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의 고린도전서 5장 5절의 해석에 관하여 ("LIFE WORD MISSION" or "JBCH")

대한예수교침례회에 대하여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의 고린도전서 5장 5절의 해석에 관하여 ("LIFE WORD MISSION" or "JBCH")

바잇 카탄 2023. 11. 3. 18:32

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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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예수교침례회(이하 대침)에 출석하는 교인들은 고린도전서 55절의 다음의 구절에 대한 설교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고전 5:5)

 

 대침은 해당 본문을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구원받는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 구원 받은 자는 그가 심지어 근친상간을 행하더라도(고전 5:1)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해석을 기반으로 구원받은 자는 심한 징계는 당할지 언정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며 마치 죄를 짓는 것과 구원은 별개인 것처럼 말한다.

 

 물론 나 역시 개인적으로는 택자는 절대 구원을 잃지 않는다고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구원 받은 자라고 여겨지는 자가 근친상간을 했다면, 나는 그를 보면서 저 사람은 심한 징계를 당하겠네-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은 구원받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해야 옳을 것이다.

 

 문제는 대침 측에서는 믿음과 행위를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고, 이것이 그들의 구원론에까지 단단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식의 사고방식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그들 단체의 수장이 그러하듯이 심한 징계는 당해도 그 사람은 믿었으므로 구원받은 자라고 간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가르치는 대침 내 유명한 목사의 14년도 설교전문을 갖고 있다.)

 

NIGTC 고린도전서 앤서니 티슬턴 표지.
NIGTC 고린도전서 앤서니 티슬턴 표지.

 

 

 

 


 

 

 

 

 이제 대침의 해당 본문에 대한 해석이 어떠한가를 논해보자.

 

 본문은 분절하여 딱 이 문장만으로 주해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부적절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특별히 4절과 함께 묶어서 살펴볼 것이다.

 

 고전 54-5절의 헬라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가장 핵심이 되는 쟁점은 육신으로 번역된 “σαρκός(싸르코스)이다. 대침의 해석은 이 “σαρκός를 물리적인 육체로 보고, 뒤에 나오는 ”, “πνεμα(프네우마)”는 인간의 영혼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길 때에만 참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구원받은 것으로 간주되는 자가 만약 근친상간의 죄를 지었다면, 그는 복음을 믿었으므로 구원 받은 자이며, 따라서 구원은 절대로 잃어버릴 리가 없으니 그의 육체-곧 물리적인 몸(body)은 징계를 당해 멸망하고, 반면에 그의 영혼(soul)은 이미 구원 받았으므로 천국에 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서신에서 종종 등장시키는 설명의 틀, 즉 육과 영의 대비라는 설명적 틀을 심각하고도 단순하게 오해하는 것이다. 바울은 σάρξ(싸륵스)“πνεμα”와 대조하여 설명할 때에 플라톤 등의 헬라 철학의 이원론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신약학계에서 오랜 시간 동안 너무나 분명하게 입증된 것이어서,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이다. 오히려 그보다 바울은 기존 유대교의 입장, 인간을 전인적으로 취급하는 관점을 대표한다. 만약 바울의 육과 영의 대조를 헬라 철학의 물리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이원론으로 설명한다면 많은 성경 구절들이 심각한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는 대침의 목사들이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유대교가 지녔던 인간론에 대한 관점과 플라톤 등의 이분법적인 헬라 철학의 인간론의 관점 및 바울의 용어 사용에 대한 언어적 지식이 거의 전무함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고전 2:14의 다음 구절을 보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자, 만약 이 구절에서 육은 물리적인 육신을 의미하고 영은 비물리적인 영혼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해석에 있어서 오류가 발생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영혼은 작동하지 않는 물리적 실체만이 작용하는 인간을 의미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런 인간에게는 영혼이 부재한다는 뜻인가? 영적으로 분변 한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이 영적으로 분변 하는 자들에게는 물리적인 육체가 없는가?

 


 

 혹은 고전 3:1의 다음 구절을 보라: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σαρκίνοις; 싸르키노이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이런 구절들에서 육은 물리적인 실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에 반대되는 것, 즉 인간적인 생각, 사상, 원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특별히 고린도전서에서는 고린도 교회의 회원들이 보여주는 육적인 자세, 곧 서로 분쟁하고 당파를 나누고 자랑하며 출세를 위해 경쟁하는 그리스도인 답지 않은 인간적인 면모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캐제만, 슈나이더, 크레이그, 잔트, 불트만, 사우스, 티슬턴 등의 저명한 신약학자들 모두 이 점을 지적하며 강조한다.

 

 

 이 외에 로마서에서 육과 영의 대조에 대한 많은 구절들이 있으나 지면의 한계상 이만 줄인다.

 

 


 

 

 또 만약 “σαρκός를 물리적인 육체로 본다면 심각한 난점이 생기는데, 그것은 곧 사탄에게 넘겨준다는 동사 “παραδοῦναι(파라두나이)”의 주체가 고린도 교회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4절을 함께 고려하면 분명해지는데, 바울은 분명하게 이 넘겨주는 주체를 너희와 내 영(μν κα το μο πνεύματος; 휘몬 카이 투 에무 프네우마토스)”이라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뭐가 문제가 된다는 것일까? 만약 이 근친상간한 사람을 사탄에게 Σατανᾷ; 토 사타나) 넘겨주는 자들이 고린도 교회 공동체라면, 이 육신이 멸한다는ἰς λεθρον; 에이스 올레뜨론) 구절을 해석할 때에 난점이 생긴다. 대침에서는 이것이 그 육신의 물리적 죽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공동체가 그 사람을 물리적으로 죽일 수는 없었다. 교회는 그런 권징을 시행할 만한 제도적인 기반이나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로마법에 호소해도 소용이 없었는데, 당시 로마인들이 근친상간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고 비난은 했어도 사형으로 다스렸다는 증거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레위기 율법에 호소하여 유대인 회당에 넘기려고 하여도, 고대 도시 코린토스의 시민을 그렇게 사형에 처하는 것은 거의 불가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물론 흥분한 유대인 군중들이 간혹 집단 린치를 통해서 한 개인을 사망에 이르게 할 수는 있었으나, 바울이 그런 방법을 주 예수의 능력으로넘겨줬다고 묘사했다 보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다.

 

혹 만약 그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다 해도 당시의 유대교의 권징이 팔레스타인 지역 밖으로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것은 명백하며, 심지어 팔레스타인 내에서도 유대 당국자들의 권한은 제한적이었고 다수의 유대인들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했다(e. p. 샌더스, 크레이그 s. 키너 등).

 

 또 6장에서 세상 법정에 송사하는 것을 비판하는 바울이 여기서는 세상 법정이나 제도에 넘기라고 말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심지어 사우스, 차우, 티슬턴이 주장하는 바 이 근친상간을 행한 사람은 상당한 부를 통해 고린도 교회를 후원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은 그를 곧바로 물리치지 못했다(2).

 

 혹은 이것이 신비한 징계, 곧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은 것과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징계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문제는 위에서 지적한바 이 내어주는(παραδοναι) 것의 주체가 고린도 교회 공동체이지, 하나님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교회 내의 권징과 관련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 가장 올바른 해석이며, 교회의 권징 외에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어떤 벌(죽음이나 질병 따위의)이 내려졌다고 해석할 근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σαρκός를 물리적인 육체로 보고, 육신이 멸한다는ἰς λεθρον) 구절을 육체에 물리적인 무언가를 끼친다고 해석하는 것에 근거한다. 반면에 이것을 교회의 권징(특히 출교)과 함께 본다면, 513절에서 이 사람을 내어 쫓으라고 권면한 것과 부합하며(만약 이 사람이 죽을 것이라면 바울이 이런 권면을 했을까?), 6장의 주제와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그러므로 해당 구절은 곧 이 근친상간한 자를 출교조치 하라는 바울의 권면으로 보는 것이 가장 올바른 해석이다. 그의 육신(σαρκός) 곧 고린도전서의 전체 주제인 육적인 자세이자 인간적인 생각은 이 사람의 출교조치를 통해 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것이다.

 

 출세와 명예와 사회적 지위가 중요했던 상업 도시 코린토스에서,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람이 갑자기 공동체 밖으로 쫓겨나 그 지위를 잃는 것은 상당한 충격을 줄 것이다. 그것은 또한 고린도 교회에서 그같이 육신적으로행하던 자들에게 경각심을 줄 것이며, 혹시 그 출교 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올 마음을 품도록 만들 수 있다. 즉 그의 “πνεμα”, 영적인 자세는 회개하도록 촉구하여 혹시 그가 구원을 얻도록 만들 것이다.

 

 그래서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να… σωθῇ(히나... 쏘떼)인데, 목적(να; 히나)의 접속사와 함께 “σῴζω(쏘조)”의 가정법인 “σωθῇ(쏘떼)”가 사용되었다. 이 출교조치는 그의 구원을 반드시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구원이 어떠한가는 최후의 심판, 주 예수의 날(ν τ μέρ το κυρίου; 엔 테 헤메라 투 퀴리우)”에서야 드러날 것이다.

 

 

 


 

 

 

 대침은 왜 이 구절을 물리적인 육신은 징계에 의해 죽고 그 사람의 영혼은 구원받는다고 해석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어떤 사람이 복음을 믿고 구원받으면 그 사람이 어떤 죄를 지어도 구원받는 것에는 지장이 없다는 그들의 가르침 때문이다. 마치 영화 밀양에 나오는 범죄자의 고백과도 흡사한 이 가르침은 성경에 나오는 회개를 자백으로 순화시키려는 그들의 움직임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또한 그들이 따르는 삼분법적인 헬라 철학적 인간론도 이 같은 잘못된 해석을 야기한 원인이 된다. 대침에서는 인간을 영, , 육의 세 요소로 구성된 삼분법적인 존재로 여기기 때문이다. 아마 성경에 영, , 육이라고 제시된 것들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나 싶은데, 이들은 헬라 문화권 당대의 수사학이 성경에 사용되었는지도 모르고 성경을 해석한 것 같다. 특히 로마서 7장에 대한 대침의 해석 역시 이것을 잘 보여준다. 대침의 어떤 목사는 영, , 육을 영혼 구원, 생활 구원, 몸의 구원이라는 자기들의 교리와 연관 지어 설명하기도 했다(이것은 성경에 제시된 구원의 세 가지 시제를 오해한 것이다).

 

 그런데 구원을 받으면 어떤 죄를 지어도 천국에 간다는 그들의 믿음과는 다르게, 그들의 구원 여부는 대침에 출석하느냐와 강력하게 관련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교회 내에서 복음을 믿고 구원받았다 선언된 자라고 해도, 대침을 탈퇴하고 다른 교단(장로교나 감리교 등)에 출석하면 갑자기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매도하며 실족했다고 공공연하게 판단하기 때문이다. 복음을 믿는 자는 근친상간을 하든 어쩌든 강한 징계만 받고 땡이지만, 대침에서 탈퇴한 자는 교회를 대적하는 자요, 실족한 자요, 구원 받지 않은 거짓 형제가 되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뭔가? 대침은 정말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가르치는 내용이라고 믿는 것일까? 아니면 다만 신도들을 교회 밖으로 못 나가고 끊임없이 봉사하도록 만들기 위한 수단일까?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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