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가 아니라 침례라고 말하는 대한예수교침례회(구원파, 생명의말씀선교회).

대한예수교침례회에 대하여

세례가 아니라 침례라고 말하는 대한예수교침례회(구원파, 생명의말씀선교회).

바잇 카탄 2023. 12. 10. 14:00

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반응형

 대한예수교침례회(이하 대침)는 여타 다른 침례교단들과 마찬가지로 세례를 시행할 때에 침수하는 방식을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교단들과 대침의 다른 점은 일반적인 교단들의 경우 세례의 방식이 물을 뿌리는 것이든, 붓는 것이든, 물에 담그는 것이든 그것이 크게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지만, 대침은 세례의 방식에서 침수의 방식만이 옳고 그 외의 방식은 배척하는 배타성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대침 유명 목사의 2023년 12월 3일 자 설교에서도 "세례가 아니라 침례가 맞다"라고 말하면서 "옛날 가톨릭에서도 침례의 방식을 썼는데 바뀐 것이다"라고 말한다. 

 

 필자 역시 대침에서 생활할 시절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것이 침례는 반드시 침수의 방식으로 행해져야 하며 그 외의 다른 방식의 것들, 소위 '세례'라 불리는 것들은 모두 잘못된 것이며, 대표적으로 천주교(가톨릭)에서 그렇게 시행하기 때문에 가톨릭은 틀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침에서 탈출한 뒤에도 한동안 침수의 방식 외의 다른 세례 방식에 대한 막연한 반감이 지속되었다. 어쩌다 물을 뿌리거나 붓거나 하는 세례를 보기라도 하면 마음속에서 '저 불쌍하고 무식한 사람들... 진정한 침례는 물에 완전히 들어갔다가 나오는 건데'라고 생각했다.

 

 대침에는 이렇게 타 교단들을 깔보고 경멸하면서 자기들끼리 우월 의식을 느끼게 만드는 요상한 배타적 가르침들이 상당히 많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세례에 대해, 특별히 세례의 방식이 반드시 침수의 방식으로 시행되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 세례의 기원에 대하여


 먼저 우리가 세례에 대해 생각할 때 이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세례는 공중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즉 기독교의 순수 창작물이 아니라, 그 이전의 유대교의 풍습에서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1세기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교 풍습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고대 유대교에서는 '정결 의식'이라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세례가 이 유대인들의 정결 의식에서 기원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유대인들은 일상의 많은 부분들에서 수시로 몸을 정결케 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 때문에 부유한 자들의 경우 저택에 정결 의식을 위한 개인용 욕조를 하나씩 구비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욕조를 "미크바" 혹은 "미크베"라고 불렀는데, 복수로 "미크바옷"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 의식은 예수님 시기 훨씬 이전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미크바옷" 의식은 침례탕이었는데, 탕 안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도관을 통해 신선한 물을 공급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각주:1] 물론 이 같은 시스템이 모든 유대인들에게 제공되었던 것은 아니다. 랍비들은 반드시 순결하고 깨끗하며 신선한 물을 사용하여 정결 의식을 수행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면이 있었지만, 여건이 안 되는 일반 서민들의 경우 돌 항아리 등에 물을 저장해서 정결 의식에 사용하였다.

 

 물론 엄격한 자들에게는 정결을 위해 돌 항아리를 사용하는 등의 편법을 용납하지 않았다. 랍비들은 일반적으로 어딘가에서 길어온 물이나 담겨 있는 물 자체는 정결 목욕을 위해 부적합하다고 말했다. 그 물은 반드시 "살아있어"야 했다. 따라서 빗물이나 샘물 등에서 나오는 흐르는 물이 사용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랍비들의 이런 원칙을 전부 지킬 수는 없었다.[각주:2] 대부분의 도시나 마을들에는 급수와 개인 목욕을 위한 시설이 열악했기 때문에 일반 대중들은 이런 것들에 접근하기 어려웠다.[각주:3]

 

 아마 학자들이 말하는 1세기 당시의 "개종자의 세례"는 이 유대교의 정결 예식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대 유대교에서는 이방인들이 유대교에 입교할 때에 입교 의식으로 할례만 시행했던 것이 아니라 세례도 함께 시행했다. 이것은 정결 예식으로서 몸을 씻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시행되었으며 유대교에 입교할 때에 단 한 번 베풀어졌다. 학자들은 유대교의 정결 의식보다는 이 개종자의 세례가 기독교의 세례와 더욱 가깝다는 것을 확인한다. 바빌로니아 탈무드에서는 랍비 여호수아와 랍비 엘리에셀이 이에 대해 논쟁하는 대목이 나온다.[각주:4] 여기서 랍비 여호수아는 세례와 할례를 모두 필요하다고 말하며, 랍비 엘리에셀은 할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주장한다.[각주:5] 유대교에서 입교자를 위한 개종자의 세례는 특정 종파의 경우에 시행되었던 것 같다. 아마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것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유대교의 개종자 세례는 개종자가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수행하는 것이었는데, 세례 요한은 자신이 직접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점일 것이다.

 

 기독교의 세례가 유대교적 배경을 갖고 있다는 것에 놀랄 필요는 없다. 기독교뿐 아니라 구약의 유대교 역시 주변 국가들의 종교적 관행이나 문화적 의식 중 일부분을 차용해 사용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할례의 경우 이스라엘만의 풍습이 아니라 이집트나 기타 주변 국가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근동의 공통 문화였다. 세례는 개종자가 자신이 이전에 몸 담고 있던 영역에서 새로운 영역으로 옮겨 간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분명하게 선포하는 기능이 있고 이것은 유익하기 때문에 세례 요한에 의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활용될 수 있었다. 이것은 유대교의 입교 의식인 할례나 그들의 정결 예식들이 새롭고 더 나은 기독교의 세례라는 장치로 변화되었고 기독교 역사 속에서 수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치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안식일이 주일로 대체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2. 초대 교회 당시의 세례는 반드시 침수의 방식을 고집했는가?


 대침의 2023년 12월 3일 자 설교에서 어떤 유명한 목사는 "세례가 아니라 침례가 맞으며", "가톨릭도 처음엔 침례였다"라고 주장한다. 과연 이 주장은 사실일까?

 

 먼저 위에서 알아본 바 세례는 유대교의 정결 의식과 개종자의 세례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침수의 방식으로 시행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은 맞다. 예전에는 학자들이 헬라어 "밥티조(βαπτίζω)"나 "밥토(βάπτω)"의 어원이나 요한이 강가에서 세례를 베풀었다는 사실 등에서 이것을 추론했으나, 이제는 유대교의 미크바옷의 고고학 발견으로 초기 세례는 침수의 방식으로 시행되었음이 충분히 증명된다.

 

 그러나 이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필립 샤프는 성경에서 침수가 불가능한 경우를 예시로 드는데, 오순절에 3천 명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당시 예루살렘의 수도 시설의 상태를 고려해 볼 때 이들이 침수의 방식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세례 받았음을 암시한다.[각주:6] 더욱이 예루살렘 옆의 기드론 시내 역시 작은 시내인 데다가 여름에는 물이 말라버리는 것이 보통이다.[각주:7] 또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는 자신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에서 침례교도들에게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례 요한이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려고 몰려오는 무리를 침수시키는 어마어마한 작업을 감당해 낼 수 있었을까? 아니면 일부 고대 비문들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그들에게 다만 물을 부었을까? 사도들은 하루에 삼천 명을 침수시키기에 충분한 물과 필요한 용기들을 예루살렘에서 발견할 수 있었을까? ... 행 9:18은 바울이 아나니아가 그를 찾은 곳에서 떠나 어떤 못이나 강으로 가서 침례를 받았음을 시사하는가? 고넬료의 세례 이야기는 물을 가져다가 집에서 침례를 베풀었다는 인상을 주는가(행 10:47, 48)? 빌립보의 간수가 감옥 근처에서 세례를 받지 않고 바울과 실라를 강으로 데리고 나가 거기서 침례를 받았다는 어떤 증거가 있는가? 그들을 안전하게 지키도록 명령받은 간수가 그들을 도시 밖으로 데리고 나갈 수 있었을까(행 16:22-33)?"[각주:8]

 

 물을 뿌리거나 붓는 형태의 세례는 이미 사도 시대 때부터 병자나 죽어가는 자들이나 전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침수가 불가능한 경우에 일반적으로 수행되었다.[각주:9] 디다케(Didache)에서는 세례를 줄 때 흐르는 물을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각주:10] 흐르는 물이 없을 경우 일반적인 물로 주고, 만약 찬 물을 사용할 수 없을 땐 따뜻한 물을 사용하며, 찬 물도 따뜻한 물도 쓸 수 없을 때는 머리에 세 번 물을 붓는 약식 세례를 허용한다.[각주:11] 디다케의 연도가 대략 2세기 초엽, 즉 AD 110년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인정되는 것을 고려할 때 이 지침은 사도 요한이 생존해 있던 시기와 그리 멀지 않을 때에도 보편적이었음을 암시한다. 또 키프리아누스(AD 200-258) 역시 물을 붓는 방식의 세례를 옹호하면서 개종자가 믿음이 있다면 세례를 주는 방식은 사소한 문제라고 지적한다.[각주:12]

 

 따라서 초대교회 당시에는 반드시 침수의 방식으로 세례를 주었던 것은 아니며,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유연한 방식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성경문화배경사전」에서는 성경 시대 당시 세례가 물을 뿌리는 "살수례", 물을 머리에 붓는 "관수례", 물에 몸을 완전히 잠기게 하는 "침수례"의 3가지 방식으로 존재했다고 말한다. 바빙크는 일반적으로 침수의 방식이 기본 원칙인 것은 맞으나, 13세기까지 침수 방식의 세례와 뿌리는 방식의 세례가 함께 나타났다고 지적한다.[각주:13] 가톨릭의 경우 이것은 뿌리는 "살수례"로 점차 굳어졌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반대로 "3번 침수하는 방식"을 아직도 고집하고 있다.[각주:14]

 

 만약 우리가 초대교회가 세례를 어떤 방식으로 했는가를 정말 엄격히 지켜야 한다면, 디다케가 제시하는 내용인 "흐르는 물"에 침수하는 방식을 고수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관습대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 번 침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침례교에서는 이렇게까지 하진 않는다. 대침 역시도 "세례가 아니라 침례!"라고 외치면서도 단지 몸을 완전히 잠기게 할 뿐이지, 초대교회의 관습 그대로를 시행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심지어 초대교회에서도 침수 방식을 절대적으로 고집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도들은 "침수례"의 어떤 방식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그것은 그저 수단일 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상황과 여건에 따라 유연하게 물을 뿌리기도 하고 붓기도 하는 등의 방식도 겸하여 사용한 것이다. 만약 대침의 주장대로 가톨릭 등의 교단들이 침수 방식을 사용하지 않았기에 오류가 있는 것이라면, 대침은 사도들과 초대 교부들 역시 오류가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침수의 방식을 고집할 정도로 편협하고 배타적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각 신자들의 상황에 따라 기독교적 사랑을 드러내기로 결정했다. 수단은 수단으로 남아야 한다. 목적이 수단에 의해 희생당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세례 받는 모습
세례 받는 모습

 

 

 


 

 

 

 

3. "밥티조(βαπτίζω)"나 "밥토(βάπτω)" 및 로마서 6장과 골로새서 2장의 세례에 대한 내용


 흔히 침수 방식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헬라어 "밥티조(βαπτίζω)"나 "밥토(βάπτω)"에 호소하면서 이것이 "잠기다", "침수하다"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세례를 할 때에 반드시 몸이 물에 잠겨야 한다고 주장하곤 한다. 이 같은 주장은 대침뿐 아니라 근본주의 진영이나 보수적으로 성경을 독해하는 거의 모든 진영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 같은 주장을 무조건 수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 "밥티조(βαπτίζω)"의 어근인 "밥토(βάπτω)"는 "담그다"라는 의미가 유일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적시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각주:15] 따라서 "밥티조(βαπτίζω)"는 반드시 물속에 완전히 잠기게 하는 의미를 뜻하기보다는, 물에 잠기게 하든 아니면 물을 위에 붓든지 해서 대상을 물들게 하고 적시게 하는 것이다. 또한 학자들은 신약성경에서 "밥티조(βαπτίζω)"가 언제나 물에 침수시키는 용어로 사용된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 지적한다.[각주:16] 즉, "씻다", "목욕하다", "정결 예식을 하다" 등의 의미로도 당시에 통용되었다.

 

 「스트롱코드 히브리어, 헬라어사전」에서는 "밥티조"의 어원인 "밥토"에 대하여 "잠그다, 담그다" 외에 "적시다, 물들이다, 찍다, 뿌리다"를 제시한다.[각주:17] 그러면서 눅 16:24와 요 13:26, 그리고 계 19:13의 본문들에도 "밥토"가 사용되었다고 명시한다. 이는 「BDAG」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거기서 "밥토"는 "물속에 넣다, 담그다, 잠그다" 외에도 "물들이다"의 의미가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밥티조"의 의미 역시 유대교에서는 "씻다"로, 기독교에서는 "세례를 베풀다"로 제시될 수 있다.[각주:18]

 

 따라서 "밥티조"나 "밥토"의 의미에 호소하여 세례가 반드시 침수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밥티조"는 "담그다", "적시다", "물들이다"의 의미가 있고 여기에서 종교적 의미의 "정결 예식으로 씻다"와 "세례를 베풀다"라는 의미가 나왔다고 여기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밥티조(βαπτίζω)"는 사도 시대에 이미 "세례를 베풀다"를 뜻하는 전문용어가 되어 있었다.[각주:19] 그러므로 "밥티조(βαπτίζω)"가 세례를 의미하는 문맥에서 억지로 무리하게 "담그다"의 의미를 따로 분리하여 강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 외에도 혹은 로마서 6장 1-6절의 내용이나 골로새서 2장 12절의 구절에 호소하여 침례교파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이론, 즉 물에 침수할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며 물에서 나올 때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을 뜻하므로 세례는 침수의 방식을 사용하여야 가장 알맞다는 주장이 있다. 이것은 대침뿐 아니라 침례교파에도 일반적으로 퍼져있는 가르침인 것 같다. 소수의 학자들 중에서도 이를 지지하는 경우가 있는데, 웨인 그루뎀 역시 자신의 조직신학에서 이것을 강력하게 옹호한다.[각주:20] 그러나 대부분의 신약학자들은 해당 본문의 주해에서 물 안에 침수됨과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적용할 만한 근거는 없다고 입을 모은다.

 

 쟁점은 해당 본문, 곧 롬 6:4와 골 2:12의 본문의 헬라어 원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먼저 로마서 6장 4절의 내용을 먼저 보자. 바울이 "장사되다"로 활용한 "συνετάφημεν(쉬네타페멘)"이 과연 "세례(τοῦ βαπτίσματος; 투 밥티스마토스)"라는 단어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즉 이 구문은 물에 침수될 시에 예수님과 장사되고 물 밖에 나올 시에 부활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가? 더글라스 무(Douglas J. Moo)는 이 문제에 대하여 전치사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각주:21] 로마서 6장 4절의 본문에서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는 '장소'가 아니라 '수단'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세례를 받음으로"는 헬라어로 "διὰ τοῦ βαπτίσματος(디아 투 밥티스마토스)"라 기록되어 있는데, 전치사 "디아(διὰ)"와 속격인 "투 밥티스마토스(τοῦ βαπτίσματος)"가 결합하여 수단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전치사 "디아"는 속격과 결합할 때 "~을 통하여", 혹은 "~을 수단으로 하여"의 의미를 나타낸다는 것을 고려하라.

 

 그러므로 여기서 바울이 뜻하는 바는 개종자가 물에 침수될 때에 그곳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물에서 나올 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한다거나 하는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해당 본문은 세례 시에 침수를 해야 하는가 아닌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며, 사실 사도 바울은 이 시점에서 침수냐 아니냐에는 관심도 없다. 그는 그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는 과정에서 "세례"를 '수단'으로 제시할 뿐이다.

 

 골로새서 2장 12절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다. "세례로"라고 번역된 "엔 토 밥티스모(ἐν τῷ βαπτισμῷ)"의 전치사 "엔(ἐν)" 역시 문맥상 수단의 뜻으로 쓰였다고 봐야 옳다. 여기서도 바울은 "장사되고", "일으킴을 받는 것"을 세례와 연관 짓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한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ἐν ᾧ; 엔 호)"의 "그(ᾧ; 호)"는 어떤 침례교파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침례"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고 봐야 한다. 오브라이언(Peter T. O'brien)은 비슬리 머레이(Beasley Murray)의 해당 견해를 비판하면서, "엔 호"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미할 수 있다고 보고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훨씬 일관성 있다고 지적한다.[각주:22]

 

 그러므로 바울은 분명하게 "세례"를 '수단'으로 인식하면서 "장사됨" 및 "부활함" 역시 "침례"와 연관 짓는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 지어서 설명한다. "침례"에서 물에 들어갈 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물에서 나올 때 그와 함께 부활한다는 내용은 성경에서 지지하는 사상이 아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한다고 말하지, "침례 안에서"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로마서나 골로새서를 통해서 신자가 물에 침수되고 나오는 의식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다고 해석할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웨인 그루뎀이 "세례"를 물에 침수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하며 제시하는 논점은 다수의 학자들을 따라 마땅히 거부되어야 한다.

 

 

 


 

 

 

결론


 성경은 물에 완전히 잠겼다가 나오는 것이 세례의 본질이라 말하지 않는다.[각주:23] 성경은 세례를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양식을 정하고 있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이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 없다. 그런데도 세례는 틀렸고 침례가 맞다는 식으로 말하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을 벗어나는 것이며, 비본질적인 문제로 무의미한 분쟁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바울은 디도서 3장 9절에서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고 하면서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라고 말한다. 내 생각에 세례의 방식 중 하나인 침수례는 세례의 기본 원칙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살수례나 관수례를 잘못된 것이라고 배타적으로 판단하면서 무의미한 변론을 일으키는 것은 무익하고 헛된 것이다.

 

 심지어 침수례를 강력히 옹호하는 웨인 그루뎀조차, 세례를 침수하는 방식으로 하느냐 마냐의 문제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분열되거나 논쟁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세례가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핵심 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지적한다.[각주:24] 그러므로 가톨릭의 살수례든, 고대 교회의 관수례든, 침례교파의 침수례든 우리는 모두 존중하고 기독교 역사에서도 초기부터 함께 존속해 왔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성경의 관점에서도 침수례이냐의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상황과 여건에 따라서 세례는 다양한 양식을 띨 수 있고, 그것이 권장된다.

 

 


 

 

 

 2018년 5월 14일 국민일보에는 "세례가 아닌 살인미수"라는 제목의 기사가 올라왔다.[각주:25] 그리스 동방정교회의 대주교가 갓난아기를 세 번 빠르게 물에 담갔다 빼기를 반복하는 영상이 논란이 되었기 때문이다. 2017년에는 조지아의 동방정교회 수장인 엘리아 총대주교가 같은 방식으로 갓난아기에게 세례를 주어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기사에는 한 영상도 게시되어 있는데, 영상 속 주교는 아기를 머리, 발의 순서로 매우 빠르게 휙휙 뒤집으면서 물에 담갔다 뺐다를 세 번 반복한다. 이 영상을 보는 사람들은 아마 누구나 아동학대로 이것을 볼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아이를 이런 방식으로 빠르게 돌리며 물에 담그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위의 총대주교는 동방정교회에서 관습으로 내려오는 세례 양식에 충실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잘못된 편협함은 아이에게는 깊은 트라우마로 작용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것은 명백한 정서적, 신체적 아동학대에 해당하며, 기독교의 바른 핵심 가치를 보여준 것이 아니다. 어떤 한 교리, 가르침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은 이와 같은 극단적인 양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대침 분들은 스스로 한 번 생각해 보라. 세례를 할 때에 물에 완전히 담그냐 마냐가 도대체 기독교 세계 안에서 무엇이 중요한가? 어떤 심각한 중요성이 있길래 설교에서 세례는 틀렸고 침례가 맞다며 침례를 시행하지 않는 다른 교단을 공격하는 것인가? 

 

 나는 세례는 어떤 양식으로 베풀어지든 그것이 상황과 여건에 맞는 적절한 것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세례를 어떻게 시행하느냐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세례를 통해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선언되며 개종자로 하여금 헌신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식을 보면서 우리가 더욱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신앙 공동체와 내 이웃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단 생활!>

 

이단 생활! -프롤로그- (기독교 이단 웹툰)

기독교 이단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일상(?) 웹툰입니다. 이단 생활! -1화- (기독교 이단 웹툰) littlebiblicaltheology.tistory.com

littlebiblicaltheology.tistory.com

 

  1. Craig S. Keener, The Gospel of John: A Commenatary II, trans. Ok Yong Lee, CLC, 2018, p. 1337. [본문으로]
  2. Ibid., p. 1488. 각주 203의 Sanders의 주장을 보라. [본문으로]
  3. Philip S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1, trans. Gil Sang Lee, CH북스, 2014, p. 375. [본문으로]
  4. Babylonian Talmud, Yevamot, 46a. [본문으로]
  5. Ibid., 71a. [본문으로]
  6. Philip Shaff, op. cit., p. 375. [본문으로]
  7. 우리는 팔레스타인 지역이 그다지 물이 풍부한 곳은 아니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본문으로]
  8.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trans. Su Kyeong Kweon & Sang Won Lee, CH북스, 2015, p. 893. [본문으로]
  9. Philip Shaff, op. cit., p. 374. [본문으로]
  10. 위의 미크바옷의 원칙과 비교해 보라. [본문으로]
  11. 디다케 7장을 보라. [본문으로]
  12. Philip S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2, trans. Gil Sang Lee, CH북스, 2016, p. 70. 각주 64를 보라. [본문으로]
  13. H.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vol. 4, trans. Tae Hyeon Park, 부흥과개혁사, 2016, p. 609. 그는 물을 붓는 방식은 고대에만 있었다고 말한다. [본문으로]
  14. Philip Shaff, op. cit. 2., p. 242. [본문으로]
  15. Louis Berkhof, op. cit., p. 892. [본문으로]
  16. Ibid., p. 893. [본문으로]
  17. ed. Min Seon Kim, Strong's Exhaustive Concordance of the Bible, O. N. O. 편찬위원회, 2020, p. 824.의 911.을 보라. [본문으로]
  18. W. Baur, BDAG, trans & ed. Jae Gwon Kim, Word of Life Press, 2017, p. 249, 251. [본문으로]
  19. Douglas J. Moo, The Epistle to the Romans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trans. Ju Cheol Son, 솔로몬, 2015, p. 497. [본문으로]
  20.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Zondervan, 2000, p. 969. [본문으로]
  21. Douglas J. Moo, op. cit., p. 500. 각주 48도 참고하라. [본문으로]
  22. Peter T. O'brien, Colossians and Philemon (Word Biblical Commentary), trans. Il O Jeong, 솔로몬, 2008, p. 245-246. [본문으로]
  23. Louis Berkhof, op. cit., p. 891. [본문으로]
  24. Wayne Grudem, op. cit., p. 982. "In fact, most Christians seem to realize that baptism is not a major doctrine of the faith." [본문으로]
  25. https://m.kmib.co.kr/view.asp?arcid=0012352842 [본문으로]
반응형

이 글이 도움이 되었다면 ♡를 눌러 주세요. 익명성이 필요한 질문일 경우 Q&A 카페를 이용해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