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징계와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의 교리

대한예수교침례회에 대하여

성경의 징계와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의 교리

바잇 카탄 2023. 11. 27. 15:52

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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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대한예수교침례회(이하 대침)가 가르치는 징계의 의미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2023년 11월 19일 자의 설교에서, 대침의 어느 굉장히 유명한 목사는 히브리서 12장 6-8절을 인용하며 징계에 대해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징계는 죄를 지으면 오는 것인 동시에 물질적이거나 정신적인 여러 가지 피해를 통해 그것이 다가온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가 인용한 성경구절에는 그와 같은 내용은 없다. 

 

 이 때문에 대침의 신도들은 자신들이 잘못하면 징계가 올까봐 두려워 떤다. 동시에 자신이 어떤 나쁜 일, 곧 불운을 겪게 되었을 때 자기가 과거에 잘못했던 죄들을 떠올리며 이것 때문에 내가 징계당했나 보다 하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해 이런 시각으로 판단하는 것 역시 일상적이다. 만약 누군가가 굉장히 안 좋은 일을 당했다면, 대침의 어떤 다른 사람이 다가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잘못한 것은 없는지 그 생활을 돌아보라고 권면할 것이다. 이것은 특히 대침에 자주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더욱 가혹하게 행사되는데, 소문과 근거 없는 추측이 난무하기 마련이며, 간혹 이것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교회를 옮기는 경우들도 종종 생긴다.

 

 대침에서 가장 큰 징계를 받는 것은 당연 "전도인에게 대적했을 때"이다. 대침 내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저마다 전도인에게 대들었다가 사업이 망했다든가, 큰 병에 걸렸다든가, 아니면 심한 경우 사망했다든가 하는 괴담들이 한 가득 존재한다. 이런 괴상한 생각에 부채질하는 것은 대침의 목사들이다. 그들은 설교를 통해 이런 사례들을 소개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모세에게 대항했다가 죽은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을 예로 들고, 또 미리암이 모세에게 대들었다가 벌을 받은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혹은 베드로 앞에서 죽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도 들고 온다.

 

 이 때문에 대침 내에서는 전도인에게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꾼"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전도인이 하는 조언은 그것이 학업, 직장, 결혼, 가정사, 사업, 심지어 재산 처분에 대한 것 까지도 순종해야 하며, 만약 순종하지 않을 경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과 사실상 동일하다. 그리고 일단 그것에 순종했다면 일이 틀어져서 그 전도인이 한 조언이 비현실적이며 비효율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하더라도 전도인 책임이 아니라 온전히 신도 개개인의 책임이 된다. 이 경우 그것은 전도인이 잘못 조언한 것이 아니라 단지 신도가 새로운 죄를 또 지어서 추가적인 징계를 받았을 뿐이다.

 

 이렇듯 대침 내에서 징계라는 교리는 신도들의 일상 속에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동시에 신도들은 이 징계의 무서움 때문에 전도인들에게 순종하면서 이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 망상한다.

 

 이제 대침의 징계 가르침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점들을 논해보자. 

 

판사 지팡이 저작권 프리 이미지
대침의 징계 교리는 마치 무분별한 재판을 연상시킨다.

 

 

 


 

 

 

 

1. 대침 전도인이 받는 징계에 대해서는 왜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인가?


 위의 설교에서 인용한 히브리서 12장에 의하면, 징계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예외 없이 겪는 사건이다. 왜냐하면 징계가 없으면 우리가 참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단언하기 때문이다. 징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논하기 이전에, 이 명제와 부딪히는 대침의 실상에 대해 모든 신도들은 의문을 가져야 한다.

 

 만약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징계 받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이 일상의 일부분이라면, 대침의 전도인들 역시 일상 속에서 항상 이런 징계에 노출되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대침의 방식대로 한다면 어떤 전도인이 안 좋은 일을 당했을 때 모든 신도들은 당연하게도 '아 저 전도인이 죄를 지어서 징계받았네.'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이 명제는 대침의 대부분의 전도인들에게 예외 사항으로 남는 것 같다. 왜냐하면 정말 명백하게 총회에서 처단한(?) 전도인이 아니라면 거의 모든 전도인들은 자신들은 징계에서 예외처리 되는 듯이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 대해 말하는 것 역시 신도들에게는 금기인 것으로 보인다.

 

 대침의 가르침이 옳다면, 대침의 신도 분들은 전도인이 불행을 겪을 때마다 전도인에게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라'고 조언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만약 죄가 있어서 징계를 받는 상황에 있다면 이것만큼 심각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대침의 신도 분들은 정말 이런 자에게 자신의 영혼 건강을 맡길 것인가? 그러므로 앞으로는 어려운 일을 겪는 전도인에게 가서 적극적으로 조언해 주자. 그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징계에서 벗어나도록 말이다.

 

 나는 대침을 다닐 때에 목사들이 아프거나 그 가족들이 아픈 것을 많이 목격했다. 만약 대침의 가르침대로라면, 이런 모든 사례들은 그 전도인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발생한 징계이다. 그런데, 대침 내에서는 이것을 징계로 말하기 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 혹은 바울의 가시와 같은 것으로 미화하고 포장하기 바쁘다. 

 

 그러나 대침의 징계 교리에 충성하는 모든 대침 신도들이여! 이제는 이 지고한 법칙을 예외 없이 전도인들에게도 적용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목사의 자녀가 아프다거나 그 사모가 안 좋은 일을 겪거나 하는 모든 일들에 말이다. 이것이 잔인하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 잔인한 짓은 대침 내에서 지금까지도 일상이지 않은가? 대침에서는 어떤 신도의 가족이 아프거나 큰 일을 당했을 때 뒤에서 수군거리며 저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라고 혀를 끌끌 차거나 아니면 저 사람이 저번에 목사에게 대들어서, 교제에 빠져서, 봉사에 잘 참여하지 않아서 등등의 이유들을 찾아내고 조사하며 만들어 생산하는 것으로 서로 즐겁게 히히덕거리며 교제하는 좋은 안주거리로 삼고 있지 않은가?

 

 이 사람들은 대침의 가장 유명한 그 목사가 만약에 질병에 걸리면 어떻게 할까? 징계를 받았다고 할까, 아니면 그것은 고난이라고 말하며 칭송할까? 만약 당신이 징계에 대한 대침의 가르침을 진심으로 하나님의 것으로 믿고 있다면, 이 원칙을 마땅히 전도인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해야 한다. 만약 당신이 그렇게 하길 거부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사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전도인의 평판을 더욱 신경 쓰고 있는 셈이다.

 

 

 

2. 불운을 겪은 것을 보고 징계라고 추론하거나 죄라고 추론하는 것의 근거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잘 속는 이유 중 하나는 객관적 사실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보다 자신의 본능적 느낌을 따라가거나 아니면 타인의 조언을 쉽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징계를 둘러싼 거대한 정신병자들의 이야기들은 이런 배경 위에 펼쳐진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사고를 당했을 때 그 사고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눈물 흘리기보다는 눈에 불을 켜고 그 사람이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일을 당했는가 라는 인과관계를 억지로 찾아내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부지런히 애쓴다. 심지어 그 사람이 자신에게 별 피해를 끼친 것이 아닌데도 정말 온 힘을 다해 그렇게 한다. 왜 이러는 것일까?

 

 문제는 징계라고 추론하는 것에 아무런 근거가 없으며(당신은 하나님이 아니다), 이 사람이 겪은 사고가 어떤 특정한 죄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는 인과관계 역시 추적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만약 누군가가 '이 사람의 징계는 이러 저러한 죄 때문인 거 같아. 신기하게도 이러저러한 죄를 짓고 나서 얼마 안 지나 저런 일이 발생했다니까?'라고 수군거린다면 순진하고 무지한 당신은 그것을 철석같이 믿어버린다. 정말 세상에! 저 사람이 전도인하고 싸우고 한 달 뒤에 교통사고를 당했잖아? 오!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리셨구나! 아주 놀라워! ...어떤 기독교인들이 이 글을 보고 저런 바보 같은 걸 믿는 사람들이 어디 있냐고 묻는다면 바로 대한예수교침례회에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이것을 "미신"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마치 징크스를 피하려는 사람들이 하는 것과 비슷한 사고회로를 거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강박증이 있는 사람이 문을 나설 때마다 성호를 세 번 긋고 나간다고 해보자. 그 사람은 이것이 자신을 모든 사고로 부터 보호해 준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너무 바빠서 출근하다가 이를 깜빡했다. 이 사람은 이것 때문에 하루종일 불안해하다가, 이런, 그만 커피를 쏟고 말았다! 세상에 주여! 저를 용서해 주소서! 오늘 아침 성호를 세 번 긋지 않는 죄를 저질렀나이다! (이해를 위해 성호라고 예시를 든 것이지, 가톨릭 분들의 신앙을 비하할 의도는 없다) 당신은 이것이 건강한 신앙으로 보이는가? 아마 아닐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이것과 같은 일이 대침에서는 일어나고 있다.

 

 어떤 대침 신도는 유초등부 교사였는데, 주일 말씀 등등의 교제에 잘 참석하다가 시간이 도저히 안 되서 교사모임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하자. 이 신도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유초등부 부장 등등의 교사들이 병문안을 온다. 그러곤 하는 소리가, 요새 교사모임도 빠지고 하시더니 징계를 받은 것 같다고 말하면서 생활을 돌아보라고 조언하는 것이다. 이것이 위의 징크스를 피하려는 미신적인 사람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어떤 지인도 대침에서 봉사를 여럿 맡다가, 다리가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이와 같은 일을 겪었다. 물론 그 덕에 그 지인은 대침에서 탈출해 정상적인 교단에 출석하고 있지만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사고나 불운을 보고 그 사람의 죄를 필연적으로 추론하는 괴이한 사고 활동에 기인한다. 이 같은 것은 성경적이라기보다는 미신적이며, 무속적이고 비기독교적이다. 이런 것을 믿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은 성경을 믿기보다는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샤머니즘이 이들에게 더욱 가까운 부류일 것이다. 어쩌면 대침의 나이가 많은 목사들이 이런 가르침을 신봉한 것은 무속적인 경향이 짙었던 한국이라는 토양에서 자라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대침 신도들이나 전도인들이 추론하는 징계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전부 사실무근이며 순전히 망상과 추측이다. 그리고 대침 신도들은 지금까지도 근거 없는 추측으로 불운한 사고를 당한 피해자들을 모욕하며 비난하면서 이것을 권면이자 교제라고 포장한다.

 

 

 

3. 징계를 이런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기복신앙이다.


 자,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고 좋은 일을 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것을 기독교에서 가르치면 뭐가 될까? 정답은 기복신앙이다. 구약성경은 일부 기복신앙의 모습들이 보이나, 신약성경은 이 같은 것들을 배제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초대교회는 핍박받는 교회였고, 심지어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신자들도 신앙 때문에 자신이 누리던 것을 희생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에서 어떤 기복신앙적인 고백은 나올 수가 없으며, 이것은 오늘날의 기독교에서도 상당히 유효하다. 심지어 시편 기자 역시 악인들이 잘 사는데 의인들은 왜 이 모양이냐고 의문을 표하기도 한다. 

 

 그런데 대침은 실제로 기복신앙적인 면이 정말 많다. 이들 신도들은 설교를 통해 교회에 헌신했더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라는 가르침을 공급받고, 동시에 죄를 지으면 징계를 받는다는 가르침도 흡수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교회에 전적으로 헌신하면서 전도인의 말에 순종하는 존재이다. 차라리 좋은 일 하면 복 받고 나쁜 짓 하면 벌 받는다가 이거보다 낫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적어도 사회에 좋은 일을 많이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근데 대침 신도들이 말하는 좋은 일은 사회에 좋은 게 아니라 교회에 좋은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의를 행하는 것이란 대침이 포교활동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져다 바치는 것과 전도인의 말에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즉 소위 복음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교회에 바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세상만사가 형통하며 잘 풀린다고 생각한다. 대침이 이렇게 가르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거짓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설교를 조금만 찾아봐도 이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너무 많아서 인용하기도 애매할 정도이다. 당장 대침의 가장 유명한 목사만 해도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주신다 라고 말하며 신도들에게 교회에 모든 것을 내놓으라고 말하고 있는 실정이니 말이다.

 

 재밌는 것은 대침이 과거에 이런 가르침들을 비판하는 측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소위 기성교단들이 이같은 것을 가르친다며 자신들은 이들과는 다르다고 말하며 우쭐해했다. 당시에는 정말 그런 교회 같지 않은 것들이 한국 교회에 많았고 대침이 그런 가르침을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인 줄 알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이제 대침은 본색을 드러낸다. 그들이 비판하던 그 교리를, 이제 대침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르치고 있다. 나는 이들이 배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직도 신기하다. 이들은 자신들이 다른 교회들과 다르다고 차별화하지만, 내가 보기에 대침은 한국 교회의 안 좋은 점으로 지적받곤 하는 모든 요소들을 사실상 다 지니고 있다. 문제가 있다면 한국의 정상적인 교단에서는 신도들이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이상할 때 그냥 다른 교회로 옮기면 되지만, 대침은 신도들이 나가면 실족하고, 구원받은 것이 아니며, 교회를 대적하는 중죄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협박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내가 봤을 때 대침과 한국 교회의 차이점은 기복신앙의 유무나 복음을 잘 전하느냐의 여부가 아니다. 오히려 배타성이 있냐 없냐이다. 대침은 자기들 외의 구원을 거의 인정하지 않는 배타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한국 교회와 차별화된다. 따라서 만약 배타성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대침을 선택하는 데에 큰 메리트가 될 것이다.

 

 

 

4. 성경에서 말하는 징계는 대침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다.


 자, 대침의 징계 교리를 생각하면서 디모데전서 1장 20절을 봐보자.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는 바울에게 대적하여 출교 조치된 자들이다. 그리고 성경의 언어는 이들의 구원을 인정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도 "징계"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대침의 가르침대로라면 징계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모두가 받는 것이고 마치 하나님의 자녀의 지위를 나타내는 것인양 느껴지는데 말이다. 혹, 히브리서의 징계와 여기서의 징계는 다른 것인가? 그러나 헬라어 원문을 보면 둘 모두에게 같은 단어(παιδεύω; 파이데우오)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징계라는 단어는 기독교인이냐 아니냐 와 무관한 것일까?

 

 그렇다. 무관하다. "파이데우오(παιδεύω)"는 기독교만의 용어가 아니다. 이것은 헬라 세계에서  흔히 사용되는 용어로, 본래 "아이"를 뜻하는 "파이디온(παιδίον)"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그래서 "파이데우오(παιδεύω)"는 "가르치다, 교육하다, 훈련하다, 훈육하다, 징계하다, 징벌하다" 등 다양한 의미에서 가르치고 교훈을 주는 수단을 모두 지칭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서 나오는 "징계"라는 단어를 기독교적인 의미로만 파악할 필요는 없다. 히브리서 기자나 바울이 이것을 사용할 때에는 그 대상이 어떤 일을 통해 가르침을 받을 것이라는 소망을 나타내는 것이지, 죄를 지으면 징계를 받는다는 식의 세부적인 교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 히브리서의 "징계"라는 단어가 사용된 초대교회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 당시에는 기독교인임을 드러내는 것에 용기가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생활의 전반이 우상숭배와 함께 얽혀 있었을뿐더러 로마에 의해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받은 유대교에게서도 적대적인 대우를 받고 있었다. 이 시기에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그다지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으며 큰 수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모든 외부의 압박은 당연히 기독교인들에게는 심각한 도전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징계를 이야기 하면서 '너희가 죄 때문에 벌 받는다'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가 참는다'라고 묘사한다(히 12:7). 그리고 "죄와 피흘리까지 싸우라"라고 조언한다(히 12:4). 이것은 죄지은 것 때문에 벌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하는 조언으로는 부적절하다. 오히려 고난과 시련을 겪는 사람에게 하는 "견뎌내라는" 권면으로 읽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또 만약 "징계"를 죄와 기계적으로 연결하는 대침의 가르침이 옳다면, 우리 예수님께서 당하신 "징계"는 무엇으로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이사야 53장 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는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징계"로 번역된 "무싸르(מוּסָר)"는 "징계, 교훈, 책망"으로, 헬라어로 "징계"를 뜻하는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와 동일한 의미이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이 징계를 당한 것을 보고 죄를 추론해야 하는 것이 절대적이라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받으신 것을 보고서도 우리는 같은 추론을 해야 하는가? 그러나 성경은 아무 이유 없이 고난당하는 종의 이미지, 죄 없이 시련을 겪는 의인, 욥과 같은 경우가 많이 있다고 알려준다. 그리고 그런 경우들에도 성경은 "징계"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만약 여기서는 예외라고 말한다면, 죄 지어서 벌 받는 징계는 일반화 하면서 이것은 제외하는 것인가?)

 

 물론 계시록 등에서 죄가 있어서 받는 징계를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협소하게 징계의 의미를 한정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징계는 고난, 시험 등과 함께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가르치는 모든 상황을 총칭하는 보다 더 넓은 단어이다. 심지어 대침이 지속적으로 인용하는 히브리서 12장의 내용은 대침이 주장하는 징계 교리와 그 내용 면에서 완전 다르다. 오히려 대침의 교리는 너무나 미신적이고, 너무나 원시적이며, 너무나 미개하다.

 

 

 

5. 대침은 "소발"이다.


 욥기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욥이 무고히 고난 당하고 있을 때에 세 친구들이 욥에게 찾아와 욥을 비판했다는 내용을 알고 있을 것이다. 엘리바스는 욥의 고난이 단지 일시적인 것이라 보았고, 빌닷은 욥의 자녀들은 죽었지만 욥은 아니라는 말을 해줬지만, 소발은 극단으로 나아가 욥의 고난에 대해 그런 상황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소발은 욥의 고난은 반드시 그의 죄의 결과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소발에게 있어서 욥은 고난 받고 있으며, 고난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대침은 "소발"과 신학의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침은 "소발"이라고 말해도 무리가 아니다. 그리고 "소발"을 포함한 세 친구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신 판결은 명확하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욥 42:7)

 

 그러므로 누구든지 대침의 징계 교리를 따라서 징계 받으면 그것은 죄의 결과이므로 생활을 돌아보라고 말한다든가, 아니면 교회 전도인에게 대적하면 징계를 당한다든가 하는 가르침을 신봉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위의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욥이 평생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것은 아니었지만, 욥기는 분명하게 그를 의인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겪는 고난(징계)은 반드시 그의 죄의 여부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욥이 받을 일에 대해서는 욥은 무고하며, 그는 의인이라 불려야 마땅했다. 

 

 대침의 이 악한 교리에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피해자들은 욥과 같은 심경으로 하나님께 아뢰고 힘을 얻으라.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대침을 "소발"로 취급하시며 심판하실 것을 알고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라. 

 

 

 

6. 대침은 "1세기 유대교"이며 예수님은 이에 대해 비판적이다.


 요한복음 9장에는 이런 본문이 있다: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요 9:2)

 

 당시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이 질병을 가지고 있을 때 그 질명이 그 사람의 죄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 보았다. 그래서 심각한 질병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큰 죄인인 셈이다. 이제 이 시각을 보면 어떤 가르침과 유사하다고 생각이 되는가? 그렇다. 바로 대침의 징계 교리와 똑 닮아 있다. 아마 대침이 있기 이전에도 이와 같은 가르침을 통해 신도들을 통제하는 것은 매우 편리한 방편이었던 것 같다. 혹은 구약성경의 일부 죄를 지어서 벌 받는 사례를 대침처럼 전체로 확장하여 적용한 오류가 있었던 것 같다. 무엇이 되었든, 이런 잘못된 교리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요 9:3)

 

 이제 이 구절을 본 대침 사람들은 무릎을 탁 치며 그래! 여기서만 예외인 거야. 왜냐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였으니까. 그 외의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징계는 죄의 결과야!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자, 그럼 여기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눅 13:2)

 

 유대교의 이런 잘못된 인식은 어떤 사람이 불운한 일을 겪었을 때 자신들 보다 저 사람이 뭔가 더 죄가 있기 때문에 저런 일을 경험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발전했다. 대침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상당히 냉소적이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그런 기준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더욱 큰 명제를 들고 오시면서, 갈릴리 사람들이 실로암 망대에서 떨어져 사망한 것을 이 사람들의 죄와 기계적으로 연결 짓는 견해를 비판하신다. 

 

 대침의 시각과 유대교의 시각이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는 것은 그들이 참된 기독교의 가르침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유아기적 단계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현대의 유대교도 저런 미개한 사상을 가르치지 않으니, 대침을 유대교로 묘사하는 것도 유대인들에게는 실례이다. 오히려 대침은 "1세기"의 유대교와 닮아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즉 내가 미개하다고 표현한 이유가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대침의 징계 교리는 구시대적인, 시대착오적인 유물이며, 반드시 수정되어야 할 사악한 교리이다.

 

 

 

7. 대침의 징계 교리는 흔한 일반화의 오류를 보여준다.


 위에서 이미 "징계"라는 단어는 여러가지 상황을 포괄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실제로 성경은 이런 방식으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대침은 일부의 죄를 지어서 벌 받는 사례를 단편적으로 똑 떼어서, 이것을 전체 징계에 적용한다. 이것은 초등학생들도 알만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인데, 대침의 목사들이 성경을 해석할 때 얼마나 신중하지 못하고 무지하며 문맥과 신학자들의 연구를 무시하고, 히브리어나 헬라어에도 문외한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징계 교리를 처음 만든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정말 성경의 용어 사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황당한 것은 이런 허술한 성경 독법을 갖고 있고, 이런 미신적인 교리를 만드는 집단에 자신의 영혼을 맡긴 불쌍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대침 분들이 이 글을 본다면 묻고 싶다. 과연 이런 단순하고 오류 가득한 극단적인 견해를 가진 자들의 성경 해석에 자신의 신앙을 맡길 것인가? 이런 성경 해석을 지지하는 자들이 과연 복음은 제대로 잘 가르칠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정말 있는 그대로 잘 전달할 수 있을까?

 

 1960년대에는 이런 것들이 먹혔을 수도 있다. 1980년대에도 아직 유효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2023년이다! 이런 빈약한 성경 해석 능력으로 만들어낸 모순 가득한 교리는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 대침 분들도 이런 이상한 가르침에는 따르지 말았으면 좋겠다. 주변 교인들이나 전도인이 이런 주장을 해도 이제 귀담아 듣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며,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며, 성경 원어와도 맞지 않고 "소발"의 견해와 같은 것으로서 오직 전도인들에게만 예외인 이상한 구시대적 오류이기 때문이다. 

 

 

 나는 대침 분들이 성경과 하나님께 얼마나 헌신적인지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적이지 않은 징계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을 대침의 신도 분들은 왜 용인해 줘야 하는가? 그럴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당신은 전도인을 따르는 사람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인가? 전도인에게 순종해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가? 전도인의 말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를 것인가?

 

 선택은 당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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