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2장 4절.
최근 바로세우기 카페를 방문하는 분들은 거기서 강한 자들의 강한 모습들을 많이 목격했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의 이번 묵상은 바울의 약한 모습에 대한 것이다.
우리 모두가 바울과 같이 약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고 소망한다.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ἐκ γὰρ πολλῆς θλίψεως καὶ συνοχῆς καρδίας ἔγραψα ὑμῖν διὰ πολλῶν δακρύων,)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쓴 편지의 내용을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학자들은 이 편지가 아마도 현재는 남아있지 않은, 디도의 손으로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일 것이라 추측한다. 1고린도후서 7장 6-8절에 의하면 그 편지의 내용은 상당히 엄숙하고 심각했던 것 같다. 학자들은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이 알려지지 않은 편지를 대개 “severe letter”로 명명한다.
헬라어 “에크(ἐκ)”는 이 “severe letter”가 나오게 되는 바울의 심중의 감정 상태를 설명해준다. 그것은 “환난”, 곧 “뜰립세오스(θλίψεως)”와 “애통하는 마음”, 곧 “쉬노케스 카르디아스(συνοχῆς καρδίας)”이다. 이것은 바울이 교린도 교인들의 죄악을 훈계하는 편지를 쓰면서 매우 고통스러운 감정을 느꼈음을 보여준다. 그 마음은 바울에게 환난을 당하는 것 같았고, 사방에서 압박을 당하는 것 같았다.
헬라어 “쉬노케(συνοχή)”가 여기서 사용된 것은 이러한 바울의 심리 상태를 잘 말해준다. 이 명사는 동사 “쉰에코(συνέχω)”에서 나왔다. “쉰에코”는 “함께”를 의미하는 “쉰(συν)”과 “가지다, 잡다”를 의미하는 “에코(έχω)”가 결합된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hold together”의 의미를 기본적으로 가진다. 2그래서 이 동사는 “억압, 압박, 실망, 괴로움, 곤고함”을 주는 상황에서 주로 사용된다. 3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편지를 쓸 때에 이와 같은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고 고백하는 것은 그가 고린도 교인들을 얼마나 소중하고 애틋하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는 어째서 이런 격정적인 슬픈 감정을 품은 채 심각한 내용의 편지를 적어야만 했는가?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 중 일부가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고 바울을 모욕하며 조롱하는 자들에게 동조하였기 때문이다. 아마 그것은 두 번째 방문에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고린도전서 서신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뒤에 바울은 두 번째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방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카리스마 있는 강력한 리더형의 모습 보다는 유약하고 따뜻한 모습으로 나아갔던 것 같다.
학자들은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이 바울의 이런 부드러운 모습을 보고 오히려 이것은 약한 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그를 공개적으로 모욕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4고린도후서 10장 1절에서 바울은 이 때 있었던 일을 은연 중에 암시한다. “너희를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즉 고린도 교인들이 보기에 바울은 편지의 내용으로는 권위 있었지만, 직접 만나보니 ‘별거 아닌 사람’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20-21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세 번째 만날 때에 또다시 이런 공개적 망신이 있을까 하여 두려워한다.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 하고…”
이런 상황 속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죄와 교만에 대해 권면하는 심각한 내용의 편지를 쓰는 바울의 마음은 결코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편지를 쓰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 전치사 “디아(διὰ)” 뒤에 “많은 눈물”, 곧 “폴론 다크뤼온(πολλῶν δακρύων)”의 속격이 오는 것으로 이 슬픔의 상황이 강조된다. 전치사 “디아”는 뒤에 이 같은 속격절이 올 때에 “~통하여”(through)의 의미를 가진다. 이 본문의 이러한 표현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심각한 내용의 편지를 쓰는 중에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미지를 전달한다. 편지의 내용은 엄숙하고 심각했지만, 그것은 눈물을 통하여 탄생했던 것이다.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것이 아니요 (οὐχ ἵνα λυπηθῆτε,)
바울의 편지를 받은 고린도 교인들은 큰 근심에 빠졌다. 그리고 이 근심은 디도를 통해 바울에게도 알려진 것 같다(고후 7:7).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회개하는 근심을 듣고 어느 정도 위로를 받았지만, 동시에 엄청난 후회를 했던 것 같다(고후 7:8). 고린도 교인들이 근심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울의 마음을 아마도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근심하는 것을 원하는 마음에서 편지를 보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인들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얼마나 컸던 것인지, 바울은 심지어 그들이 다시 근심하게 될까봐 두번째 방문 이후 다시 찾아가는 것을 주저했을 정도였다(고후 1:23). 그리고 바울 스스로도 혹 다시 고린도 교회에 방문하더라도 근심 안에서 그들을 찾아가지 않겠다고 결단하였다(고후 2:1). 바울의 목회 활동의 핵심 목표는 근심을 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신자들이 기쁨을 느끼게끔 도와주는 것이었다(고후 1:24). 그리고 바울 역시 이 과정에서 기쁨을 느끼는데, 왜냐하면 바울의 기쁨은 고린도 교인들의 기쁨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고후 2:3).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편지를 읽고 보인 반응은, 사실 바울이 기대한 것을 훨씬 넘어선 것이었다. 물론 그 근심이 그들의 회개를 이끌어낸 것에 대하여 바울은 이후에 긍정적으로 평가하였지만(고후 7:8), 그들의 마음이 근심하고 낙심한 것에 대해서는 바울은 가슴 아파했다.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ἀλλὰ τὴν ἀγάπην ἵνα γνῶτε ἣν ἔχω περισσοτέρως εἰς ὑμᾶς.)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그의 진심은, 사랑으로 가득 찬 그의 여린 마음이다. 어떤 면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직접 대면했을 때는 약하다’라고 평가한 것은 옳다. 왜냐하면 그는 고린도 교인들을 마주할 때마다, 제아무리 그들의 죄가 눈 앞에 보일지라도, 한 없이 녹아내려 연약한 상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을 평가하고 재판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사랑으로 감싸주고, 넘어가주고 싶어한다.
학자들은 바울이 이 대목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어순을 사용함으로써 그의 사랑의 마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5본래 문법 구조상 “사랑”을 의미하는 “텐 아가펜(τὴν ἀγάπην)”은 접속사 “히나(ἵνα)” 뒤에 위치하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대격인 “텐 아가펜”은 “히나” 절 안에 있는 동사 “그노테(γνῶτε)”의 목적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히나” 절 안에 있는 목적어 “텐 아가펜”을 사실상 문장 앞으로 빼내어 전면에 배치하고 있다. (“τὴν ἀγάπην ἵνα γνῶτε”)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먼저 읽게끔 만든다. 그는 일종의 도치법을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 헬라어 문장을 읽는 사람은 누구든지 (필자 역시 그러했는데) 낯선 구조로 인하여 잠시 멈추고 “사랑”이라는 단어에 집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부사 “페리스테로스(περισσοτέρως)”는 이 사랑의 크기를 (혹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마음의 크기를) 표현해준다. 이것은 “더욱, 심히”를 의미하는 “페리소스(περισσῶς)”의 최상급 표현으로 간주된다. 6그래서 학자들은 이 단어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강력한 뉘앙스로 제안한다:
“very intensely”, “extremely abundantly”, “all the more”
그러므로 바울의 사랑은 매우 특별한 사랑이다. 그 사랑은 “the very intense love”이고, “the extraordinary affection”이며, 헬라어 “에이스 휘마스(εἰς ὑμᾶς; 너희를 향하여)”와 결합했을 땐 “especially for you”, 그리고 “my special love for you”이다. 7혹은 이에 대해 “the abundant love”, “the more than ordinary love”, “the exceptional love”, “the love that I have specially for you”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8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이러한 사랑을 고린도 교인들이 알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편지를 썼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함으로써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현재 가진 근심이 빨리 사라지길 바라는 것 같다. 심지어 그는 고린도 교인들 중 죄를 많이 지어 가장 많이 근심하고 있는 사람을 차라리 용서해주라고 제안하기까지 한다(고후 2:7). 아마 이 대목에서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들을 향한 바울의 애틋한 사랑의 심정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결론
바울의 따뜻한 태도는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하며 사랑으로 감싸주는 그의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바울은 단단하고 차가운 심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연약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을 정당하게 지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들이 힘들어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진심으로 가슴 아파하고 번민했던 사람이다. 고린도 교인들이 (비록 범죄하였지만) 근심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울의 양심을 힘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근심하지 않기를 바란다. 바울이 원하는 것은 그들이 기쁨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쓴 편지의 내용이 그들을 근심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의 진심은 그들을 향한 가득 차서 넘치는 사랑이다. 그 사랑 때문에 바울은 그들이 근심할 때 함께 근심하고, 그들이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한다.
바울은 쉽게 울고 쉽게 아파하고 쉽게 사랑하고 쉽게 즐거워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과 같이 고린도 교인들이 죄를 지은 자들을 그와 같이 용서하여 사랑을 나타내길 원한다(고후 2:7-8). 그런데 바울의 이 모습은 냉정하고 공격적이고 차가운 사람이 보기에 연약해 보였을 것이다. 어쩌면 바울은 강단 없고, 쉽게 흔들리는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바울의 연약한 모습은 예수님을 닮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약한 모습이었기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이다(고후 13:4).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진정한 삶의 양태는 약한 모습이다. 그래서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바울은 기뻐한다. 그는 약할 그 때에 강하다(고후 12:10). 그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약한 모습을 현재 닮았다면, 그는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강한 자로 드러났듯이 종말에 강한 자로 드러날 것이다(고후 13:3-4).
그래서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눈물로 만들어진 편지를 보내고, 마음이 짓눌리며 아파하고 탄식하며 근심하여 슬퍼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강한 모습이 아니다. 사랑의 진정한 정체는 약한 모습이다. 그리고 때론 사랑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목적보다도 우선되어야 할 수도 있다.
따뜻한 말 한마디, 배려 하나가 논리 정연하고 체계적인 논증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때가 많다. 약한 모습, 사랑의 모습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는 이것을 아주 잘 보여준다. 로마 제국은 칼과 피의 지배로 확장되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섬김과 돌봄과 관심과 사랑으로 뻗어 나갔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로마 제국은 (그리고 그 어떤 제국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막지 못했다. 사랑의 약함이 폭력의 강함을 이긴 것이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바울은 이런 사랑의 약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차례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있는가? 진정 예수님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가 믿는 복음의 내용이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 그 자체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점점 약한 사람으로 변해갈 것이다. 스데반을 무정하게 돌로 살해했던 청년이 고린도 교인들의 근심에 가슴 아파하는 약한 사람으로 변한 것처럼 말이다.
- Ralph P. Martin,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40 2 Corinthians, trans. Cheol Kim, Solomon Press, 2007, 153. [본문으로]
- The basic sense of συνέχω from Hom. is “to hold something together,”1 so that it does not fall apart but hangs together.
Hom. Homer, of Chios (?), the classical Greek epic poet, around whose name were grouped the older epics of the Ionians in the 9th and 8th centuries B.C., ed. G. Monro and T. W. Allen, 1908 ff.
1 The sense “to have several things together” is formed only later: Ἀριστόδημος … δύο σχολὰς συνεῖχε, πρωὶ μὲν τὴν ῥητορικήν, δείλης δὲ τὴν γραμματικὴν σχολήν, Strabo, 14, 1, 48; cf. BGU, II, 577, 17 (3rd cent. A.D.).Very late and linguistically out of place is the use of συνέχω for ἀπέχω σύν τινι, “to hold something together with someone,” P. Tebt., I, 242, 25. 27 (2nd cent. A.D.), cf. Preisigke Wört., s.v.; Moult.-Mill., s.v.
Helmut Köster, “συνέχω, συνοχή”, ed. Gerhard Kittel, Geoffrey W. Bromiley와/과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 877. [본문으로]
- συνέχω (“hold together, oppress”) and used only here and in Luke 21:25, means “oppression” or “compression,”59 and in the NT “dismay” or “anguish.”
59 MM 611 cites P. Lond. 354 line 24 (ca. 10 B.C.), where the word apparently means “imprisonment.”
Murray J. Harris,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Milton Keynes, UK: W.B. Eerdmans Pub. Co.; Paternoster Press, 2005), 221. [본문으로]
- Ralph P. Martin,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40 2 Corinthians, trans. Cheol Kim, Solomon Press, 2007, 149. [본문으로]
- The words for the sake of do not stand in the Greek text, but they have been supplied in order to reproduce in English the emphasis on love which results from the unusual word order (tēn agapēn hina gnōte);
Victor Paul Furnish, II Corinthians: translated with introduction, notes, and commentary, vol 32A, Anchor Yale Bible (New Haven;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2008), 154. [본문으로]
- περισσότατα, the superlative of περισσῶς, was obsolescent in Hellenistic Greek, so the comparative περισσοτέρως was used for this elative superlative
Murray J. Harris,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Milton Keynes, UK: W.B. Eerdmans Pub. Co.; Paternoster Press, 2005), 221. [본문으로]
- means “very intensely,” “extremely abundantly,” or simply “especially,” “all the more.” If this adverb qualifies ἀγάπην, the sense will be “the very intense love,” “the extraordinary affection” (Goodspeed). If, on the other hand, it modifies εἰς ὑμᾶς and retains a comparative sense, the meaning is “especially for you,” “my special love for you” (Moffatt).
Murray J. Harris,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Milton Keynes, UK: W.B. Eerdmans Pub. Co.; Paternoster Press, 2005), 221. [본문으로]
- The word is often translated as if it were an adjective describing love (e.g., RSV: “the abundant love”; NEB: “the more than ordinary love”; Plummer, 52: “the exceptional love”). Barrett’s tr., on the other hand (“the love that I have specially for you” [82, 88]), associates the adverb too closely with the following prepositional phrase, as if Paul were saying that he has “more” love for the Corinthians than for others (see the criticism of such an interpretation offered by Hughes, 54 n. 44).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Bible (copyrighted 1973 by the Division of Christian Education of 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NEB The New English Bible with the Apocrypha (Oxford and Cambridge: Univ. Presses, 1970)
tr. translator, translation
n. note
Victor Paul Furnish, II Corinthians: translated with introduction, notes, and commentary, vol 32A, Anchor Yale Bible (New Haven;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2008), 15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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