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의 구원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의적 구원 확신이다.

대한예수교침례회에 대하여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의 구원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의적 구원 확신이다.

바잇 카탄 2024. 1. 9. 16:40

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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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예수교침례회(이하 대침)에 관한 글을 쓰면서, 이제 슬슬 구원에 대한 문제를 다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침이 구원파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기 때문에 이 구원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대침 내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단체에 다양한 오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나오기 꺼려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가 이 구원, 곧 복음과 관련된 것 때문임을 생각할 때 이것을 다루는 것은 거의 필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흔히 인터넷이나 이단 비평 사이트 등에서 말하는 구원에서의 대침의 문제는 '구원받은 날짜, 시기에 집착한다'는 것과 '회개를 가르치지 않는다'의 두 가지인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에 대침에 계신 분들이 이 말을 들으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완고해지면서, 코웃음을 치며 '역시 우리에 대해 하나도 모르면서 비판만 하는군'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 이유는 이 두 가지의 오류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사안을 제대로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대침에 계신 분들은 위의 지적에 대해 이렇게 대처합니다. '구원받은 날짜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은 존재해야 한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교회 설교에서도 죄를 지으면 회개하라고 가르치는데 저렇게 비판하는 거 보니 역시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다.' 그리고 제가 경험했던 대침은 실제로도 구원받은 날짜에 그리 집착하지 않게 변했습니다. 물론 과거에는 좀 더 많이 날짜에 집중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또 실제로 설교에서 회개를 가르치며, '생활 구원'이라는 교리 아래에서 성화에 대해 배울 때에 죄를 회개하고 더 이상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때문에 구원파에 대한 일반적인 비평들이 대침 사람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들은 그들을 더더욱 대침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만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침 내에서 정통 교단 사람들은 대침에 대해 하나도 모르면서 이단이라고 비판한다는 교육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도 정통 교단 측에서 대침에 대한 무지를 보여준다면, 대침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단이라 비판받는 것은 전부 다 오해와 비방과 모함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이 더욱 공고해지기만 할 뿐입니다.

 

 이 밖에 '깨달음으로 구원 얻는다고 주장하므로 이단이다.'라는 설명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판에 대해 대침 사람들은 별 감흥을 못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설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예수님의 대속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라는 사실을 '믿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설교에서 '깨달음'이라고 말할 때에 이것을 '믿는다'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만약 어떤 사람이 대침을 향해 '깨달음으로 구원 얻는 것이므로 영지주의 이단이다'라고 주장한다면 대침 사람들은 정말 코웃음 치며 비웃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정통 교단이 대침에 대해 진단한 것들은 전부 다 허상이며 잘못짚은 것들일까요? 정통 교단이 구원파에 대해 느낀 알 수 없는 불편함은 단지 그들을 이단이라고 비방하기 위한 모함일 뿐일까요? 아닙니다. 저는 이것들이 정통 교단의 입장에서 구원파의 묘한 이상함을 알아차린 좋은 계기가 되는 시작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조금 피상적이었을 따름입니다.

 

 이제 이 주요한 세 가지 오류들을 하나로 관통하는 구원파 대침의 구원에서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제시하고자 합니다. 대침이 왜 정통 교단들을 비판하며 그곳에는 복음이 제대로 가르쳐지지 않는다고 말하는가도 이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또 대침 외부의 사람들이 처음에 대침의 가르침을 들으면 일반적인 복음의 가르침과 무엇이 다른지 쉽게 분별하지 못하는 것도 이것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침 사람들이 선민의식과 비슷한 우월감을 갖고 자기들끼리 똘똘 뭉치는 이유도 이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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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은 시점을 특정해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자의적 구원 확신 때문이다


 대침 구원관이 정통 교단들과 가장 첨예하게 갈리며, 정통 교단의 입장에서 느꼈을 이유 모를 불쾌감의 원인이 되는 것은 바로 "자기 확신", 곧 "구원 확신"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대침을 비판하는 위의 세 가지 주장들의 근본적 원인이 됩니다.

 

 먼저 대침에서 왜 구원받은 날짜, 곧 구원을 받았다는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한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대침에서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구원을 받았다는 '자각'을 한 시점이 있어야 한다는 일반적인 가르침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침 측에서는 정통 교단을 비판하면서 기성 교단들의 신자들이 구원받았던 경험이 없거나 혹은 잘 모른다고 대답한다며 이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자신이 언제 구원받았는가, 자신이 구원받았던 어떤 시점이 있는가를 모른다는 것은 구원받은 경험 자체가 없는 것이므로 이것이 곧 그들은 구원을 잘 모른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구원받은 시점'은 예수님의 대속을 믿기 시작한 바로 그 시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정통 교단과 대침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정통 교단은 예수님의 대속을 믿은 날을 구원받은 날이라고 섣불리 말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구원받을 것으로 '추정'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의 구원에 대해서 완전히 확신에 차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여도, 그 사람이 구원받았는가는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은 지속적으로 복음의 신앙 안에 머물며, 그 안에서 자라 가고, 인내하며, 회개하며,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점이나 날짜를 특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욱 많을 것입니다.

 

 반면에 대침은 예수님의 대속을 믿은 사람은 이미 구원받은 것이라 못 박습니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도 아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도 아니며, '구원을 이미 받았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의 구원받은 시점을 당연히 특정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대속을 믿은 그날이 바로 이 사람이 구원을 받은 날이 됩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은 자의적인 확신에 의해 수용되고 고백됩니다. 이제 대침의 이 사람은 정말 진심으로 자신이 그날에 이미 구원을 얻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다른 교회들도 다녀봤는데 이제껏 이 사실을 몰랐다며 기뻐하고 놀라워합니다. 이것을 보며 대침 사람들은 '음, 역시 우리 교회가 최고야. 다른 교회에는 복음이 없군.'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들이 생각하는 구원받은 시점이란 '자기 확신'에 근거한 것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의하면 어떤 사람의 믿음 고백은 그 자체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언제부터 구원의 길에 참여하게 되는지 우리는 사실상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혹 이 사람은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여긴 시점보다 훨씬 이후에 구원의 길에 참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대침은 이 모든 것들을 거의 고려하지 않고 단정해버린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대침은 이런 성급한 빠른 확신을 권장하며 바람직한 것으로 내세웁니다.

 

 그래서 대침 내에서는 구원 의심 자체를 빨리 해결해야 할 상황이자 별거 아닌 사소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자매가 자신이 구원받았는지 의심된다며 수양회 등의 상담을 받는다면, 그 전도인은 전도집회에서 가르칠 법한 아주 익숙한 복음 내용을 설명해 주고는 '이것을 믿습니까?'라고 되묻습니다. 그러면 그 자매는 '네 믿긴 하죠. 그런데..'라고 대답합니다. 그럴 때 전도인은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교제에 더 붙어 있고 봉사에 적극 참여하면 그런 생각은 사라질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따위로 대답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믿으면 구원이므로, 이에 대해 더 생각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이들은 복음을 믿는다고 말해서 구원이라고 선언한 자들이 자기들의 교회에서 나가면, 그 사람은 구원이 애초에 아니었다고 재선언합니다. 즉, 분명 복음을 믿은 그 시점이 구원이라고 해놓고서, 또 다른 예외 경우가 발생하면 그 사람은 구원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구원받았다'라는 개념이 자의적인 '자기 확신'에 근거하고 있는 것임을 잘 보여줍니다. 정상적인 교회라면 어떤 사람이 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하면 '당신은 구원받았다'라고 성급하게 말해줄 것이 아니라 '당신은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다. 당신은 구원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정말 구원을 얻을지 우리는 알 수가 없으며, 당신 스스로도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 우리는 단지 당신의 믿음의 고백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라고 말해줘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파에 빠지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자기 확신'의 편리함과 명쾌함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교단들에서는 제공해 주기 힘든 확실함, 분명함, 명쾌함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자신이 고민하는 가장 큰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어 버리는 경험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선사합니다. 그래서 대침에서 구원받았다는 선언을 들을 때는 마치 모든 죄 짐이 다 떨어지고 종결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대침에서 소위 '죄의 문제가 해결됐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도 이것에 있습니다. 사실은 성급한 자기 확신에서 나오는 착각일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정통 교단을 비판하는 이유도 이것에 있습니다. 대침 사람들은 '아니, 믿으면 구원인데 왜 구원 받을지는 아직 모른다고 말하는 거야? 정통 교단은 복음을 제대로 모르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들은 대침에서 나간 사람들은 애초에 구원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구원 역시 애초에 아닌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일까요? 왜 자신들의 구원은 확실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대침에서 나간 사람들의 구원은 그렇게도 쉽게 없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혹시 그들의 구원 여부는 무의식적으로나마 교회 출석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언덕 위의 교회

 

 


 

 

회개를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 역시 자의적 구원 확신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대침의 회개 문제가 정통 교단과 차이를 보이는 것 역시 이 '자기 확신'과 관련이 있습니다. 대침이 회개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비판을 받은 주요 이유 중 하나는 대침 측에서 먼저 회개 기도를 하는 정통 교단의 신자들을 향해 '저것 봐라. 구원받은 적이 없으니까 죄 용서해 달라고 회개 기도한다. 쟤네는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라고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대침에 계신 분들은 이런 내용의 설교를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입니다.

 

 대침은 정통 교단의 회개 기도, 죄를 용서해 달라는 부르짖음이 그들이 구원받지 않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에, 정말로 구원받았다면, 이제는 지옥 갈 두려움이 사라졌으므로 굳이 저렇게 용서해 달라고 빌 필요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저들이 저렇게 용서해 달라고 비는 것을 보니, 저 사람들은 죄 용서받은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네,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정통 교단과 대침을 가르는 선은 '자기 확신'이 극단적이냐 아니냐입니다. 정통 교단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믿는다고 말하는 모든 사람이 전부 다 구원받은 것이라 섣불리 판단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들을 신중하게 다뤄야 합니다. 믿음을 고백하는 신자들은 지속적인 회개와 믿음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믿음의 순수성을 증명하고, 인내하는 것을 통해 구원의 서정을 걸어갑니다.

 

 신약학계의 주요 가르침인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은 이 개념을 정말 잘 보여주는 구호입니다. 믿음을 고백하는 신자들은 잠정적으로 구원을 자신의 것으로 이미(already) 소유한다고 여겨집니다. 이것을 보증하는 것으로 성령이 주어집니다. 따라서 바울은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라고 고백합니다(고후 1:22). 왜냐하면 이 구원은 아직(but not yet) 완전히 우리의 것이 아니며, 미래에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대침에게 구원은 이미 받은 것이며, 신자들은 이것에 지나친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배웁니다. 따라서 회개 기도는 이들에게 다만 징계를 받지 않기 위한 방편일 뿐이며,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측면에서만 논의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구원을 확실히 받았기 때문에 이제 조심해야 할 것은 죄를 지었을 때에 징계를 받느냐 안 받느냐의 여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같은 가르침이 구원파 외에도 오늘날 한국 교회 내에서 꽤 널리 퍼져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이미 천국에 갈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죄를 지었을 때에 징계만을 받을 뿐이며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의심하거나 고민하지 않는 행태들을 우리는 쉽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전반적인 도덕적 해이는 바로 이런 극단적인 사상의 토양에서 심기고 자라난 것입니다.

 

 대침의 이런 가르침 덕분에, 대침의 신도들은 정통 교회의 신자들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용서해달라고 슬피 우는 것을 보고 마치 공감 능력을 결여한 사람과 같이, 저들이 구원받은 경험이 없어서, 죄 용서받은 적이 없어서 저러는 것이라며 조롱합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이후에 하는 회개는 징계받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측면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정통 교단의 입장에서 대침은 사실상 믿음 이후의 회개를 부인하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회개는 신자의 핵심적인 특징이며, 구원에 이르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보이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단지 이미 구원받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단편적인 측면에서만 논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분명하게 이 근심하게 하는 지속적인 회개가 고린도 교인들을 구원에 이르게 만든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고후 7:10).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는 날까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완전히 확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이 아니며, 오직 구원의 여부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이것은 일종의 구원 확신과 구원 의심 간의 긴장 관계가 존재하는 셈입니다. 즉 우리는 잠정적으로, 간접적으로, 거울로 보는 듯이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 우리는 그 즉시 돌이켜 자신의 상태에 대해 의심해 보고 생각해 보며 우리가 지금은 믿음을 고백하지만 언제든지 신앙 밖으로 나가떨어질 수 있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벧후 3:17; 히 3:12; 고전 9:27).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나가기 위해 지속적으로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빌 2:12).

 

 

 

복음을 자꾸 깨달으라고 말하는 것도 자의적 구원 확신 때문이다


 이 쯤되면 이제 세 번째 오류인 '깨달음으로 얻는 구원' 역시도 지나친 '자기 확신'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말하는 깨달음은 '예수님의 대속을 믿으면 이미 구원받은 것이다'라는 자기 확신의 명제를 아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대침 사람들은 '깨달음'을 '믿는 것'이라고 여긴다고 설명했는데, 깊이 들어가 보면 사실상 그렇지 않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만약 그들이 말하는 '깨달음'이 정말 '복음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면, 정통 교단들을 비판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통 교단들도 모두 복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정통 교단 신자들이 '예수님을 믿지만 아직 저는 구원에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고백하는 것을 두고 그들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고, 그들이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이들이 말하는 '깨달음'의 범주란 '믿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이미 구원받았다는 확신' 자체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 기성 교단들을 향해 복음을 깨달으라고 외칩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과 같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는 것이 아니며, 예수님과 같이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에 이른다고 외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을 믿은 사람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깨달으라는 외침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복음의 주요 내용이 아닙니다.

 

 복음은 '누구든지 회개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여 따르는 자는 구원에 이를 것이다.'이지, '이 복음을 믿는 자는 이미 구원을 얻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진짜 구원이다.'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대침 측에서 정통 교단 신자들이 구원을 자기들의 수준으로 지나치게 확신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직 복음을 깨닫지 못했다'라고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 확신' 자체는 복음의 내용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았다는 확신'을 믿는 것이 곧 복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확신이 명확해야만 복음을 제대로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런 복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간혹 고린도후서 13장을 가져오면서 확신이 있어야 구원이다라고 주장하는 대침 사람들도 있는데, 이것은 본문을 맥락과 무관하게 분절하여 읽은 해석의 오류입니다. 왜냐하면 해당 본문은 고린도 교인들 중 극단적인 자들이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상황에서, 동일한 잣대로 그들 스스로를 평가해 보라는 사도 바울의 도전이기 때문입니다(고후 13:5-6). 이 맥락은 엄밀히 말해 구원의 확신을 말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성경은 복음의 내용이 '구원 확신'의 내용을 포함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결론


 그러므로 대한예수교침례회의 구원관에서 가장 큰 핵심 문제점은 곧 '지나친 자의적 확신'입니다. 그리고 이 자의적인 확신이 없는 일반 교단들을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구원받지 않은 것이며 구원에 대해 모른다.'라고 비방합니다. 이들이 구원의 시점을 특정해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자기 확신에 근거합니다. 다른 교단들이 회개 기도하는 것을 보고 죄 용서받아본 적이 없어서 저러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자의적인 구원 확신에 근거합니다. 또 복음을 '깨달아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들의 자의적인 구원 확신과 관련이 있습니다.

 

 대침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미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면서도, 대침에서 탈퇴한 사람들을 향해서는 처음부터 구원이 아니었다고 비방합니다. 그렇다면 사실상 이들의 '구원 확신'은 철저하게 성경 본문에 근거했다기보다는 교회 안에 있냐 아니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혹은 이들의 구원의 상태를 증거 해주는 것이 교회 출석 여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복음을 믿으면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자의적으로 확신하면서도, 교회 활동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는 과정에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왜 정통 교단의 신자들이 자신들처럼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않는다고 해서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고 판단하며 조롱하는 것일까요? 자신들은 구원의 확실한 여부가 교회 안에 있느냐와 결부되어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같은 모순은 그들의 구원 확신이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교단의 자의적인 판단이나 선언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확신은 '지나친 자기 확신'이며, '자의적인 구원 확신'입니다. 

 

 만약 대침 내에서 이런 잘못된 자의적 구원 확신이 사라진다면, 구원 날짜를 추적할 필요가 없어질 것입니다. 또 정통 교단과 같이 죄 용서를 구하며 회개하는 것이 당연해질 것입니다. 더욱이 다른 교단들을 향해 '복음을 깨달으라'라고 말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배타성이 사라질 것이며, 겸손한 마음으로 정통 교단에게 배우고 그들과 함께 교제하기 위해 이단해제절차를 밟을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성경을 신중하게 읽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구원에 대해 함부로 단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타인의 구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함부로 단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을 확신하는 부분에 있어서 성급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 모두가 동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대침에 계신 분들도 자신의 구원을 단정적으로 확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확실한 구원 날짜를 특정해 낼 수 없을 것이며, 죄를 지었을 때에 회개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나갈 것입니다. 또한 정통 교단의 신자들이 구원 확신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면서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서라고 비방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대침이 복음을 더 잘 가르친다는 잘못된 편견이 깨질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대침이 이단 판정을 해제할 의지를 보이지 않은 채 지속적으로 정통 교단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면, 굳이 그곳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 대침은 성경대로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잘못된 가르침을 수호하는 자존심에 의해 움직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성경의 가르침만을 따르고자 한다면, 자의적으로 쉽고 성급하게 구원을 판단하고 선언하는 대침의 비성경적인 가르침에서 탈출해야 할 것입니다.

 

 반면에 그곳에 남아 있으려 한다면, 당신은 그들이 성경과 다르게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대침을 위해서 이것을 수용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선택은 각자의 몫입니다.

 

 


 

추가) 자의적 확신이 어떻게 정통 교단과 갈라서고 전도 방식에 차이를 주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아래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단 생활! -30화- 이단의 전도 방법 (기독교 이단 웹툰)

이단 생활! -29화- 성경에는 다 짝이 있다 (기독교 이단 웹툰)이단 생활! -28화- 대기업 회장의 24가지 질문 (기독교 이단 웹툰)이단 생활! -27화- 전도집회 1일차... 개노답 믿음 삼형제! (기독교 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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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생활! 보러 가기>

 

이단 생활! -프롤로그- (기독교 이단 웹툰)

기독교 이단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일상(?) 웹툰입니다. 이단 생활! -1화- (기독교 이단 웹툰) littlebiblicaltheology.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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