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이사야 42장 2-3절
이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종은 구약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일차적으로 바벨론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했던 고레스 왕을 의미한다. 반면에 이사야 42장에서 묘사된 바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는 고레스 왕에게 적용되기 힘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내 생각에 여기서 예언의 대상이 이중적으로 중첩되어 있다고 여기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고레스 왕은 하나님이 선택한 일종의 "메시아의 기능"을 수행했다. 반면에 그는 성경이 그리는 다윗 왕조의 메시아는 아니다. 따라서 고레스를 통해 장차 올 메시아의 더 선명한 그림이 예언되고 선포된다. 고레스는 이후에 종말적으로 이 땅에 나타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참된 하나님의 종 메시아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이사야 42장에 묘사된 메시아의 겸손한 성품은 읽는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한다. 이스라엘 왕국을 하나님의 참된 왕국으로 만들고 모든 이방을 굴복시킬 다윗 왕 메시아는 강력한 군사력과 탁월한 카리스마를 통해 도래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과 반대되는 방식으로 모든 민족들을 대우한다. 1절에 의해 메시아의 이 겸손한 행동이 이방에 공의를 베푸는 상황에서 표출되고 있음에 주목하라.
우리가 생각하는 "공의"는 대부분의 경우에 엄격하고 단호한 분위기를 포함하곤 한다. 강철 지팡이로 질그릇을 부수듯이 이방 민족을 깨뜨리고 박살 내는 메시아의 이미지와(시 2:9) 여기서 묘사하는 이미지는 서로 많이 다르다. 또 일반적으로 백성들이 국가의 왕에게 기대할만한 성품과도 괴리감이 있다. 그러므로 분명 이 메시아는 범상치 않은 인물일 것이며, 이 메시아가 몰고 올 하나님의 왕국 역시 평범하지 않은 국가일 것이다.
하나님의 이 종은 하나님의 공의, 즉 미슈팟(מִשְׁפָּט)을 모든 민족들에게 베푸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 베푸는 방식은 연약한 자들을 기소해서 강제로 연행하고 재판하여 감옥에 집어넣는 일반적으로 기대할 과정과는 많이 다르다. 이것은 매우 조용한 방식, 그러면서도 약한 자들이 완전히 무너지거나 좌절할 정도의 가혹한 수단을 피하는 방식, 그리고 오히려 그들을 보호하는 따뜻한 방식을 통해 진행될 것이다. 더 많은 억압과 더 우월한 강제력을 통해 공의를 세우는 기존의 낡은 체계는 새로운 체계에 의해 대체되고 변화된다. 그것은 바로 고요한 겸손의 방식이다.
그리고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이 메시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부정어 "로(לֹא)"가 이끄는 세 문장이 연이어 등장함으로써 메시아가 하지 않을 행동을 강조하고 주목하도록 만들고 있다. 2절의 히브리어 문장 구성은 짧은 문장들이 연속적으로 쏟아져 호흡이 매우 긴박하게 이어진다. 곧 "로 이쯔악(לֹ֥א יִצְעַ֖ק)", "베로 잇싸(וְלֹ֣א יִשָּׂ֑א)", "베로 야슈미아(וְלֹֽא־יַשְׁמִ֥יעַ)"가 연이어 등장하고 이것들이 "바후쯔 콜로(בַּח֖וּץ קוֹלֽוֹ׃)"를 대상으로 가리킨다. 반면에 3절의 구조는 더 긴 호흡으로 구성되어 있다: "카네 라쭈쯔 로 이슈보르(קָנֶ֤ה רָצוּץ֙ לֹ֣א יִשְׁבּ֔וֹר)", "우피슈타 케하 로 예카베나(וּפִשְׁתָּ֥ה כֵהָ֖ה לֹ֣א יְכַבֶּ֑נָּה)", "레에멧 요찌 미슈팟(לֶאֱמֶ֖ת יוֹצִ֥יא מִשְׁפָּֽט׃)". 부정어 "로"의 이러한 짧은 반복은 이사야의 예언에서 시적 운율을 느끼도록 만드는 동시에 읽는 독자들의 감정을 점점 고조시킨다.
먼저 그는 "소리지르지 않는다(לֹ֥א יִצְעַ֖ק; 로 이쯔악)". 동사 "짜아크(צעק)"의 뜻은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다"이다. 이 동사의 동족어가 아랍어에서는 "천둥이 쳐서 의식을 잃는" 상황에서 사용된다. 1 성경에서는 주로 누군가를 향해 고함치거나 부르짖을 때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그 자체로 "cry"의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로 이쯔악"이 목적어로 갖는 "콜로(קוֹלֽוֹ)", 즉 "그의 목소리"를 고려하면 목소리의 강도를 높이는 상황, 곧 음성을 크게 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여기서 이사야 저자가 그리는 이미지는 마치 천둥이 치듯이 자신의 음성을 강하게 울리도록 만드는 지배자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 무서운 소리를 발하는 왕 앞의 민족들은 큰 두려움으로 몸을 움츠릴 것이 분명하다.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 마치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묘사된다. 곧 그의 음성은 쓰나미가 몰려오듯 "많은 물"의 소리와 같고(겔 43:2), 천둥소리와 같다(삼하 22:14; 시 29:3). 그분의 음성은 "위엄의 울리는" 소리다(욥 37:4).
따라서 여호와께서 보내시는 메시아가 이것과 반대로 묘사된다는 점은 전형적인 기대와 차이가 있다. 그가 목소리를 크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은 고대 국가의 흔한 왕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의 종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진정한 참된 왕이시지만, 그분이 보내시는 종인 이 메시아는 왕의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사람들의 기대에서 벗어난 뜻밖의 모습, 곧 종의 모습으로 찾아올 것이다. 그래서 철저하고 강력한 군주를 바라는 엄중한 사람들에게는 실망을 안겨줄 수도 있다. 반면에 상처받고 약한 자들에게 부드러운 왕의 등장은 유일한 희망이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 볼 때 바로 이것이 그분이 보여주신 모습이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왕의 위엄을 드러냄으로써 보다 손쉽게 압도하는 방식을 사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만 한 명의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평범한 방법으로 유대 당국자들의 무시와 조롱 속에서 담담하게 가르쳤다. 혹 우리 기독교인들은 나의 위치, 나의 지위, 나의 유리한 면을 이용해 타인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봐야 한다. 이것은 가장 가까운 지인에서부터 가족들, 특히 나의 자녀에게 기독교를 무리하게 강요하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며느리, 혹은 사위에게 교회에 출석하라는 압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이것의 극단은 역사 속에서 자주 벌어졌던 강제개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기독교적 가치인 이웃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과 매우 거리가 멀다. 반면 우리 예수님의 사랑은 인내하고 기다리며 강요하지 않는 것으로 가장 잘 표현된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곧 "베로 잇싸(וְלֹ֣א יִשָּׂ֑א)"는 동사 "나싸(נשׂא)"가 사용되었다. 이 동사는 성경에서 굉장히 많이 사용되었으며 매우 유명하다. 이것의 의미는 "들다", "lift up"이며, 이전의 "로 이쯔악"과 같이 "콜로"를 목적어로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목소리를 올리다"의 의미이다. 이것은 목소리의 높낮이를 올리는 것이든, 아니면 "이쯔악"과 같이 음량 자체를 높이는 것을 뜻할 수 있다. 「HALOT」에서는 "raise the voice"를 제시하며, 누군가를 부르거나 연설을 통해 주목하게 하거나 혹은 노래를 부르는 등의 상황에 사용되는 것으로 말한다. 전반적으로 이 활용법은 마치 음성을 통해 대상을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려는 모습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능력 있는 왕이라면 민중들이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고 설득당하도록 만들기 위해 다양한 수사적 기법 등을 통해서나 아니면 확성기 따위를 사용해 주목하도록 할 것이다. 특히 중요한 규칙과 사상, 그리고 지도자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의 법칙을 백성들에게 전달할 때 이런 방식들이 요구될 수 있다. 3
하지만 이사야 예언자가 묘사하는 메시아는 이런 화려한 전략, 요란한 주목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백성들을 교화하는 작업에 착수할 것이다. 우리 예수께서 스타 연예인이나 정치인의 등장과 같이 군중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대부분의 경우에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역이 성공적이었던 사례에 있어서도 민중들의 주목을 받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 이유는 아직 자신을 드러낼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요 7:8). 예수님의 조용한 움직임은 단지 겸손함만을 위한 고요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분의 겸손함은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과 뜻에 완전히 순종하여 인생을 걸어가는 모습에서 명확하게 보인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조용함은 하나님의 정하심에 순복 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들리게 아니하며", 곧 "베로 야슈미아(וְלֹֽא־יַשְׁמִ֥יעַ)"는 위에서 묘사한 고요함의 특징을 더욱 강한 어조로 반복한 것이다. 즉 그 메시아는 어찌나 조용한지, 심지어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다. "그 소리로 거리에", "바후쯔 콜로(בַּח֖וּץ קוֹלֽוֹ)"는 "로~"로 시작하는 문장들이 수식하는 대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조용한 성품은 그의 목소리가 거리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존재감이 적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메시아를 멸시해도 될만한 인물로 생각했다. 4
인간 평가의 대략적 지표는 외모와 음성이며 이것이 첫인상의 대부분을 결정한다.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을 이런 정보들의 렌즈를 통해 파악하고 판단한다. 그래서 목소리가 크지 않고 자신의 말을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 작고 소심한 사람들의 의견은 곧잘 묵살당하기 일쑤다. 우리는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어필하는 자신감 있는 사람 주변으로 모이길 선호한다. 반면에 우리 구주 예수께서는 자기주장 한 마디도 제대로 내뱉지 못하는 바보 같은 사람들 곁에서 위로하시는 분이다. 그분은 무리 가운데 선호받을 인기 있는 위치로 시작하지 않았다. 낮은 곳에서부터, 조용한 곳에서부터, 약한 곳에서부터 복음의 역사는 시작되고 확장된다. 이것이 인간의 예측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놀랍고도 역설적인 방식이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로~"로 시작하던 문장들이 이번에는 도치되어 역전된다. "카네 라쭈쯔 로 이슈보르(קָנֶ֤ה רָצוּץ֙ לֹ֣א יִשְׁבּ֔וֹר)"와 "우피슈타 케하 로 예카베나(וּפִשְׁתָּ֥ה כֵהָ֖ה לֹ֣א יְכַבֶּ֑נָּה)"를 보라. 목적어가 문장의 가장 앞에 위치하고, 그다음으로 "로"와 동사가 이어지는 것은 이사야 예언자가 이 목적어를 강조할 필요성을 느꼈음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목적어, 곧 "상한 갈대"인 "카네 라쭈쯔(קָנֶ֤ה רָצוּץ֙)"와 "꺼져가는 등불", 곧 "우피슈타 케하(וּפִשְׁתָּ֥ה כֵהָ֖ה)"에 마땅히 주목해야 한다.
"갈대"인 "카네(קָנֶה)"는 "줄기, 가지, 갈대 종류, 갈대 길이, 저울대, 장대" 등을 의미한다. 또는 "reed" 외에도 "stalk", 즉 식물의 줄기를 폭넓게 지칭할 수 있다. 5 이것을 "압제하다, 학대하다"를 의미하는 "라짜쯔(רצץ)"의 수동 분사인 "라쭈쯔(רָצוּץ֙)"가 수식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을 "상한 식물 줄기" 등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6
또 "등불"로 해석된 "피슈타(פִּשְׁתָּה)"는 "삼, 아마, 린넨"을 의미하며, 등불의 불이 붙는 가느다란 심지를 가리킨다. 이것에 "희미해지는"을 뜻하는 형용사 "케하(כֵּהֶה)"가 수식하고 있다. "식물의 상한 줄기"와 "꺼져가는 촛불의 심지"의 심상은 모두 가느다랗고 연약하여 곧 부러져 사라질 것만 같은 이미지를 우리에게 전달한다. 이것들은 굳이 왕과 같은 강력한 존재가 아닌 어린아이와 같은 작은 자라도 쉽게 끊어버리고 금방 꺼버릴 수 있을 만한 것이다. 우리가 이 본문이 이방 모든 민족을 향한 메시아의 사역에 대해 말하는 것임을 상기한다면 이 묘사는 메시아 앞의 국가나 민족들은 모두 이와 같은 아슬아슬하고 빈약한 상태임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 메시아는 이럴 때에 상한 것을 더 상하게 하고 희미해져 가는 것을 강하게 불어 꺼버리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이방 민족들의 곧 무너질 것 같은 상태를 그분은 싸매시며 보듬어주신다. 심지어 진리를 위한 공의를 가져올 때도 그분은 가혹하거나 폭력적인 방식으로 반역자들을 제압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모욕하기 위해 모인 민족들을 진심으로 보살피고 마치 끊어져가는 갈대 줄기를 보호하고 바람 앞의 꺼져가는 심지를 조심히 살리는 것처럼 그분은 죄인들을 함부로 다루지 않고 사려 깊고 신중하며 조심스럽게 소중히 보존하신다.
복음의 전파와 선언은 메시아의 이런 모범을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방식, 타인의 기분을 배려하지 않는 독선적인 공격은 복음의 능력을 가로막고 그 빛을 퇴색시킨다. 때로 마음에 상처 입고 속상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비방하는 자들을 우리는 동일한 비방과 비판과 모욕과 조롱으로 적대하곤 한다. 인간은 누구나 정신적인 고통과 아픔이 있으며, 복음이 전파되어야 할 대상들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들을 더욱 아프게 하고 더욱 슬프게 만드는 방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원칙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에게 위로를 얻고 안식과 평화를 얻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통해 동일한 감정을 느끼도록 하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본 것처럼, 누군가가 우리를 보았을 때 예수님의 자취를 발견하도록 만들자. 그리고 그것을 위한 가장 강력한 동기는 예수께서 조용히, 고요함 속에서, 겸손하고 온유하게 우리에게 다가오셨으며, 끊어지기 직전의 꺼져가던 심지였던 우리를 매우 부드럽고도 조심스럽게 사랑으로 다뤘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아직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말이다(롬 5:8).
<이단 생활!>
- 편집 및 번역 라형택, 「스트롱코드 히브리어 헬라어 사전」, 도서출판 O.N.O, 2020, p. 587. [본문으로]
- L. Koehler & W. Baumgartner, 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STUDY EDITION VOLUME II, trans. ed. M. E. J. Richardson, BRILL, 2001, p. 1042. [본문으로]
- L. Koehler & W. Baumgartner, 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STUDY EDITION VOLUME I, trans. ed. M. E. J. Richardson, BRILL, 2001, p. 725. [본문으로]
- 물론 나는 "바후쯔"는 "로 야슈미아" 문장과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 편집 및 번역 라형택, op. cit., p. 607. [본문으로]
- L. Koehler & W. Baumgartner, op. cit. VOLUME II, p. 111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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