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장 10절
이사야서의 이 본문은 (이사야서를 3권으로 분리하는 성서학의 이론을 차치하고서라도) 이스라엘의 국가적 그리고 영적인 실패와 이방 제국들에 의한 점령 및 파괴 등을 바라본다. 성전에 하나님을 모시고 예배 드리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있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언제나 일하신다는 생각과는 다르게, 국가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 왕국은 앗시리아에게, 남유다 왕국은 바빌로니아에게 차례로 멸망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과연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는 것인지, 토라나 선지자들이 말한대로 하나님이 정말 자신들을 살피고 보호하고 있는 것인지, 회의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목격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멸망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졌다고 느꼈을 것이다. 어쩌면 어떤 히브리인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모세나 선지자들의 망상에 불과하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이제 이사야서 저자는 이런 상황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직 버리지 않으셨으며, 그들을 향한 언약을 굳게 지키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며,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신다. 이사야서 저자가 보기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제껏 이스라엘을 위해 여러 의로운 일들을 해 오셨다는 사실로 인해 설득력을 얻는다.
이것은 비단 국가를 잃은 슬픔에 충격을 먹은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사실 유대인들에게 혈통을 기준으로 민족성을 따지는 것은 현대에 와서는 거의 무의미하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중 열지파는 북이스라엘 왕국을 형성한 뒤에 국가가 멸망하고 나서 여러 민족들과 형통이 뒤섞였다. 예수님 당시에 그들은 사마리아인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잦은 학살과 개종 등으로 현재는 팔레스타인 및 이스라엘 내에서 겨우 800명 남짓의 소수 민족이 되었다. 1
남유다 왕국을 잇는다는 유대인들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로마 제국 시기에 이미 “유대인”이란 유다 지파의 혈통 민족을 뜻한다기 보다는 유다 땅에 사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것이었다. 후에 로마가 유대인들의 결집을 막기 위해 이 지역의 명칭을 “팔레스티나”로 변경하면서 이들의 정체성은 상당히 약화되었다. 이후 이들은 전세계에 흩어졌으며 수천년에 걸쳐 혼혈화가 상당히 진행되었다. 현대의 유대인들은 혈통을 따지는 것이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유대교를 중심으로 한 신앙이다. 현대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유전적으로 20% 정도가 유대인들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2그러나 이들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로 불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유대인들과 신앙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사야서 저자의 “이스라엘과의 언약”은 어떻게 된 것인가? 현대의 국가 이스라엘은 크게 보수적인 “orthodox Jew”, 진보적인 “reformed Jew”, 그리고 무신론자들로 구성된다. 이런 상황의 국가 이스라엘이 이사야서 저자가 바라본 언약 관계가 유지되는 이스라엘의 실체로 여기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극보수 정통파 유대교 종파 “하레디”들 중 일부는 현대의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문을 국가 이스라엘에 한정 지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 곧 인종과 국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을 진정으로 예배 드리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특별히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를 믿고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곧 새언약의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 모든 신실한 자들에게 전해지는 메시지로 이해될 수 있다.
이스라엘의 멸망,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등을 지켜보며 히브리인들이 충격과 공포 그리고 절망에 빠졌던 것처럼, 우리 기독교인들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버려졌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을 때도 있을 것이다. 특별히 시편 기자에게는 이런 상황들이 영적인 핍박과 소외로 묘사된다. 악인들은 의인들을 둘러 싸고 그들을 말로써 모욕하고 조롱한다. 악인들이 주로 말하는 것은 ‘너희들이 처한 상황을 봤을 때 너를 구원할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바벨론 포로기의 유대인들이 겪은 현실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기독교인들도 이와 같은 일들을 경험한다. 사람들은 때로 우리들이 만나게 되는 악한 일들을 보면서 우리를 위로해주기 보다 조롱하고 비웃으며 비방하기 바쁘다. 그래서 종종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고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느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충격과 공포와 좌절을 경험한다.
이 본문은 그런 사람들을 위한 위로와 희망의 말씀이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멸망했고 히브리인들은 강대국들로 잡혀 갔지만, 하나님께서는 고레스 대왕을 통해 그들을 구원하신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성전을 더럽혔을 때에는 마카비 형제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독자, 메시아 예수를 보내셔서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사랑의 제국, 곧 하나님의 제국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제국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통해 확장되고 이루어지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을 봤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버리셨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셨으며 앞으로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소망을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 안에서 위로와 안식을 얻을 수 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אַל־תִּירָא֙ כִּ֣י עִמְּךָ־אָ֔נִי
אַל־תִּשְׁתָּ֖ע כִּֽי־אֲנִ֣י אֱלֹהֶ֑יךָ)
부정어 “알(אַל)”과 2인칭 희구법 동사의 결합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져야 할 자세가 제시된다. 그것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함”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동사 “야라(ירא)”와 “샤타(שׁתע)”를 통해 동일한 의미를 두 번 반복하는 것으로 충분히 강조된다.
“알”과 결합된 두번째 동사 “샤타”는 개역한글 번역에서 “놀라지 말라”로 번역되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이 동사가 『BDB』에서 “응시하다”를 의미하는 어근 “샤아(שׁעה)”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가릿어와 페니키아어에서 “두렵다”라는 뜻의 어근이 발견되면서 이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것이 “두렵다”의 “샤타”라는 것을 인정한다. 3『HALOT』에서도 이사야 41장 10절의 이 동사의 의미를 “to be afraid”으로 제시한다. 4그러므로 본문의 의미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두려워하지 말아라…”인 셈이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왜냐하면”의 “키(כִּי)”가 이끄는 절에 의해 제시된다. 그것은 “키 임카 아니(כִּ֣י עִמְּךָ־אָ֔נִי)”와 “키 아니 엘로헤카(כִּֽי־אֲנִ֣י אֱלֹהֶ֑יךָ)”이다.
“키 임카 아니”, 곧 “왜냐하면 내가 너와 함께(있기 때문이다)”는 성경에서 매우 자주 등장하는 메시지다. 그것은 이사야가 아하스 왕에게 “임마누엘(עִמָּ֥נוּ אֵֽל)”이라 말한 것과 같다(사 7:14). 그리고 모세가 홍해를 가를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한 사실이기도 하다(출 14:13-14). 후에 모세는 여호수아에게도 동일한 선포를 한다(신 31:8). 5물론 모세 역시 하나님께 동일한 메시지를 받았다(출 3:12). 그리고 후에 이것은 예수님에 의해 다시 한 번 반복된다(마 28:20). 6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뒤,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대 땅에서 쫓겨나 바벨론에 잡혀 갔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과 함께 계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이 어떤 국가, 어떤 장소,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느냐 때문에 그들과의 관계를 끊으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의 신실하심은 시간이나 공간에 구애 받지 않는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에 반드시 예루살렘의 시온산에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아니면 반드시 세겜의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하나님 아버지께 언제든지 그리고 어느 장소에서든지 예배를 드릴 수 있다(요 4:21).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대 땅에서 국외 추방되어 바벨론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임카 아니”라고 선언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바로 그 장소가 예배의 장소가 된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것을 자각하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신다.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의 상황과 무관하게 언제나 함께 있다는 사실은 더욱 강력한 메시지, 곧 “키 아니 엘로헤카”, “왜냐하면 나는 너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인해 보다 강조된다. 특별히 이 선언은 출애굽기 20장 2절과 신명기 5장 6절 등에서 언약을 맺는 것과 관련하여 등장한다. 하나님의 언약은 시대가 변하는 것, 장소가 달라지는 것, 섬기는 교회를 옮기는 것, 혹은 심지어 한 국가, 한 문명이 멸망하는 것을 뛰어 넘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로가 된 상황에서도, 혹은 로마 제국 안으로 편입된 상황에서도 그분의 언약은 취소되거나 좌절되지 않는다.
하나님 편에서의 “나는 너의 신이다”라는 선언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주변에서 사람들이 뭐라고 비방하든지, 그것과 무관하게 우리와 언제나 함께 계신다. 이런 이유 때문에(“키”), 하나님의 백성들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אִמַּצְתִּ֙יךָ֙
אַף־עֲזַרְתִּ֔יךָ
אַף־תְּמַכְתִּ֖יךָ
בִּימִ֥ין צִדְקִֽי׃)
“~하리라”의 미완료처럼 번역된 세 동사는 사실 모두 완료형이다. 개역한글의 “~하리라”는 번역은 이 동사들의 완료형을 “예언적 완료”, 곧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으로 제시되는 완료형으로 이해하였음을 보여준다. 반면에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시간과 상관 없는 현재의 사실을 나타내는 완료형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아니면 과거에 시작되어 현재도 지속되고 있는 완료의 의미로도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 7
어느 의미로 이것을 해석하든,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행하시는 은혜는 매우 확고한 것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너무나 확실하게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완료형으로 표현된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시간과 무관하게 지금 현재의 상태에서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완료형으로 표현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과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쉬지 않고 지속적으로 우리를 힘 있게 만드시고 있어왔기 때문에 완료형으로 표현된 것일 수 있다.
세 동사, 곧 “강하게 하다”의 “아마쯔(אמץ)”, “도와주다”의 “아자르(עזר)”, “붙들다, 지키다”의 “타막흐(תמך)”는 공포와 좌절을 느끼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경험할, 경험하는, 경험해 오고 있는 은혜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내가 너를 강하게 하였다.”,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내가 너를 붙들었다.”는 선언을 통해 우리는 이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 그리고 “너의 하나님 되심”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가를 확인한다. 그것은 한 사람을 흔들리지 않고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다. 문제를 당장에 제거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만났을 때 이겨내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작업은 한 사람을 강한 용사로 육성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불변화사 “아프(אַף)”를 통해 하나님의 이런 행동들이 점점 누적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아프”는 개역한글 등에서 “참으로”, “indeed”와 같이 번역되었지만, 사실은 “also, even”의 의미가 더 강하다. 8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것을 “moreover”로 번역하기도 한다. 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과 같다: “내가 너를 강하게 만들었다. 그것에 더하여, 심지어 나는 너를 도와주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나는 너를 붙들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 그리고 하나님 되심의 의미이다. 그리고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특별히 “내가 너를 붙들었다”는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손”에 의해 행해진다. 10여기서 “의로움” 곧 “쩨덱(צֶ֫דֶק)”은 윤리적인 의로움을 말하기 보다 “옳은 것”, 즉 “righteousness”를 뜻한다. 11유대인들의 영어 성경인 『Tanakh』에서는 이것을 “victorious”로 번역한다. 12그러므로 이 단어는 문맥에 따라 “의로움” 외에도 “성공”, “옳음” 등을 뜻할 수 있을 것이다. 13역사를 이끌어가는 하나님의 오른손은 언제나 옳은 방향을 보여주며, 언제나 패배하지 않고 승리한다. 그런 손으로 붙드는 대상은 매우 견고하고 안정적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오른손의 도움을 얻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결론
이스라엘 국가의 멸망과 함께 제기되는 하나님의 약속의 신뢰성에 대한 문제는 필연적으로 국가, 인종, 지역, 시대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흔들리지 않는 “함께 있음”을 향해 나아가게 만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독교인이라면 예수를 믿는 자들은) 그들이 처해 있는 외부적 상황에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라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개인이 겪는 현실적인 문제나 영적인 실패 등을 모두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의 슬픔, 나의 아픔에 무관심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 곧 하나님이 나와 언제나 함께 계신다는 것과 동시에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다시 상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의 방식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문제를 단박에 사라지게 만들기 보다는, 우리가 그것을 겪을 때에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방식으로 일하시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 사도 바울은 매우 남성다운 군사적인 용어로 그리스도인들을 묘사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제국의 군사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떤 문제 상황을 회피하기 보다, 그것에 실존적으로 맞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들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강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 https://namu.wiki/w/%EC%82%AC%EB%A7%88%EB%A6%AC%EC%95%84%EC%9D%B8 [본문으로]
- 나는 이것을 이익상 목사의 팟캐스트 ‘성서 비블리아’에서 들었다. [본문으로]
- John Oswalt, The Book of Isaiah chapters 1-39, trans. Yong Jung Lee, Revival & Reformation Publishing, 2015, 99-100. John D. W. Watt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25 Isaiah 34-66, trans. Cheol Seong Kang, Solomon Press, 2002, 190. [본문으로]
- L. Koehler & W. Baumgartner, 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STUDY EDITION VOLUME II, trans. ed. M. E. J. Richardson, BRILL, 2001, 1671. [본문으로]
- John Oswalt, The Book of Isaiah chapters 40-66, trans. Yong Jung Lee, Revival & Reformation Publishing, 2016, 105. [본문으로]
- John D. W. Watt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25 Isaiah 34-66, trans. Cheol Seong Kang, Solomon Press, 2002, 197. [본문으로]
- John Oswalt, The Book of Isaiah chapters 40-66, trans. Yong Jung Lee, Revival & Reformation Publishing, 2016, 100. [본문으로]
- L. Koehler & W. Baumgartner, 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STUDY EDITION VOLUME II, trans. ed. M. E. J. Richardson, BRILL, 2001, 76. [본문으로]
- John Oswalt, The Book of Isaiah chapters 40-66, trans. Yong Jung Lee, Revival & Reformation Publishing, 2016, 100, 그리고 106. [본문으로]
- ”아자르티카(עֲזַרְתִּ֔יךָ)”의 자켑 카톤과 “테막흐티카(תְּמַכְתִּ֖יךָ)”의 티프하 엑센트는 이 둘이 서로 동등하게 분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본문으로]
- Ibid. [본문으로]
- Fear thou not, for I am with thee, be not dismayed, for I am thy God; I strengthen thee, yea, I help thee; yea, I uphold thee with My victorious right hand.
Jewish Publication Society of America, Torah Nevi’im u-Khetuvim. The Holy Scriptures according to the Masoretic text. (Philadelphia, PA: Jewish Publication Society of America, 1917), 사 41:10. 물론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너무 지나친 의미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 John D. W. Watt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25 Isaiah 34-66, trans. Cheol Seong Kang, Solomon Press, 2002, 19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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