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3편 묵상: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 Meditation on Psalm 23.

성경 묵상

시편 23편 묵상: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 Meditation on Psalm 23.

바잇 카탄 2024. 6. 22. 01:34

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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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편 23편

 

 


 

 

시편 23편 히브리어 원문

 
 

 


 

 


 시편 23편은 하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아름다움을 준 시다. 특별히 이 시는 하나님과 함께 인생의 여정을 걷는 사람에게 고통 속에서도 안정된 휴식과 만족이 있다고 말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따라 그분과 동행하고 그분의 품 안에 안기는 사람은 현재의 상황과 무관하게 행복하다.
 
 그런 사람은 암묵적인 위협과 어려움 속에서도 궁극적인 악이 자신에게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고통을 맞았을 때에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잠잠히 인내할 수 있다. 이 때에 그가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현재의 비관적인 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 그동안 받았던 은혜, 그리고 앞으로 받게 될 축복이다.
 
 로마의 총독이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카르포스(Polýkarpos)에게 그리스도를 저주하고 부인하라고 제안하였다. 그러면 순순히 풀어주고 해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폴리카르포스는 그 제안을 거절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그분을 섬긴 것이 86년이다. 그 세월 동안 그분은 내게 잘못한 것이 단 한 가지도 없었다. 그러니 나를 구원하신 왕을 어떻게 저주할 수 있겠는가?”
 
 폴리카르포스는 지금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다. 그는 불타는 장작더미 위에서 고통스럽게 익어가며 죽어야 한다. 그런데 이 비극을 앞두고도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잘못한 것이 단 한 가지도 없다고 고백한다. 과연 그의 인생에서 악한 일이 단 한 가지도 없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이 고백을 하는 순간에도 그는 로마에 의해 결박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그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시선이 현재의 고통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받은 자비로운 은혜는 너무나 크기에 인생에서 부딪히는 악들은 마치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는 온갖 역경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또한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 할 때에 이 모든 악한 것들에서 구원을 받을 아름다운 미래를 바라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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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יְהוָ֥ה רֹ֝עִ֗י לֹ֣א אֶחְסָֽר׃)”



 먼저 시편 기자는 양을 돌보는 목자의 이미지를 가져와 여호와 하나님을 묘사한다. 여호와는 시편 기자에게 “나의 목자”, 곧 “로이(רֹ֝עִ֗י)”로 표현된다. 이것은 “먹이를 주다, 양육하다, 먹이다, 보살피다”의 뜻을 가진 동사 “라아(רעה)”의 분사형으로 “목자(shepherd)”라는 의미를 지닌 일반 명사처럼 사용되는 단어이다.
 
 히브리인들은 가나안에 정착하기 이전인 족장시대 때부터 유목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양을 치는 이미지는 그들에게 매우 친숙한 것이었다.[각주:1] 또한 고대 근동 지역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은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목자들은 양들의 필요를 채워주었으며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였다. 따라서 후에 “목자”는 한 도시나 국가를 통치하는 지도자를 비유하는 용어로 자리잡았다.[각주:2]
 
 특히 목자는 이스라엘이나 고대 근동 전체에서 왕을 나타내는 비유로 자주 사용되었던 것 같다.[각주:3] 유대인들은 양의 이미지를 자신들에게 적용하였으며 이스라엘 국가를 다스리는 하나님을 목자로 묘사했다. 양들은 온순하기 때문에 목자의 명령에 잘 순종하고 또 목자의 지도가 필요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목자들이 양을 보호하고 먹일 뿐 아니라 산으로, 계곡으로, 들판으로 이끌고 인도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시편 1편의 묵상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길”을 걸어가는(“할라크”) 이미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부르셔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마찬가지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나오도록 만들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좋은 지도자의 존재는 그들이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였다. 지도자가 악하면 그들은 불순종하였고, 지도자가 선하면 그들은 순종하였다.
 
 좋은 지도자, 곧 목자는 양들에게 어떤 것이 좋은 것이고 어떤 것이 해로운 것인가에 대해 잘 안다. 그래서 좋은 목자의 임무는 양들을 목적지까지 이끄는 여정 중에 양들이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 전반에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셨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시편 기자를 올바른 길, 곧 하나님의 길, 의인의 길(시 1편) 안에서 걷도록 보호하시고 예비하시며 이끄셨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진정 “목자”이시다.
 
 의로운 바른 길을 걷도록 인도하는 하나님의 보살핌 덕분에 시편 기자는 자신의 인생에서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 즐거워한다. 히브리어 “로 에흐싸르(לֹ֣א אֶחְסָֽר)”는 직역하자면 “내가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이다. 동사 “하싸르(חסר)”의 주요 의미는 “lack”, 혹은 『HALOT』이 제안하는 대로 “devoid”이다.[각주:4] 시편 기자가 이와 같이 하나님과의 길을 걷는 여정 중에 “부족한 것이 없을 것이다”라고 기대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선한 목자라는 그의 확고한 신념과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양과 목자의 비유를 배경으로 이 “로 에흐싸르”를 생각해보면 여기서 말하는 “부족한 것이 없을 것이다”란 광야 여행 중에 “어떤 필수품도 부족함이 없다”를 의미함을 알 수 있다.[각주:5] 하나님은 자신이 이끄는 양에게 결핍이 있을 때에 방치하는 무능력한 목자와는 다르다. 그분은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적절히 제공하시는 분이다. 특별히 예수께서 묘사하는 하나님 아버지는 자신의 자녀들을 일용할 양식으로 먹이시는 분이다(마 6:11; 눅 11:3).
 
 이러한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여기서 사용된 동사 “하싸르(חסר)”가 신명기 2장 7절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된 것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각주:6]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막 한 가운데에서 부족한 것이 없도록 이끄신 것으로 나온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공급을 따라 이동했다는 것을 상기하였을 것이다. 선한 목자인 하나님께서는 사막에서도 자신의 양들을 보호하시며 필요한 것들을 때에 맞게 적절히 제공하신다.
 
그러나 이것이 육체적 의미에서 결핍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목자이신 하나님의 인도는 의의 길을 걷는 것이기 때문이다(3절). 그러므로 여기서 “부족함이 없음”은 육체적으로도, 그리고 영적으로도 순수한 만족의 상태에 있음을 의미하는 시편 기자의 고백일 것이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בִּנְא֣וֹת דֶּ֭שֶׁא יַרְבִּיצֵ֑נִי עַל־מֵ֖י מְנֻח֣וֹת יְנַהֲלֵֽנִי׃)”



 이제 생존에 필수적인 것들을 공급받는다는 이미지는 양들이 사막의 건조함과 온갖 위협들로부터 안전하게 벗어나 있는 이미지로 더욱 깊어지고 구체화 된다. 푸른 초장(בִּנְא֣וֹת דֶּ֭שֶׁא)”은 양들이 거주하는 공간이 매우 이상적인 곳임을 암시한다. 고대 근동에서 “푸른 초장”의 이미지는 이상적인 환경을 묘사하는 상투적인 언어였다.[각주:7]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의 이상적 공간에 대한 소망과 관련이 있다는 점은 “초장”인 “나봐(נָוָה)”가 출애굽기 15장 13절의 “성결한 처소”의 “나붸(נָוֶה)”를 연상시킨다는 것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각주:8] 『BDB』에서는 “나붸”가 “나봐”와 같이 목초지, 곧 목자들이 거주하고 쉬는 장소와 동일시된다.[각주:9] 이것은 『HALOT』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거기서 “나봐”와 “나붸”는 모두 “grazing place”, 곧 “목초지, 방목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제안된다.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나붸”가 출애굽기에서 “주의 성결한 처소(נְוֵ֥ה קָדְשֶֽׁךָ)”를 의미하기 위해 사용된 것은 주목 할 만한 점이다.[각주:10] 이처럼 시편 기자가 바라보는 “푸른 초장”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곳에 양들을 누이시는 이미지는 이 장소가 휴식과 안정을 취하기 좋은 곳임을 강조한다. 라바쯔(רבץ)”는 이것이 단순히 웅크리거나 엎드리거나 누워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음을 전달하기 보다는 휴식을 위해 편안하게 누워있는 한 마리 양의 모습과 같음을 전달한다. 이 동사는 주로 지친 짐승이 쉬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각주:11]
 
 부드러운 안식과 기분 좋은 휴식의 분위기는 “쉴만한”으로 번역된 “메누홋(מְנֻח֣וֹת)”으로 인해 더욱 배가된다. 명사 “메누하(מְנוּחָה)”는 “쉴 곳, 휴식처”의 의미이며, 동사 “누아흐(נוח)”에서 파생되었다. “누아흐”는 성경에서 “안식”을 표현하기 위해 매우 자주 사용되는 동사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나할”; “נהל”)으로 인해 도착하게 된 곳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목초지일 뿐만 아니라 휴식할 수 있는 물가라는 점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시며 먹이시는 목자의 이미지와 중첩되어 그 의미가 더욱 풍성해진다.
 
 수천년 이상 소모되어 척박해진 토양과 적은 강수량의 건조한 기후는 고대 근동 지역의 대부분을 사막 지형으로 만들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모세의 인도 아래에서 유목생활을 했던 시나이(sinai) 반도의 광야 역시 이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양을 치는 목자는 양들의 생존을 위해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는 역량이 매순간 필요했을 것이다. 놀랍게도 현대의 베두인족(Bedouin)은 아직까지도 시리아의 사막이나 네게브 광야에서 양을 치는 일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얇게 흐르는 와디(wadi)나 작은 오아시스(oasis)를 발견하는 것은 목자나 양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될 것이다. 그곳 주변에 양들이 쉴 수 있는 푸른 목초지가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더운 기후와 갈증으로 지친 양들에게 목을 축이는 것과 시원한 곳에 누워서 쉬는 것보다 더 나은 보상이 과연 있을까? 목자이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우리를 이와 같은 영원한 휴식을 향해 안내한다.
 
 하나님의 인도는 우리를 다만 부족한 것이 없는 상태에 머물게만 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그것 이상의 가치 있는 것, 곧 참된 안식을 향한 것이다.
 

푸른 초장에 누워 있는 어린 양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נַפְשִׁ֥י יְשׁוֹבֵ֑ב יַֽנְחֵ֥נִי בְמַעְגְּלֵי־צֶ֝֗דֶק לְמַ֣עַן שְׁמֽוֹ׃)”


 1절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만족스러움을 말하고 2절에서 하나님이 완전한 안식으로 인도하심을 말했다면, 3절에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가에 대해 말한다.
 
시편 기자의 영혼을 “소생시킨다”, 곧 “예쇼벱(יְשׁוֹבֵ֑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영혼을 다시 회복시킨다는 의미이다. 또한 이것이 “슈브(שׁוב)”의 폴렐형인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 곧 회개의 의미 역시 함축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각주:12] 왜냐하면 동사 “슈브”는 “돌아오다, 회개하다”의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의해 다시 돌아오도록, 회복하도록 된 그 영혼은 또다시 하나님에 의해 “의의 길”로 인도함을 받는다(“יַֽנְחֵ֥נִי”; 얀헤니, 히필형). “의의 길”은 “마으글레 쩨덱(מַעְגְּלֵי־צֶ֝֗דֶק)”이다. 명사 “마으갈(מַעְגָּל)”은 “통로, 단단한 길, 마차길”을 의미한다. 『HALOT』은 이것을 “waggon track”, 혹은 “firm path” 등으로 제안한다. 이 길은 특별히 “안전한 길”, “다니기 수월한 길”[각주:13], 즉 마차나 병거가 다닐만한 넓고 곧은 판판한 대로를 뜻할 것이다.
 
 동일한 명사가 사용된 이사야 26장 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의인의 길을 평탄하게 하시는 것으로 나온다(“מַעְגַּ֥ל צַדִּ֖יק תְּפַלֵּֽס”). 의인의 길은 곧고 정직한 길이지만, 시편 125편에서 악인의 길은 굽어 있는 것으로 등장한다. 악인의 길은 함정이 가득한 위험한 길이기에 실족하기 쉽다. 반면에 의인의 길은 단단하고 평탄하며 완전 형통할 것이다. 이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이 의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특징이다(잠 4:26-27).
 
 참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이상한 길로 양들을 인도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어떤 길이 곧고 평탄하며 양들에게 위험하지 않은지를 잘 알고 계신다. 그래서 양들이 가장 수월하고 단단한 길 한 가운데로 통행하여 움직이도록 친히 지도하신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이렇게 인도하신다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 및 명예와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고대 사회에서 어떤 사람의 명예는 곧 그 사람의 이름의 가치 평가와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성품이나 명예를 모욕하는 일을 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고 시편 기자가 보기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를 의의 길로 지속적으로 인도하시는 것과 관련이 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גַּ֤ם כִּֽי־אֵלֵ֨ךְ בְּגֵ֪יא צַלְמָ֡וֶת לֹא־אִ֘ירָ֤א רָ֗ע כִּי־אַתָּ֥ה עִמָּדִ֑י שִׁבְטְךָ֥ וּ֝מִשְׁעַנְתֶּ֗ךָ הֵ֣מָּה יְנַֽחֲמֻֽנִי׃)”


 1-3절까지 시편 기자는 3인칭을 통해 여호와에 대하여 노래하였다. 그런데 4절에서 시편 기자는 2인칭을 통해 하나님께 직접 말한다: “당신이 나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있다고 감각하는 것은 고통과 환란의 순간에서 시작된다. 기분 좋은 상황에서 신에 대해 논하고 찬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고통과 위기의 시기에 자신이 처한 현실으로부터 눈을 돌려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 때문에 폴리카르포스가 불에 타 죽으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 안에서 안식을 찾은 것은 우리에게 큰 도전과 충격을 준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가 하나님의 존재, 그분의 임재를 선명하게 감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나님에 의해 변화된 영혼, 회복되고 소생되며 다시 돌아온 영혼은 의의 길을 걸으며 하나님과 동행한다. 이 영혼이 하나님과 함께 여행하는 삶의 과정에서 강력한 신의 임재를 느끼는 것은 중도에 길에서 이탈하여 하차하지 않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다.
 
 신이 나와 함께한다는 감각을 충분히 느끼고 그것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사실상 모든 만물과 현상과 작용에서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와 은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의 임재에 집어 삼킴을 당한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상황이 좋게 풀릴 때에나 상황이 나쁘게 흘러갈 때에나 모두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심을 느낀다. 이럴 때 그는 “나는 악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쉬브트카(שִׁבְטְךָ֥)”“미슈안테카(מִשְׁעַנְתֶּ֗ךָ)”이다. 어떤 학자에 의하면, 팔레스타인의 목자들은 들짐승을 물리치기 위한 것과 양떼를 인도하고 통솔하기 위한 것의 두 가지의 도구를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각주:14] 그 중 “쉐벳(שֵׁ֫בֶט)”은 아마 들짐승들을 공격하는 용도였을 것이다.[각주:15] 반면에 “미슈에넷(מִשְׁעֶ֫נֶת)”은 양들을 모으고 지도하는 용도였을 것이다.[각주:16]
 
 이 두가지 도구가 시편 기자를 “안위한다.” 동사 “나함(נחם)”은 본래 “위로하다, 공감하다”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롤프 제이콥슨(Rolf A. Jacobson)은 이 문맥에서 “나함”은 “용기를 주다”의 의미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말한다.[각주:17] 어떤 학자는 이 동사가 “공감하다”는 의미보다 “격려하다”의 의미에 보다 가깝다고 지적하기도 한다.[각주:18] 무엇이 되었든, 목자가 양들을 보호하고 지도하기 위해 충분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은 양들이 두려워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고 격려하는 요인이 된다.
 
 위기의 순간에도 시편 기자는 자신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하나님의 도구들을 바라본다. 그것들로 인해 그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나아갈 힘을 얻는다. 2인칭 대명사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향해 직접 말하는 시편 기자의 이러한 신앙 고백은 읽는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준다:

“또한 내가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갈 때에도, 나는 악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나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지팡이와 당신의 막대기가 나에게 용기를 줍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תַּעֲרֹ֬ךְ לְפָנַ֨י׀ שֻׁלְחָ֗ן נֶ֥גֶד צֹרְרָ֑י דִּשַּׁ֖נְתָּ בַשֶּׁ֥מֶן רֹ֝אשִׁ֗י כּוֹסִ֥י רְוָיָֽה)”


  “상”, 즉 “슐한(שֻׁלְחָן)”은 “식탁, 밥상”을 의미한다. 특별히 학자들은 여기서의 “슐한”이 축제와 관련된 분위기를 전달해준다고 말한다.[각주:19] 이 잔치는 아마도 최종적인 종말적 승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수들 앞에서 시편 기자의 머리에 기름이 부어지고 잔이 풍족하게 채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의의 길을 걸어가는 자신을 대적했던 많은 원수들이 패배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최종적인 승리를 얻는 미래를 그린다.
 
 하나님은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에 양들을 굶도록 방치하고 자신의 배만 불리지 않으신다. 그분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을 환대하시며 식탁을 베푸시고 친히 먹이신다. 하나님의 식탁에는 온갖 좋은 것들이 있으며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이것은 비단 종말적인 천국 잔치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도래했다고 선언하신 것과 같이, 기독교인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 중 하나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지상에서도 실현하고 확장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도 마 22:1-14와 눅 14:15-24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잔치가 베풀어지는 것으로 비유하셨다.
 
 초대 교회가 식탁을 중심으로 교제하고 식탁을 통해 가난한 자들을 도움으로써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했던 것은 어쩌면 이런 하나님 왕국의 특성을 실현하고자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매 주일 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성만찬 이후에 각자 집에서 가져온 음식들을 서로 나누어 먹는 것으로 교제를 시작하곤 했다. 이 때 부유한 자들은 더욱 좋고 많은 음식과 물품들을 가져와 가난한 성도들에게 나눠주었다.
 
즉 이들은 자신들의 물질적 요소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로운 베푸심을 이 땅에서 실현했던 것이다. 신자들이 이와 같은 관행을 “주님의 식탁”으로 불렀던 것은 가난한 자들이 이것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반면에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성도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보다 그들에게 희생과 노력을 강요함으로써 착취했다. 이들이 보여주는 열매의 악함은 이들이 하나님과는 다르게 선한 목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도들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삼으려고 했다(벧후 2:3).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거짓 목자들과는 다르다. 하나님은 부족할 것이 없도록 베풀어 주시고 보호하시며 참된 안식을 제공하신다. 하나님은 양들에게 풍성한 식탁을 차려 주시며 기름을 부어 높이시며 차고 넘치도록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
 
 만약 어떤 목자가 늑대가 왔을 때 양들을 버리고 혼자 도망간다면 이 사람은 삯군이며 좋은 목자가 아닐 것이다. 선한 목자는 이와 다르게 양들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심지어 이런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그렇게 할 것이다(요 10:11-15).
 
 이처럼 하나님의 인도는 기독교인들을 착취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을 넘치도록 채워주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אַ֤ךְ׀ ט֤וֹב וָחֶ֣סֶד יִ֭רְדְּפוּנִי כָּל־יְמֵ֣י חַיָּ֑י וְשַׁבְתִּ֥י בְּבֵית־יְ֝הוָ֗ה לְאֹ֣רֶךְ יָמִֽים׃)”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길을 걸어가는 시편 기자는 자신의 인생 전반에 걸쳐 두 가지가 존재했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선하심과 인자하심”, 곧 “토브(ט֤וֹב)”“헤쎄드(חֶ֣סֶד)”이다. “토브”는 성경에서 온갖 좋은 것들, 선한 것들을 지칭할 때 포괄적으로 쓰이는 단어이다. “헤쎄드”는 주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신실하심, 변하지 않는 고귀한 은혜와 사랑 등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마치 폴리카르포스가 죽기 전에 고백했던 것과 같이 말하고 있는 셈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인생에서 오직 좋은 것들만 주셨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가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경험을 한다고 해도 말이다. 이 구절이 “오직(אַ֤ךְ)”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시편 기자가 자신의 지나온 삶이나, 앞으로의 삶에서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만을 바라보겠다고 결심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매우 집요하게 이런 것들을 주시는 것으로 묘사한다. “따르리니”로 번역된 “이르드푸니(יִ֭רְדְּפוּנִי)”의 원형은 “라다프(רדף)”이며 이것의 의미는 “추적하다, 쫓다”이다. 이 동사는 성경에서 주로 원수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추격하여 핍박하는 상황에서 사용된다. 그래서 “라다프”는 “chase”, “hunt”의 의미로 보아야 한다.[각주:20] 학자들 역시 이 단어를 단순히 “따르다”로 번역하는 것은 이 용어가 가리키는 하나님의 목적의 집요함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라 지적한다.[각주:21]
 
 아마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시편 기자의 이 고백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던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집요하게 끝까지 추적하여 그분의 선하심과 은혜를 지속적으로 베풀어 오셨음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양들이 경로에서 이탈할 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추격하여 붙잡아 올바른 길로 데리고 오는 끈질긴 목자이다.
 
 이렇게 적극적인 개입과 인도를 받은 시편 기자가 도착하게 되는 최종 목적지는 바로 “여호와의 집(בֵית־יְ֝הוָ֗ה)”이다. “거하리니”로 번역된 “샤브티(שַׁבְתִּ֥י)”가 “돌아오다”를 의미하는 “슈브(שׁוב)”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거주하다”를 의미하는 “야샤브(ישׁב)”에서 나온 것인지 모호하다. 학자들도 이 문제가 하나를 고르기 어려운 복잡한 문제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을 따르든 의미에서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각주:22]
 

 



 
 선한 목자는 사막에서 양들의 부족함을 채워주며 보호하고 기르며 이끌어 안전한 오아시스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따라 의의 길을 걷는 인생이 이와 같은 것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의 삶은 온통 그분의 “토브”와 “헤쎄드”로 가득 차 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사람의 뒤를 계속해서 쫓아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사람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99마리의 양을 들에 두고 1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집요한 목자처럼 말이다(눅 15:4-7).
 
 때때로 이 사람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 때에는 마치 자신이 이미 죽은 사람처럼,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버려진 사람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 때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 하고 부르짖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하나님은 이 사람이 길을 벗어나도록 방치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토브”와 “헤쎄드”를 보내신다. 이 사람이 눈치 채든 그렇지 못하든 상관 없이…
 
 그렇게 이 사람은 하나님의 “토브”와 “헤쎄드”의 괴롭힘을 받으면서 의인의 길을 걸어간다. 그리고 그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었을 때, 그의 눈 앞에는 다름 아닌 하나님이 서 계신다. 그는 하나님의 집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하나님의 지팡이를 따라, 하나님의 공급을 받아 걸어가는 긴 여정의 끝에서, 그는 하나님과 자신이 동행한 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함이었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진정한 안식과 기쁨과 행복을 느낀다. 그의 연약함, 부족함, 결핍, 그 모든 것을 따뜻하게 끌어 안아주는 하나님의 팔이 있다. 그가 하나님을 원망하며 욕할 때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잡아주던 손이 있다. 그가 이상한 길에 들어섰을 때에 잠잠히 뒤를 따라와주던 발이 있다.
 
 이제 문득 그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생각해보니, 좋든 나쁘든 그는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를 따라다니시며 먹이시고 기르시며 가르치시고 사랑하셨다. 그가 힘들 때에도 말이다.
 
 그렇다면 그의 인생의 모든 날들이 사실은 전부 축복 받은 순간들이었던 것은 아닐까? 폴리카르포스가 고백한대로, 그 온 세월동안 그분은 이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단 한 가지도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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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경문화배경사전』, 1023. [본문으로]
  2. Craig S. Keener,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II, trans. Ok Yong Lee, Christian Literature Center, 2018, 2125. [본문으로]
  3. Nancy L. deClaisse-Walford, Rolf A. Jacobson and Beth LaNeel Tanner, The Book of Psalms, trans. Dae I Kang, Revival & Reformation Publishing, 2019, 300. [본문으로]
  4. L. Koehler & W. Baumgartner, 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STUDY EDITION VOLUME I, trans. ed. M. E. J. Richardson, BRILL, 2001, 338. [본문으로]
  5. Nancy L. deClaisse-Walford, Rolf A. Jacobson and Beth LaNeel Tanner, op. cit., 301. [본문으로]
  6. Peter C. Craigie,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19 Psalms 1-50, trans. Seok Tae Son, Solomon Christian Press, 2000, 278. [본문으로]
  7. Nancy L. deClaisse-Walford, Rolf A. Jacobson and Beth LaNeel Tanner, op. cit., 302. [본문으로]
  8. Peter C. Craigie, op. cit., 278. [본문으로]
  9. נָוֶה n.m. abode of shepherd or flocks, poet. habitation — 1. a. abode, of sheep; of people under fig. of sheep; of camels. b. abode of shepherds. c. = meadow, in fig. of Ephr. planted (שָׁתוּל) as tree. 2. habitation, usu. of country, or of domains in the country (chiefly poet.);
     
    n. nomen, noun
     
    m. masculine
     
    fig. figurative
     
    fig. figurative
     
    Richard Whitaker기타, The Abridged Brown-Driver-Briggs Hebrew-English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from A Hebrew and English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by Francis Brown, S.R. Driver and Charles Briggs, based on the lexicon of Wilhelm Gesenius (Boston; New York: Houghton, Mifflin and Company, 1906). [본문으로]
  10. L. Koehler & W. Baumgartner, op. cit., 678. [본문으로]
  11. Ibid., 1181. [본문으로]
  12. Nancy L. deClaisse-Walford, Rolf A. Jacobson and Beth LaNeel Tanner, Ibid. [본문으로]
  13. Ibid. [본문으로]
  14. Peter C. Craigie, op. cit., 279. [본문으로]
  15. L. Koehler & W. Baumgartner, op. cit. II, 1388. [본문으로]
  16. L. Koehler & W. Baumgartner, op. cit. I, 651. 반면에 크레이기(Craigie)가 소개하는 파워(Power)는 이것을 각각 반대로 설명한다. WBC의 해당 부분을 보라. [본문으로]
  17. Nancy L. deClaisse-Walford, Rolf A. Jacobson and Beth LaNeel Tanner, op. cit., 304-305. [본문으로]
  18. L. Koehler & W. Baumgartner, op. cit. I, 688. [본문으로]
  19. L. Koehler & W. Baumgartner, op. cit. II, 1521. [본문으로]
  20. L. Koehler & W. Baumgartner , op. cit. II, 1192. [본문으로]
  21. Nancy L. deClaisse-Walford, Rolf A. Jacobson and Beth LaNeel Tanner, op. cit., 305. [본문으로]
  22. Ibid., 30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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