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시편 17장 8절
시편 기자는 지금 하나님을 향해 간청하고 있다.
"당신은 나를 지켜주소서!"
"샤므레니(שָׁ֭מְרֵנִי)"는 이것을 잘 보여준다. 동사 "샤마르(שׁמר)"는 "지키다, 보전하다"의 의미이다. 영어로는 "keep"과 가장 잘 부합할 것이다.
이제 이 "샤마르"가 "샤므레니"가 된 것은 2인칭 명령형("당신은 지켜라!")에 1인칭 대명 접미사("나를")가 붙은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나를 지켜라!"라고 직역할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과 간청, 이것이 정말 직접적으로 화자의 표현을 통해 분출된다.
시편 기자가 감히 하나님께 명령형 동사를 통해 간청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이처럼 당당히 하나님께 요청할 수 있는 배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5절에서 언급된 것 때문이다.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지 아니하였나이다(시 17:5)" 그리고 3절에서 하나님에 의해 시편 기자가 시험을 받았다고 말한다.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나를 권고하시며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으니...(시 17:3)"
시편 기자의 이런 당당한 고백은 자신이 죄를 하나도 짓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거룩과 순결 그 자체이신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비하면 그는 아직도 한참이나 부족하다. 그러나 그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현재 당하고 있는 이 상황이 자신이 하나님께 기대할 수 있는 상황과 결코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시편 기자의 신학에 의하면 부당하며 정의롭지 않다.
욥이 자신이 받는 고통에 대하여 취한 태도를 상기하라. 그는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은 완전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받았던 고통이 합리화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욥보다 악한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욥의 상황이 더욱 안 좋았기 때문이다. 욥은 자신이 받았던 부조리를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은 의로웠다.
따라서 시편 기자 역시 욥의 입장에 서 있다. 그는 당당히 하나님께 이러한 부조리를 이제 시정해 달라고 요구한다. 시편 기자가 완전한 인간인 것은 아니다. 그 역시도 부족하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당하는 이 고난을 받을 만큼 그가 악하지는 않다. 오히려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삶을 살아가는 길을 배우는 제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지켜주셔야 한다.
"눈동자, 곧 눈의 딸과 같이!"
"케(כְּ)"는 "~처럼", "~와 같이", 영어로는 "like"의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를 보호해주셔야 하는데, 그가 원하는 보호는 어떤 것인가? "케"는 이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겠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시편 기자의 "마치 ~처럼 지켜달라!"라는 대목에서 "케" 이후에 등장할 비유에 마땅히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눈동자 같이(כְּאִישׁ֣וֹן)"이다. "이숀(אִישׁוֹן)"은 "눈동자"를 뜻한다. 흥미롭게도, 로고스 소프트웨어 사전에서 이 단어는 "어린아이"의 의미도 갖고 있다고 한다. 「HALOT」은 이것이 "남자"를 뜻하는 "이쉬(אִישׁ)"와 연관성이 있으며, "the little man (in the eye)"의 용례도 있다고 소개한다.
그래서 뒤이어 등장하는 "밧 아인(בַּת־עָ֑יִן)"은 "이숀"을 동어 반복한 것일 것이다. "밧(בַּת)"은 "딸(daughter)"을 의미하며, "아인(עָ֑יִן)"은 "눈(eye)"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밧 아인"은 "눈의 딸"이라고 직역할 수 있다.
"이숀", 즉 눈동자를 고대 히브리인들이 어떤 식으로 인식했는가를 여기서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눈동자는 고대 동양권에서 한 사람의 정신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기관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정신이 총명한 사람은 눈 빛을 통해 그것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인간의 몸의 부분 중에서 눈동자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그래서 그것은 보호받아야 한다. 마치 우리가 위험이 닥칠 때 사랑하는 자녀를 먼저 보호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눈동자는 눈 전체의 입장에서 "딸"이며 "어린아이"이다.
"눈동자, 곧 눈의 어린 딸처럼 나를 보호하소서!"라는 시편 기자의 부르짖음은 겉으로는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어린아이와 같이 유약한 자기 자신에 대한 고백이 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어른에게 도피할 수밖에 없는 처지임을 고백한다.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는 모든 상황에서 여전히 어린 아이나 다를 바가 없다.
결론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노출되는 무수히 많은 스트레스 상황들을 생각해 보라. 만약 누군가가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받을만하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한 사람의 고통에 대해 깊이 숙고해보지 않은 무정하고 빈약한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스트레스들은 내 생각에 매번 합당하게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생계를 위해 이 같은 것들을 겪어야만 한다.
때론 방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불 깊숙한 곳으로 숨어 있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어른처럼 굴어라!"라고 훈수를 두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주께서는 나의 이런 "어린아이 같음"을 부드럽게 포용하신다. 나의 고민들을 들으시고 나의 곁에 함께 있어주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나의 이런 고민들에 공감해 주신다.
심지어 그분은 말로만 공감해 주시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고통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생을 살아가셨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의 삶의 고통을 잘 이해하고 공감하는 이 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간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분의 자녀인 우리들을 보호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 속에서 언제나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눈동자, 어린 자녀를 지키는 것과 같이 나를 보호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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