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여호수아 1장 9절.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을 때 말씀을 특별히 자신에게 적용하여 힘을 얻는 경우가 있다면 바로 이 구절을 통해서 그러하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자신이 현재 마주하고 있는 가장 큰 관심사와 연관 지어 읽기 마련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를 그 본문에 투영하여 현실의 고민 앞으로 포착하여 가져온다. 반면에 또 다른 사람들, 몇몇 강경한 자들의 경우에는 소위 '평범한 기독교인'들의 이러한 행동을 부정적으로 검토하고 비판하면서 해당 성경 본문이 '평범한 기독교인'들이 원하는 내용을 전달해 주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여호수아를 읽을 때 여호수아의 성공과 강인한 정신을 보고 자신의 현실적 문제들과 경제적 곤란, 정신적 빈곤, 사업의 실패나 취업 및 결혼의 고민들에 대하여 힘을 얻는 방식으로 이것을 활용할 때마다 그것을 주시하는 다른 사람들이 헐레벌떡 뛰어와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재빨리 알려주는 방식으로 말이다. 물론 이 본문의 전후 문맥을 신중하게 검토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기독교의 거룩과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는 일에 우리가 힘을 내고 강해져야 한다는 것으로 이것을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그런 의미가 하나님 아버지의 따뜻한 격려와 위로를 배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에 여호수아 1장 9절을 자신의 삶의 실패의 시기 때마다 새로운 힘을 얻는 강력한 말씀으로 적용하고 간직하는 모든 사람들의 방식도 우리는 부드러운 마음으로 존중해야 한다. 여호수아는 분명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위와 같은 명령을 하셨을 때 이것을 명령으로만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이 말씀은 격려이자 위로였으며 보증이자 확실한 약속의 소망이었다. 그는 분명 이 말씀에서 힘을 얻었다. 그런데 현대인들이 같은 감정을 이 본문을 통해 느끼는 것을 우리가 왜 부정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므로 나는 어떤 사람이 이 본문을 자신의 경제적 성공과 번영을 위한 힘을 얻기 위해 활용한다고 해도 부분적으로는 그것이 오류가 아니라고 여길 것이다.
다만 이 구절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자들은 이 본문을 막연하게 취급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수아 1장 9절은 격려와 약속을 하는 동시에 그것을 성취할 '방법' 역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본문에서 소망을 얻으면서도 그것을 어떻게 얻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면 별 유익이 없을 것이다.
이 본문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가나안 땅을 향해 인도하던 지도자 모세가 사망하였다. 문제는 아직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얻지 못한 상태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이제 모세를 이어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 이스라엘을 이끌 새로운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이제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의 명령을 내리신다. 곧 가나안 땅을 얻으라는 명령과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아가라는 명령이다(수 1:6-7). 이 두 가지의 명령과 함께 하나님의 격려와 위로의 보증의 말씀이 선포된다(수 1: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히브리어 원문은 "하로 찌비티카(הֲל֤וֹא צִוִּיתִ֙יךָ֙)"이다. 의문사 "하(הֲ)"가 부정어인 "로(לֹא)"와 결합하여 "아니냐?", "어찌 아니냐?"라는 의문문을 만들어낸다. 이 의문문은 묻는 것에 대하여 '그렇습니다'라는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수사 의문문이다. 그러므로 "하로?"를 통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기대하는 답변은 "맞습니다. 아멘입니다."라는 긍정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강한 대답과 동의를 여호수아로부터 이끌어내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그렇지 않으냐?"라고 물으실 때 우리는 마땅히 "전적으로 옳습니다"라는 강력한 동의와 인정의 고백을 말해야 한다. 그리고 주께서 이런 고백을 우리에게 요구하실 때는 대개 불가능해 보이는 일 앞에서 우리가 후퇴하지 않아야 할 때이다.
삶의 길에서 인간은 예측 불가능한 고통과 좌절 및 생존의 위협을 자연스럽게 마주치곤 한다. 만약 인간이 온 우주에서 고독한 존재로서 가혹한 현실을 홀로 감내해야 한다면 그를 전진하도록 만들 설득력 있는 동기나 필연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칼 세이건(Carl E. Sagan)이 「창백한 푸른 점(The Pale Blue Dot)」에서 고백한 대로 만약 이 광활한 세계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다만 보잘것없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인생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시련을 적극적으로 대항해야 할 동기란 무의미한 발악일 뿐이다.
인류가 생존해야 하는 이유란 무엇인가? 어째서 생명은 소중한가? 우리의 인생에 정말 가치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한단 말인가? 과학에 의해 고등한 동물로 간주되는 인간이 윤리적이어야 하며 인류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기여해야 한다는 명제는 사실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마주하는 다양한 고난에서 우리가 느끼는 스트레스는 이런 관점에서는 큰 무게를 가지지 않는다. 다만 필연적 고통 앞에서 행복해지는 방법이란 사회적, 물리적 자기 포기를 통한 죽음뿐이다. "삶은 비존재의 축복받은 고요를 방해하는, 이로울 것이 없는 사건으로 여길 수 있다." 전도자 역시 심도 있는 숙고와 사색을 통해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살아 있는 산 자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를 복되다 하였으며 이 둘보다도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욱 낫다 하였노라."(전 4:2-3) 1
하나님의 "하로?(הֲל֤וֹא)"를 통한 불가능성 앞에 직면하라는 결단적 요구는 인간의 이런 차갑고 고독한 탄식의 흑암을 가르고 떠오르는 태양의 빛이다. 인간은 고통 앞에서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면 "내가 한 것이 아닌가?"라는 우주 밖에서 전해진 수사 의문문의 메시지를 받는다. 그 지점에서 인간의 마땅한 응답은 "네 맞습니다"와 "아멘 그렇습니다"라는 적극적 긍정이다. 다른 인간들이 포기와 죽음과 무가치를 말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무가치해 보이는, 보잘것없는, 우주의 입장에서 사소한 스트레스의 상황을 무시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의 아버지, 그분은 우리의 작은 고민과 탄식에도 주의를 기울이시며 집중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포기하지 말아라!", "일어나서 맞서라!", "생존하라!"라고 격려하시는 분이시다. 왜냐하면 인간의 불가능함이 하나님에게는 가능함으로 바뀌기 때문이다(마 19:26). 불가능한 일을 직면하였는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라. 그분은 그것을 가능한 일로 만드시고 실현하시는 분이시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은 "찌비티카(צִוִּיתִ֙יךָ֙)"이며 직역하자면 "내가 네게 명령했다"이다. 위의 "하로?(הֲל֤וֹא)"와 결합하여 이것은 "내가 네게 명령하지 않았느냐?"라는 문장으로 번역될 수 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받은 명령은 이 시점에서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점령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라는 부름이었고, 다음으로는 모세의 모범을 따라 항상 삶 속에서 율법을 지키는 언약의 삶을 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의 명령을 모두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렇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얻으라는 명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안에 거하라는 명령.
E. P. 샌더스(E. P. Sanders)의 「PPJ」 이후로는 유대교가 율법을 행위로 지켜서 천국에 가려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해 인정된다. 이제 1세기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교가 간직하고 있던 교리는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것으로 묘사된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면"이라는 명령으로 시작된 언약 관계 안에서 출생하고 소속되어 있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존재한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가입 조건'이라기보다는 "소속되어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언약 관계의 마땅한 의무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명령 역시 이 언약 관계를 잘 보여준다. 여호수아는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자신이 언약의 영역에 소속되어 있다는 상태를 증거 한다. 그는 이 언약의 테두리 안에 거할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신다는 약속을 보증받는다. 2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는 이 옛 언약의 체계의 종말을 선언하시고 더 나은 새로운 언약으로 대체하셨다.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언약의 상태에 있음을 확인하는 이 체계는 사실 완벽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인간이 완전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님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심판이라는 인과 관계의 사슬로 인간을 인도하기 때문이다.
언약 안에 거한다는 것을 통해 율법 앞의 불완전함을 일부분 간과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실제로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언약 안에 머물고 있다면 율법의 완전의 요구를 충족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사실 이 틀 안에는 불편한 진실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히 새로운 언약의 틀이 도래한다. 언약 안에 들어가는 가입 조건이 출생이나 율법의 체계에 합류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변모한다. 그 언약 안에 머무는 상태는 또한 자신의 능력으로 토라나 구전 토라의 옛 율법을 사수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메시야의 새로운 계명, 곧 이타주의와 타인을 향한 희생을 위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으로 바뀐다.
또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죽음과 승리를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이제 완성된 종결된 사건이 아니라 역동적인 미래를 바라보는 종말적 보증과 확신이다. 아직 기독교인들은 약속된 것을 모두 얻은 것은 아니다. 그는 새로운 종족, 신인류이지만, 여전히 죄의 영향 아래에 있으며 죽을 수 있는 연약한 몸을 갖는다. 대한예수교침례회 등과 같은 구원의 완결성을 강조하는 교단들이 주장하는 바와는 다르게, 기독교인은 현재 진행의 역동적 미래의 보증으로 성령을 받아 자신의 종말을 소망으로 바라본다.
즉,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 아래 이집트를 탈출했지만 가나안 땅을 아직 얻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여전히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걷고, 일하고, 삶을 살아가며, 전쟁하고, 위협을 무릅쓰면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바울 역시 이런 점을 지적하며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게 경고한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에게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여전히 현대의 우리에게 적용되는 부분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보증을 얻었지만, 여전히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해 전투적으로 임해야 한다. 그 방식은 하나님의 동반자로서의 삶을 걸어가는 것을 통해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두 가지 명령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수사 의문문의 형식을 통해 우리에게 현재에도 요구하신다.
기독교인의 좌절의 상황에서도 이것은 유효하다. 기독교인의 불행한 삶은 저항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항상 다가오지만,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망과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인식의 강력함의 정도는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결정적 원인이 된다. 그리고 이를 막연한 슬로건이 아닌 생생한 현실로 실감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원리, 곧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여 그를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진정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선명하게 감각한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 가지의 명령형 동사들이 나열되며 두 가지는 긍정법으로, 나머지 두 가지는 부정법으로 등장한다. 하나님의 격려가 두 가지의 '해야 할 것'과 두 가지의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여호수아를 굳건하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한다. 또 이 '해야 할 것'은 여호수아가 강한 힘을 내라는 명령이며,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여호수아가 나약해지지 말라는 명령이다.
'해야 할 것' 두 가지는 곧 "강하게 하는 것"과 "담대히 하는 것"이다. 전자는 "하자크(חזק)"이며 후자는 "아마쯔(אמץ)"이다. "하자크"는 성경에서 매우 유명한 단어로 무려 300회 가까이 등장한다. 「BDB」나 「HALOT」이 말하는 이 단어의 뉘앙스는 주로 "강하게 만드는 것", "확고하게 하는 것" 및 "용기를 부여하는 것"을 뜻한다. 성경의 히브리어 본문을 자주 독해하는 사람이라면 이 단어가 인간의 손이나 팔과 함께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처럼 "하자크"의 이미지는 마치 손에 힘이 빠져서 축 늘어지고 덜덜 떨릴 때 갑자기 누군가 다가와 손을 꼭 잡아주고 힘을 실어주는 것과 같다.
하나님 나라를 얻기까지 싸우는 전투에 임할 때 기독교인들이 충분한 힘을 내기 어려울 때가 있을 것이다. 또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삶은 실천하기가 매우 어렵고 만약 우리 스스로에게 남아 있는 에너지가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 줄 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기독교인은 이렇게 손과 팔이 작동하지 않는 무기력한 상황에서 포기하는 영적 실패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손과 팔을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는 데에 움직이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면, 바로 그때 우리의 손을 잡으시고 어루만져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마쯔"는 "하자크" 보다는 성경에서 덜 등장하는 단어로 41회만 사용되었을 뿐이다. 대부분 "하자크"와 함께 사용되는 이 단어의 의미는 "하자크"와 비슷한 의미로 활용되곤 한다. 「HALOT」은 "단단함", "강함"을 더욱 강조하는 의미를 제시한다. 데이비드 하워드 2세(David M. Howard Jr.)는 NAC에서 이 단어가 1장의 문맥 때문에 "용기"와 "단호함"의 의미 사이를 오가며, 하나님의 명령을 생각할 때 "용기" 보다는 "단호함"이 더욱 선호할 만한 의미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때에 여호수아는 강한 마음, 단호한 마음으로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여호수아 1장 7절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명령을 떠올리게 만든다. 3
기독교인들에게는 시선을 고정하고 정확하게 돌진해야 할 명확한 목표 지점이 존재한다. 곧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하는 미래의 종말적 목표이다. 그리고 이것을 얻어내는 승리하는 삶의 과정 역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단호함을 요구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타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희생을 보여주셨듯이, 우리 역시도 그를 본받아 나의 유익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다.
'하지 말아야 할 것' 두 가지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놀라지 않는 것"이다. 전자는 "아라쯔(ערץ)"이며, 후자는 "하타트(חתת)"이다. "아라쯔"는 "두려워하다", "두려워 떨다"의 의미이다. 특히 이 단어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앞에서 공포를 느끼는 상황에도 사용되었다. 기독교인들의 두려움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향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과연 우리가 공포를 가져야 할 대상이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 확실하다.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때 겪게 될 일반적인 공포는 무엇인가? 여호수아는 가나안의 족속들과 전쟁할 때 죽음의 위협과 문화적 혼합의 위협 둘 다를 겪어야 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우상숭배와 관련된 행사나 커뮤니티에 참여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불이익을 겪었다.
기독교인이 접하는 외부는 끊임없이 그를 공격하고 위협한다. 우리가 예수를 메시야라 고백하고 이타적인 희생으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드러내며 하나님 나라를 추구할 때 세속적인 시선은 우리를 미련한 자들이며 수완이 좋지 못하고 순진한 자들이라 모욕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 앞에 우리는 종종 두려움을 느껴 굴복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 외에 두려움의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우리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과연 무엇이 우리에게 공포를 느끼게 한단 말인가?
"하타트"는 「BDB」에서 "be shattered, dismayed"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나온다. 「HALOT」 역시 이 의미를 지지하며, "두려움으로 가득 차다"와 "마음이 조각조각나다"라는 의미도 강조한다. 이것은 두려운 일을 맞닥뜨리는 것으로 인해 "충격, 경악, 실망"을 느끼는 상태를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개역한글은 "놀라다"로 이것을 번역하였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예측하지 못하는 비극적 상황은 순식간에 예고 없이 그를 덮치곤 한다. 기독교인들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행복을 언제나 지속적으로 느끼는 것은 아니다. 이것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에서 오는 고난 만이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수히 많은 인간적인 연약함에서 오는 서글픈 감정과 절망적 한계들, 이를테면 학업 문제, 진학 문제, 외모에 대한 고민, 취업 실패, 결혼, 사업, 자가 마련, 경제적 이유, 불안한 직장, 미래가 보이지 않는 노후 등의 지극히 인간적이라 보는 문제들 역시 이것에 해당된다. 이 모든 장애물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삶에 예기치 못한 스트레스를 유발하며 우리에게 쓰라린 마음을 안겨준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께 버려진 듯한 쓸쓸한 외로움과 실망과 충격과 하나님에 대한 자조적 포기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 동일한 감정을 예수께서도 십자가 상에서 서서히 죽어가면서 느끼셨다(마 27:46; 막 15:34). 하나님은 억지로 우리에게 "실망하지 말라"라고 명령하는 분이 아니라, "나도 네 마음을 안다"라고 따뜻하게 격려하시는 분이다. 여호수아가 아이성 전투에서 실패를 맛보았듯이(수 7:1-12) 우리 역시 고통스러운 좌절을 맛볼 수도 있다. 그럴 때마다, 임마누엘(사 7:14), 곧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의 화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깊이 공감하시고 우리의 고독함을 어루만지시며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신다. 그러므로 "놀라지 말라", "실망하지 말라", "충격받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공허한 명령이 아닌 깊은 공감과 따뜻한 위로의 말이다. 4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히브리어 원문은 "키 임카 아도나이 엘로헤카 베콜 아쉐르 텔레크(כִּ֤י עִמְּךָ֙ יְהוָ֣ה אֱלֹהֶ֔יךָ בְּכֹ֖ל אֲשֶׁ֥ר תֵּלֵֽךְ)"이며 직역하자면 "이는 네가 걸어가는 모든 곳에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문장 앞의 "키(כִּ֤י)"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접속사이지만, 문맥에 의해 여기서는 "for", 혹은 "because"의 의미로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따라서 이 문장은 여호수아가 힘을 낼 수 있는 이유, 근거에 대해 말한다.
그 근거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כִּ֤י עִמְּךָ֙ יְהוָ֣ה אֱלֹהֶ֔יךָ). "임카(עִמְּךָ֙)"는 "함께, 더불어, with"을 뜻하는 "임(עִם)"과 "you"를 뜻하는 2인칭 대명 접미사 카프가 결합된 것이다. 여기서 "임"은 이사야 7장 14절의 "임마누엘"에도 사용된 전치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는 이사야의 메시지를 떠올리도록 만든다. 여호수아가 낙담하지 않고 힘을 얻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할 가장 강력한 동기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은 여호수아의 인생 전반에 걸쳐서 분명한 사실로 존재한다. "베콜 아쉐르 텔레크(בְּכֹ֖ל אֲשֶׁ֥ר תֵּלֵֽךְ)"는 이를 잘 보여주는 구문이다. 여기서 2인칭 남성 단수 "텔레크"의 원형은 "할라크(הלך)"이며, "길을 걸어가다, 행하다"의 뜻이 있다. 히브리 문학에서 "길을 걷는" 심상은 사람이 자신의 인생길을 걸어가는 이미지를 강조한다.
그리고 의인은 의의 길을 따라 자신의 인생 길을 걷는다. 시편 1편 6절에서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것으로 묘사되는 반면에 악인의 길은 멸망의 길로 묘사된다. 그리고 시편 1편 1절에서 의인은 악인의 이런 길을 따라 걷지 않는 것(לֹ֥א הָלַךְ֮; 로 할라크)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의인의 길은 여호와의 율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시 1:2).
그러므로 다시금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행할 때, 특히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약속이 선포된다. 왜냐하면 그 길은 바로 의인이 걸어가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만약 여호수아가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삶,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인생을 걸어간다면 그의 길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의인의 길 그 자체이다. 그리고 그가 의의 길을 걷는 인생을 살고 있다면 그는 인생에서 부딪히는 다양한 좌절과 고통과 어려움에 굴복하고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강력한 위로와 격려를 받는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확신과 보증된 소망에 근거하는 축복받은 사실이다.
우울증 환자를 다룰 때처럼,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대부분의 피상적인 위로나 격려가 별 소용이 없다. "힘 내!"라든가 "슬퍼하지 마. 기운 내!" 따위의 조언들은 비록 선한 의도와 좋은 마음으로 그리 했을지라도 우울증 환자의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다. 반면에 이에 대하여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자세는 "나는 네 편이야.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나에게 말해줘. 나는 언제나 네 곁에 있으니까."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생길을 같이 걸어갈 좋은 친구를 얻는 것만큼 가치 있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인간이 결혼하여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은 이같은 목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우리의 인생 길을 담담히 걸어가시는 분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삶의 풍파 속에서 고독하지 않다.
기독교인들의 천로역정의 삶,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길고도 험난한 여정은 많은 사람들을 좌절시킬 것이다. 단순히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 외에도, 인간적인 연약함 때문에 우리가 집중할 수밖에 없는 세상 속의 어려움들도 존재한다. 이것을 이겨내는 가장 좋은 방식은 격려나 위로의 말씀을 달달 외우거나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과 함께 길을 걸어가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은 구약 시대의 옛 언약 하에서는 토라를 지키는 삶을 사는 것이었다. 이제 옛 언약이 종말을 고한 새로운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생활이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이다. 즉 예수께서 친히 보여주신 자기희생의 삶, 죽음과 부활의 승리의 삶을 믿음으로 나의 것으로 만들고 그분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선한 열매를 맺는 삶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손과 팔에 새로운 힘을 얻어(하자크) 흔들리지 않는 단호함으로(아마쯔) 외부의 시선과 평가에 두려워하지(아라쯔) 않고 어떠한 예기치 못한 장애물에도 동요하지(하타트) 않으면서 하나님과 함께(임카) 이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할라크)이다.
- "Man kann auch unser Leben auffassen als eine unnützerweise störende Episode in der seeligen Ruhe des Nichts." Arthur Schopenhauer, Nachträge zur Lehre vom Leiden der Welt. [본문으로]
-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 [본문으로]
- David M. Howard Jr., The New American Commentary: Joshua, trans. Youn Sou Sin, Revival and Reformation Press, 2020, p. 10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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