다. 이것은 속죄제만의 특징, 곧 부정한 것을 제거하고 거룩하고 정결하고 깨끗하게 만든다는 개념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가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는 저자의 이 의도에 마땅히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히브리서 전체의 주제, 곧 위기의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용기와 헌신을 새롭게 하는 목적에도 잘 부합한다.
본문 묵상
이제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히브리서 본문을 묵상해 보도록 하겠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οὐδὲ διʼ αἵματος τράγων καὶ μόσχων διὰ δὲ τοῦ ἰδίου αἵματος)"는 유대교의 속죄제와 비교하여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의 가치 측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가 더욱 탁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속죄제는 위에서 살펴본 바, 깨끗한 마음, 정결한 양심을 갖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런 정결 의식에 사용되는 피는 본래 토라에 의하면 짐승의 피였으나, 히브리서 저자에게 이것은 옛 언약, 낡은 시대의 체계에 속한 것이다. 이제 새로운 언약, 새 시대가 도래했는데, 이 혁신적인 체계에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정결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이 된다. 전치사 "디아(διὰ)"가 속격 "투 이디우 하이마토스(τοῦ ἰδίου αἵματος; 자신의 피)"와 결합하여 예수의 피가 기독교인들의 마음의 부정을 씻어내는 데에 수단으로 쓰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αἰωνίαν λύτρωσιν εὑράμενος)". 구원파, 특히 그중에서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에서는 이 구절의 시간적인 측면에 집중하면서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모두 용서되었다'라는 교리를 강조한다. 반면에 속죄제사가 부정-정결의 개념과 연결되어 있으며, 히브리서 전체 주제 및 해당 본문의 문맥이 정결하고 깨끗한 마음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 본문 역시 그런 의미로 해석되어야 옳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모든 제사는 기본적으로 죄 사함의 원리가 들어가 있다. 그것은 속죄제뿐만 아니라 번제, 화목제, 속건제에도 모두 동일하게 내재하고 있는 원리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뤼트로시스(λύτρωσις)", 즉 "속량, 구제, 몸값"이라는 의미의 헬라어가 쓰인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속죄제사 역시도 죄 사함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원한", 즉 "아이오니스(αἰώνιος)"가 히브리서에서 순전히 시간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이것은 오히려 종말론적인 의미가 있는 용어로 보아야 한다. 히브리서에서 시간적인 뉘앙스는 종말론적인 영원의 개념에서 보조적으로 파생된 것이다. 따라서 "영원한 속죄"에서 '과거, 현재, 미래' 따위의 시간적인 의미를 구체적으로 도출해 내는 것은 본문이 말하는 것 이상으로 무리한 해석을 하는 것이다. 반면에 히브리서 저자는 "반복되지 않음", 곧 "종말적인 완결성"에 무게를 두고 논증하고 있다. 토라의 속죄제는 불완전성으로 인해 반복해서 수행되어야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제는 (시간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완전하기 때문에 다시 반복하여 수행될 필요가 없다. 6
또한 "영원한 속죄를 얻다"의 "헤우리스코(εὑρίσκω; 찾다, 얻다)"는 부정과거 중간태 분사인 "헤우라메노스(εὑράμενος)"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의 시간적 뉘앙스가 불분명하다는 문제점도 있다. 이 분사의 수행이 주동사인 "들어갔다(εἰσῆλθεν)"보다 과거의 일인지, 동시적인 일인지, 미래의 일인지는 주해하는 사람의 해석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죄 사함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성소 휘장 안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이루어졌는가, 동시에 이루어졌는가, 아니면 이후에 이루어졌는가? 신약학자들마다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나는 레위기의 속죄제사가 죄 사함에 강조점이 있지 않고 정결하게 함에 방점이 있으며, 히브리서 저자 역시 이 같은 사실에 무지하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에 지성소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행위와 죄 사함이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반드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례로 히브리서 10장 6절은 속죄제와 번제를 따로 분리하여 언급하고 있다(즉, 그는 분명히 속죄의 의미는 번제에 더욱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모호한 시간적 뉘앙스를 가진 분사를 통해 "영원한 속죄를 얻으면서"라고 표현할 수 있었다. 7
즉, 히브리서 저자가 여기서 "뤼트로시스", 즉 "속량, 구속, 몸값"에 대해 언급한 것은 이 본문에서 죄사함의 원리에 대해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속량의 원리, 곧 값으로 지불된 희생 제물로서의 원리에 의해 제공되었음을 말하고자 한 것 같다. 짐승의 피는 유대인들이 선한 양심을 갖도록 만들지 못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새 시대에 발맞춰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의 법을 새겨 넣도록 정결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 피는 예수 그리스도를 속량의 값으로 지불한 바로 그 결과로 얻은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마음의 정결함을 위하여 뿌려진다.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εἰσῆλθεν ἐφάπαξ εἰς τὰ ἅγια)". 부정-정결의 개념이 여기서 다시금 등장한다. 이미 히브리서 저자는 9장 6-7절에서 성소와 지성소가 지극히 거룩하기 때문에 접근이 제한되어 있음을 언급한 바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오직 정결한 존재들만 그분께 가까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아무리 대제사장이라도 여러 휘장을 통과해야만 하나님의 임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는 그들조차 완전히 순결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제한 요소들과 절차들을 단번에 통과하여 하나님 앞으로 곧바로 나아간다. 이것은 히브리서 저자가 7장에서부터 줄곧 말해왔던 논증,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단번에", 곧 "에파팍스(ἐφάπαξ; 한번에, 단번에, 일시에)"는 이것의 완결성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곧 희생제물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피를 지성소에 뿌리는 대제사장으로도 묘사된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피는 속죄를 위해 흘린 자신의 피이다. 그러나 그것이 속죄제에서 뿌려지고 성소에 부어지는 것은 우리의 정결케 함을 위해서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제 이것이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히 10:22). 8
이 같은 사상은 13절과 14절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13절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속죄제사를 통해 유대교는 육체를 정결케 하고 거룩하게 했다고 언급하면서, 하물며 더 우월한 그리스도의 피는 그 효과 면에서 어떻겠느냐고 논증한다. 이것은 마땅히 우리의 양심으로 하여금 "죽은 행실"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만들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히 9:13-14).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흘린 피가(영원한 속죄로 흘린 피가) 우리가 하나님을 선한 행실의 실천으로 섬기게 하는 원인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 정결하다면 하나님께 나아가 즐거운 마음으로 예배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마음의 정결함"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가? 히브리서 9장 14절의 "죽은 행실"은 히브리서 6장 1절에서도 등장한다. 거기서 그것은 회개할 대상, 곧 죽은 행실을 회개하여 완전을 향하여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권면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6장 1절과 9장 14절을 통해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을 참되게 섬기는 신령한 예배를 위해 우리가 죄의 고백과 회개하는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고든 웬함(Gordon Wenham)은 레위기 5장에서 속죄제가 회개하는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레위기 5장 5-6절과 요한일서 1장 9절이 강조하는 바가 사실상 동일하다. 곧, "신약성경에서도 죄의 고백이 정결함의 필수 조건이다." 9
결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았고 마음의 정결함을 얻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종결된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번제나 화목제나 속건제가 아닌 속죄제를 통해 논증하고자 한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성소를 향해 단번에 나아가 예배드릴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자유롭게 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순전하고 깨끗하며 거룩해야 함을 요구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라고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드리기에 합당하도록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 거룩하게 하는 작업은 레위기와 히브리서에 의하면, 죄를 자복하고 지속적으로 회개하는 삶이다.
대한예수교침례회가 이 본문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사해졌다는 죄 사함의 시간적인 측면의 가르침을 이끌어낸 것은 히브리서 저자가 의도한 바를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해당 본문은 오히려 죄사함에서 더 나아가 그 피로 우리를 정결케 하는 것과, 그 정결함을 받은 우리가 지속적인 회개의 삶으로 거룩함을 통해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려야 함을 말하고 있다. 물론 내가 이전에 쓴 글에서 말했듯, 대침의 가장 큰 오류는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그것을 자의적으로 신도들에게 적용하는 극단적인 구원의 확신에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만약 대침이 과거의 죄, 미래의 죄 등등을 말하며 해당 본문을 인용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성경 말씀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가를 보여줄 뿐이다. 또 그런 사사로이 풀어낸 해석을 자신들의 자의적인 구원 확신에 무리하게 적용한다면 그들이 신학적으로 얼마나 신중하지 못한가를 보여줄 뿐이다. 이제 신도들은 대침이 성경을 잘 가르친다고 막연하게 여겼던 것이 정말 사실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만약 그들이 정말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그들의 교회에만 출석할 필요가 없으며, 대침 밖의 일반적인 교단들에 자유롭게 출석해도 될 것이다.
그것과 별개로,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된 우리가 지속적으로 거룩한 삶을 위해 죄를 회개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의 목적은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며 그분과 자유로운 교제를 누리기 위함이다.
<이단 생활!>
- 고든 웬함의 NICOT 레위기 주석을 보라. 고든 웬함은 여기서 밀그롬의 해석을 따르며, 특히 그가 서론에서 말하는 부정함-정함의 관계에 대한 설명은 이것을 이해하는 좋은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본문으로]
- William L. Lane,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47A Hebrews 1-8, trans. Cheon Seok Chae, Solomon Christian Press, 2006, p. 144. [본문으로]
- Walter Bauer, BDAG, trans. Jeong Ui Lee, Word of Life Press, 2017, p. 1461. [본문으로]
- 다시 한번 말하지만, 구약성경의 제사는 모두 죄 사함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속죄제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속죄제는 이것에서 더 나아가 정결하게 함의 개념 역시 포함하고 있으며, 번제와 비교했을 때 이같은 점이 더욱 강조된 제사법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본문으로]
- 구약의 제사는 예배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라. [본문으로]
- William L. Lane,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47B Hebrews 9-13, trans. Cheon Seok Chae, Solomon Christian Press, 2007, p. 98. [본문으로]
- Ibid. [본문으로]
- 아마 이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가 휘장 안으로 들어가기 이전이라고 여기는 신학자들이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정결함을 위해 예수께서 휘장에 뿌리는 피는 휘장 안에 들어가기 이전에 흘리신 피여야 하기 때문이다. 또 문법적인 면에서도 이전이라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로버트슨(A. T. Robertson), 모울(Moule)은 이를 지지한다. 반면에 동시적이거나 이후의 시점이라 보는 신학자들은 버톤(Burton), 코디(Cody), 그리고 윌리엄 레인(William L. Lane)이 있다. 그러나 나는 히브리서 저자가 시간적인 선후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이것을 기록했다고 생각한다. 혹은 가능성은 낮지만,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기록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 Gordon J. Wenham, The Book of Leviticus, trans. Gui Tak Kim, Revival and Reformation Press, 2020, p. 1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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