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눅 12:31.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마 6:33과 눅 12:31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중에 아마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이 본문을 필요에 따라 사용해 왔고, 또 많은 기독교 신자들 역시 이 본문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 매일매일을 살아오고 있다.
그런데 어떤 교회는 이 본문을 이용해 신자들이 자신들의 집단을 섬기게끔 만드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이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라는 권면은 그런 교회에 의해 신도들로 하여금 거의 모든 시간과 비용을 교회를 성장시키고 교회에 봉사하는 것에 사용하라고 강제하는 명령으로 변모해버린다. 이 때문에 그런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신도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 곧 교회에 봉사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해당 본문의 문맥은 그런 내용을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에서도 동일한 초대의 말씀을 강론하심으로써 이 말씀의 의미를 분명하게 파악하도록 하셨다. 비록 몇몇 학자들에 의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서로 다른 배경에서 반복되어 선포된 설교 내용이라는 지적이 있지만,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두 본문이 모두 이 땅에 물질을 축적하는 것이 아닌, 하늘에 보화를 저장하는 것을 추구하라고 초대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방법이란 하나님의 나라를 찾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를 찾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 자신만을 위한 물질적 축적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보물을 쌓아 두는 것”이라는 주제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반면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본문이 등장하게 된 사건의 정황에 대해서 차이가 있다.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어떤 상황에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는가에 대해서 추가적인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누가복음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형제와 유업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예수께 도움을 요청하는 사건을 그린다. 눅 12:13의 “유산, 상속, 기업”을 뜻하는 헬라어 “클레로노미아(κληρονομία)”는 이 사람이 유산을 상속받는 상황에 처해 있었음을 알려준다.
유대교에서는 랍비들이 법적인 분쟁이 있을 때 문제 해결을 위해 개입하기도 했기 때문에 예수께 유산 상속에 대한 법적 분쟁의 조정을 요청했던 것은 당시 사회적 시선에서 바라볼 때 무리한 것은 아니었다. 모세 오경에는 상속에 대한 규정들이 존재했으며, 랍비들은 이 토라의 내용을 해석함으로써 법적인 분쟁이 있을 때 적절한 도움을 주었다. 1
하지만 예수께서는 상속과 관련된 이 분쟁에 개입하기를 거부하셨다(눅 12:14). 그리고 상속을 받기 위한 개인적 이유로 예수를 찾은 이 사람 덕분에 예수께서는 재물과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에 대하여 설교를 할 기회를 얻으셨다. 이런 배경을 생각해볼 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둘 모두 재물을 축적하는 것과 관련하여 일관된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있다는 것은 납득할만하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우리의 소득을 저축하는 것 자체를 금하시기 위해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일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본문에서 재물의 일반적인 저축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이 없다. 예수님은 자신이 일한 소득을 저장하는 것 자체를 잘못된 것으로 규정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비판의 화살은 ‘나 자신만을 위한 물질적 축적’을 향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태복음은 단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명령하심으로써 “땅”과 “하늘”을 대조하고 있을 뿐이지만, 누가복음은 12:16에서 한 부자의 비유를 소개함으로써 이 주제에 대한 더욱 선명한 관점을 제공한다.
그 비유 속에서 한 부자는 오직 자신의 유익을 위해 곡식과 물건을 저장하기로 결심한다. 그 부자는 이것을 더욱 확실하게 실행하기 위해 기존의 저장 공간을 헐고 확장 공사까지 감행한다. 본문에서 1인칭 “내가” 혹은 “나의”가 계속 자주 반복되는 것은 부자가 자신의 재물을 운용할 때 오직 자기 자신 밖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눅 12:21에서 예수께서는 이 비유의 의미를 간명하게 다음과 같이 전달한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그렇다면 마태복음의 “땅에 쌓는 것”과 “하늘에 쌓는 것”의 강조점 역시 “자신만을 위해 재물을 운용하는 것”과 “하나님을 위하여 재물을 운용하는 것”과의 대조에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더할 것이다
돈을 버는 것의 목적이 자기 자신을 향해 있는 사람의 경우 어떻게 하면 잘 먹을 수 있을지, 무엇을 마셔야 할지, 그리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집에 살아야 할지에 대해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안위와 이득과 유익을 인생의 최고 목표로 설정한 사람이라면 거의 하루 온종일 이런 관심사를 위해 시간과 비용을 투자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런 염려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명령하신다. 이런 것들에 대한 적극적인 추구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마 6:32; 눅 12:30). 오히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너희는 찾아야 한다”의 “제테이테(ζητεῖτε)”는 현재 명령법으로 사용되어 제자들의 이 같은 노력이 지속적인 습관과 같이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찾아야 하는데, 그것은 일시적인 순간이나 사건이 아닌 지속적으로 날마다 유지되는 삶의 양식이다.
마태복음의 “먼저(πρῶτον)”와 누가복음의 “오직(πλὴν)”은 이 같은 계속되는 삶의 양태가 제자들에게 그 어떤 것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 중에서도 본문에서 대조되고 있는 “재물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과 비교했을 때 이 삶의 습관, 곧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함의 습관이 더욱 우선적으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은 하나님께서 이것을 책임지시고 안전하게 보장하는 삶을 가져온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제자들에게 “이것들(ταῦτα; 눅 12:31)”, 혹은 “이 모든 것들(ταῦτα πάντα; 마 6:33)”을 “더하겠다(προστεθήσεται)”고 선언하신다. 이 때문에 어떤 기독교인들은 마치 교회를 잘 다니면 만사형통해서 자신이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라고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헬라어 “타우타(ταῦτα)”와 “타우타 판타(ταῦτα πάντα)”가 지시하는 대상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이런 오해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누가복음 12:31의 “타우타”는 12:30의 “이 모든 것(ταῦτα… πάντα)”를 가리키며, 마태복음 6:33의 “타우타 판타”는 6:32의 “이는 다… 것이라(πάντα γὰρ ταῦτα)”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것은 “만사형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것은 마 6:11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간구와 더욱 비슷한 의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지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제자들에게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을 공급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활에 대해 염려하고 몰두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의 양식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고 그의 의를 구한다는 것, 곧 보물을 땅이 아니라 하늘에 쌓아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본문을 오용하는 자들은 이것이 교회에 봉사하고 교세 확장을 위해 끊임 없이 전도하라는 명령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를 물질적으로 잘 섬기면 하늘에 상급이 쌓인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본문에서 그와 같은 의미는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누가복음의 본문은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안내하는 것 같다. 누가복음 12:33은 마태복음 6:19-20이 말하는 “도둑이나 좀이 해할 수 없는 저장 공간”이 무엇인가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그것은 교회에 봉사하거나 전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드는 것이다.
눅 12:33의 ”구제”로 번역된 “엘레에모쉬네(ἐλεημοσύνη)”는 “구호품, 구제, 자선행위”를 폭 넓게 지칭하는 단어이다. 이것은 “긍휼, 자비, 연민”을 의미하는 “엘레오스(ἔλεος)”와 연관이 있으며, 일차적으로는 “동정, 연민(sympathy)”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이것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비로운 활동(benevolent activity)”을 하는 것을 지칭할 때에만 사용된다. 2그래서 『TDNT』는 이것을 “almsgiving”, 즉 “구호, 희사, 자선”을 뜻하는 것으로 제안한다. 3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여기서 제자들이 자신이 가진 재산을 활용하여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줘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분명하게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드는 것으로 묘사하신다. 이 주머니는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며,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는 것, 곧 마 6:20에서 말씀하신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고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는 하늘에 쌓은 보물”을 가리킨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란 예수님의 설명에 의하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재산을 사용하지 않고 타인을 위해 물질적인 자선을 행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나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시간과 비용을 온통 개인적인 안락과 유익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의 삶과 거리가 멀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을 향한 관심을 외부로 돌려 타인을 향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바울에 의하면 사랑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13:5).
어쩌면 예수께서 “그의 나라” 뿐만 아니라 “그의 의”, 곧 “텐 디카이오쉬넨 아우투(τὴν δικαιοσύνην αὐτοῦ)”를 추가로 언급하신 것은 이것을 분명히 강조하고자 한 이유에서 였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눅 12:33의 “자선”을 의미하는 “엘레에모쉬네(ἐλεημοσύνη)”는 70인역(LXX)에서 “공의, 올바름, 의로움(righteousness)”을 뜻하는 히브리어 “쩨다카(צְדָקָה)”의 번역어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대교에서 이 “쩨다카”는 공의로운 행동으로서의 “의”를 뜻하는 동시에 “자선 활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빈자와 고아와 과부 등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고 또 그들을 돌보는 것은 의로운 것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단 4:27).
특히 학자들은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 “구제를 행하다”의 헬라어 표현인 “포이에인 엘레에모쉬넨(ποιεῖν ἐλεημοσύνην)”은 유대교 문헌의 히브리어 표현인 “아싸 쩨다카(עשׂה צדקה)”와 상응하는 것이며, “구호품을 주다”인 헬라어 “디도나이 엘레에모쉬넨(διδόναι ἐλεημοσύνην)”은 히브리어 “나탄 쩨다카(נתן צדקה)”와 동일한 것이라 말한다(마 6:1-4; 행 9:36; 10:2; 24:17; 눅 11:41; 12:33). 4
그러므로 예수께서 아람어로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히브리식 표현인 “아싸 쩨다카”나 “나탄 쩨다카”에서의 “쩨다카”를 떠올렸을 것이다. 더욱이 누가가 12:33에서 “도테 엘레에모쉬넨(δότε ἐλεημοσύνην)”으로 “구제하라”를 번역한 것은 마태복음 6:33의 “그의 의”를 제자들이 “엘레에모쉬네”의 의미로 받아들였음을 증거한다. 또한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설교를 모두 설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테이테(ζητεῖτε)”의 지속적인 의미도 잘 드러내며, “재물을 나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지 말라”는 전체 문맥의 내용과도 잘 어울린다.
결론
갤럽 인터네셔널(Gallup International Association)이 2022년 8월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조사 대상인 61개국 평균보다 무신론자의 비율이 더 높다. 5한국은 자신을 비종교적이라 생각한다고 응답한 사람이 27%이며, 무신론자라고 응답한 비율이 34%이라고 한다. 반면에 자신을 종교적이라 응답한 비율은 고작 36%에 불과하다. 즉 한국인들 중 대략 60%이상이 종교적 가치관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자신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한국인의 이런 무신론적인 세계관 속에서 물질만능주의가 궁극의 삶의 가치로 채택되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인들은 외국과 비교했을 때 자기 자신의 이득을 위해 발빠르게 움직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더 나은 집, 더 나은 차, 더 나은 학교, 더 나은 직장, 더 나은 수입, 더 나은 자산을 갖기 위해 이리저리 알아보고 공부하며 투자하고 발로 뛴다.
거의 모든 학생들이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출혈 경쟁을 하며, 좋은 대학을 가고 난 뒤에는 자격증이나 전문 자격증, 혹은 전문직 면허를 취득하기 위해 또다시 경쟁에 돌입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고수익의 연봉과 안정적인 직장을 얻기 위함이다. 젊은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빠르게 자산을 만들었는가를 자랑한다. 혹은 자신의 부모에게 얼마나 많이 물려받았는가를 자랑한다. 반면에 이런 것들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절망에 빠지며 “이번 생은 망했다”며 자조한다.
남들과 비교했을 때 더욱 나은 물질적 풍요를 누려야 우월하다는 인식도 물질만능주의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남들처럼 해외여행, 골프, 파인다이닝 등을 어느 정도 누려야 기본 이상의 삶을 사는 것이라 착각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이런 행실들을 보고 학습한다. 그래서 아이들끼리 자신들의 사는 아파트가 매매냐 임대냐, 전세냐 월세냐를 기준으로 사회적 위치를 가늠하고 “전세 거지”나 “월세 거지”와 같은 단어들을 만들어냈다. 어떤 아이들은 아이폰이 없는 아이를 차별하고 괴롭히며 왕따 시키기도 한다.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풍족한 환경에서 물질에 둘러싸인 채 기름지게 성장해야 좋은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태어나자마자 가장 비싸고 고급스러운 것들로 아이들을 대접하고자 노력한다. 요새는 아동 용품들 중에서 소위 “명품”에 속하는 것들을 구매하는 것이 유행이라고 한다. 아이 엄마들은 맘카페를 통해 이런 정보들을 서로 공유하고 인스타그램을 통해 서로 가늠하고 비교하면서 “남들처럼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키우기 위해 무리하게 경쟁한다.
이런 왜곡된 물질적인 가치관은 배우자를 고를 때에도 어김 없이 작용한다. 과거에는 단칸방이라도 신혼집이라면 시작하기 좋은 괜찮은 장소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현재는 적어도 경기도 혹은 서울의 20평형대나 30평형대의 자가 보유자를 찾는다. 한국의 중위 소득은 2021년 기준으로 개인당 연봉 3174만원인데, 6이는 월 265만원이 조금 안 되는 수준에 불과하다. 그런데 어떤 결혼정보업체의 2023년 조사에 따르면 이상적인 남편의 조건으로 연봉 6067만원과 자산 3억 3491만원이 희망 된다고 한다. 7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의 젊은이들은 결국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길을 선택한다.
한국인들은 이런 자기들의 물질적 만족의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기도 한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물질적으로 부족하지만 행복한 젊은 부부의 사례가 나오기라도 하면 많은 사람들이 댓글로 악플을 달면서 “그런 삶은 행복할 수 없다”고 아우성친다. 마치 물질적인 요소가 충족된 상태에서 결혼이나 일상을 시작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절대 행복의 궤도로 들어갈 수는 없다는 듯이 말이다.
어째서 우리 사회는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필자의 생각에) 자신의 유익을 위해 물질적인 것들을 축적하고 최대로 활용하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들과 비교했을 때 자신이 어느 정도의 자산을 가지고 있고 어느 수준의 연봉을 받고 있으며 어떤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배우자와 결혼했는가, 이것이 중요 해진다.
만약 모든 인류가 이런 마음가짐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어떨까? 그런 사회를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마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은 상당히 불행한 사회이다. ‘남들처럼’ 잘 살기 위해서 끊임 없이 비교하고 평가 당하며 물질적인 성공을 위해 계속해서 내달리는 그런 불행한 사회이다.
그런데 만약 자신의 소득이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타인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주요 가치관으로 자리 잡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곧 인간의 궁극적 삶의 목적을 자신을 위한 물질적 풍요로부터 어려운 이웃을 돕는 윤리적 사랑으로 옮기면 어떻게 될까? 예수께서 원하시고 그리시며 우리를 초대하는 사회는 바로 이런 사회이다.
나의 유익이 아니라 불쌍하고 부족하며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는 이웃을 돕는 것, 이것이 바로 가장 진정한 기독교적 자세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고 그분의 “쩨데카”, “엘레에모쉬네”를 추구하는 삶을 사는 참된 가치 있는 태도이다. 이것을 행함으로써 사람들이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 13:15; 15:14).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땅이 아닌 하늘에 보물을 쌓는 진정한 방식이다(눅 12:33).
모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런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야 한다(“ζητεῖτε”). 그렇게 했을 때 기독교는 사회를 보다 아름다운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앞장 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을 산다면, 즉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을 산다면, 나는 사회의 대부분의 갈등이 완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교회를 성장시키고 교회에 봉사하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일 뿐더러 기독교를 예수님이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잘못 인도하는 것이다. 혹은 이 말씀을 전도하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 역시 엄밀한 의미에서 본연의 뜻을 벗어나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기독교인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과연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봐야 한다. 예수님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과연 무엇인가? “나의 죄는 없어졌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한 가득 모여 있는 곳인가? 아니면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도와주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는 곳인가?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말씀인 것 같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면, 우리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즉,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나의 시간과 비용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 Darrell L. Bock, Luke 9:51-24:53, trans. Gi Cheol Sin, Revival & Reformation Publishing, 2017, 292. [본문으로]
- “In the NT ἐλεημοσύνη is found only in the sense of “benevolent activity,” and always to the poor (“almsgiving”)”
NT New Testament.
Rudolf Bultmann, “ἔλεος, ἐλεέω, ἐλεήμων, ἐλεημοσύνη, ἀνέλεος, ἀνελεήμων”, ed. Gerhard Kittel, Geoffrey W. Bromiley와/과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 486. [본문으로]
- Ibid. [본문으로]
- “The expression ποιεῖν ἐλεημοσύνην, which corresponds to the OT עשׂה צדקה, is common, as in Judaism (Mt. 6:1–4; Ac. 9:36; 10:2; 24:17); so, too, is διδόναι ἐλεημοσύνην, which corresponds to the Rabb. נתן צדקה (Lk. 11:41; 12:33).”
OT Old Testament.
Rabb. Rabbis,
Rudolf Bultmann, “ἔλεος, ἐλεέω, ἐλεήμων, ἐλεημοσύνη, ἀνέλεος, ἀνελεήμων”, ed. Gerhard Kittel, Geoffrey W. Bromiley와/과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 486. [본문으로]
- https://www.gallup.co.kr/gallupdb/reportContent.asp?seqNo=1378 [본문으로]
- https://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1110535.html [본문으로]
- https://www.sedaily.com/NewsView/29YENSIT1J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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