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대한예수교침례회(이하 대침)의 포도나무 비유를 교회와 과도하게 연결 짓는 해석은 이제는 너무나 유명하고 반박하는 글들도 많기 때문에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이미 많은 분들이 결론을 낸 문제에 숟가락 하나를 더 얹는 것과 같다. 그러나 대침을 논하면서 그들의 교회관의 핵심이 되고 설교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해당 본문의 해석을 간과하고 소홀히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렇게 펜을 들었다. 대침에서 신앙생활을 해보신 분들은 익히 잘 알다시피, 그들의 체계에서 교회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며 거의 모든 신자들이 교회를 신앙생활의 중심이자 핵심, 궁극적 실체로 여길 것을 강요받는다. 만약 대침에서 교회에 대한 부분을 제외한다면 그들의 설교단에서 행해지는 가르침의 대부분은 폐기될 것이다. 그 정도로 대침과 교회관은 매우 깊게 얽혀있다.
대침은 포도나무 비유에서 요한복음 15장 5절 말씀의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의 본문을 신자가 교회에 강력하게 붙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이후 이어지는 마른 가지를 불에 던져 사르는 등의 결론들(요 15:6) 역시 교회에 붙어 있느냐 마냐와의 관계에서 사고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전에 내가 썼던 글들 중 특히 배타성에 대해 논한 것에서 자주 이야기 하였듯이, 이들은 자기들의 교회 밖으로 나간 자들은 구원이 애초에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구원은 당연히 의심할 수 있으며 실족한 안타까운 영혼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고 속에서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은 교회에 붙어 있는 것과 사실상 동치이며, 교회에 붙어 있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 자들은 곧 포도나무에서 분리되어 마른 가지가 된, 그리고 모아다가 불살라지는 바로 그 가지들이기 때문이다.
이 해석에 대해 성경 본문을 통해 포도나무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정당한 비판을 가하면, 이들은 자신들도 포도나무를 교회라고 직접적으로 해석하지는 않는다고 대응한다. 오히려 포도나무는 예수님이 맞으나,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곧 교회 안에 거하는 것이므로, 사실상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은 교회에 붙어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제 이들의 주장의 핵심인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교회 안에 거하는 것과 사실상 같기 때문에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은 교회에 붙어 있는 것이라는 내용의 사상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해석한 것인가에 대해 성경 본문 자체와 1세기 팔레스타인 지역의 문화 배경 등을 통해 검토해 볼 것이다. 또한 아울러 포도나무 비유 내용과 주석을 제시하는 요한복음 15장 1-17절에 대한 간략한 해설 역시 살펴볼 것이다.
이 글이 대침 내에 출석하면서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의 해석이 어떤 수준인가를 궁금해하고 그에 대해 고민하는 많은 진솔한 분들과 대침 밖에서 그곳이 어떤 성경 해석을 하는 단체인가 알아보고자 하는 분들, 그리고 대침에 소속되어 있다가 지금은 탈퇴하여 성서신학의 관점에서 성경 본문이 이야기하는 포도나무 비유의 뜻은 무엇인가 고민하고 있는 많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성경에서 포도나무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을 의미
신학자들의 저서에서 포도나무 비유를 해설하는 내용들을 보면 가장 먼저 그들이 고대의 문헌들에서 포도나무가 어떤 의미를 함유하고 사용되었는가를 조사하고 그것이 성경에서 제시하는 포도나무 비유와 관련성이 존재하는지를 고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지중해의 고대 세계에서 포도나무는 올리브나무와 함께 매우 흔하게 재배되던 식물이었기 때문이다. 유대 지역은 말할 것도 없이, 갈릴리 지역의 많은 농부들은 하나의 식물을 전문적으로 재배하기보다 다양한 나무들을 식재하였고 포도나무 역시 이 중 하나였다. 1 심지어 지형에 따라 포도나무에 적합한 토양이 존재했고 포도나무만을 재배하는 농가들도 있었다. 2 이 때문에 고대 자료들에서도 포도나무는 매우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골 소재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설명하실 때에 포도나무를 가져오신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3 4
신학자들은 저마다 포도나무가 고대 세계에서 어떤 의미였는가를 조사하고 성경의 용어의 의미에 대해서도 고민하는데, 유월절 포도주와 연결하거나, 시편 80:14-15에 관한 탈굼의 해석에 기초하여 메시아와 동일시하거나, 시락서에 호소하여 지혜를 적절한 해석으로 제안하거나, 헬레니즘과의 연관성으로 헤라클레스(Heracles) 혹은 디오니수스(Dionysus)와 관련이 있다고 여기는 등 많은 해석적 시도를 하였다. 심지어 불트만(Bultmann)은 영지주의에서 포도나무를 참 생명나무로 보는 사상과 이것을 연관 짓는다. 5 6
그러나 성경에서 제시하는 이미지에 따라 포도나무(시 80:8-16; 사 27:2-6; 렘 2:21; 겔 15:2-6; 17:5-10; 19:10-14), 혹은 포도원(사 5:1-7)은 모두 이스라엘을 비유하는 것이라 여겨야 적절하다. 초기 유대교의 전승에서도 이스라엘을 포도원, 혹은 포도나무로 지칭한다(바룩2서 39:7; 바룩3서 1:2; 에스라4서 5:23 등). 이로 인해 포도나무는 마카비 시대 이후에도 동전 및 도자기류에 자주 새겨지던 형상들이었으며, 특히 요세푸스는 헤롯 성전 지성소 입구에 있던 큰 금으로 만든 포도나무에 대해 묘사한다. 7 이스라엘을 상징했던 이 포도나무는 매우 풍성한 형상이었으며 해마다 황금이 추가되어 계속 확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헤롯 성전의 자랑거리였던 이 포도나무에 대해 키케로(Cicero) 등의 이교도들은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8 9
동시에, 신학자들은 이 이미지가 성경에서 사용될 때에는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맥락에서 흔히 사용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국가 이스라엘이 포도나무로 비유되는 문맥에서 이스라엘은 거의 언제나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과 함께 등장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부패와 관련하여 쉽게 찾아볼 수 있다(사 5:1-7; 렘 2:21 등). 10 따라서 신약성경에서 포도나무를 제시할 때에는 선한 열매를 맺는 것에 실패한 이스라엘을 은연중에 암시하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즉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포도나무로 제시하는 본문은(요 15:5의 '나는 포도나무요') 참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과 대조되는 참된 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려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11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신약성경의 독자들이 비유로서 포도나무의 이미지를 만날 때, 그들은 자연스럽게 구약성경에서 역사적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포도나무의 이미지를 떠올렸을 것이라는 점이다. 아마 1세기 유대 지역에서 포도나무 형상이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사용되었던 것을 고려해 볼 때, 당시 유대인들은 포도나무와 국가 이스라엘을 연관 지을 때에 과도하게 그것의 부정적인 함의나 맥락을 염두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긍정적인 의미로나 혹은 부정적인 의미로나, 신약성경의 독자들은 예수께서 포도나무 비유를 가르치실 때에 역사적 이스라엘을 설명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포도나무인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참 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
모든 신학자들은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포도나무가 가리키는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거의 만장일치로 해석한다. 이것은 헬라어 문법과 문맥을 살펴보아도 매우 명백하기 때문에 학자들 간에 이견이 존재하기가 어렵다. 헬라어 원문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는 분명하게 "나는 ~이다"이며, 곧바로 뒤이어 주격 명사 "헤 암펠로스(ἡ ἄμπελος)"가 따라붙어 "나는 포도나무이다"라고 번역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여기서 "나", 즉 "에고(ἐγώ)"는 1인칭 단수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금 말하고 있는 화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해야 한다. 곧, "나, 예수는 포도나무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신학자들 역시 이 부분을 거의 설명하지 않고 넘어갈 정도로 당연하게 여긴다. 오히려 더욱 중요한 것은 과연 여기서 말하는 포도나무가 예수님께서 새로운 의미(즉 예수가 포도나무이다)를 부여하기 이전에 어떤 의미를 지녀왔느냐이다. 이것은 이미 위에서 역사 속의 국가적 이스라엘을 뜻한다는 것이라 지적하였다. 따라서 신학자들은 우리가 예수께서 포도나무인 이스라엘을 대체한다는 의미에 마땅히 집중해야 한다고 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므로 요한이 요한복음에서 제시하는 포도나무 비유는 마땅히 옛 언약의 시대가 지나가고 새 언약의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낡은 것이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고 변화되고 발전하며 혁신을 만난다는 점에서 기존의 이스라엘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체계로 변화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예수께서 "나는 포도나무다"라고 선언하실 때에는 이것이 단순히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예수께 붙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이스라엘이 가리켜왔던 실체가 이제 도래했고 이제 기존의 이스라엘의 역할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성취된다.
크레이그 키너(Craig S. Keener)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포도나무"라는 것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이스라엘의 포도나무 비유와 과도한 대조를 도출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경계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포도나무"라는 사실이 이스라엘 자체가 포도나무로 불릴 수 없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즉 이스라엘이 거짓 포도나무로 간주되어야 하는 극단적인 대조를 지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이스라엘이 여전히 "포도나무"로 불릴 수 있는 것은 맞지만, 그 보다 더 나은, 더 온전한, 더 참된 포도나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 이스라엘이 "포도나무"로 불린 것은 진정한 포도나무의 천상적 실체인 예수님을 바라보게 만드는 표상이 된다. 12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의 의미
추측하기로는, 이 지점까지는 큰 이견 없이 대침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도 동의할 만한 내용을 다룬 것 같다. 성경을 정직하게 해석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요한복음 15장의 본문에서 포도나무는 분명하게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으며 이것은 이제 역사적 이스라엘을 새롭게 대체하는 예수님의 새 언약을 뜻한다는 내용에 동의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대침은 포도나무를 직접적으로 교회라고 해석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포도나무가 예수님인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 즉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을 해석하는 시점에서 교회 안에 거하며 교회에 붙어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대침의 가르침이 성경 본문이 의도한 바와 갈라서는 예리한 지점은 포도나무를 무엇으로 해석하느냐이기보다는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 곧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인 셈이다. 그리고 이것에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에는 교회의 역할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사실상' 교회 안에 거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으므로, 따라서 이 본문을 교회 안에 거하는 것이라 가르칠 수 있다는 논리적 흐름이 존재한다. 과연 이 해설은 성경을 본문 그대로의 의미에 따라 가르친 것일까?
먼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 본문의 문맥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안에 거하라"는 헬라어 본문에서 "메이나테 엔(μείνατε ἐν)"으로 표현되며, 4절에서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 뜻하는 바로 처음 등장한다. 이것은 5절에서 또다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와 강력하게 결합하고, 6절에서는 밖에 버려지는 가지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을 비유하는 것임이 직접적으로 언급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설명을 통해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는 것이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잠시 7-8절에서 가지가 맺는 열매에 대해 설명하면서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고 구하는 것을 이루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것임이 선언된다.
그리고 다시금 9절에서 "메이나테 엔(μείνατε ἐν)"이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 곧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 거함"의 가르침이 처음에는 포도나무의 비유로, 그다음은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표현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가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지는 것에 주목하라. 이것은 4-7절에서 계속해서 이어지는 "메이나테 엔(μείνατε ἐν)"과 9절에서 설명하는 "메이나테 엔(μείνατε ἐν)"이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사실상 동일한 것을 순차적으로 상세하게 풀어 해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여기까지의 논의(4-9절)를 정리해 보자면,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는 것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을 뜻한다. 이제 10절에서도 "메이나테 엔(μείνατε ἐν)"을 사용하여,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연이어 설명한다. 그것은 "내 계명을 지키는 것"을 뜻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10절).
그렇다면 예수님의 계명을 무엇인가? 12절에서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 기독교인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바로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예수께서 주셨던 새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는 계명이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13-15절에서 "친구"에 대한 비유로 더욱 강력하게 연결 짓는다. 어떤 사람이 만약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준다면, 이것은 엄청난 사랑일 것이다(13절). 그렇다면 예수님의 친구는 누구인가? 곧, 예수께서 목숨을 내어줄 친구란 누가 될 것인가? 그들은 예수님의 명하는 대로 행하는 자들이다(14절). 그리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이제 "친구"라고 부른다(15절).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가르침을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두 알려주셨고, 이제 제자들이 그것을 따라 살아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신 것처럼, 그분의 친구들 역시 서로를 위해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 이 명령대로 행하는 자는 예수님의 친구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자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심으로 큰 사랑을 보여주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17절에서, 예수께서는 이 모든 비유를 풀어주시는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함이로라"
그러므로 그 어떠한 편견 없이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 비유의 성경 본문을 있는 그대로 해석한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i)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4-6절)
(ii)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9절)
(iii)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10절)
(iv) 예수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이다. (12절)
(i) 만약 어떤 사람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면 이것이 가장 큰 사랑이다. (13절)
(ii) 예수님의 명령대로 행하는 자는 예수님의 친구이다. (14절)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해설을 그대로 따라간다면,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결론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해설을 그대로 따라간다면,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라는 가르침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것은 필자만의 독단적인 해석이 아니다. 해당 본문을 주해한 학자들 역시 동일한 강조점을 갖는다. 비슬리-머레이(Beasley-Murray)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당연히 예수 안에 '거하는 일'은 더 나아가 예수의 계명을 준수하는 일을 수반한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께서 성부의 계명을 준수하시며 그의 사랑 안에 거하셨던 것과 같다." (강조는 저자의 것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라는 부가어가 중요하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타인들을 위한 죽음에서 드러난다는 의미를 포함하며, 따라서 신자들 가운데서 지켜져야 할 사랑의 표준을 드러낸다. 더 나아가 그 부가어는 (요일 4:19에서 다시금 확인되는 바와 같이) 그런 사랑의 동기와 원천이 우리를 자신에 국한된 이기적인 사랑에서 해방시키는 구속적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13
D. A. 카슨(D. A. Carson)는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강조한다:
"예수의 요지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은 반드시 하나님의 계시의 초점인 아들에 대한 사랑을 낳게 되고, 아들에 대한 참된 사랑은 반드시 그에 대한 순종을 낳게 되는데(14:15), 그에 대한 순종은 특히 새로운 계명, 곧 사랑하라는 계명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확증된다는 것이다(13:34-35; 15:12).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의 끊김 없는 연쇄를 통해서 다른 신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고, 그 사랑에 의해서 확증된다(참조. 요일 4:11-21)." 14
우리는 크레이그 키너(Craig S. Keener)의 다음과 같은 말에도 주목하여야 한다:
"사랑은 예수님 안에 남아 있는 것의 열매이면서(15:8), 또한 예수님 안에 남아 있기 위한 조건의 기능을 하는 계명이기도 하다(15:10, 12). 열매와 계명은 이처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이 연관성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바울 신학뿐만 아니라 요한의 신학에서도, '안에 머무르기' 위해 해야 하는 본질적인 일이 바로 열매라는 점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의 생명을 내려놓았던 것처럼(10:18; 14:31),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계명을 순종함으로써 이 사랑을 증명한다(15:10; cf. 14:15, 21; 15:14)."
"개신교(protestant) 학자들은 이 본문(passage)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순종해야 한다는 조건(condition)을 불편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내내 먼저 일을 시작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며, 하나님은 인간의 순종과 인내(perseverance)에 대한 반응으로 더욱 많은 사랑을 부어 주신다. 묘사되고 있는 것은, 앞서 언급된 것처럼, 공식(formula)이 아니라 발전하는 관계(relationship)인 것이다."
"그래서 서로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13:34-35; 15:10)." 15 16
여기서 "교회"에 대한 강조를 찾는 것은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인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에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의 설명만을 충실하게 따랐을 때, 교회에 대한 내용은 발견하기 어려워 보인다. 만약 여기서 억지로라도 교회에 대한 내용을 이끌어내야 한다면, 신자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행할 때에 교회라는 환경적 요소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교회를 억지로 도출해 내더라도, '교회에 붙어 있어야 한다', '교회에 붙어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따위의 해석을 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붙어 있는 것", "안에 거하는 것", "열매를 맺는 것" 등은 이 본문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행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에 의해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표현에서 교회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서로 사랑하라'에 방점이 있는 이 본문을 고린도전서 12장 27절의 몸-지체 비유, 에베소서 1장 15-23절의 몸-머리 비유와 함께 무리하게 엮어서 마치 하나의 본문인 것인 양 해석하는 것 역시 성경을 억지로 풀어내는 것이다(벧후 3:16). 왜냐하면 세 본문이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가 제각기 각각 다른데도, 이것을 모두 교회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의 문맥이나 내용을 전부 무시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선별하여 취급하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23년 7월 2일 자 L목사의 설교에서 이런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주제를 가진 본문이 뒤엉키는 기괴하고 혼란스러운 자의적 해석이 등장한다. 이것은 L목사가 성경을 해석할 때에 문맥이나 주제 등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보고자 하는 내용을 투사하여 무리하게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포도나무 비유는 바른 해석, 곧 다름 아닌 예수님 스스로의 해석에 의해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행하라는 내용으로 이해해야 옳다. 이 해석은 성경 본문을 편견 없이 바르게 읽고자 하는 모든 사람이 동의할 만한 내용인 동시에, 학자들 역시 동일하게 강조하는 내용이며,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15장 1-8절의 비유를 9-16절에서 직접 해설해 주신 내용이다. 이 본문을 교회에 대한 내용으로 읽는 것은 예수님께서 해설해주신 것을 무시하고 다른 것을 가져다 붙여 그 본래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참으로 베드로가 거짓 선지자들을 경계하면서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 것은 이단을 판가름하는 가장 좋은 시금석이다(벧후 1:20). 서로 사랑하라는 주제의 포도나무 비유를 교회에 대한 내용으로 둔갑시키는 것만큼 성경 본문을 사사로이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대침에 계신 분들은 대침의 이런 마구잡이의 난잡한 성경 해석이 바른 가르침이라 여기는 것일까?
모쪼록 그들이 성경을 잘 가르친다고 착각하는 많은 분들이 이 글을 통해 그런 망상에서 하루속히 벗어나길 바랄 뿐이다.
<이단 생활!>
이단 생활! -프롤로그- (기독교 이단 웹툰)
기독교 이단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일상(?) 웹툰입니다. 이단 생활! -1화- (기독교 이단 웹툰) littlebiblicaltheology.tistory.com
littlebiblicaltheology.tistory.com
-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NTC), trans. Mun Jae Park, Solomon Press, 2017, p. 950. 「성경문화배경사전」의 p. 1534 역시 참고하라. [본문으로]
- Craig S. Keener,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III, trans. Ok Yong Lee, Christian Literature Center, 2018, p. 2620. [본문으로]
- Ibid. [본문으로]
- D. A. Carson, op. cit. [본문으로]
- Craig S. Keener, op. cit., p. 2622-2624. [본문으로]
- George R. Beasley-Murray,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36 John 1-21, trans. Deok Sin Lee, Solomon Press, 2001, p. 529. [본문으로]
- Craig S. Keener가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III의 p. 2626 각주 38-42에서 제시하는 많은 참고문헌들. [본문으로]
- George R. Beasley-Murray, op. cit., p. 529-530. [본문으로]
- Craig S. Keener, op. cit., p. 2627, 그리고 각주 45를 보라. 비슬리-머레이와 마찬가지로, 크레이그 키너 역시 이 형상이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여긴다. [본문으로]
- D. A. Carson, op. cit., p. 952. [본문으로]
- George R. Beasley-Murray, op. cit., p. 530. [본문으로]
- Craig S. Keener, op. cit., p. 2629. [본문으로]
- George R. Beasley-Murray, op. cit., p. 532-533. [본문으로]
- D. A. Carson, op. cit., p. 966-967. [본문으로]
- Craig S. Keener, op. cit., p. 2650-2652. [본문으로]
- 키너가 "머무르기"를 강조하고, 이것을 지나치게 공식화하기보다 "관계"성에 주목하도록 만들고자 하는 것은 그가 여기서 새 바울관점의 논점들에 반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클레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키너는 은혜의 '우선성'을 강조하면서, 그 밖의 다른 요소들을 극대화하기를 거부하는 셈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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