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2장 15절 묵상: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젊은 남녀의 이색 데이트 (대한예수교침례회, 생명의말씀선교회) (아 2:15)

성경 묵상

아가 2장 15절 묵상: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젊은 남녀의 이색 데이트 (대한예수교침례회, 생명의말씀선교회) (아 2:15)

바잇 카탄 2024. 4. 9. 00:41

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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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아가 2장 15절

 



 

아가 2장 15절 히브리어 원문.

 

 

 


 

 


 아가서에 대해서는 이전에 묵상한 글이 있다. 거기서 나는 아가서를 흔히 기독교인들이 해석하는 방식대로 알레고리로 보고, 본문을 그런 방식에 따라 취급하였다. 그래서 아가서의 내용들을 기독교적 교리와 신학과 연관 짓기 위해 노력했었다. 
 
 그러나 성서학자들의 저서를 읽게 되면서 나의 이런 틀에 박힌 사고는 이제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가서에서 기독교의 교리나 교회 등의 진리를 찾으려 하는 것은 아가서를 진솔하게 다루는 것이 아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아가서에서 어떤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 하고, 그것을 보다 기독교적으로 바라보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기독교에서의 금기, 곧 금욕적인 요구에 따라 성적인 남녀 간의 사랑은 기독교적 가르침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편견 때문일 수 있다. 
 
 유대교의 랍비들이 아가서를 알레고리로 해석하려고 시도한 것 역시 이런 편향적인 시각의 고착화 때문으로 보인다. 랍비 아키바가 당대의 어떤 사람들이 아가서를 단순히 사랑 시로 여기는 것에 대해 개탄한 것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로는 랍비 아키바가 비판하였던 그들의 시각이 성경 본문을 좀 더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해석한 것이었다. 이런 고지식하고 금욕적인 시각은 기독교에서 더욱 극단으로 치달았다. 그래서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 파괴 시의 환란 때를 대비하여 독신으로 있을 것을 권장하였을 때,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오해하여 독신 그 자체를 좋은 기독교적 미덕으로 만들어버렸다. 교부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 독신을 통해 금욕을 실천하고 이 같은 방식으로 세상과 단절되려 했다는 것은 이미 익히 알려져 있다.
 
 중세 시대에도 이런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성적인 것은 모든 것이 죄악 된 것으로 취급되었으며, 부부간의 관계 까지도 부부가 서로에 대해 죄를 짓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오직 자녀를 만들고 출산하는 목적 외에는 성관계나 남녀 간의 로맨틱한 사랑이란 음란한 것이며 방종이었다. 많은 수도사들이 그들의 수도원의 울타리 안에서 독신을 서약하고 지키기 위해 음욕을 향해 선전포고 하며 금욕적인 삶을 살아갔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극단적인 시도는 완벽하게 성공할 수는 없었다. 혼인을 할 수 없었던 많은 수도사들이 비밀리에 여성들과 관계를 가졌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사생아들이 태어나고 버려졌다.
 
 어쩌면 이미 기독교 초기 2-3세기의 금욕주의 사막 은둔자들의 사례가 이런 비극들을 예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교회사는 이 시기에 이미 가장 철저한 금욕을 실천했던 자들이 밤마다 악마와 진수성찬의 환영에 시달렸으며 그중에는 나체의 여인의 환영이 가장 견디기 힘든 "사탄의 시험"으로 등장했다고 일러준다. 이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극단의 상황으로 인간을 몰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필자 또한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에 있으면서 남녀 간의 사랑의 표현은 절제하고 교회와 관련된 것들에만 집중할 것을 강요받아왔다. 그곳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어떤 것을 하기보다는,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있어야 하며 이것이 권장된다. 자유로운 연애는 사실상 금지이며, 반드시 결혼을 전제로만 연애를 해야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부부들이 자유롭게 만나 결혼하기보다는 목사에게 상담을 받고 목사를 통해 중매 대상과 만나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반년만에 결혼한다. 만약 목사에게 허가받지 않은 상태에서 남녀가 자유로운 연애를 한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된다. 심지어 결혼한 뒤에도 남녀 신도들은 설교 시간에 함께 붙어 있기보다 따로 떨어져 들어야 한다. 그리고 교단에서는 서로 꼭 붙어 설교를 듣는 부부들을 향해 '남에게 덕이 되지 않는다'며 불쾌하게 바라보고 떨어뜨려 놓는다.
 
 필자의 이러한 배경 때문에 아가서를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내용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갖는 데에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일단, 정경으로 채택된 아가서가 감히 그런 외설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다고 인정하기가 싫었다. 아가서의 모든 본문들을 하나님과 성도, 예수님과 성도, 교회와 성도의 관계 등으로 풀어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 같은 이유 모를 충동이 들었다. 아가서를 성적인 어떤 것으로 만드는 신학자들이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잘못 해석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이 사랑스러운 책이 두 남녀가 서로를 연애하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성(sex)을 통해 서로에 대해 즐거워하고 행복감을 느끼는 것을 다루고 있음을 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가장 적절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결실이 될 때,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필자는 대침에 있었을 때에 이 결혼과 관련된 문제로 매우 많은 고통을 겪었다. 이것은 내 아내가 불신자여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또는 내가 불신자여서도 아니었다. 혹은 둘 중 한 명이 대침이 아닌 다른 교단에 다녀서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나와 아내는 대침 안에서 정상적으로, 더 정확히는 열정적으로 봉사하며 신앙생활하던 형제요, 자매였다.
 
 다만 대침에서 반대했던 것은 우리가 자유롭게 사랑이 싹트고 목사의 허락 없이 연애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나도 대침 사람이었어서, 그들과 부딪히며 엄청난 신앙적인 고통과 심리적인 혼란을 겪었다. 그때에는 내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보다 세상적인 시각에서 사람의 정욕을 따른 것 같아 자괴감과 죄책감이 들었다. 그리고 주변에서도 마치 내가 그런 사람인 것처럼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하나님을 떠나 잘못된 길에 들어선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는 나와 내 아내의 사랑의 관계가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안다. 오히려 그들의 엄격한 통제와 관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소위 목사의 뜻에 순종해서 만났다는 위장된 사랑의 관계가 아닌 것에 감사하다.
 
 그리고 아가서를 읽으면서 나와 아내의 성적인 사랑에 대해 무언가 불안하게 느껴졌던 초조함과 죄책감이 모두 사라졌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를 통해 정상적인 남녀의 사랑을 통제하고 때로는 침묵시키려고 시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에서 아가서의 존재는 이 모든 폭력적인 노력들이 결코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추가로, 대침에서는 위의 본문을 지극히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다. 곧 포도원=교회이며, 여우=교회를 망치는 어떤 것, 이를 테면 우리가 짓는 죄나, 마귀, 혹은 판단하는 마음이나 목사에게 대적하는 형제 등등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에서도 이런 알레고리적 해석들이 난무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방식의 해석들이 성경 본문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해당 본문은 아가서 전체의 주제, 곧 남녀 간의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하는 시로 여겨야 한다고 확신한다.
 

 

 


 

 


 

우리를 위하여... 잡으라

(אֶֽחֱזוּ־לָ֙נוּ֙)


  아가서의 구조에 대해서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세 그룹이 노래 부르는 형식을 위해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남성 가수, 여성 가수, 그리고 합창단(코러스)으로 구성되며 서로가 서로의 노래에 대하여 화답하는 형태의 고대 음악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 "우리를 위하여(לָ֙נוּ֙; 라누)"는 이런 형식과 관련하여 남성 및 여성 화자를 지칭하거나, 혹은 코러스 합창단을 지칭할 수 있다. 만약 전자라면 남성 및 여성 화자가 코러스 합창단을 향해 "우리를 위하여 너희는 잡아라!"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고, 만약 후자라면 코러스 합창단이 남성 및 여성을 향해 "너희는 잡아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두 가지 견해 모두 문법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 부분에서 화자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고 말한다.[각주:1] 반면에 어떤 학자는 아가서에서 보통 행위의 주체(여기서는 여우를 잡는 행위 주체)가 남자나 여자에게 있다는 점을 근거로 화자가 코러스 합창단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아가서 5장 8절에 의하면, 남자나 여자가 코러스 합창단을 부를 때에는 "예루살렘의 여자들" 등으로 명시한다고 한다. 또한 코러스가 커플을 위해 여우를 잡을 것을 요청받는 이유를 상상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각주:2] 이 관점에 의한다면, 코러스 합창단은 남자와 여자에게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고 말하고 있다.
 
 약간의 모호함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나 역시도 여기서는 합창단이 남녀 커플에게 여우를 잡으라고 말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 잠정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고대에 여우 잡는 것이 젊은 청년들의 오락거리였다는 것과도 잘 어울린다. 여우 사냥은 고전 그리스의 도기들에서 소년들의 놀이로 그려진다.[각주:3] 그러므로 합창단이 어린 커플을 향해 "여우를 잡으라!"라고 권하는 것은 이 젊은 남녀의 풋풋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데이트를 사람들이 보기 원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포도원에 누워 있는 젊은 남녀. 아 2:15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שֽׁוּעָלִ֔ים שֽׁוּעָלִ֥ים קְטַנִּ֖ים מְחַבְּלִ֣ים כְּרָמִ֑ים)


 여우(שֽׁוּעָלִ֔ים; 슈알림)는 포도원을 허는 부정적인 동물로 묘사된다. 고대 세계에서도 여우는 포도원을 망치는 주범이었다. 트렘퍼롱맨 3세는 BC 275년경 코마타스의 테오크리토스(Theocritus of Comatas)가 쓴 시를 소개한다: "나는 붓꼬리 여우를 싫어하는데, 이것들은 날이 저물자마자 한창 포도를 수확하는 미콘(Micon)씨의 포도 덩굴로 서서히 다가온다."[각주:4]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 아리스토텔레스, 핀다르(Pindar), 소포클레스(Sophocles), 플라톤 등 역시 여우를 해롭고 매우 교활한 짐승으로 묘사한다.[각주:5] 이 때문에 젊은 청년들 사이에서 여우 사냥이 흔했던 것으로 보인다.[각주:6] 예수님께서도 눅 13:32에서 여우를 교활함을 표현하는 은유로 사용하신다.
 
 포도원(כְּרָמִ֑ים; 케라밈)은 아가서에서 여성 화자와 관련이 있거나, 아니면 남녀 커플이 사랑을 나누는 장소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아 1:6; 6:11). 그래서 앞 구절인 아가 2장 13절에서 남성 화자가 여성 화자에게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고 권하는 장면에서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 것으로 제시되며, 남성 화자가 여성 화자를 밖으로 이끌어내는 주요 동기로 작용한다(아 2:10-13). 아마 여기서 포도원이 등장하는 것 역시 이런 남성 화자의 데이트 신청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즉, 포도원은 남성 화자가 여성 화자와 사랑을 나누기 위해 고른 장소적 배경이 된다.
 
 여기서 알레고리로 이 본문을 해석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은 포도원을 교회로, 여우를 교회를 망치는 어떤 요소로 여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아가 2장의 전체 흐름과 전혀 맞지 않으며, 포도원이 이스라엘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아가서가 암시하지 않는 상징적인 의미를 통해 도출하는 것에 근거한다. 이 본문은 교회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나 예수 그리스도 등에 대해서 아무런 말을 하고 있지 않다. 또 여우가 어떤 마귀적인 일이나, 혹은 누군가의 죄를 의미한다거나 하는 등의 추론 역시 이 본문을 통해 나오기엔 부적절하다. 만약 여기서 '포도원=교회', 혹은 '여우=교회를 망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알레고리적 해석을 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개인의 주관적인 해석일 뿐이며, 성경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해석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여우는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나누는 배경이 될 포도원을 파괴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여우는 그럼에도 아주 위협적이진 않은 것 같다. 여기서 여우는 작은(קְטַנִּ֖ים; 카타님)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합창단은 남녀 커플에게 여우를 죽이라고 권하지 않고 다만 "잡으라"라고 말한다.[각주:7] 그러므로 여우가 포도원을 허무는 것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마치 중대한 위험이 되는 것처럼 해석할 필요는 없다. 이 여우는 포도원에게는 작은 골칫거리이며, 따라서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나누는 것을 결정적으로 방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וּכְרָמֵ֖ינוּ סְמָדַֽר׃)


 "쎄마다르(סְמָדַֽר)"는 포도나무의 꽃순(blossom of grape)을 의미하며, 아가서 2장 13절에서도 사용되었다. 이것은 13절의 이미지가 15절에서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포도나무가 꽃이 피는 봄이 되자, 이스라엘에서는 겨울이 지나고 늦은 비가 그친다. 그리고 자연이 깨어나 푸른빛으로 물든다. 들판에는 꽃들이 피고 비둘기는 노래하며 무화과나무는 3월을 맞아 첫 열매가 맺힌다(아 2:11-13). 이제 싱그러운 봄 향기와 함께 젊은 남녀는 창문 하나를 두고 서로 얼굴을 맞대며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아 2:9).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 아름다운 포도원에 도착한다. 그리고 이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이 보기 좋은 한 쌍이 봄에 어울리는 행복한 시간을 보내길 기대한다. 그래서 포도원 곳곳에 숨어 있는 작은 여우를 잡는 이색 데이트를 추천한다.
 
 상기된 얼굴의 두 남녀가 포도원에서 여우를 잡으며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는 이 사랑스러운 장면을 통해 우리는 아름다운 목가적인 분위기와 마음이 간질간질한 설렘을 느낄 수 있다. 만약 여기서 약간의 기독교적인 신학을 첨가한다면, 젊은 연인의 열정적인 사랑은 하나님과 성도와의 애틋한 관계를 잘 나타낸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야곱과 라헬의 관계에서나 룻과 보아스의 관계에서 그런 가르침을 필연적으로 뽑아내지 않는 것처럼, 여기서 반드시 그런 함의를 찾아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대가나 조건을 바라지 않고 그저 순수하게 사랑한다는 그것만으로도 이 장면은 기독교인이 지향하는 연애관을 보여주며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본문에서 흐뭇한 커플의 연애가 아닌 포도원을 망치는 여우에 집중하는 이상함을 보여준다. 그래서 젊은 남녀의 사랑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시가 갑자기 교회를 망치지 않기 위해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교훈을 주는 내용으로 변모해 버린다. 심지어 필자는 어떤 목사가 자신의 교회를 대적하는 사람을 이 포도원을 허는 여우에 빗대면서 비난하는 것을 듣기도 했다. 이것은 아가서의 주제를 무시하는 것이며, 또한 아가서 2장의 문맥을 무시하는 것이다.
 
 아가서가 이렇게 본문이 말하는 것과 무관한 내용으로 해석되는 것은 기독교 내에 뿌리 내려져 있는 남녀 사랑에 대한 모종의 거부감 때문일 수 있다. 마치 아가서는 단순한 연애 이야기로 끝나서는 안 되고 무언가 깊은 숨겨진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면서 때때로 고귀한 신앙생활을 위해서 청춘들의 사랑은 소홀하게 취급되거나 무시될 수도 있다고 여겨지는 것 같다. 특히 기독교 이단들은 남녀 관계를 통제하면서 사랑을 포기하도록 만들거나 억지로 사랑하도록 만들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세뇌시키곤 한다.
 
 하지만 두 연인의 서로를 향한 간절한 사랑을 아름답게 노래한 아가서는 이런 모든 생각들에 의문을 던진다. 어쩌면 사람들이 아가서에서 찾으려고 애쓰는 신비스럽고 깊은 숨겨진 가르침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젊은 커플의 사랑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두 남녀가 서로를 통해 완전한 만족을 누리는 이 관계는 매우 아름다운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사랑에서 "교회"나 "전도"나 "신앙생활"과 같은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이것을 애써 무시하고 간과하려 해서는 안 된다. 혹은 상대적으로 가치가 낮은 것이라 취급해서도 안 된다. 적어도 아가서 저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가에는 두 남녀의 사랑을 방해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등장한다. 작은 것이긴 하지만, 여우도 사랑의 배경이 되는 포도원을 망친다는 점에서 그런 부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긴 한다. 어떤 학자들은 여성에게 그녀의 오빠들이 분노하며 포도원지기를 시킨 것 역시 여성의 사랑을 아니꼽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아 1:6). 성 중의 경호원들은 여성이 남성에게 나아갈 때의 장애물이다(아 5:7).
 
 그런데 어떤 교회에서는 청년들의 사랑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거나 혹은 심하게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것으로 비화하여 이들의 사랑을 방해하기도 한다. 혹은 어떤 교회에서는 목사가 청년들에게 헛된 사랑의 감정을 끊어내게 만들기 위해 이 본문을 인용하여 교회에 숨어든 작은 여우를 잡으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 남자친구나 혹은 여자친구와 헤어지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교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순박한 자들의 사랑을 망치기 위해 숨어든 작은 여우처럼 행동한다.
 
 이단들이 남녀 관계를 통제하며 자유로운 연애를 막는 것은 아가서의 시각에서는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나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이 남녀 간의 사랑이나 부부간의 사랑을 '덕이 되지 않는다'는 괴상한 변명을 통해 남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이상한 것으로 만드는 것 역시 아가서가 그리는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물의 역할을 이들이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들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이것들에 순종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아가서의 메시지는 이들의 극단적인 가르침이 비성경적임을 드러낸다. 어떤 두 남녀의 사랑을 방해하고, 교회 내에서 부부를 갈라놓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과 도대체 어떤 상관이 있는가? 또 목사가 마음대로 두 남녀를 짝 지어 결혼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반면에 아가서가 그리는 자연스러운 사랑, 자유로운 연애의 아름다움은 종교 생활을 위해 사랑을 희생시키는 이단들의 잘못된 신념이 성경이 원하는 것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보여준다. 젊은 남녀가 포도원에서 여우 사냥을 하며 데이트를 하는 아름다운 장면의 묘사는 이단들이 젊은 남녀의 연애를 통제하고 결혼만을 위한 사랑으로 축소시키며 제한하는 현상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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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remper Longman III, Song of Songs, trans. Dae Yeong Kwon, Revival & Reformation Publishing, 2018, p. 157. [본문으로]
  2. Duane Garrett & Paul R. House,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23B Song of Songs & Lamentations, trans. Cheon Seok Chae, Solomon Christian Press, 2010, p. 243. [본문으로]
  3. Ibid., p. 244. [본문으로]
  4. Tremper Longman III, op. cit., p. 157. [본문으로]
  5. Duane Garrett & Paul R. House, op. cit., p. 243. [본문으로]
  6. Ibid. [본문으로]
  7. Duane Garrett & Paul R. House, op. cit., p. 24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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