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 6절
생명은 언젠가 모든 것의 끝마침이자 종말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영원함'이 존재하지 않는 자연세계의 생명체들은 자신의 종말이 닥쳐올 때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을 사실상 찾을 수 없다. 시간의 경과는 결국에 '나'라는 무언가가 이 세상에서 점차 희미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가 서늘한 공포를 느끼는 것은 각 개인이 사라진다는 두려운 사실 때문이다.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겐 많이 남아있지 않다.
이 때문에 인간은 죽기 직전에 가장 진솔하고 또 가장 중요한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어떤 개인의 일상적인 말보다는 그 사람의 유언에 더욱 중요한 정보가 들어있을 것이라 합리적으로 추론하곤 한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도 그렇다. 위의 본문은 예수께서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진리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나온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위 본문은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제자들의 불안감과 공포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응답이라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반복적으로 작별하는 듯한 말을 하시는 것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께서 때가 이르렀다, 이제 곧 너희 곁을 떠나간다 따위의 말씀을 하실 때마다 제자들은 공포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를 때에 가족과 직업 등 자신의 거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이 임박한 시기에는 예루살렘에서도 예수님을 혐오하여 붙잡아 살해하려는 기묘한 분위기와 실제로 그런 움직임들이 표출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예수께서 제자들의 곁을 떠난다고 하시면, 제자들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도마가 요한복음 14장 5절에서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모른다고 불안감을 내비친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반면에 예수께서는 4절에서 제자들이 자신이 가는 길, 그리고 자신이 가는 장소를 알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예수께서는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이 길이 무엇인지, 그리고 예수께서 가시는 장소가 무엇인지에 대해 가르치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λέγει αὐτῷ ὁ Ἰησοῦς· Ἐγώ εἰμι ἡ ὁδὸς)"
"길(ὁδός; 호도스)"은 제자들이 궁금해하는 예수께서 가시는 장소로 인도하는 바로 그 '길'이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를 따르려거든, 예수께서 가시는 장소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야할 뿐만 아니라 그곳에 가는 길이 무엇인가 역시도 알아야 할 것이다(요 14:3-5).
성경의 배경에서 "길"은 특히 구약성경의 시각에서 보자면 사람이 걷는 자신의 '인생 전반의 과정'과 깊은 연관성을 보인다. 특히 시편 1편에서 '길'은 그 길을 밟는 사람의 성품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즉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 있으며, 인생을 걸어가는 모든 인류는 두 길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하는 것으로 나온다. 시편 기자에게 이 의인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 그분의 교훈과 명령, 즉 토라를 묵상하고 그것대로 삶을 꾸려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70인역의 이사야서와 유대 지혜 문서들에서 '길'의 이미지는 주로 의와 지혜의 길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등장한다. 또한 초기 유대교의 랍비 할라콧(halakot)에서는 이것이 행동(behavior)을 가리킬 때에 사용된다. 더 나아가 1세기 유대 철학자인 필로(Philo)는 모세가 제시하는 토라의 훈육의 길은 지혜의 길이며 안전한 길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탄나임(Tannaim)은 토라 자체를 "길"이라 말하며, 이것을 행하는 것을 "할라카(הֲלָכָה)"라고 부르는데, 이 히브리어는 "길을 걷다"라는 동사 "할라크(הלך)"의 동사형이다. 이 외에도 유대교 전통에서 토라를 삶에 행하고 적용하는 것은 '길'의 이미지로 지속적으로 묘사된다.
아마 요한복음의 독자들 역시 이런 유대적인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길'의 이미지를 이와 같이 이해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신을 "길"이라고 선언하신 것은 요한복음 처음에 사도 요한이 말했던 대로(요 1:1-2) 그분이 토라에 계시된 "지혜", 즉 "신적인 로고스" 그 자체임을 뜻한다. 신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예수님은 "신적인 지혜" 그 자체인 것으로 종종 소개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가시는 장소에 도달하려거든, 마치 유대인들이 토라를 "지혜의 길, 의인의 길, 생명의 길"로 여기고 따랐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여겨야 한다. 즉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삶 등을 통해 토라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이 이제껏 말해왔던 "지혜의 길"의 화신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진리요 생명이니
(καὶ ἡ ἀλήθεια καὶ ἡ ζωή·)"
"진리"와 "생명"은 여기서 "길"과 동치인 것으로 평행하게 등장한다. 이것은 "진리의 길" 혹은 "생명의 길"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 보다는 "진리이기 때문에, 그리고 생명이기 때문에 길이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예수님이 유대교에서 묘사하는 바로 그 "길"이라는 설명은 그분이 "진리"이자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분임을 보여준다.
구약성경에서 "진리(ἀλήθεια; 알레떼이아)"는 히브리어로 "에메트(אֱמֶת)"이며, 알파벳의 처음, 중간, 그리고 마지막의 문자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종종 처음이자 마지막, 알파요 오메가인 하나님이 곧 "진리" 그 자체라고 말했다. 요한복음에서 이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의 성품을 뜻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길로 삼아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있고, 하나님께 직접 접근할 수 있으며, 그분을 예배할 수 있다.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최상의 계시를 가장 올바르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종종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그 자체임을 암시하는 여러 본문들에 의해 더욱 강조된다. 그분을 통해 "진리"이신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생명(ζωή; 조에)"은 흔히 영원히 사는 것과 관련이 있는데, 구약성경보다는 신약시대에 흔한 개념이었다. 그러나 유대교를 제외한 다른 이교의 문헌들에서는 자주 발견되지는 않는다. 유대 문헌들에서 이 용어는 주로 죽은 자가 부활할 때에 상속받게 될 생명을 가리키곤 했다. 외경인 솔로몬의 시편에 의하면, 이런 종말의 날에 의인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 올려질 것으로 기대되었다. 이 때문에 유대교 자료들은 "장차 올 세상의 생명" 혹은 "그 시대의 생명"이라는 용어들을 사용하였으며 이것이 1세기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들에게도 익숙했다. 요한복음은 이런 개념을 축약하여 "생명"이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더욱이 많은 신약학자들이 지적하는바, 초기 기독교 문헌들에서도 "생명"은 "장차 올 시대의 생명"의 의미로 대부분 사용된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이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니는 "생명"을 현재 시제의 동사들과 연결하여 이것이 믿음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으로 말한다. 즉,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이 지금 현재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종말에 있을 부활의 영원한 생명을 미리 맛보아 즐기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 그 자체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으로, 우리는 미래의 영생을 소망으로 바라보고 그에 대한 보증으로 성령을 소유한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οὐδεὶς ἔρχεται πρὸς τὸν πατέρα εἰ μὴ διʼ ἐμοῦ.)"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성경과 유대 랍비들이 줄곧 말해왔던 "지혜의 길", "토라 그 자체", "진리이신 하나님",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이라면 이것을 통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은 계속해서 이 같은 것들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증거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제자들을 떠나 향하는 장소가 어디인지 밝혀진다. 그곳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머무시는 그 장소이다. 하나님을 찾으려는 자들은 그분이 계신 곳에 도착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제자들이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신가를 알 수 없다면, 제자들은 하나님을 찾더라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신령한 예배, 참된 예배를 올려드린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은 헛된 것으로 남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정확한 길이 존재한다면 어떨까? 제자들은 이 길을 따라 걸어가면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이 길은 구약성경 및 유대교 선생들에 의하면 토라를 묵상하고 그것대로 삶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토라를 묵상하면 하나님의 성품, 곧 "진리"를 알 수 있으며, 장차 올 하나님의 날에 의로움으로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 성경을 연구했다. 그런데 사실 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었다(요 5:39-40).
그렇다면 영생을 얻기 위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연구하는 것과 관련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이기 때문이다(요 14:9). 우리는 부지런히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그분의 삶이 주는 계시들을 연구하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을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유일한 길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분의 가르침이나 삶을 따를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즉 우리는 가장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곧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믿음은 우리를 예수님에게로 주목하게 만들 것이다. 만약 그분이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자 하나님 그 자체이자 영원한 생명의 근원임을 믿게 된다면, 그분의 말씀과 삶을 기록한 제자들의 증언을 결코 소홀히 여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을 통해 하나님께로 향하게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걸어 나갈 것이며, 하나님께 도착할 것이다.
이제 새로운 시대, 새 언약의 시대가 도래했다. 구약성경의 의인이 토라의 길을 걸어가듯,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은 예수라는 길을 걸어간다. 그리고 그가 향하는 곳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품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곁을 떠난 뒤에, 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바로 이것이다.
<이단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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