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이하 대침)에서 생활할 때에 가장 인상 깊게 내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666표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리고 대침을 나와서 이리저리 방황하면서 가장 혼란스러워했던 부분 역시 666표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 정도로 대침의 666에 대한 해석은 건전한 해석, 혹은 성경만의 문맥을 통해 파악한 해석과는 많은 차이가 있고 또 극단적이며 과격하다. 동시에, 매력적인 부분이 있다. 이 때문에 대침을 탈출한 많은 분들 중에서도 아직까지 666의 이상한 해석을 버리지 못하고 비성경적인 해석을 따라가는 분들이 많다.
내가 "비성경적"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대침의 해석이 정말로 성경 본문과 아무런 관련성이 없기 때문이다. 대침은 666표를 마지막 때에 올 적그리스도라는 인물이 인류에게 강제로 부여하는 어떤 물리적 실체로 여긴다. 이것은 굳이 대침이 아니더라도 음모론과 종말론을 혼합한 교회의 경우에도 흔히 관찰되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대침의 7일 성경강연회를 들어보면 마지막 때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666표를 바코드 등과 동일시하여 사람들이 이마에 666이 그려진 바코드를 새긴 사진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 미국의 RFID 칩이나 베리칩 등 인간의 체내에 삽입하여 신분증 혹은 물건을 구입하는 등의 활동에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술들이 666표의 전신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석하는 근거는 성경에서 찾을 수 없는 것들 뿐이다. 성경은 666표를 바코드라고 말하지 않으며, 인간의 체내에 삽입하는 생체칩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666표를 그렇게 해석하는 성경적 근거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음모론과 같이 사람들이 사전에 생각한 편견에 의한 해석과 끼워 맞추기에 의존한다. 혹은 바코드의 기다란 막대 3개가 666으로 읽힌다는 낭설에 의존한다(근데 웃긴 것은 찾아보니 그런 것도 아니었다). 1 이와 같은 방식으로 대침의 어떤 전도인은 미국의 에너지 드링크 로고에서도 666이라는 표기를 찾아내는 엄청난 능력을 보여준다. 대침에서 나오고 나서 나는 음모론자들의 홈페이지 등에서 대침이 하는 주장과 꼭 닮은 것들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음모론자들의 커뮤니티에서 그들은 모든 매체, 상표 등에서 666과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의 흔적들을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2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대침의 목사들이 성경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성경의 본문 때문에 666표가 바코드나 RFID 칩 등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설마 음모론자들의 헛소리를 교회 안으로 가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 아래 강단에서 설교하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침 목사들의 성경 해석에 대한 전반적인 건전성과 역량이 의심받던 순간이었다.
그러므로 나와 같이 666표에 대해 반신반의 하는 분들이 대침의 잘못된 비성경적 해석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도록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물론 음모론을 신봉하면서 대침의 종말론을 믿는 분들에게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을 것이다. 음모론자들이 쓴 온갖 어지러운 글들과 이론들을 보면서 내가 든 생각은 음모론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서 자신이 보고자 하는 대상이나 패턴을 찾아내고 그것으로 만족해하며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나는 감히 그들의 그런 만족과 행복의 굴레를 깰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또 음모론자들의 근거 없이 존재하는 독단적인 주장을 내가 일일이 반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말 엄청난 시간 낭비이기 때문이다. 본래 주장만 존재하는 것을 반박하려면 엄청난 양의 부연 설명이 필요한 법이다. 심지어 음모론자들의 주장은 그들 자신에게 반박 당할 수 없는 진리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런 소득이 없다.
따라서 나는 666표의 성경적 해석, 그 중에서도 성서학자들은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집중하여 글을 쓸 것이다. 음모론에 환멸이 난 분들, 그리고 대침의 잘못된 해석에 회의감을 느낀 분들에게 신약학자들의 견해가 제시하는 666표의 해석을 소개하고, 좀 더 넓은 선택지를 제공하는 것으로 나는 만족하려고 한다. 특히 성서학자들이 1세기 팔레스타인의 배경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고 666표를 해석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나는 이것이 가장 성경 자체에 충실한 해석들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고대 근동과 헬레니즘 문명 및 로마 제국의 문화의 영향 아래에서 기록되었지만,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나 바코드나 생체칩이 성경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전무하다. 그러므로 나는 성경이 기록된 문화와 배경에 입각한 해석들을 소개할 것이다.
참고로 H목사의 2023년 1월 12일 성경강연회 4일차 설교 1시간 50분 45초에서 666표를 마이크로 칩 같은 "생체 칩" 따위로 해석하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표"에 대한 논의들
계시록 본문의 "표"는 헬라어 "카라그마(χάραγμα)"이다. 이것의 일차적인 의미는 "표, 낙인"을 뜻하며, 말에게 찍은 낙인, 증서에 찍는 도장, 혹은 어떤 형상으로 빚어진 조형물이나 형성물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카라그마"의 우선적인 의미는 어떤 것을 표시하기 위해 찍는 낙인 정도로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이것은 「TDNT」에 의하면 순종하지 않은 노예나 군인들과 다양한 종교의 신들에게 충성하는 자들에게 낙인을 찍거나 문신을 하던 고대의 행위를 암시할 수 있다. 3 혹은 로마 제국에서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국가의 다신론적인 제의에 참여했다는 확인증을 의미할 수도 있다. 4 5
데이비드 아우네(David E. Aune)는 계시록의 "카라그마"에 대하여 1세기 문화 배경에 입각한 용례 4가지를 소개하는데 각각 다음과 같다: 6
(1) 유대인의 성구함. 곧 성경 구절을 담은 가죽 상자로, 왼쪽 팔과 이마에 장착하는 것.
(2) 노예나 군병의 문신, 짐승에게 찍는 낙인.
(3) 로마 황제의 초상과 이름을 새긴 로마의 주화. 주로 비즈니스 계약에서 사용되었다.
(4) 판매 증서에 사용되는 황제의 이름과 연도가 표시된 인장.
"카라그마"가 사용된 배경과 함께, 대부분의 학자들은 계시록의 "카라그마"가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라는 것에 의견이 일치한다. 계시록의 "카라그마"는 일곱 번 등장하는데, 항상 짐승에 대한 충성과 관련한 낙인으로 제시된다. 이것은 계시록 7장 4절과 9장 4절에서 제시된 하나님의 성도들이 받는 "인"에 대한 서투른 모방이며, 패러디이다. 7 8
그레고리 비일(G. K. Beale)은 666표가 하나님의 인을 악의적으로 패러디한 것임을 말하면서, 이것을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비유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성경의 문맥과 그 본래의 의도를 잘 드러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666표는 문자적으로 해석되지 않는 것이 좋다. 9
(1) 하나님의 인과 666표가 둘 모두 영적인 성격이 있어서 서로 병행되고 비교할 목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바로 뒤따라오는 14장 1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이 성도들의 "이마에" 쓰였다는 언급에서 분명하게 암시된다. 하나님의 "인"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666표 역시 그럴 것이다.
(2) 하나님의 인과 666표는 모두 그들이 따르는 지도자 혹은 그 특성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인침 받는다.
(3) 이름의 표가 비유적인 것이며 문자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짐승의 이마에 "모독하는 이름들"이 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13:1). 이것과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았다는 것을 비교해야 한다.
(4) 에스겔 9장 4절에서 예루살렘의 의인들이 "이마"에 있는 하나님의 표를 받아 멸망에서 보호받고 그것이 없는 사람들은 정죄당하는 것처럼, 여기서의 666표 역시 그러하다.
(5) 토라가 담긴 성구함이 유대인들의 이마와 손에 부착되는 것처럼, 신약성경에서는 이것이 비가시적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제시된다(7:2-8). "이마"는 이상적인 헌신을, "손"은 그 헌신의 실천적인 작용을 의미하며, 666표가 이마와 손에 부여된 것은 그것을 받은 사람들이 짐승에게 지속적으로 또한 전심으로 헌신함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666표는 에스겔 9장 및 계시록에서 제시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이마에 인치는 것과 비교하여 해석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성도들의 이마에 인을 치고 표시하는 것이 물리적 실체가 아니며 비유적인 의미를 지니듯이, 짐승에게 경배하는 자들의 이마와 손에 표시하는 것 역시 물리적인 실체로 표시되는 것이 아니라 짐승을 경배하는 그들의 사악한 헌신을 나타내는 비유적인 의미를 가진다. 유대인들이 토라를 이마나 손에 부착하여 자신들의 일상 전반에서 항상 토라를 기억하고 헌신하며 실천한다는 것을 상기해야 했던 문화가 있었던 것을 생각할 때, 계시록이 기록될 당시 초대 교회 신자들 역시 짐승의 표가 이마와 손에 주어지는 것을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받아들였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음모론자들은 666표를 신용카드나 바코드나 RFID칩이나 베리칩 등으로 여기는 것일까? 그것은 이 표가 매매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는 본문의 언급 때문이다. 계시록 13장 17절에서는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음모론자들은 이 표가 매매하는 데에 사용되는 어떤 물리적 실체로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의 사회 문화적인 배경에 무지하기 때문에 생겨난 잘못된 해석이다.
1세기 로마 제국 치하에서는 경제 활동을 할 때에 여러 가지 상인 조합에 가입해야만 했다. 이러한 상인 조합들은 장사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공식적인 매매 권한을 허가해 줬으며, 상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서로 교류하는 사교의 장의 역할을 하였다. 즉 만약 로마 제국의 경제 시스템 안에서 공식적인 매매를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상인 조합에 소속되어야 했다. 본래 이것들은 자발적인 모임으로 시작하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회원들의 상업적인 활동에 직접 관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교적인 문화의 영향으로, 점점 황제 숭배나 우상 숭배 의식을 통해 제국에게 충성하고 결속력을 다지는 집단으로 변모해 갔다. 따라서 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에 상인 조합의 회원은 반드시 우상 숭배 의식에 참여해야 했고, 사도 요한이 반대했던 제물의 고기를 먹는 의식 역시 이것에 포함되어 있었다. 10
심지어 사도 바울, 그리고 사도 요한의 시기에 상인 길드에서 자행되는 우상 숭배 의식에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뿐만 아니라 온갖 성적인 음란한 의식에 참석해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 계시록의 "니골라 당", "발람의 교훈", 그리고 거짓 여선지자 "이세벨"이 성적인 방종과 함께 등장하는 것도 이것과 관련이 깊다. 그리고 상인 길드의 이런 문란한 축제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불이익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배경에 대해서는 내가 이전에 쓴 글, "초기 영지주의 운동과 배타적인 기독교인: 고린도전서의 신령한 자들과 요한계시록의 니골라당"을 참고하면 좋다. 11
그 밖에 아우네(David E. Aune)는 아시아 지방 동맹, 곧 "코이논(κοινον)"에 대해서도 소개한다. BC 29년 이후 아시아 지방 동맹의 주요 기능은 황제 숭배를 관리하고 지원하는 것이었다. 황제 숭배는 지역 동맹의 회합들에 의해 시행되었으며, 각 지역들이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경쟁한 탓에 상당히 과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래 이런 황제 숭배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풍습과 관련이 있다. 그리스의 통치자들에게서 여러 가지 특권 및 유익을 얻은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종종 통치자들을 공경하는 예배 의식을 제정하기도 했다. 이런 통치자 숭배는 기존의 전통적인 종교의식과 결합하는 양상을 띠었고, 때때로 통치자의 권력이 사라진 이후에도 도시들에서 자율적으로 숭배를 이어 나가거나 새로운 통치자에게로 대체되는 경우가 흔했다. 12
이런 종교의식들의 가장 큰 특징은 굳이 통치자가 아니더라도 그 지역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을 숭상하는 공적인 종교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풍습은 BC 29년 이후 새로운 인물을 추가적으로 숭배하는 것보다는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대체로 로마 제국의 중심에서는 원로원들과의 관계 때문에, 황제를 지나치게 신격화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황제가 사망한 이후에 신성을 부각하고 신격화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로마 황제가 직접 통치하기 힘든 지방 식민지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들을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결속시키기 위해서는 황제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이것을 공고히 할 수단이 필요했다. 이것을 가장 잘 수행해 주는 것이 바로 아시아 지방 동맹, 곧 "코이논"이었으며, 특히 21세기에 들어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식민지 국가들 내에서 황제 숭배의 종교적 의미가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황제는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있는 곳에서보다는 없는 곳에서 더 신에 가까웠다'". 13 14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사회적 상황은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황제에게 예물을 드리지 않는다고 비난했으며, 황제 예배에 참석하여 충성심을 나타내지 않는다고 고발했다. 그래서 이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라고 불렸다. 계시록 2장 9절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상인 조합의 신들과 카이사르의 신상에 경배하길 거부했다는 것 때문에 이들이 물질적으로 궁핍해졌다고 말한다(2:9-11, 14, 20-21). 666표가 하나님의 인과 비교하여 문자적이 아니라 비유적으로 해석되어야 함을 알고, 1세기 로마 제국의 사회적 배경을 함께 고려한다면, 우리는 계시록에서 666표가 없는 자들이 매매를 할 수 없다는 본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알게 된다. 특히 많은 학자들이 계시록의 짐승이 로마 제국의 우상 숭배적인 시스템, 특히 지방 의회, 아시아 지방 동맹 코이논의 회합들에 의해 자행되는 반기독교적인 움직임의 총체라고 보고 있다는 것을 참고하라. 15
따라서 666표가 매매하는 것과 관련이 있고 이것이 손이나 이마에 부여받는다는 것을 통해 이 표를 어떤 물리적 실체, 곧 바코드나 생체칩 등으로 여겨야 할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이 기록된 사회 문화적 배경은 계시록의 독자들이 처한 상황이 단순히 손이나 이마에 무언가를 찍고 주입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상인 조합이 섬겼던 로마 황제와 우상들에게 경배하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의 시대에 그것은 매우 심각한 경제적 불이익과 생계의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사도 요한의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요한의 시대가 지나간 이후에도 많은 정치적 세력들에 의해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말살하려는 정책이 수행되었다. 짐승의 표는 어느 시대, 어떤 장소에서나 기독교의 믿음을 부인하고 안락함을 얻으라는 요구가 존재하는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부여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이것을 해석할 때에 굳이 음모론을 가져올 필요가 없다. 오히려 음모론을 통해 성경을 바라보는 것은 성경의 참된 메시지를 가리고 왜곡한다.
"666"에 대한 논의들
계시록의 666 해석은 기독교 세계 안에서 매우 많은 시도들이 있다. 그중에서 비교적 최근 시작된 음모론의 낭설을 제외하고, 이것들의 해석은 다음과 같은 범주들로 구분될 수 있다.
(1) 게마트리아(gematria) 방식.
(2) 삼각수(triangular numbers) 방식.
(3) 연대기적, 혹은 적그리스도의 재위 기간을 암시한다고 보는 방식.
(4) 적그리스도, 혹은 적그리스도적인 세력을 상징한다고 보는 방식.
이제 이것들에 관해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게마트리아 방식
게마트리아 방식은 고대 언어의 알파벳 하나하나가 각각의 숫자에 대응하고 숫자로 표현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생겨난 방식이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종종 어떤 낱말이나 이름을 표현할 때에 그것을 구성하는 알파벳의 숫자의 총수로 이것을 나타내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리스어 알파벳에서 α=1, β=2, γ=3을 나타낼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예수님을 표현하면, 신약성경에 표기된 "이에수스(ιησους)"는 Ι=10, Η=8, Σ=200, Ο=70, Υ=400, Σ=200에 따라 888로 표현할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은 계시록의 666이 성경에서 게마트리아의 방식으로 어떤 것을 표현한 가장 좋은 실례라고 말한다. 이것은 고대 세계에서 일종의 암호문의 역할을 하였는데, 계시록 13장 18절에서 "지혜"가 있는 총명한 자들에게 이 수를 세어 보라고 말한 것과도 관련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 학자들은 666이 어떤 한 사람의 이름이나 어떤 단어를 지칭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다양한 인물 혹은 단체들의 이름이 666을 해석할 때의 후보로 올랐지만, 아마 가장 유명한 것은 이 단어가 로마의 제 5대 황제인 네로 황제를 뜻한다는 가설이다. 그러나 이것은 통상적인 네로 황제의 명칭을 그리스어로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네로 카이사르"의 통상적인 히브리어 음역인 "קיסר נרון"을 합산한다면, 이것은 676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요드(י)를 제외한다면, 그제야 이것은 666으로 표현된다. 히브리어에서 사본상으로도 요드는 흔히 생략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이 가장 그럴듯한 해결책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것은 몇몇 전통적인 신약성경 사본에서 666이 "616"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설명하는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네로를 뜻하는 히브리어 낱말을 라틴어로 음역 한 다음 이것을 숫자로 치환하면 616이 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신약성경을 필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666이 네로를 지칭한다는 해석이 널리 퍼져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네로를 "짐승"으로 지칭하는 여러 고대 작가들의 증거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네로"로 해석하는 가설에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게마트리아 방식의 문제점은 "네로" 외에도 다른 단어나 이름들이 666을 표기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반드시 네로를 지칭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짐승"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셈하면 이것 역시 666이 된다. 또한 666을 네로로 해석할 때에 요드를 임의로 제거한 불완전한 형태의 히브리어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이 해석의 설득력이 반감된다.
비일(G. K. Beale)은 666을 네로와 동일시하는 것에 대한 5가지 문제점을 지적한다: 16
(1) 네로와 동일시하는 일은 주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요한의 독자/청중들이 히브리어와 게마트리아 체계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2) 네로를 지칭할 때에 반드시 "네로 카이사르"로 지칭해야 666이 완성된다. 그러나 네로를 가리키는 칭호와 이름은 다른 것들도 많이 있었다.
(3) 외국 이름을 히브리어로 음역 할 때에 변수가 상당히 많다. 모음이나 자음의 경우 선택할 수 있는 다른 알파벳들이 있으며, 시그마(Σ)에 해당하는 것은 3가지나 될 정도다.
(4) 가장 초기의 교부들은 네로와 동일시하는 해석을 알지 못했다.
(5) 요한이 독자들에게 "그 수를 세어보라"라고 권했을 때, 지적이고 수학적인 솜씨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분별을 요구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666을 네로 외의 다른 것들로 보는 가설들도 존재한다. 율리우스부터 베스파시우스에 이르기까지 황제들의 이름의 첫 글자의 수를 더하면 666이 된다는 주장, 도미티아누스의 동전에 등장하는 그리스 칭호의 축약 형태를 계산한 결과라는 주장,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의 히브리어 음역을 계산하면 된다는 주장, 도미티아누스의 헬라어 이름과 그의 직함을 모두 그리스어로 계산하여야 한다는 주장, 로마 제국과 동일시되는 Teitan과 Lateinos를 계산하는 주장, 또한 20세기에는 게르만 카이사르와 히틀러도 666으로 표기될 수 있다는 주장 등이 있다. 그 밖에 그리스어 "니골라 당"을 히브리어로 재음역하면 666이 된다든가, 666을 히브리어 낱말로 쓸 경우 "너는 파괴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든가, 아니면 베스파시아누스의 전설을 요약하는 로마의 동전 위에 기록된 단어들의 숫자의 합이 666이라든가 하는 주장들도 있다.
이런 모든 주장들로 보건대, 게마트리아로 666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궁극적으로 만족할 만한 해결법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사실상 모든 것을 다 끼워 맞춰서 666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본문에 게마트리아 방식이 사용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과연 666이 정말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에 대해 길을 잃고 말 것이다. 그리고 대개 이런 방식은 사람들의 자의적 해석의 시작의 문을 열어놓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철저한 음모론자들의 경우에는 게마트리아 방식을 이용하여 자신들이 적그리스도, 혹은 짐승으로 생각하는 대상의 이름이 666이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음모론은 흥미진진하고 재밌긴 하지만 근거가 없으며, 더욱이 성경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는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때에 이런 무질서한 방식으로 본문을 해석하게 할 의도가 있었는가에 대해 회의적인 편이다. 17
(2) 삼각수 방식
"삼각수"란 1로 시작되는 일련의 정수들의 총합을 의미한다. 즉 수학적으로 표현하자면 n번째 삼각수는 1부터 n까지의 수를 모두 합한 수라고 말할 수 있다. 18 예를 들어 5의 삼각수는 1+2+3+4+5=15이다. 그리고 특별히 666은 36의 삼각수이다. 즉 1에서 36까지의 정수를 모두 더한 값은 666이 된다. 또한 36은 8의 삼각수인데, 1에서 8까지의 정수를 모두 더한 값이 36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666은 삼각수의 삼각수인 셈이다. 19 그리고 계시록 17장 11절에서 짐승은 특별히 "여덟째"로 불린다. 20
반면에 이 같은 해석은 짐승의 수(666)가 짐승을 나타내는 또 다른 수(36)로 바뀐다는 문제점이 있다. 또한 사도 요한이 지혜와 총명을 내어 수를 세보라고 했을 때 의도했던 바가 이런 수학적 개념이었을 것 같지는 않다. 더욱이 이런 수학적 개념을 통해서 666이 짐승의 숫자 8과 관련되어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는 있지만, 이것은 새로운 정보는 아니며, 여전히 666이 정말 무엇을 지칭하는가에 대해 알려주는 것은 없다. 21
(3) 연대기적, 혹은 적그리스도의 재위 기간을 암시한다고 보는 방식
이것은 666이 상징, 혹은 묵시 문학의 숫자로서 취급될 수 있다는 가설과 관련되어 있다. 특히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는 대로, 요한계시록의 숫자들은 대개 게마트리아나 삼각수의 방식으로 해석되지 않고도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상징체계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이십사 장로, 일곱 인, 십사만 사천, 세 때 반, 두 증인, 일곱 머리, 열 뿔 등은 7, 12, 1000 등의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숫자들을 통해 조합되고 구성될 수 있다. 이것들을 해석할 때에 게마트리아나 삼각수에 대한 지식은 필요하지 않으며, 다만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 의미로 해석했을 때에 가장 자연스러운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사도 요한 역시 이에 대해 무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성경에 등장하는 상징적인 숫자들을 사도 요한이 사용하여 무언가를 표현하려 했다면, 666 역시 성경의 숫자들과 어떤 관련성이 있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특히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7은 신적인 것과 관련이 있으며 어떤 완전성을 암시한다. 그리고 666은 신적인 것과 대조되고 비교되는 악마적인 대상이다. 그러므로 6은 어쩌면 신적인 것과의 대조로 인한 불완전함과 미완성을 시사할 수도 있다. 22
이것에서 출발하여, 어떤 교부들은 시편 90편 4절의 본문을 통해 창세기 1장의 7일을 세상 역사의 7천 년으로 해석하고, 여섯 번째의 천 년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때이며, 이후에 메시아의 승리의 천년이 시작된다는 견해를 가지기도 했다. 이레니우스(Irenaeus)는 이에 따라 666을 "육 천년 간 일어났던 전체 배교의 기간의 집약"으로 이해한다. 23 이것은 여섯째 인, 여섯쨰 나팔, 여섯째 대접들이 각 시리즈에서 짐승을 따르는 자들에게 내려지는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과도 연결된다. 그리고 각 시리즈는 일곱째가 없이는 불완전하다. 24
(4) 적그리스도, 혹은 적그리스도적인 세력을 상징한다고 보는 방식.
이제 위의 성경의 상징적인 숫자들과 666이 관련이 있다고 보는 가설의 또 다른 연장선은 666이 적그리스도, 혹은 적그리스도적인 세력 그 자체를 의미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게마트리아 방식과는 약간 다른데, 게마트리아 방식이 숫자를 어떤 대상의 단어나 이름과 직접 결부시켜 해석하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면, 이 방식은 666을 그렇게 직접적으로 대상과 연관 짓지는 않고 다만 적그리스도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안전한 해석에 머무르는 편을 택한다. 예를 들어 게마트리아 방식이라면 666이 적그리스도를 뜻한다고 말하면서도 고대의 네로 황제나 현대의 정치인 등의 인물의 이름을 계산하여 666과의 연관성을 증명하려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상징적인 숫자 체계 자체에 호소하는 이 방식은 666을 그런 개인이나 단체에 국한하여 해석하는 것 자체를 배제한다.
만약 위에서 언급한 바 숫자 6이 완전한 수인 7과 비교했을 때의 불완전함을 뜻하는 것이 옳다면, 6을 세 번 써서 강조한 666은 신적인 것에 미치지 못하는 불완전함과 거짓됨을 더욱 강조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더욱이 "표에 대한 논의들"에서 이미 지적한 대로 하나님의 인을 어설프게 패러디한 짐승의 표의 부족하고 기만적인 특징을 분명하게 드러낼 것이다. 또한 짐승은 계시록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 및 예언의 영을 끊임없이 흉내 내고 패러디 한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는 결국에 성공하지 못한다. 25
요한이 7에서 하나 부족한 6을 세 번이나 강조한 것은 짐승이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기만적인 전략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속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말해준다. 애초에 우리는 "적그리스도"라는 인물을 너무 음모론자들이 사용하는 방식대로 취급하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성경이 말하는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모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미지에 더욱 가깝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독자들에게 이런 움직임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주의를 주고 경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할 수만 있다면 믿는 자라도 속일 수 있을 정도로 감쪽같다(마 24:24). 짐승은 하나님의 성품을 아주 훌륭한 방식으로 모방하여 흉내 낼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미혹되어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이 짐승의 모방은 완전한 신의 성품을 정확히 드러낼 수 없다. 그것은 불완전하다. 오히려 신의 성품을 가장 완전하게 드러낸 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며 그 본체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뿐이다(히 1:3-5).
계시록의 내용에서 짐승은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우상에게 절하게 하며 음행 하도록 미혹한다. 이것은 위의 "표에 대한 논의들"에서 살펴보았던 계시록이 기록되던 당시의 사회 문화적 배경, 곧 우상 숭배가 신자들의 일상생활 전반에 깊이 관여되어 있었던 상황과 매우 부합하는 듯이 보인다. 또한 사도 요한이 일곱 교회들에게 "니골라 당", "발람의 교훈", "거짓 여선지자 이세벨"을 따라가지 말라고 권면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이전에 쓴 글인 "초기 영지주의 운동과 배타적인 기독교인"에서도 사도 요한의 시기에 자신들이 하나님의 "깊은 것"을 잘 안다고 말하며 당대의 기독교인들을 미혹하고 우상 숭배와 문란한 축제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던 거짓 교사들에 관해 지적한 바 있다. 사도 요한은 분명 이런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경계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말하는 "지혜와 총명"은 게마트리아 방식이나 삼각수의 방식으로 숫자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음모론에 빠져서 모든 것에서 666의 문양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비밀 조직이나 세계정부나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같은 것들을 쫓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여 우상을 섬기며 음행을 하도록 만드는 거짓된 가르침에 속지 않고 이것의 불완전함과 헛됨을 간파하는 영적인 통찰을 지니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수"는 대개 셀 수 없는 많은 무리를 가리키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곤 한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즉 어떤 특정 개인을 지칭한다기보다 단체나 세력을 나타낸다고 여기는 것이 더 낫다. 또한 666표의 그 "수"를 세어보라는 대목 다음에 14장 1절에서 성도들의 많은 무리인 144000이 곧바로 등장하는 것은 우연으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요한이 여기서 말하는 "짐승"은 분명 한 명의 개인을 뜻한다기보다 어떤 집단적인 특성이 있는 것이라 결론 내리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는 적그리스도는 분명 시대에 따라서 매우 많이 등장할 것이다. 결정적으로, 요한은 요한일서 4장 3절에서 적그리스도의 영이 이미 그의 시대에 와 있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666이 뜻하는 바를 개인이 아닌 집단 전체, 곧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반기독교적인 미혹의 세력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26
결론
아직도 인터넷에 "666표"를 검색하면 온갖 음모론이 점철된 해괴한 글들이 성경 해석이라는 이름 아래에 버젓이 등장한다. 아마 이것은 특히 세기말에 유행하였던 휴거와 관련된 소동과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널리 퍼졌던 도시전설과 같은 이상하고 기괴한 문화적 혼합물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종말론을 극단적으로 밀기 좋아하는 대한예수교침례회 역시 이런 시대적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들이 성경 해석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은 사실 대침 소속의 어떤 늙은 목사들이 여기저기 떠도는 음모론을 가져다 짜깁기 한 것이다. 그래서 그곳에 소속되어 있었던 나 역시 부모님을 따라 세상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등장해서 사람들의 몸에 실제로 666표를 삽입해서 통제하고 감시한다고 생각했다.
기억나는 전도집회 사진 중에는 어떤 대머리의 남성의 이마와 뒤통수에 '666'과 바코드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던 것도 있었다. 나중에는 이것이 RFID칩, 혹은 베리칩 같은 걸로 바뀌었는데, 어떤 남성이 슈퍼에서 물건을 마음대로 집어 주머니에 넣고는 계산대를 그대로 통과해서 지나가면 자동으로 모든 것이 결제된다는 영상을 보여주며,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가 미래에 사람들이 "매매하게 하는" 수단이며 이 칩이 없이는 물건도 못 사게 할 것이라고, 지금 준비가 다 끝났고 곧 주님이 오시면 휴거 된다고 선동하기도 했다.
이런 비성경적인 음모론은 나의 머리를 한동안 지배했다. 그래서 대침을 나오고 나서도 미국에서 일부 사람들이 헬스 케어를 위해 생체 칩을 삽입한다고 했을 때 나는 세상이 곧 끝나는 줄 알고 두려워했다. 그리고 666이 그려진 그 에너지 드링크 음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입에 대지 않았다(지금은 가장 좋아하는 음료 중 하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적그리스도가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고, K-POP 노래를 역재생하면 사탄의 음성이 들리므로, 세상 가요를 들으면 사탄에게 세뇌당한다고 믿었다. 많은 정치인과 연예인들이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뭐가 되었든 세계 정부 수립을 위한 어둠의 음모에 가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바로 세우기 카페를 가보니, 예전에는 대침에서 666표를 컴퓨터라고, 혹은 신용카드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것이 점차 바코드, RFID칩, 베리칩 등으로 발전해 나간 것이다. 다행히도 대침은 어떤 이상한 음모론자들과 같이 666표를 코로나 백신이라고는 주장하지 않는 것 같다. 아마 대침 운영에 해가 되는 것들은 적절한 선에서 취사선택하는 듯이 보인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건강보험 정책으로 전 국민에게 베리칩을 심겠다고 선언하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다.
놀랍게도, 여전히 대침 내부의 사람들은 666표를 적그리스도가 마지막 때에 사람들에게 심는 통제의 수단이자 물리적 실체라고 여긴다. 대침 사람들이 사용하는 커뮤니티인 "깨사모(깨어 있는 사람들의 모임)"에서는 아직까지도 이런 글들이 종종 올라온다. 넷플릭스의 어느 프로그램 예고편에 나온 장면이 짐승의 표라는 글도 있고, 또 피부에 이식하는 백신패스의 기사를 공유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소위 "마지막 때"를 나타내는 게시물들은 사람들에게 인기도 많다.
이런 사람들을 학자들의 견해로 건전한 성경 해석을 향해 되돌릴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음모론은 매력적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왜곡시킨다. 그런 사람들이 보기에 내가 쓴 이 글도 어쩌면 세계 정부의 비밀 음모로 조작된 글이라 느껴질 수도 있다. 어쩌면 나를 프리메이슨 단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여담으로 프리메이슨은 지금은 정말 작은 조직이라고 한다. 단체 운영 조차 힘들 지경이라 이곳 저곳 입단 광고를 올리고, 미국의 어떤 랏지는 관광객들에게 공개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심지어 비밀조직이라면서 프리메이슨 문양을 아주 당당하게 박아 넣고 있다. 이런 것을 볼 때마다 대침의 허접한 설교에 속은 과거의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런 음모론은 성경과 아무 상관이 없다. 성경은 음모론의 내용이 없으며, 음모론을 지지하지 않으며, 음모론을 증명하지 않는다. 혹 성경이 음모론을 지지한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갖고 계신 분은 나에게 제시해 주길 바란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대침에 다니고 계신 분들은 지금 그곳에서 가르치는 종말에 대한 내용이 음모론 덩어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666만 다뤄서 그렇지, 열 뿔이 유럽연합이라느니 이런 것들까지 다루면 정말 한도 끝도 없다. 대침 분들은 아시다시피, 충격적 이게도 이런 것들이 성경강연회, 즉 전도집회에서 설교 자료로 등장한다.
나는 이런 음모론을 통해 성경을 바라보는 교회는 교단과는 무관하게 이단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장로교단에 이런 교회가 존재한다면 그 교회가 이단 판정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단성이 있는 교회이다. 감리교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하물며 대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네이버 블로그들을 통해서(대부분 건강 관련 블로그들) 자신들은 이단이 아니라고 홍보하는 것은 정말 이 음모론이 성경을 잘 해석하는 것이라 여기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을 진지하게 속이려 하는 것인지 참 궁금한 부분이다.
이제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어느 교회에 소속되어 있든, 음모론을 성경 해석으로 내어놓는 교회를 만난다면, 즉시 도망가라. 왜냐하면 이런 교회는 정상적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단 생활! 보러 가기>
- https://m.blog.naver.com/han95173/220824091994 [본문으로]
- http://kcm.co.kr/bible/rev/666/c666-05.html [본문으로]
- Walter Bauer, BDAG, trans. Jeong Ui Lee, Word of Life Press, 2017, p. 1625. [본문으로]
- G. K. Beale, The Book of Revelation: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The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trans. Gwang Man O, Holy Wave Plus, 2016, p. 1205. [본문으로]
- Ibid. [본문으로]
- David E. Aune,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52B Revelation 6-16, trans. Cheol Kim, Solomon Press, 2004, p. 691-692. [본문으로]
- David E. Aune, op. cit., p. 692. [본문으로]
- Ibid. [본문으로]
- G. K. Beale, op. cit., p. 1206-1208. [본문으로]
- David E. Aune, op. cit., p. 692-693. [본문으로]
- G. K. Beale, op. cit., p. 423. [본문으로]
- David E. Aune, op. cit., p. 703. [본문으로]
- David E. Aune, op. cit., p. 707. [본문으로]
- Ibid., p. 708. [본문으로]
- G. K. Beale, op. cit., p. 1205. [본문으로]
- G. K. Beale, op. cit., p. 1212-1213. [본문으로]
- Ibid. p. 1214. [본문으로]
- David E. Aune, op. cit., p. 699. [본문으로]
- https://ko.wikipedia.org/wiki/%EC%82%BC%EA%B0%81%EC%88%98 [본문으로]
- G. K. Beale, op. cit., p. 1225. [본문으로]
- David E. Aune, op. cit., p. 699. [본문으로]
- G. K. Beale, op. cit., p. 1216. [본문으로]
- 바나바 서신과 이레니우스. [본문으로]
- Ibid. [본문으로]
- G. K. Beale, op. cit., p. 1217. [본문으로]
- G. K. Beale, op. cit., p. 121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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