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이하 대침)에서는 인간을 영, 혼, 육의 삼분법으로 구분하여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비단 대침만의 주장인 것은 아니다. 지금 당장 인터넷에 "영혼육"을 검색해 보면 이와 같은 삼분법을 성경 구절을 근거로 주장하는 자들의 글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한 때 대침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삼분법과 자신들의 구원론을 연결지어 "영의 구원", "혼의 구원", "육의 구원"과 같은 방식으로 구원의 세 가지 시제를 설명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곧 "영의 구원"은 믿었을 때에 이미 구원받은 것을 가리키며, "혼의 구원"은 신자가 점점 성화되어 가는 소위 "생활 구원"을 의미하고, "육의 구원"은 미래에 부활하여 얻게 될 "몸의 구원"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몸에 대한 분리적인 인식은 대침이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오류인 "이미 얻은 구원"에 집착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성경에 제시되어 있는 구원에 대한 내용 중 현재진행이나 미래 시제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다만 "생활 구원"이나 "몸의 구원"에 대한 설명인 것으로 해석하면 자신들이 집중하는 "이미 얻은 구원"의 교리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성경이 구원에 대해서 말하는 풍성한 진리를 인위적으로 세 가지의 인간 구성에 대한 구원을 뜻하는 것으로 인식함으로써 성경을 왜곡하여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제 과연 대침 및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 성경 그 자체가 인간을 영, 혼, 육의 삼분법으로 구분하고 있는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쟁점은 성경에서 "영"과 "혼"이 명확하게 구분되느냐 이다
아마 거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라면 인간이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바, 영혼과 육신이라는 구분 자체에 대해서는 이번 글에서 다룰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주요 쟁점은 과연 성경이 영과 혼을 구분하고 있고, 명확하고도 일관되게 이 둘을 서로 다른 것으로 취급하고 있는가의 여부일 것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견해들에 따르면, 성경에서 "영"은 히브리어로 "루아흐(רוּחַ)"이며 헬라어로 "프네우마(πνεῦμα)"이고, 영어로는 "spirit"에 해당한다고 한다. 또한 "혼"은 히브리어로 "네페쉬(נֶ֫פֶשׁ)"이며 헬라어로 "프쉬케(ψυχή)"이고, 영어로는 "soul"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영"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영혼"을 뜻하며, "혼"은 인간의 지식, 이성 등의 정신적인 부분을 담당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성경은 이와 같은 구분법을 따르고 있는가?
이 같은 주장을 가장 손쉽게 반박할 수 있는 방법은 각각의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살펴보고 이것이 성경에서 서로 혼용되어 구분되지 않고 사용된 사례를 찾아보면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각 단어가 정말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루아흐(רוּחַ)"의 의미와 사용례
구약성경에서 "루아흐(רוּחַ)"는 정말 유명한 단어이다. 이것은 창세기의 창조 시에서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한다고 묘사할 때에 "신"으로 번역된 단어에서 사용되었다. 또한 구약성경을 히브리어로 독해하는 사람이라면 익히 알고 있듯이, "루아흐"는 "바람(wind)"의 의미로 성경에서 정말 많이 사용된다. 그 밖에 "호흡, 생기, 생령, 영, 생각" 등을 의미하기 위해서 이 단어는 사용된다.
「HALOT」에서는 일차적으로 이 단어를 "숨, 호흡"으로 볼 것으로 제시하면서 제 6번의 의미까지도 "호흡, 공기, 바람"을 뜻하는 사용례들을 방대하게 인용한다. 그러므로 "루아흐"는 보이지 않는 공기나 대기의 움직임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1 여기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 마음, 감각" 등의 의미가 파생된다. 이것이 인간의 정신적인 부분을 의미할 때에는 인간 마음의 "지적인 틀(intellectual frame)"을 의미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의 성격 중 "성질(temper)을 부리는 것"이나 "분노(wrath)하는 것"을 묘사할 때에도 이 단어가 사용된다(사 25:4; 잠 29:11). 특히 고대 문헌들에서 이 단어는 왕이나 영웅 등이 자신들의 거친 성격("루아흐")을 통제하는 대목에서도 등장한다. 2 그 밖에 "불안한 감정"을 나타내거나(욥 7:11; "내 마음의 아픔"), "의지", 혹은 "순종"을 의미할 때에도 사용된다(출 35:21; "자원하는 자"). 3
"루아흐"는 "생명" 그 자체를 의미할 때에도 많이 다용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숨, 호흡(breath)"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아흐"를 인간의 "영"을 의미한다고 여기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성경은 이 단어를 짐승의 생명의 호흡을 표현할 때에도 사용한다(창 6:17; 7:15). 또한 인간의 일반적인 생명을 묘사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루아흐"는 "네페쉬(נֶ֫פֶשׁ)"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여러 가지 사례를 가진다(사 26:9; 시 143:6-7; 욥 7:11).
그러므로 우리는 "루아흐(רוּחַ)"가 "바람, 공기, 호흡, 생명, 성질 부리는 것, 지식, 의지, 생각, 마음, 영" 등의 의미로 다양하게 사용될 수 있다고 여겨야 한다.
"네페쉬(נֶ֫פֶשׁ)"의 의미와 사용례
"네페쉬(נֶ֫פֶשׁ)"는 일반적으로 "생물, 생명, 목, 목구멍, 영혼"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HALOT」에서는 이것의 기본적인 의미(basic meaning)를 "호흡을 하기 위해 열려 있는 공기가 통하는 파이프(wind-pipe opened for breathing)"로 봐야 한다고 제안한다. 즉 "네페쉬"의 일차적인 의미는 "목구멍"이다. 이것에서 "숨, 호흡, 생명, 영혼" 등의 의미가 파생된다. 또한 학자들은 이 단어가 종종 인간의 영과 육을 아우르는 인간 전체(the person as a whole)를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4 5
특히 구약성경을 히브리어로 독해하는 사람이라면 이 단어를 매우 친숙하게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네페쉬"는 성경에서 어떤 한 사람의 존재, 인격, 생명 그 자체를 뜻하기 위해 많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 20-24절에서는 "네페쉬"가 "살아있는 상태" 그 자체를 의미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그래서 해당 구절에서 이것은 "생물"로 번역된다. 또한 이 단어는 집합적인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개인 단위의 "사람, 인간"을 의미하기도 한다(레 24:17; 민 9:6; 19:11; 31:35; 대상 5:21; 겔 27:13).
더욱이 히브리어 구문에서 "네페쉬"는 화자가 스스로를 지칭하는 "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창 27:4; 사 1:14; 삿 5:21; 레 26:11, 30). 또는 상대방인 "너, 당신"을 지칭할 때에도 "네페쉬"는 사용된다(창 27:19, 31; 사 43:4; 51:23). 마찬가지로 "우리"(시 124:7), "너희"(레 26:15), "그들"(사 46:2; 47:14)의 경우에도 그렇다. 또한 재귀대명사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는데, "그녀 스스로"(민 30:5-12), "그 스스로"(삼상 18:3; 20:17; 사 53:10) 등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네페쉬(נֶ֫פֶשׁ)"가 호흡을 하는 생명체 전체, 곧 인간의 존재 그 자체를 전체적으로 의미한다고 여겨야 한다.
"루아흐(רוּחַ)"와 "네페쉬(נֶ֫פֶשׁ)"를 성경은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는가?
위의 단어들의 의미와 사용례에서 이미 추론할 수 있듯이, 성경은 두 단어를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는다. 애초에 "루아흐"와 "네페쉬"는 모두 인간의 생명이나 인격적인 존재 혹은 영혼을 의미할 때에 모두 사용될 수 있다. 성경에서 "루아흐"는 "영"을 의미하고 "네페쉬"는 "혼"을 의미한다는 주장은 찾아볼 수 없다.
욥 7장 11절에서 "루아흐"와 "네페쉬"는 모두 욥 자신의 "마음, 영혼"의 아픔과 괴로움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루아흐)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네페쉬)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 욥 7장 11절.
"아픔"과 "괴로움"의 평행은 "루아흐"와 "네페쉬"가 해당 문맥에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본문에서 욥이 자신의 "영"으로는 아픔을 느끼고 자신의 "혼"으로는 괴로움을 느낀다고 해석한다면 정말 이상한 의미가 될 것이다. 오히려 욥은 자신의 괴로움을 표현하기 위해 동일한 대상을 다른 용어로 두어 번 강조하고 있다고 여겨야 한다.
이사야 26장 9절의 말씀 역시 "루아흐"와 "네페쉬"가 동일하게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밤에 내 영혼이(네페쉬)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루아흐)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이사야 26장 9절.
해당 본문 역시 이사야가 "혼"으로 하나님을 사모하고 "영"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구한다고 해석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성경의 용례는 "루아흐"와 "네페쉬"가 구문상 동격임을 강조한다.
시편 143편 6-7절 역시 이를 잘 보여준다.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네페쉬)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셀라)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루아흐)이 피곤하니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하나이다" 시편 143편 6-7절.
이 본문에서 화자의 "혼"은 주님을 사모하고 "영"은 피곤함을 느낀다고 해석해야 하는가?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추측하기로는 이 같은 잘못된 구분이 생겨난 배경에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할 때에 "루아흐"를 "spirit"으로, "네페쉬"를 "soul"로 번역한 것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미국에서도 인간을 "three parts"로 구분하여 "spirit"은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좀 더 영적인 것으로, "soul"은 인간의 몸과 연결되어 있는 부분으로 설명하는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실제로 "루아흐"와 "네페쉬"를 다른 것으로 여기는 견해들의 근거는 성경 자체의 사용례에 있다기보다는 그것을 번역한 단어인 "spirit"이나 "soul"의 의미에 있었다. 즉 "영"과 "혼"의 구분은 성경에 있다기 보다는 그것을 번역한 영어 단어의 의미에 너무나 매몰된 나머지 본래 성경이 의미하고자 한 바를 왜곡한 것과 관련이 있다. 6
대침 역시 이런 "번역어"인 "spirit"과 "soul"의 의미로 성경을 바라보면서 동일한 오류에 빠진다. 2024년 1월 22일 서울중앙교회 대전도집회 1일 차 설교에서 L목사는 "혼"은 영어로 "soul"이라 말하며 "마음, 생각, 정신, 사랑, 지식, 사상" 등의 영역이라 설명한다. 또한 "하나님은 영"이라고 말하면서 영은 영어로 "spirit"이고 "신을 찾는 마음"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하며, "종교심, 선을 추구하는 마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여기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2023년 1월 9일 수원교회 성경강연회에서 H목사 역시 동일하게 주장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성경은 이와 같은 번역어인 "영어 단어에서 나온 해석"을 지지하지 않는다. 창세기 6장 17과 7장 15절은 영어 단어 "spirit(영)"에 해당하는 "루아흐"가 동물들에게도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본문이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루아흐)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창세기 6장 17절.
"무릇 기식(루아흐)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창 7장 15절.
전도서 3장 19절 히브리어 본문에 따르면 인간과 동물은 모두 같은 하나의 "루아흐"를 갖고 있다.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루아흐)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것이 헛됨이로다" 전도서 3장 19절.
더욱이 대침에서 종종 인용하곤 하는 전도서 3장 21절 본문의 개역한글 번역에서 "혼"으로 번역된 것은 사실 "네페쉬"가 아니라 "루아흐"이다. 즉, 본래는 "spirit(영)"에 해당한다.
"인생의 혼(루아흐)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루아흐)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전도서 3장 21절.
만약 "루아흐"와 "네페쉬"를 "spirit"과 "soul"의 의미로 구별해야 한다면 우리는 동물들 역시도 인간과 같이 "spirit"을 갖고 있다고 여겨야 한다.
이제 성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마음을 "네페쉬", 즉 "soul"로 번역되는 "혼"이라고 지칭하는 것을 보여준다.
"내 마음이(네페쉬)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이사야 1장 14절.
"내가 내 장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네페쉬)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레위기 26장 11절.
"내가 너희의 산당을 헐며 너희의 태양 주상을 찍어 넘기며 너희 시체를 파상한 우상 위에 던지고 내 마음이(네페쉬) 너희를 싫어할 것이며" 레위기 26장 30절.
그러므로 구약성경은 "루아흐"와 "네페쉬"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지 않다고 우리는 결론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루아흐"와 "네페쉬"는 서로 혼용하여 사용될 수 있으며, 이것을 번역한 영어나 한글의 단어의 의미에 지엽적으로 매몰되어 해당 본문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구약성경의 히브리어에 대해 살펴보았으니, 이제 신약성경의 헬라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프네우마(πνεῦμα)"의 의미와 사용례
"영"으로 알려져 있는 "프네우마(πνεῦμα)"는 히브리어 "루아흐"를 헬라어로 번역한 단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네우마"의 의미 역시 위의 "루아흐"와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다. 70인역에서는 히브리어 "루아흐"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에 277번 "프네우마"로 번역하고, 2번은 "프쉬케"로 번역한다.
"프네우마"의 일반적인 의미는 "영, 성령" 등이다. 신약성경 저자들에 의해 "루아흐"의 번역어로 채택된 만큼, 「BDAG」에서는 이것의 일차적인 의미를 "루아흐"에서와 마찬가지로 "바람"으로 제안한다. 또한 "숨, 생기, 생명, 영혼" 등 육체에게 생존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라는 의미도 있다. 7 그 밖에 "정신적인 태도, 기질, 의향" 혹은 "지혜, 감정, 의지의 원천의 자리"라는 의미도 가진다. 8
그러므로 신약성경 저자들의 히브리적인 배경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헬라어 "프네우마"가 성경에서 사용될 때에는 히브리어 "루아흐"의 의미로 사용된다고 여겨야 할 것이다.
"프쉬케(ψυχή)"의 의미와 사용례
"혼"으로 종종 알려진 "프쉬케(ψυχή)"의 일반적인 의미는 "목숨, 영혼, 생명"이다. 이것은 히브리어 "네페쉬"의 번역어로 주로 채택된다. "네페쉬"는 70인역에서 600번 "프쉬케"로 번역되었다.
「BDAG」는 이것의 일차적인 의미를 "생명이 필요로 하는 기본 요소, 혼, 심령, 영혼"으로 제안한다. 혹은 "생명 자체", "감정, 기분, 느낌", "생명체" 등을 의미할 수 있다. 이것은 위에서 살펴본 "네페쉬"와 의미가 비슷하며, "루아흐"와도 통하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70인역에서는 "루아흐"를 "프네우마"로만 번역한 것이 아니라 "프쉬케"로 번역하기도 한다. 9
하지만 헬라어 "프쉬케"는 추가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것은 인간을 삼분법으로 나누는 헬라 철학의 사상과 이 용어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44절에서 형용사 "프쉬키코스(ψυχικός)"는 형용사 "프네우마티코스(πνευματικός)"와 대조되는 의미에서 좋지 않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프쉬케"는 여전히 인간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즉, 신약성경 저자들은 그리스 철학의 사상이 아닌 히브리적 사고관을 가지고 "프쉬케"를 사용한다. 10
그러므로 "프쉬케"는 구약성경의 히브리어 "네페쉬"와 비슷한 의미로 우리는 여길 수 있을 것이다.
"프네우마(πνεῦμα)"와 "프쉬케(ψυχή)"를 성경은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는가?
영어 성경에서 "프네우마"를 "spirit"으로, "프쉬케"를 "soul"로 번역한 것 때문에, "프네우마"와 "프쉬케"가 신약성경 저자들에 의해 구분된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둘을 사실상 구분하지 않으며, 혼용하여 교차 사용한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지칭할 때에 "프네우마(영)"가 아닌 "프쉬케(혼)"를 사용한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프쉬케)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0장 38절.
이것은 "혼"으로 번역되는 "프쉬케"가 인간의 육체와 연관되어 있는 부분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위에서 "네페쉬"가 하나님의 마음을 묘사할 때 사용될 수 있듯이, 여기서도 "프쉬케"는 하나님의 어떤 것을 묘사할 때에 사용될 수 있다.
또한 계시록 6장 9절과 20장 4절에서 인간의 몸을 떠난 영혼을 설명할 때에도 "프쉬케"를 사용한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프쉬케) 제단 아래 있어" 요한계시록 6장 9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프쉬케)..." 요한계시록 20장 4절.
즉 인간의 몸에서 떠난 영에 대해서도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프쉬케"를 분명하게 사용한다. 해당 본문들에서 "프쉬케"와 "프네우마"를 함께 사용하지 않고 다만 "프쉬케"만을 사용하여 "영혼"을 표현한 것은 계시록 저자가 인간의 육체 외의 영역을 두 가지로 구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프쉬케"만으로 충분히 표현될 수 있다. 만약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면, 여기서 하나님께서 신원해 주실 대상들이 인간의 "영"이 아니라 다만 "혼"만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뿐 아니라, 종교적인 행위를 할 때에도 "혼"으로 번역되는 "프쉬케"가 사용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프쉬케) 주를 찬양하며" 누가복음 1장 46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프쉬케)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히브리서 6장 18-19절.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프쉬케) 구원할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야고보서 1장 21절.
즉 성경은 대침이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게 "혼"으로 번역되는 "프쉬케"를 분명하게 종교적인 영성과도 연관시킨다. 그러므로 "영=spirit"이 종교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혼=soul"이 그렇지 않다는 주장은 성경이 말하는 것과 명백하게 다르다. 만약 대침이 성경이 말하는 용어인 "루아흐/프네우마", "네페쉬/프쉬케"의 용례를 전부 무시하고 성경을 해석하지 않는다면 이 부분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침이 자주 인용하는 마태복음 10장 28절은 인간이 몸과 영혼, 곧 "쏘마(σῶμα)"와 "프쉬케(ψυχή)"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왜냐하면 "프쉬케"는 "영"을 뜻하는 용어로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몸은(쏘마) 죽여도 영혼은(프쉬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쏘마) 영혼을(프쉬케)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10장 28절.
위의 본문이 인간의 "혼"만을 지옥에 멸하시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반적인 기독교인이라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만약 "프쉬케"를 인간의 삼분법적 오류에 의해 "혼"으로 번역하여야 한다면 아래의 본문의 의미가 왜곡된다.
"또 내가 내 영혼(프쉬케)에게 이르되 영혼아(프쉬케)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프쉬케)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누가복음 1장 19절-20절.
하나님께서 도로 찾으시는 것은 부자의 "혼"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영혼 전체이다.
요한3서 1장 2절에서도 "영혼"은 "프쉬케"를 번역한 것이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프쉬케)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한3서 1장 2절.
만약 대침의 인간 삼분법을 따른다면 해당 본문이 말하는 바가 "영"이 아닌 "혼"이 잘 된 바와 같이 범사에 잘 되길 원한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아래 본문 역시 "프쉬케"가 영혼 전체를 의미한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프쉬케)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베드로전서 2장 25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 되신다.
또한 아래의 본문들의 "프쉬케"를 "혼"만으로 여기면 그 의미가 퇴색된다.
"내가 내 영혼을(프쉬케)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1장 23절.
"내가 너희 영혼을(프쉬케)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고린도후서 12장 15절.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프쉬케)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3장 17절.
그러므로 신약성경 역시 "영"과 "혼"을 따로 구분하여 가르치고 있지 않으며, 대침이 "영"에게 부여하는 역할들을 성경은 "혼"으로 번역되는 "프쉬케"에게 담당시키기도 한다. 더욱이 인간의 영혼을 일반적으로 지칭할 때에도 "프쉬케"가 사용되며, 따라서 "프네우마"와 "프쉬케"는 서로 교차하여 사용될 수 있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히브리어 "루아흐"와 "네페쉬"의 경우와 거의 동일하다.
"영", "혼", "육"을 구분하는 듯한 본문에 대하여
대침 등 인간의 삼분법을 지지하는 자들이 성경에서 가져오는 근거 구절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과 히브리서 4장 12절이 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프네우마)과 혼(프쉬케)과 몸(쏘마)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프쉬케)과 영(프네우마)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브리서 4장 12절.
학자들은 위의 본문들이 인간의 구성 요소를 설명하려는 목적을 갖고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것에 의견이 일치한다. 예를 들어 만약 위의 본문들을 통해 인간이 어떤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논해야 한다면, 왜 우리는 히브리서 4장 12절에 의해 인간을 4가지의 구성요소, 곧 혼, 영, 관절, 골수로 구분하지 않는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더욱이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 본문은 이미 3장 13절에서 언급한 것을 재차 확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5장 23절과 3장 13절은 "신자들을 보존한다"는 같은 내용의 주제를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고 여겨야 한다.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 3장 13절.
그래서 F. F. 브루스(F. F. Bruce)는 세 가지 명사를 통해서 인간이 3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한 일임을 지적하면서, 위의 세 명사들은 3장 13절의 "너희 마음" 이외에 다른 의미를 덧붙이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11
우리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명령에서 인간의 구성 요소를 "카르디아(καρδία)", "프쉬케(ψυχή)", "디아노이아(διάνοια)", "이스퀴스(ἰσχύς)"로 구분하여 추론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위의 본문들 역시 인간의 구성 요소가 무엇인가를 논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억지로 무리하게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는 본문으로 취급하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위의 본문들은 유대인인 신약성경 저자들이 히브리인들의 수사법을 잘 사용하고 있는 사례이다. 실제로 위에서 이미 인용하였던 욥기 7장 11절, 이사야 26장 9절, 시편 143편 6-7절 등은 동일한 대상을 "루아흐"와 "네페쉬"라는 두 가지 용어로 동어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유대적인 사상에 익숙하였던 신약성경 저자들이 구약성경의 이러한 잘 알려진 강조법에 무지하였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위의 본문들 역시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것들을 나열하여 강조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결론
인간을 삼분법으로 구분하는 것은 유대-기독교적 사고관이라기보다 헬라 철학적 세계관이다.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삼분법적인 인간관은 희랍 철학에서 유래했다. 희랍 철학에서는 인간의 몸과 영혼과의 관계를 물질적 우주와 신과의 관계를 유비로 하여 설명했다. 신이 제 3의 본질 또는 중간적 존재를 통해서 물질계와 서로 교류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영도 제 3의 중간적 요소인 혼을 통해서만 몸과 살아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12
헤르만 바빙크(H. Bavinck)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리적으로 플라톤의 이원론에 근거하고, 반복적으로 기독교회의 영지주의적 학파들과 신지학적 학파들에서 수용되었던 [인간을 몸과 마음과 영靈으로 구분한] 삼분법三分法은 여기서 두 개의 특별한 실체들[프뉴마와 프쉬케]을 본다. 하지만 이것은 틀린 것이다. 히브리서 4장 12절과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은, 예를 들어 누가복음 10장 27절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다양한 인간의 구성 요소들을 열거하지 않으며, 따라서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다. 혼魂과 영靈은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병행하고 서로 교환된다." 13
바빙크가 지적한 것은 옳다. 왜냐하면 헬라 철학의 삼분법은 엄밀히 말해 "프네우마", "프쉬케", "쏘마"의 3체계는 아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마음이 영혼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영혼은 몸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함으로써 "누스(νοῦς)"를 "프쉬케"와 구분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감각은 육체에, 충동은 영혼에, 견해는 마음에 속한다고 말함으로써 "쏘마(σῶμα)", "프쉬케(ψυχή)", "누스(νοῦς)"의 3체계로 인간을 구분했다(프네우마가 없음). 14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성경의 "프네우마"와 "프쉬케"의 평행과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15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헬라 철학에 익숙한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은 이 삼분법을 변형하여 성경 해석 방법으로 종종 사용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등은 인간의 삼분법을 지지한 교부들로 알려져 있다. 반면에 아타나시우스, 테오도레, 아우구스티누스 등은 삼분법을 거부하고 이분법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에서 삼분법에 대한 거부는 중세 시대뿐 아니라 종교개혁 시기에까지 유지되었던 입장이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는 삼분법을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두 가지 본문에 잠깐 나타난 "프네우마"와 "프쉬케"의 평행을 가지고 성경의 저자들이 헬라 철학자들과 같이 인간을 삼분법적으로 인식했다고 여기는 것은 부적절할 것이다. 오히려 위에서 이미 설명한 대로, 히브리적인 강조법이 여기서 드러난다고 여기는 것이 더 나으며, 이렇게 보는 것이 더 성경적인 해석에 가까워지는 길이다.
만약 대침이 성경의 히브리어, 헬라어 용례를 전부 무시하고, 신약성경 저자들이 헬라 철학자들의 세계관을 따라 (그것도 약간 변형하여) "프네우마"와 "프쉬케"를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영어 단어 "spirit"과 "soul"의 차이가 실제 인간의 구성요소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라고 여기고 있다면, 이것은 둘 중 하나이다: 그들은 성경의 용어에 전적으로 무지한 자들일 수 있다. 혹은,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신도들을 기만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둘 모두 문제이다. 만약 전자라면 대침은 성경을 제대로 가르칠 능력이 없는 셈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성경을 잘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모든 발언들을 철회해야 하며 겸손한 자세로 성경을 다시 배워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오류를 수정하고 신도들을 향해 과거에 가르쳤던 오류들에 대해 설명하고 재교육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후자라면, 그들은 아마 오류를 수정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지적하는 모든 견해들을 묵살하려 할 것이며, 계속해서 신도들을 왜곡된 성경 해석으로 기만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선택할 것이다. 이런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신도들은 하루빨리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집단은 더 이상 나아질 기미가 없으며, 정말 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더욱 나쁜 선택지가 존재한다. 그것은 스리슬쩍 교리적인 내용을 비밀리에 바꾸면서, 자신들은 성경을 잘 가르치는 편에 속한다고 지속적으로 기만하는 전략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길을 선택할 경우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다"는 식으로 변명하면서 자신들의 성경 오류에 대해서는 최대한 조용히 묻어가려 할 것이다. 그리고 교리를 수정하고 나서는, 자신들은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다고 갑자기 말을 바꿀 것이다. 이런 교회는 교리적으로 점점 발전해 나갈 수는 있다. 그러나 여전히 신도들을 기만할 것이며, 심지어 더더욱 효과적으로 기만할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이제까지 가르쳤던 오류들에 대하여 신도들에게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하는 동시에 이것을 지적해 왔던 일반 교단들을 향해서도 사과하고 겸손한 자세로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기독교적인 해법이다. 이제 신도들은 대침의 지도부에게 이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고 격려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대침이 자신들의 명백한 오류에도 불구하고 이 방향을 따르길 거부한다면, 신도들은 즉각 이런 위험한 공동체를 떠나 올바른 공동체로 옮겨야 한다.
나는 대침에 빠지게 되는 분들이 멍청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들은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을 찾다가 대침에 빠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침 인간론의 삼분법은 정말 명백한 오류이며 성경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제 대침을 다니는 여러분이 정말로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을 사모하는 분들이라면, 이런 오류가 발생하였고 또 수십 년 동안 유지되었을 때에 그냥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지요~"하면서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는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침도 자신들이 그런 교회라고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교회에게 오류를 시정할 것을 요구하거나, 아니면 그 교회를 떠나 다른 더 좋은 공동체를 찾아 나서야 한다.
이 글이 이런 지혜로운 선택을 할 사람들에게 작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 L. Koehler & W. Baumgartner, 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STUDY EDITION VOLUME II, trans. ed. M. E. J. Richardson, BRILL, 2001, p. 1198-1199. [본문으로]
- Ibid. [본문으로]
- Ibid. [본문으로]
- L. Koehler & W. Baumgartner, 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STUDY EDITION VOLUME I, trans. ed. M. E. J. Richardson, BRILL, 2001, p. 712. [본문으로]
- Ibid. [본문으로]
- https://blog.biblesforamerica.org/the-three-parts-of-man-spirit-soul-and-body/ [본문으로]
- Walter Bauer, BDAG, trans. Jeong Ui Lee, Word of Life Press, 2017, p. 1263. [본문으로]
- Ibid. [본문으로]
- Ibid., p. 1656. [본문으로]
- Anthony C. Thiselt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trans. Ji Cheol Sin, Holy Wave Plus, 2022, p. 2167. [본문으로]
- F. F. Bruce,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45 1 & 2 Thessalonians, trans. Cheol Kim, Solomon Press, 1999, p. 232. [본문으로]
-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trans. Su Kyeong Kwon & Sang Won Lee, Christian Digest Publishing Company, 2000, p. 401. [본문으로]
- H.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vol. 2, trans. Tae Hyeon Park, Revival & Reformation Publishing, 2016 [본문으로]
- F. F. Bruce, op. cit., p. 233. [본문으로]
- Ibid., p. 23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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