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대한예수교침례회(이하 대침)와 정통 교단이 교리적인 논쟁에서 부딪히는 지점 중 하나는 히브리서 9장 12절 본문의 소위 '영원한 속죄' 관련 내용이다. 주로 정통 교단 측에서는 대침의 영원한 속죄 가르침을 공격하는 편에 속하고, 반면에 대침 측에서 영원한 속죄 교리는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며 신도들에게 설교에서도 자주 언급할 정도로 핵심 교의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대침의 영원한 속죄 교리에 대한 간략한 글을 써보고자 한다.
본래는 매우 긴 본문으로 작성할 생각이었으나, 이전에 썼던 대침 구원론의 자의적 확신의 글과 내용이 중복되는 것이 많을 것이기 때문에 간단하게만 살펴볼 생각이다. 왜냐하면 대침 구원론의 많은 부분들은 그 내막을 알게 되면 신도 개개인의 자의적인 확신과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해당 성경 본문의 헬라어 원문의 해석과 묵상 역시 함께 올리려 했으나 글이 너무 길어지고 논점에서 벗어날 것 같아 차후에 따로 글을 쓰도록 하겠다.)
참고로 여기서는 속죄의 범주와 효력에 대한 각 교단 간의 교리적 차이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기로 하겠다. 칼빈주의에서는 제한속죄를 지지하고, 그 밖의 교단들에서는 보편속죄를 지지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의 차이는 대침의 영원한 속죄 교리를 논하는 것에 있어서 필수적인 논의는 아니다. 사실 대침은 속죄에 대해 그렇게 심도 있게 가르치는 교단은 아니다. 정통 교단들이 대침을 공격하는 부분 역시 속죄 자체에 대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원한 속죄라는 본문에서 자의적인 확신을 이끌어내기 때문에 비판한다. 반면에 대침은 이것을 속죄 교리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정통 교단들이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공격한다.
그래서 대침의 신도들과 정통 교단의 신자들이 해당 부분에 대해 대화를 나눌 때에는 강조점이 다르다보니 거의 언제나 평행을 달린다. 이번 글은 이것에 대해 알아보고, 이렇게 된 이유가 구원파 특유의 자의적 구원 확신과 관련이 있음을 보일 것이다.
대한예수교침례회의 영원한 속죄 교리
대침의 속죄 교리가 어째서 '영원한 속죄' 등의 구호로 강조되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교리의 핵심이 '시간적인 영역'에 있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보통 일반적인 교단들에서 영원한 속죄를 다룰 때에는 "영원한"을 뜻하는 "아이오니오스(αἰώνιος)"가 "완전한"이라는 뜻에 방점이 찍힌다고 여긴다. 성경의 "영원" 개념은 시간의 연장이나 시간의 전체 부분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시간을 초월하고 완전한 종말적 완성을 강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그러나 대침에서는 보다 시간적인 측면에 집중하는 편이다. 그래서 대침의 설교들에서 영원한 속죄는 "과거, 현재, 미래의 죄"와 함께 등장하여 설명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대침에서의 영원한 속죄는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가 전부 다 사해진다고 가르친다. 더 정확히는, 이미 모든 사람들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는 사해진 상태에 있다(보편속죄를 지지함). 이 사실을 믿느냐 마냐가 각 개인의 구원을 결정한다. 어떤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면 이것은 그 사람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이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모두 사해진 사실을 믿는다면, 이 사람은 구원받은 것이다.
정통 교단이 지적하는 내용
이제 정통 교단에서 대침을 비판하는 내용은 속죄의 효력에 있어서 문제점을 찾아서가 아니다. 정통 교단의 교리들을 살펴본다면, 그 어떤 교단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범위와 효력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정통 교단들은 영원한 속죄의 범주와 효력이 완전하며 모든 것을 아우른다고 말한다. 시간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말이다.
문제는 이것을 '나의 구원의 확신'으로 가져올 때 발생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완전한 속성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구원에 있지 못하고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영혼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속죄의 효력의 영원한 특성과 어떤 한 개인이 이 속죄의 효과를 누리는 것은 별개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마 이 부분은 구원파 교단들 역시 동의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렀을 것이다. 즉 이 경우 보편속죄뿐만 아니라 보편구원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구원파도 동의하듯이, 성경에 의하면 이것은 옳지 않은 관점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의 선택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력을 적용 받느냐 마냐를 결정하는 요인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죄 사함을 받느냐 마냐는 믿음의 영역에 달려 있는 것이지, 영원한 속죄의 영역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야 한다.
그런데 이 믿음은 일종의 불확실한 요소를 내포하는 개념이다. 어떤 사람이 복음을 믿고 참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성령의 열매로 보이는 것들을 많이 맺고 교회에서 열심히 생활한다고 해도 우리가 이 사람이 참으로 구원받았다고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차후에 이 사람이 신자가 아닌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각 교단마다 이 사람이 본래부터 참 믿음이 아니었다고 설명하거나, 혹은 이 사람이 믿음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통 교단들은 이 사람의 구원을 완전히 확신할 수 없다고 여긴다.
이 구원의 미묘한 불확실성은 신자 스스로도 자각하는 바이기도 하다. 종교 개혁 이후 정통 교단은 가톨릭과는 다르게 신자 개인의 구원 확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통 교단들은 신자 스스로도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즉, 속죄의 효력이 영원하고 완전하더라도, 이것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단정적으로 확인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내가 믿는 것이 정말 구원 얻을만한 믿음인지 그것은 확실하게 단언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통 교단의 신앙생활은 자신의 믿음을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생활하는 삶을 포함하기도 한다. 속죄의 효력은 영원하고 완전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적용될지를 완전히 단정적으로 알 수 있는 직접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속적인 회개와 믿음이 삶 가운데 필요하다.
대한예수교침례회의 자의적 확신
그런데 대침은 이것을 단정적으로 확인해준다. 영원한 속죄, 단번에 얻은 죄 사함을 믿는다면 이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는 사실상 모두 용서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 구원을 얻게 할 단회적 회개는 필요하지 않다. 오직 이미 얻은 구원의 관계 속에서의 죄의 자백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면서 대침은 이 "미래의 죄"에 시선을 집중한다. 대침에서는 암묵적으로 정통 교단의 신자들이 과거와 현재의 죄는 사함을 받는다고 믿지만 미래의 죄는 자신의 회개의 공로로 구원을 얻어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았다고 여긴다(그런데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통 교단 신자들이 끊임없이 회개 기도를 하고 죄 용서를 구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미래의 죄가 예수님의 속죄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착각한다. 그래서 대침이 "미래의 죄"를 그렇게 강조하는 것이다.
대침이 자신들 외에 복음을 제대로 가르치는 곳이 거의 없다고 여기는 것 역시 이런 생각 때문에 생겨난다. 영원한 속죄라는 개념에 집착하는 것도 그렇다. 23년 11월 5일자 설교에서 대침의 L 목사는 현대 이스라엘에 있는 교회들이 이 영원한 속죄에 대해 모른다며 구원받은 사람이 얼마 없다고 묘사한다. 그들에게는 '영원한 속죄'는 어떤 한 사람의 구원을 점검하는 사상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 외의 대부분의 교단들은 이것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대부분의 정통 교단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력이 영원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을 신자 개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에 있어서 불확실함이 남는다는 것 역시 동시에 인정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나의 모든 죄를 사할 수 있다는 사실과, 실제로 나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고 안전하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가 아니며, 별개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대침과 정통 교단의 구원론의 결정적인 차이는 '자의적 구원 확신'의 여부이다. 이들이 다른 교단들에서는 영원한 속죄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실제로 다른 교단들이 이것을 가르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영원한 속죄를 신자 개개인에게 적용하여 '나의 죄의 문제가 완전히 종결되었다는 사실'을 가르치지 않아서이다. 즉 정통 교단들이 신자들에게 자의적인 확신을 심어주지 못했기 때문에 영원한 속죄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이다.
만약 대침에서 정말로 속죄의 범주와 효력의 영원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면, 정통 교단을 비판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통 교단의 교의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주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그 어떤 것에도 제한 받지 않는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반면에 대침이 정통 교단들을 향해 영원한 속죄를 깨닫지 못했다며 비판하는 것은 이것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오히려 대침이 요구하는 것은 즉, 신자 개개인이 '나의 죄는 영원히 용서받았고 이미 종결되었다'라고 생각하는 자의적 확신이다.
정리하자면, 대침의 '영원한 속죄를 깨달음'은 속죄의 효력이 영원함을 깨닫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정통 교단을 비판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영원한 속죄의 효력이 '나'에게 확실히 적용되었다는 자의적 확신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정통 교단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를 믿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셈이다. 이것에서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가 나에게 적용되었다는 확신 자체'를 믿는 것을 요구한다.
간혹 정통 교단 신자들의 경우 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하더라도 자신의 죄의 문제가 완전히 종결되었다고 단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구원의 확신은 주관적인 영역에 어느 정도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내용은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이지, 이 속죄가 나에게 백 퍼센트 적용된다는 구원의 확신을 믿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의 믿음이 진실된 것인지 우리는 확실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대침 및 구원파 교단들은 정통 교단의 신자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보고 '영원한 속죄를 깨닫지 못했으므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라고 설교에서 가르친다. 그들의 무의식 속에서는 복음을 믿는다는 것이 곧 구원의 확신을 믿는 것과 거의 동일하게 여겨진다. 그들이 말하는 영원한 속죄를 깨달음이란 영원한 속죄의 효력이 나에게 백 퍼센트 적용된다는 자의적 확신을 갖는 것을 뜻한다(내가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라고 무작정 간주하는 것에 의해).
구원 확신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
이런 극단적인 자기 구원의 확신이 구원파가 최초인 것은 아니다. 구원파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이에 대해서 이미 많은 신학자들이 지적한 바 있다. 루이스 벌코프는 개혁파 신앙의 신뢰가 죄의 용서의 확신에 기인한다고 말하면서도, 율법폐기론자들은 이러한 확신이 신앙의 본질의 전체라고 이해했다며 비판한다. 그래서 이들은 "신앙의 다른 모든 활동을 무시하고, 신앙을 단순히 '너희 죄가 용서되었다'는 명제에 대한 지적 수용이라고 이해했다." 1 아마 정통 교단 측에서 대침을 율법폐기론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이런 시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묘사는 어느 정도 구원파의 전반적인 문제점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들이 '영원한 속죄에 대한 깨달음', 곧 '영원한 속죄가 나에게 이미 적용되었다는 확신을 믿는 것'을 구원받은 자의 증거로 제시하는 점을 미뤄볼 때 이것은 대침의 문제점을 잘 드러내주는 지적이다. 2
바빙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전파되고 모든 사람이 이것을 믿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점에 호소하면서, 구원은 "그 누구도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속죄했으며 나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믿는 것으로 시작할 수도 없고 시작해서도 안 된다."라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의 '직접적 행위'와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믿음의 '반성적 행위' 사이에는 "내가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가? 나의 믿음이 참된 것인가?"라는 심각한 질문이 끼어들 수 있다. 3 4
정통 교단이 복음을 믿는 믿음에 구원의 확신의 요소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확신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이것은 주관적인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핵심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반율법주의의 잘못은 믿음 안에 확신을 포함시키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믿음 전체를 이 확신 속에 흡수시켜 다른 모든 믿음의 활동들을 부인하고, 따라서 믿음을 다름 아닌 '네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선언을 지성적으로 수용하는 것으로만 이해한 것이었다." 이것은 대침이 자신들의 교리인 '영원한 속죄를 깨달음(즉 자의적 확신)'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다른 교단들의 신자들을 향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고 배타적으로 여기는 현상을 잘 설명해 주는 대목이다. 5
결론
결론적으로 대침이 "영원한 속죄"를 강조하면서 정통 교단들을 비판하는 것은 오히려 대침의 교리에 오류가 있음을 드러내준다. 만약 그들이 말 그대로 영원한 속죄를 강조하고자 했다면, 즉 속죄의 효력이 영원하냐 아니냐를 논하고자 했다면, 정통 교단들을 비판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그들이 정통 교단 신자들 중 구원의 확신이 약한 자들을 보면서 "영원한 속죄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라고 지적하는 것은 그들이 강조하는 바가 영원한 속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속죄가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는 확신 자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확신 자체를 믿는 것을 구원받은 자의 확실한 표지로 요구하면서 자기들 교단의 신도들이 구원받았다고 단언하는 것은 이들의 교리가 신학자들이 지적한 반율법주의, 곧 율법폐기론의 오류에 가까움을 보여준다.
구원파 교단들이 구원파로 불리게 된 배경 역시 이 자의적 확신의 극단적인 양상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일반적인 교단의 신자들을 향해 "당신은 구원받으셨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전도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통 교단의 입장에서 자신이 구원받을지 받지 못할지를 자각하는 것은 주관적인 영역에 속한다. 따라서 이것을 확실하게 직접적으로 알 방법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구원파는 이렇게 완전히 확신하지 못하는 정통 교단들을 향해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고 말하며 영원한 속죄를 봐라,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는데 왜 계속 용서해 달라는 회개 기도를 하느냐라고 정당하지 못한 비판을 한다.
믿음은 확신을 포함하지만, 확신을 믿는 것이 믿음의 본질인 것은 아니다. 나에게 속죄의 효력이 적용된다는 확신 자체를 믿는 것으로 구원받은 자의 기준을 세워서는 안 된다. 속죄의 효력은 영원하고 완전하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것이 되느냐는 아직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영원한 속죄는 성경에 언급되어 있고 확실한 사실이다. 그러나 나에게 그것이 적용되었다는 것은 성경 본문에 나오지 않는다.
확신은 성경의 본문을 믿는 믿음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지, 확신 자체가 믿음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성경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 말했지, 스스로가 구원받았다는 사실 역시 믿어야 구원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대침은 이 두 가지를 혼동하는 것에서 오류를 범한다. 예수께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는 객관적 사실과 그 속죄의 효력이 나에게도 적용된다는 주관적 확신의 영역 간의 경계가 흐려진다. 그래서 영원한 속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객관적 사실), 자신의 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주관적 확신).
그러므로 대침 분들이 히브리서 9장 12절 등을 가져오면서 영원한 속죄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호소하는 것으로는 대침의 교리가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정통 교단이 지적하는 바는 성경에 영원한 속죄가 나오냐, 나오지 않냐가 아니라 그 영원한 속죄를 자의적 구원의 확신에 적용한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또 대침 분들이 정통 교단에서는 '영원한 속죄'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오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통 교단은 영원한 속죄에서 자의적 구원 확신을 추출해 내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정통 교단들의 조직신학은 속죄의 효력이 영원하며 완전하다고 한 목소리로 강조한다.
때때로 대침에서 나와 참된 교회를 찾아다닌다는 많은 사람들이 이 영원한 속죄 교리를 가르치는 교단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찾는 것은 영원한 속죄를 가르치는 교단이 아니라, 영원한 속죄를 각 개인에게 단정적으로 적용하는 자의적 확신을 가르치는 교단을 찾아다닌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사실 성경의 가르침을 찾아다닌 것이 아닌, 구원파의 교리를 찾아다닌 셈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도 대침의 구원론의 오류는 그들의 극단적인 자의적 확신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만약 이 자의적 확신이 사라진다면, 타 교단을 향해 구원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비방하는 행위 또한 중단될 것이며, 대침에만 구원이 있다는 주장 역시 힘을 잃을 것이며, 따라서 대침의 배타성이 사라질 것이다. 이 경우 대침은 겸손하게 정통 교단들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 지난날의 과오에 대해 사과하며, 그들에게 배워야 할 것이다. 대침 내에 있는 많은 신도들 역시 대침 밖으로 나가면 실족되는 것일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교회를 선택하며 바른 신앙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날이 오기를 소망하며 기도한다.
추가) 자의적 확신이 어떻게 정통 교단과 갈라서고 전도 방식에 차이를 주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아래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단 생활!>
-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trans. Su Kyeong Kwon & Sang Won Lee, Christian Digest Publishing Company, 2000, p. 759. [본문으로]
- Ibid. [본문으로]
- H.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vol. 4, trans. Tae Hyeon Park, Revival & Reformation Publishing, 2016, p. 128. [본문으로]
- Ibid. [본문으로]
- Ibid., p. 14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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