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와 알레고리적 해석 (대한예수교침례회, 생명의말씀선교회, 구원파) (누가복음 10장 25-37절)

대한예수교침례회에 대하여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와 알레고리적 해석 (대한예수교침례회, 생명의말씀선교회, 구원파) (누가복음 10장 25-37절)

바잇 카탄 2024. 5. 27. 18:17

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반응형

 이미 웹툰 「이단 생활!」 9화에서 등장하였던 것처럼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이하 대침)는 누가복음 10장 25-37절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알레고리적(즉 풍유적)으로 해석한다. 주로 유명한 L목사의 해석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가지고 있다:

강도 만난 자=하나님을 떠난 죄인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것=죄인이 타락하는 과정
강도=마귀이다.

율법사는 여기서 강도 만난 자와 다를 것이 없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율법사는 자신의 이웃을 찾을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살려줄 이웃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제사장=세상교회의 유명한 목사님
레위인=열심히 봉사하는 사람

곧 종교인들이 이 강도 만난 자를 지나가는데 모두 도와주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멸시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었다.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이 사마리아인=예수님
기름=성령
포도주=예수님의 피
짐승에 태워서 주막으로 데려가는 것=죄인이 구원 받는 모습
주막=교회
주막집 주인=성령

교회 안에 성령이 있으니 교회 나와야 한다.

두 데나리온=은혜와 진리(요 1:17)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주님이 다시 오실 때 부활하는 것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예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것

그러므로 이 비유 말씀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전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도 해라.

 

 위 가르침은 비교적 최신 설교라 할 수 있는 2024년 1월 28일자 설교이다. 따라서 대침의 L목사는 최근까지도 이런 알레고리적 해석을 성경 해석법으로 채택하고 신도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이번 글에서는 과연 이와 같은 설교 내용이 성경을 적절하게 해석한 것인지 알아보고, 또 이런 해석이 성경의 고유한 메시지를 왜곡하여 전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것이다. 왜냐하면 대침, 특히 대침의 L목사는 자신들의 교회만큼 성경을 정확하게 잘 해석하는 교회가 없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반응형

 

 


 

 

 

 

 알레고리적 해석법


 대침에서 위의 예시와 같이 성경 본문의 단어들이 표면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과 다르게 숨겨진 또다른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는 방법은 '알레고리(allegory)'로 잘 알려진 풍유적 해석법이다.[각주:1] 이 방식은 기독교 역사에서 꽤 흔하게 보여지는 해석법이며, 특히 성서 해석법이 아직 잘 발달하지 않았던 초기 교부들의 시대 때나, 혹은 중세 가톨릭 시기에 빈번했던 해석법이다.

 

 알레고리 해석법을 기독교에 처음 적용한 것은 초대 교부들 중 헬레니즘 철학과 친근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속한 자들과 관련이 있다. 이들은 호메로스의 시에 대한 스토아 학파의 풍유화와 모세 오경에 대한 유대인 헬라 철학자 필로(Philo)의 주해에서 그 선례를 발견하였다.[각주:2]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t of Alexandria)는 후에 콰드리가(Quadriga)로 알려진 이론으로 형식을 갖추게 되는 문자적 의미 외의 추가적인 의미를 발견해내는 성경 해석법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율법의 의미를 [문자적 의미에 더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징표를 풀어 보여주는 것, 올바른 행위를 지시하는 것, 그리고 예언을 밝히 알려주는 것."[각주:3]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E. McGrath)는 클레멘스의 콰드리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요약한다.[각주:4]

① 문자적 의미.
② 풍유적 의미. 이것은 믿어야 할 내용을 알려준다.
③ 도덕적(또는 교훈적) 의미. 이것은 행하여야 할 일들을 알려준다.
④ 종말론적 의미. 이것은 희망으로 품어 바라보아야 할 일들을 알려 준다.

 

 클레멘스가 이렇게 알레고리 해석을 성경 독해 시에 사용한 것은 철학과 신학 간의 관계에 대한 그의 이해에 기반한다. 클레멘스는 기독교의 신학이 헬라 철학과 본질적으로는 모순되지 않는다고 보았으며, 성경의 내용들이 자신의 이 같은 생각을 지지한다고 여겼다. 즉, 클레멘스는 기독교가 모든 지적이고 도덕적인 열망들과 인간의 결핍들을 충족시킨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당대의 일반적인 성경 해석법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 영적인 견해들을 많이 제시하였다.[각주:5] 

 

 클레멘스는 필로와 마찬가지로, 철학자들이 원래 모세의 글로부터 자신들의 가장 좋은 사상을 얻었다고 말하는 헬레니즘적 유대교의 신념을 따르길 원했다.[각주:6] 그는 성경을 주의 깊게 연구하면 철학자들이 알고 있던 것과 사실상 동일한 진리에 도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성경이 알레고리적으로(allegorically), 즉 클레멘스의 표현대로라면 "비유적"으로(in parable) 기록되어 있다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성한 문헌인 성경에는 한 가지 이상의 의미가 있으며, 따라서 문자적인 의미에 안주하는 것은 우유로 만족하고 결코 어른이 되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각주:7]

 

 이로 인해 클레멘스의 신학은 그의 작위적 성경 해석과 함께 기독교적 요소들과 스토아주의와 플라톤주의와 필로의 해석들이 괴상하게 혼합된 것으로 드러난다.[각주:8] 후스토 콘잘레스(Justo. L. Gonzalez)는 그의 신학의 실제 내용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클레멘스는 비록 자신을 성서 해석자로 여겼지만, 실제로 그의 알레고리적 해석을 통해서는 성서 본문의 본연의 의미가 아닌 플라톤적인 영감을 받은 사상과 교리를 찾을 수 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클레멘스에게 있어 하나님은 비유와 부정적 용어(nagative term)로만 말할 수 있는 형언할 수 없는 분인 셈이다.[각주:9]

 


 

 

 클레멘스와 비슷하게, 알렉산드리아 학파인 오리게네스(Origen)는 성경 해석 방식을 독해자의 성숙도에 따라 세 가지로 구분한다. 

"기독교인의 영혼에 성경의 의미가 새겨지는 방법에 세 가지가 있다. 비교적 평범한 사람들은 성경의 '몸'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깨우침을 얻는다... 둘째, 어느 정도 진보를 이룬 사람들은 이른바 '혼'에 의해 깨우침을 얻는다. 셋째, 완전한 사람은... 장차 일어날 좋은 것들의 그림자를 지니고 있는 '영적' 율법에 의해 깨우침을 얻는다."[각주:10]

 

 특히 알레고리 해석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동의하듯이, 오리게네스는 기독교 역사에서 알레고리 해석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인물이다. 오리게네스는 이 알레고리 해석을 통해 성경을 문자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머무는 것에서 더 나아가 본문이 말하지 않는 추가적인 영적 의미를 밝히려고 노력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성경 주해의 작업은 문자적인 것을 풀 뿐만 아니라 좀더 높고 혹은 깊은 '영적' 의미도 풀어야 하는 것이다.[각주:11]

 

 필립 샤프(Philip Shaff)는 오리게네스의 가장 큰 결점이란 "(성경을 해석할 때)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소홀히 한 채 항상 본문에 감춰진 신비스런 의미를 발견하려고 한 점"이라고 말한다.[각주:12] 따라서 "그의 알레고리적 해석은 대단히 독창적이긴 하나 종종 본문에서 크게 이탈하여 매우 괴이한 결론에 떨어진다."[각주:13] 그래서 오리게네스의 주석들은 구약과 신약의 거의 모든 책들을 망라하고 있는 반면에 매우 작위적인 알레고리적이고 신비적인 공상들을 담고 있다.[각주:14]

 

 오리게네스의 이런 성향은 그의 스승인 클레멘스와 같이 헬라 철학과 기독교를 조화시키려고 시도한 것과 많은 관련이 있다. 따라서 대다수의 학자들이 지적하는 대로, 그는 기독교인이기 보다 플라톤주의자에 더욱 가까웠다. 영혼이 선재 한다는 것이나, 세계 안에서 영원히 순환한다는 그의 이론은 기독교가 일반적으로 가르치는 내용에서 그가 멀리 벗어났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각주:15] 그리고 그의 이런 가설에 힘을 실어준 것은 그의 자의적인 알레고리 성경 해석법이다.

 


 

 

 기독교 세계 안에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영향력은 굉장했기 때문에 성경 해석에서 알레고리적 접근은 지속적인 지지를 얻어왔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역시 구약성경의 의미를 문자적 의미와 풍유적 또는 영적 의미로 구분하며, 성경의 의미들이 '휘장'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이 비밀스러운 진리들의 표상은 적절한 해석을 통해서 빛 가운데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각주:16]

 

 중세 시기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Bernard of Clairvaux)는 라틴어로 저술한 「아가서 주석」에서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아 1:17)라는 구절을 아래와 같이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다.

"'집'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큰 무리를 이룬 기독교인들이라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무리는 '들보'의 역할을 하는, 권력과 위엄을 지닌 사람들, 곧 교회와 정부의 통치자들에 의해 하나로 통합된다... '서까래'라는 말에서 우리는 제대로 교육받은 성직자의 온화하고 질서 잡힌 삶과 교회의 예전이 바르게 시행되는 것을 떠올릴 수 있다."[각주:17]

 

 성경을 이렇게 문자 그대로가 아닌 비유로 보고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신자 개개인이 성경을 독해하는 것을 부적절한 것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비록 성경이 모든 기독교 교회 안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것을 해석할 때에는 반드시 교회 전통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는 사상이 점차 떠올랐다. 왜냐하면 성경의 참된 의미, 곧 알레고리적 해석법에 의한 영적 의미가 문자적인 일반적 의미 보다 더욱 깊고 높은 중요한 진리를 전달하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알레고리 해석법의 가장 큰 문제점인 독해하는 사람의 자의적인 해석에 따라 성경 본문의 의미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위험성을 적절히 통제해야만 했다. 이것을 모두 해결하기 위해 교회는 전통에 호소하는 것이 유리함을 인식하였다.

 

 알레고리적 해석법은 성경 본문의 의미보다 성경 해석자의 권위가 더욱 중요한 방식이다.[각주:18] 따라서 교황의 성경 해석 권위를 확립하고자 했던 로마 가톨릭에게 알레고리 해석법은 좋은 성경 해석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즉 성경은 표면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해석을 거친 권위가 항상 최상의 실제 권위"가 된다.[각주:19] 그래서 성경 본문의 내용을 해석하는 교회의 전통이라는 추가적인 장치가 필요하다. 로마 가톨릭에게 이것은 교황의 성서 해석 권위에 해당한다.

 

 반면에 종교개혁자들은 알레고리적 해석법보다 역사문법적 방식을 성경 해석법으로 수용함으로써 성경을 해석하는 교회 전통의 권위가 아닌 신자 개개인의 성서 해석의 정당성을 회복시키고자 하였다. 마틴 루터는 전통적인 알레고리 해석법인 콰드리가를 말하면서, 이 네 가지의 해석법에 반대하여 성경은 순전히 역사적으로 혹은 예언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각주:20] 

"...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풍유나 교훈이나 종말적 견해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역사적인 방식으로 그것의 진리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면 결코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럴 경우에 성경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각주:21]

 

 이에 대항하여 로마 가톨릭은 계속해서 종교개혁자들의 성경 해석이 전통의 지지를 받지 못하며 따라서 권위가 부족하다고 공격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성경을 해석할 때에 가톨릭 교회의 전통을 무시하는 프로테스탄트들의 해석이 무책임한 것이라 주장하였다.[각주:22] 도미니크회 가톨릭 신학자 멜키오르 카노(Melchior Cano)는 교황과 공의회, 스콜라 신학자들, 성인(saint)들의 성경 해석 권위를 옹호하면서 종교개혁자들에게 반대했다.[각주:23] 로베르토 벨라르미노(Sanctus Robertus Bellarminus)는 개신교가 성경 해석을 개인의 사사로운 판단 문제로 만들어 버렸다고 비판했다.[각주:24] 그리고 가톨릭이 수호한 이 알레고리적 해석법은 19세기 이후에 마리아와 관련된 교리와 교황 무류성 교리를 옹호하고 확립할 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로 보건대, 알레고리 해석법은 성경 본문의 본연의 의미보다는 해석자의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해석과 관련이 있을 위험성이 크다. 물론 나는 알레고리 해석법이 그 자체로 문제가 있는 해석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성경을 묵상할 때에는 개개인 마다 자유가 있으며, 이것에는 알레고리 방법을 사용하여 성경을 독해할 자유 역시 포함된다. 성경 본문에서 실천적인 교훈을 얻기 위하여 상상의 나래를 펼쳐 비유적인 의미를 끄집어 내는 것은 극단적이지 않다면 나쁘지 않다. 문제는 알레고리 해석에 '권위'가 입혀졌을 때인 것으로 보인다. 이럴 경우 성경 본문의 의미 보다 성서 해석자의 자의적 해석이 더욱 큰 주목을 받게 된다. 이것은 특정 교회나 교단의 성경 본문에 대한 주된 입장이 되거나 심하게는 교리적 확립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특히 알레고리 해석을 행하는 해석자가 배타성을 띠며 이미 공동체 내에서 권위를 획득하고 있는 상태라면 더더욱 위험성이 증가한다. 이런 해석자는 자신의 성경 해석에 따르지 않는 다른 교회나 교단들을 향해 성경을 제대로 잘 가르치지 않는다고 비방할 것이며, 성경을 자의적으로 잘못 해석했을 때에 성경 본문의 의미를 왜곡하여 신도들에게 전달할 것이다. 또 자신이 따르는 특정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성경을 자신의 입맛대로 독해할 수 있다. 이것은 이미 필자가 쓴 "대한예수교침례회를 이단이라 부르는 이유에 대하여"에서 제시한대로, 어떤 한 개인이 단체나 파당을 만들고 자신의 자의적인 성경 해석에 권위를 부여하여 배타적으로 모이는 이단의 기준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대한예수교침례회를 이단이라고 부르는 이유에 대하여 (생명의말씀선교회)

올해 9월부터 시작하여 유독 "대한예수교침례회"(이하 대침)나 혹은 "생명의말씀선교회"라는 키워드를 사용해 대침이 이단이 아니라고 옹호하는 글들이 네이버 블로그를 중심으로 생산되고 있

littlebiblicaltheology.tistory.com

 

 대침의 L목사가 알레고리 해석을 사용하여 누가복음의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풀이하는 것은 대침의 교리적 입장을 생각할 때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해당 본문에서 영생을 얻는 것과 관련해 율법사가 제시한 "내 이웃을 사랑함"이라는 명제에 대하여 예수께서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대침에게 내키지 않기 때문이다. 대침은 성경을 오직 행함-믿음의 이분법적인 내용으로 독해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명령은 그들에게 마치 행함으로 영생을 얻으라는 것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래서 대침은 이 본문의 내용을 "누구든지 내가 사랑을 실천할 대상인 이웃이 될 수 있다"에서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로 바꿔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들이 원하는 내용을 얻어내기 위해 그들은 알레고리적 방식을 사용한다. 대침은 여기서 자신들의 교리적 입장을 수호하기 위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알레고리 해석법은 성경을 묵상할 때에 활용될 수 있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것을 이용해 교리를 수호하거나, 권위를 얻어 다른 신도들의 해석에 영향력을 행사할 때에는 상당히 위험해질 수 있다. 특히 해석자가 배타적이어서 다른 기독교 교단들을 배척하고 자신들이 성경을 가장 잘 가르친다고 주장할 때에는 이 알레고리 해석법이 성경 본문의 바른 의미를 왜곡하여 가리고 영혼을 병들게 만드는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할 수 있다.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등장하게 된 배경: 율법사와 예수님의 대화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해석할 때에 사람들이 흔히 간과하는 것은 이 비유가 허공에서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율법사와 예수님이 대화하는 주제의 맥락에서 등장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예수께서 이런 대화의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의도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눅 10:25는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즉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영생 얻는 법에 대하여 질문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26절에서 이에 대해 직접 대답하지 않으시고 다만 율법사가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를 물으셨다. 이 때 율법사는 성경의 명령을 정말 탁월하게 두 가지 명제로 요약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훌륭한 대답을 들은 예수께서는 율법사의 이 답변이 바른 것(ὀρθῶς; 오르또스)이라고 인정하신다. 그리고 이것을 행하면 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행하라"의 "ποίει"의 현재 명령법은 이 행동이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의미를 전달한다.)[각주:25]

 

 여기서 율법사는 예수님이 제시한 이 기준에 의하면 자신이 의롭다고 선언될 것이라 기대한다("δικαιῶσαι ἑαυτὸν"). 왜냐하면 제 2성전 시기의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의 일반적인 편견과는 달리) 모든 율법을 다 지켜서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모두 지키지는 못하더라도, 그것을 지속적으로 행하는 마음가짐, 곧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각주:26] 그리고 율법사는 자신이 하나님을 (물론 부족하겠으나) 사랑하고 있으며, 또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었을 것이다.)

 

 이제 문제는 이웃을 사랑할 때에 "이웃"의 범주를 정하는 것이었다. 유대교에서는 '이웃 사랑'의 명령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기 위해 자신들의 이웃이 누구인지 정의하여 그 대상을 제한 시키고자 시도하였다.[각주:27] 예를 들어 시락서 12:1-4는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 선을 행할 것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며, 죄인들은 돕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각주:28] 유대교에서는 이웃의 범위를 오직 언약 백성에게 한정시킨 것으로 보인다.[각주:29] "이웃"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레아(רֵעַ)"는 평등하게 모든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선정하지 않으며, 언약의 구성원인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에 참여하는 공동체를 가리키고 있음을 암시한다. 레 19:18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여호와의 언약 구성원들에게만 분명하게 적용되며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각주:30]

 

 율법사는 예수님이 유대교의 이 모든 논의들을 알고 있다고 추론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웃 사랑"이라는 명령에서 예수님은 "이웃"의 범위를 어떻게 한정하고 있는지 알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기준이 유대교의 전통적 해석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기준이 무엇이든, 설마 죄인을 사랑하라는 내용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끊임 없이 이방 국가들에 의해 정치적 자율성을 빼앗겨 왔던 1세기 팔레스타인 상황 속에서, 가증스러운 이방인 같은 죄인들을 이웃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보편적 인식이었다.[각주:31] 그래서 예수께서 제시하는 이웃의 범위를 알아낼 수 있다면 율법사는 자신이 그 기준을 충족하고 있음을 보일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율법사가 예수님이 제시하는 기준을 충족하고 있다면, 예수님은 그를 영생 얻을 자로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과연 예수님은 "이웃"의 범주를 어떻게 설정하실 것인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도와준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사람


 예수께서는 이번에도 즉답을 피하신다. 대신 율법사에게 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중에 강도를 만났다. 여기서 대침의 L목사는 예루살렘과 여리고의 고도 차이와 함께 갑자기 사해(Dead Sea)를 언급한다. 왜냐하면 여리고로 내려간 다음 조금 더 내려가면 사해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해는 주변에 유황 덩어리들이 있으며, 소돔과 고모라 성이 망한 자리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갑자기 논리적 비약을 시도하는데,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이고, 저 밑에 있는 사해는 지옥의 모형이며, 따라서 그 중간에 있는 여리고는 "죄악"이라고 한다. (어떤 버전에서는 "세상"이라고 하기도 함) 그러면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타락하는 과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 그런 의미들을 암시하고자 하셨다면, 예수께서는 사해에 대해서도 언급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 본문에서 사해는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이 거룩한 어떤 것을 지칭한다는 것에 대해서, 혹은 여리고가 죄악을 상징한다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암시를 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난 것을 매우 짧게, 그리고 간단하게 언급한다. 누가복음의 저자 역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를 만났다는 사실을 표현할 때에 다만 10개의 헬라어 단어가 필요했을 뿐이다.("Ἄνθρωπός τις κατέβαινεν ἀπὸ Ἰερουσαλὴμ εἰς Ἰεριχὼ καὶ λῃσταῖς περιέπεσεν")

 

 혹은 "내려간다(καταβαίνω; 카타바이노)"라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는 인간에 대해 추론해야 하는 것일까? 예수께서 단어 하나 하나에 어떤 암호문을 숨겨놓으시는 성향을 지니고 있지 않은 이상, "내려가다가"를 통해 인간의 타락에 대해 어떤 단서를 얻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L목사도 언급하고 있듯이, 이스라엘의 지리적 특징을 표현한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막 3:22의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왔다고 묘사될 때에 이것을 타락하고 있는 서기관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행 25:7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눅 6:17에서 예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내려왔다고 묘사된다. 행 18:22에서 바울 역시 안디옥으로 내려간다. 또는 앗달리아로 내려가기도 한다(행 14:25). 드로아로 내려가거나(행 16:8), 가이사랴로 내려가고(행 25:6), 나사렛으로 내려가며(눅 2:51), 가버나움으로 내려가고(요 2:12), 죽어가는 아들을 향해 내려가며(요 4:47, 49, 51), 사마리아를 향해 내려가고(행 8:15), 백부장 고넬료를 향해 내려간다(행 10:20).  

 

 이런 용례들을 전부 무시하고 본문의 이 "내려가다"만 다르게 해석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혹 여기서 여호수아가 정복했던 여리고가 언급되어서 다르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학자들은 신약시대의 여리고는 고대의 여리고와 분명하게 다른 도시였다고 말한다. 존 놀랜드(John Nolland)는 신약시대의 여리고는 고대의 여리고와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헤롯 대왕이 고대의 여리고에서 남쪽으로 1.5마일 가량 떨어져 있는 와디 켈트(Wadi Qelt)의 어구 가까이에 신약시대의 여리고를 새로 건축했다고 말한다.[각주:32] 신약시대의 예리코는 구약시대의 예리코보다 남쪽 6km쯤에 있는 툴룰·아브엘 알라이크라고 부르는 폐허라고 지적되기도 한다.[각주:33] 학자들은 이 도시로 내려가는 길이 27km의 돌이 많은 구불구불한 사막 지형의 비탈길이었으며, 주변에 동굴들이 많아 강도들의 은신처로 사용되었다고 말하지만,[각주:34] 고대 여리고의 죄악성과 이것을 연결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을 예시로 든 것은 여리고에 많이 살고 있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예루살렘 성전 업무를 위해 주기적으로 이곳을 통과해야 했으며,[각주:35] 예수님 시대 이전부터 여행하기 위험한 길로 악명 높았기 때문일 것이다.[각주:36] 심지어 예수님 시대 몇 세기 이후에도 강도들은 이 길에서 여행자들을 강탈했다고 한다.[각주:37]

 

 그러므로 강도를 마귀라고 해석하는 것 또한 근거가 부족하다.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듣던 유대인들은 이 비유에 사용되는 단어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해독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보다는, 오히려 자연스럽게 익히 잘 알고 있던 여리고로 내려가는 위험한 여행길을 떠올렸을 것이다. 여기서 예루살렘이 무엇이고 여리고가 무엇이며 강도는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지 않는 내용을 추가하여 억지로 해석하는 것이다.

 

 더욱이 여기서 갑자기 사해가 등장하는 것은 과연 L목사가 성경 본문에 충실한 해석을 하는 사람인가에 대해서 의심하도록 만든다. 혹 여기서 어떻게 억지로 사해에 내한 내용을 끼워 맞춘다 해도, 그 사해를 지옥으로 해석해야 하는 근거는 찾기 어렵다. 이 본문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소돔과 고모라는 말할 것도 없다.

 

 

 

 제사장, 레위인이 지나쳐 간다


 대침의 L목사는 여기서 제사장을 기성 교단의 유명 목사, 혹은 부흥강사 등으로 해석하고, 레위인은 기성 교단에서 열심히 해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으로 해석한다. 이 해석은 사실 반박할 가치가 거의 없다. 터무니 없는 내용에 대해 우리가 과연 무슨 말을 더 할 필요가 있을까?

 

 L목사의 이와 같은 해석은 알레고리 해석법이 얼마나 터무니 없으며, 또 얼마나 성경 본문을 자의적으로 왜곡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성경 본문은 분명하게 유대교의 제사장과 레위인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L목사는 억지로 이것을 현대의 기성 교단 목사들이나 신자들로 둔갑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비판하고 싶은 대상을 비방하기 위해 성경 본문을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성경 본문과 무관하게도,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악의적으로 묘사한다. 그의 설교에서 일반 교단의 목회자들은 거룩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강도 만난 자를 그냥 지나쳐 가는 위선자들로 등장한다. 또 일반 교단에 다니는 신자들이 마치 행함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봉사하는 사람인 것처럼 나온다.

 

 그런데 L목사가 제사장과 레위인을 본문이 의미하는 것에서 벗어나 현대의 대상에게 무리하게 적용하는 순간, L목사가 소속된 대침 역시 이 기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과연 대침의 목회자들은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의 실제적인 어려움을 목격하였을 때에 도와주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대침의 많은 신도들이 건축헌금이나 요셉대출을 위해 힘든 일을 겪고 있을 때, 대침의 목회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대침에게 상처 받고 마음에 문제가 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갈 때, 그들은 어떤 도움을 주었는가? 내가 본 대침의 목사들은 교회에서 나간 사람들을 비방하고 모욕하며 교회를 대적한다고 악마적으로 묘사하는 것에 힘과 노력을 쓰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대침에 다니는 사람들은 L목사가 해석하는 레위인의 모습과 무관한 자들인가? L목사는 일반 교단의 신자들을 구원을 위해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고 교회학교에서 가르치고 찬양대도 하고 집사, 장로도 하는 사람들로 묘사한다. 그런데 나는 이 묘사를 듣자마자 대침에 있는 불쌍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구원을 위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대침 교단의 일들을 전혀 하지 않고 대침 교제에도 참석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할 때 그들은 그런 사람을 구원 받은 자로 인정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결국 대침 교회에 봉사하는 것은 자신의 구원을 증명하는 일과 사실상 동일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동시에 대침 사람들은 주변의 불행한 이웃을 돕는 것에는 놀라우리만치 무관심하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어서 빨리 교회에 봉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서 대침은 해당 본문을 "전도하는 것"에 대한 내용으로 둔갑시켜 버렸다. 이렇게 바꿔버리면 상대적으로 예수님의 명령(?)을 지키기 쉬워지며, 자신들의 결함 역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교세를 확장하는 것을 이웃을 돕는 행위로 간주해버리면, 모든 것이 참 편리해진다. 그래서 대침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은 바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복음 전파 만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지 않았을까? 내가 이렇게 말하면 대침은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도와준 것이 곧 복음 전파라고 하면서 알레고리 해석으로 또다시 돌아간다. 사전에 미리 정해놓은 정답을 위해 성경의 모든 내용을 끼워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자신들이 성경을 가장 잘 가르친다고 주장하니, 정말 황당할 따름이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도와준다


 대침은 여기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알레고리 해석에 의하면 강도 만난 자인 죄인을 구원해주는 사람은 예수님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L목사는 예수님은 사마리아인과 같이 유대인들에 의해 멸시를 받았고, 또 요 8:48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부른 것 때문에 여기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뜻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멸시 받았다는 사실이 사마리아인과 예수님의 동일성을 필연적으로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유대 사회에서 멸시 받았던 대상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지 않았으며, 이방인들이 불결하다고 생각했다. 또 같은 유대인이더라도 세리나 창녀와 같이 혐오의 대상이었던 직업군도 있었다. 어떤 종교적 열심히 투철한 유대인들은 다른 평범한 유대인들을 "하아레쯔"라 부르며 조롱하기도 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무시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사마리아인과 동일하게 여겨질 수 있다면, 굳이 사마리아인이 아니더라도 유대 사회에서 멸시 받던 이 모든 대상들과 예수님은 동일시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 활동 시기에 유대인들이 보편적으로 예수님을 무시했던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이자 훌륭한 선생이었던 니고데모와 대화하셨으며(요 3), 바리새인에게 식사 청함을 받기도 하였다(눅 11:37). 심지어 관원("ἄρχων"; 지도자)들 중에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많았다(요 12:42).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께 자신의 딸을 고쳐주실 것을 간청하기도 했다(눅 8:41).

 

 또한 L목사가 요 8:48을 예수님과 사마리아인을 연결 짓는 근거로 가져온 것은 중대한 실수이다. 왜냐하면 만약 해당 구절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사마리아인으로 불렀다는 점 때문에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을 예수님으로 여겨야 한다면, 동일한 논리에 의해 예수님은 귀신 들린 자로도 취급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 8:48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인이라고 비방할 뿐 아니라 귀신 들린 자라고도 비방한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요한복음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사마리아인이라 비방한 것은 예수님이 사마리아와 어떤 연관성이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님이 사마리아에서 영접을 받았다는 보고를 듣고 유대인들이 이를 악의적으로 확대 해석하여 예수님을 모함한 것이다.[각주:38] 만약 유대인들이 이와 같이 예수님을 비방한 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을 적대하는 자들이 자신을 사마리아인으로 취급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예수께서 스스로를 사마리아인이라 비유하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예수님이 스스로를 사마리아인의 후손으로 확실하게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 8:48은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이 아니라는 것을 은연 중에 강조하며, 누가복음 저자 역시 예수님과 사마리아인을 연관 지을 의도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누가복음은 또한 사마리아를 지속적으로 긍정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며, 사마리아의 촌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것을 기록한다(눅 9:51-56).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신을 사마리아인으로 비유했다는 주장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여기서 사마리아인이 등장한 것은 예수님의 어떤 특성과 무관하며 이 본문을 읽는 독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것을 듣는 유대인들에게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라 여기는 것이 더 낫다. 아마 앞서 제사장과 레위인의 이야기를 들은 율법교사는 자연스럽게 이것이 유대교의 종교인들을 비판하는 것이라 생각해서 이제 어떤 평범한 이스라엘인이 등장하여 강도 만난 자를 도와줄 것이라고 예측했을 것이다.[각주:39] 즉 예수님의 비판의 초점이 종교지도자들, 성직자들을 겨냥한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대침의 L목사도 제사장과 레위인을 그렇게 해석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킴으로써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지점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신다. 사마리아인이 예기치 않게 등장했다는 것은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 주변에 사마리아인들이 일반적으로 통행할 것으로 기대되지 않았기 때문도 있다.[각주:40] 또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향한 적대감을 생각해보면, 강도 만난 자의 일은 분명 유대인들의 일인데, 사마리아인이 갑자기 이상하게 끼어든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각주:41] (즉 예측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혐오했으며, 그들과 식사하는 것을 부정한 돼지고기를 먹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 멀리했다.[각주:42] 그러므로 유대인 청중의 입장에서 이런 부류의 사람이 강도 만난 자(아마도 유대인으로 추정되는)를 도와줄 것이라 기대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사마리아인이 여행 중에 강도 만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긴 것(ἐσπλαγχνίσθη)은 앞서 등장했던 제사장 및 레위인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당한 피해자의 이웃이 된 것은 그가 예수님의 비유였기 때문이 아니며, 복음을 전파해서도 아니고, 행함으로 얻는 구원에 반대해서도 아니다. 오직 여행 중에 상처 입은 자를 보고 불쌍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의 "스플랑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는 적어도 예수님이 생각하는 '어떤 사람의 이웃이 되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각주:43]

 

 

 

 기름과 포도주를 붓는다


 기름 붓는 것을 성령의 임재와 연관 짓고 포도주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연관 짓는 비유법은 기독교 전통 속에서 상당히 흔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용례에서 기름을 의미하는 헬라어 "엘라이온(ἔλαιον)"과 포도주를 의미하는 헬라어 "오이노스(οἶνος)"는 성경 본문에서 이것이 영적이고 천상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명확한 암시가 없다면 일차적으로 물질적인 "기름"과 "포도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더욱이 만약 해당 단어가 들어 있는 문장의 맥락이 물질적인 것의 사용을 시사하고 있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석 되어야 한다.

 

 학자들은 분명하게 이 문맥에서 헬라어 "엘라이온(ἔλαιον)"이 치료 목적으로 사용된 물질적인 의미에서의 "올리브 기름"이라고 명시한다. 『BDAG』는 명확하게 눅 10:34의 "엘라이온"을 "① 일반적" 의미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곧 이 문맥에서 "엘라이온"은 "상처에 바르는 기름"(사 1:6)의 용도로 사용되었다.[각주:44] 『TDNT』는 "기름은 다양한 질병을 치료하는 수단으로 종종 사용되었다"라고 언급하면서 눅 10:34를 막 6:13 및 약 5:14과 동일 선상에 둔다.[각주:45] 특히 유대 문헌에서는 “안식일에 병자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섞은 것으로 몸을 바르게 하라”라고 권하는 부분이 존재한다.[각주:46] 이사야 1:6과 관련하여 기름은 상처로 말미암는 고통을 진정시키는 완화 작용이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각주:47] 눅 10:34의 문맥은 분명하게 사마리아인이 기름을 치료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으며 추가적인 의미를 찾아내라는 암시를 전혀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서 "엘라이온"은 물질적인 의미의 올리브 기름으로 여겨야 한다.

 

 헬라어 "오이노스(οἶνος)"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BDAG』가 이것을 "① 원뜻"에 배정하고 "약으로서" 사용되는 용례를 가진다고 한 것은 여기서 "오이노스"가 영적인 추가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지 않음을 보여준다.[각주:48] 『TDNT』의 하인리히 제세만(Heinrich Seesemann)은 막 15:23과 마 27:34에서 예수님이 포도주를 거부하고 고통을 인내하는 장면을 논하면서 산헤드린 문헌의 라브 히스다(Rab Chisda)의 다음과 같은 말을 소개한다: “형을 받으러 나가는 사람은 의식을 잃게 하기 위하여 포도주에 섞인 약간의 유향을 받았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께서 포도주를 거부하신 것은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이며 이것은 눅 10:34와 관련이 있다고 명시한다.[각주:49] 대럴 벅(Darrell L. Bock)은 포도주가 상처의 세균 감염을 막아준다고 언급한다.[각주:50] 존 놀랜드(John Nolland)는 고대 의술에서 포도주가 방부제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이해되었다고 말한다.[각주:51] 이 본문의 문맥에서도 포도주가 물질적인 의미 외에 추가적으로 영적인 비유를 함유하고 있다는 암시를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분명하게 사마리아인이 포도주를 치료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신의 비유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추가적인 의미를 발견하라고 분명하게 암시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눅 10:34의 기름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의도대로) 치료 목적으로 사용된 물질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인정해야 한다.

 

 

 

 주막에 맡기고 주막집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지불한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주막에 맡긴 것을 보고 대침의 L목사는 이 "주막"이 교회이며, 주막집 주인은 성령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L목사가 여기서 "교회"라고 할 때는 한국 교회 전반을 아우르는 의미에서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판단할 때에 복음이 있다고 인정되는 교회, 즉 대침과 같은 교회만을 의미한다. 그래서 대침은 이 본문의 알레고리 해석을 통해 자기들의 교회에 성령이 거하시고 신도들은 모두 강도 만난 자와 같이 대침 교회에 맡겨진 것이므로, 영혼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서는 대침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L목사는 여기서 정말 어처구니 없는 황당한 해석을 하는데, 사마리아인이 주막집 주인에게 맡긴 두 데나리온이 요 1:17의 "은혜와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은혜는 우리 죄를 용서해주신 것이고, 진리는 죄인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L목사는 이 같은 과정의 완성이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를 통해 표현되었다고 보는데, 이 말씀은 그에 의하면 종말 시의 몸의 부활을 의미한다.

 

 그러나 "주막"을 의미하는 헬라어 "판도케이온(πανδοχεῖον)"의 뜻을 알고 나면, "주막"을 교회로 해석하는 것이 부적절하며 또한 왜 사마리아인이 주막집 주인에게 돈을 주고 강도 만난 자를 치료해달라고 신신당부했는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헬라어 용어의 의미를 생각할 때 "주막집 주인"을 성령으로 해석하는 것은 정말 적절하지 않다.

 

 헬라어 "판도케이온(πανδοχεῖον)"은 『BDAG』에 의하면 낙타나 말 등을 타고 무리를 지어 사막을 여행하는 상인들, 곧 대상들이 머무르는 대규모 숙박 장소를 의미한다. 이것은 개역한글에서 "주막"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의 주막보다는 훨씬 규모가 컸던 것 같다. 눅 2:7에서는 "여관"이라 번역된 "카타뤼마(κατάλυμα)"도 등장하는데, 눅 10:35의 "판도케이온"은 눅 2:7의 이 "카타뤼마"보다 더 좋은 숙박 시설을 갖추고 있는 대규모 호텔이었다.[각주:52] 『TDNT』는 이것이 상업의 발달과 관련하여 등장했다고 언급한다.[각주:53] 그러나 그와 같은 시설의 주인들은 사람들을 잘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환자 간호가 필요할 때 종종 이런 여관 시설의 주인과 간병 계약서를 작성하고 비용을 선불로 지불하였다. 이 계약서는 여관 주인이 그 사람을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었다고 한다. 탈무드에서도 이와 같은 계약의 과정에서 돈을 지불한 것이 언급된다.[각주:54]

 

 따라서 눅 10:35에서 사마리아인이 여관 주인에게 돈을 지불한 것은 "판도케이온"이 환자들을 잘 돌보기에 최상의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마리아인은 자신이 데려온 부상자가 확실하게 회복하길 바랐다. 그러나 그들이 머무는 "판도케이온"은 환자를 잘 케어할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많은 상인들을 접대하는 것에 익숙했던 여관 주인 역시 강도 만난 어떤 사람을 돌보는 것에는 큰 흥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은 법적 계약서를 작성해 여관 주인이 강도 만난 환자를 확실하게 보살피도록 어느 정도 강제성을 부여하고자 하였다. 

 

 헬라어 "판도케이온"은 사마리아인이 머물렀던 장소가 상당히 비즈니스적인 곳이었음을 암시한다. 이런 장소와 이런 시설의 주인을 각각 "교회"나 "성령"으로 해석하는 것은 정말 부적절할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여기서 사마리아인이 진심으로 자신이 데려온 환자의 안위를 생각하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

 

 "두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2일분 임금에 해당한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의 확실한 회복을 위해 여관 주인에게 계약금을 지불하고, 또 이것에 추가하여 자신이 돌아오기까지의 간병 비용을 선불로 지급한다. 학자들은 이 비용이 강도 만난 자가 여관에 머무르며 간호를 받는 데에 충분한 액수였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1일을 여관에 머무르는데 들어가는 식비는 약 십이분의 일 데나리온이었다고 한다.[각주:55] 그러므로 두 데나리온은 한 사람이 적어도 7일에서 최장 24일을 머무를 수 있는 비용이었다. 이것은 사마리아인이 지불한 두 데나리온의 금액이 (은혜와 진리가 아닌) 환자 한 명이 어느 정도 회복할 때까지의 기간을 생각해서 책정된 것임을 보여준다.

 

 사마리아인이 추가 비용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은 여관 주인과의 이 계약이 상당히 공식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한다.[각주:56] 그래서 여관 주인은 사마리아인이 환자를 맡기고 가는 것을 붙잡지 않는다. 이것은 여관이 교회를 의미하거나, 여관 주인이 성령을 상징하거나, 사마리아인이 예수님을 뜻한다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누가 이웃이 되겠느냐?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비유를 듣거나 읽는 사람들이 길을 잃고 헤매지 않도록 율법교사가 물은 질문의 주제로 다시 돌아온다. 즉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이제 등장하는 셈이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서 헬라어 "게고네나이(γεγονέναι; "이미 되었다")"는 이야기의 두 인물에게 어떤 요소가 이웃이 되는 강력한 원리로 작용했는가를 강조한다. 예수께서는 이를 통해 청자들의 관심을 사마리아인과 강도 당한 유대인이 서로의 사회 문화적인 혐오와 반목의 상황 속에서도 이웃이 된 원인이 무엇이었는가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율법교사가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했을 때, 예수께서는 그 대답을 긍정하시며 가서 이렇게 행하라고 명하신다. 즉 예수님의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예수님"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인종이나 문화를 뛰어넘는 이웃 관계의 설정은 긍휼과 자비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의도적으로 율법교사의 입에서 "자비를 베푼 자"라는 단어가 나오게끔 만드셨다. 

 

 우리는 앞서 위에서 1세기 당시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이웃의 범주를 언약 공동체에 속한 자들로만 한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율법교사 역시 예수께서 이런 결론을 내실 것이라 예측하고 "자기를 옳게 보이"기 위해 "그렇다면, 내 이웃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여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하였다. 만약 예수께서 "언약 공동체에 속한 유대인들이 너의 이웃이다"라고 대답하셨다면 (그리고 이것은 율법교사가 의도한 방향이다) 율법교사는 그런 범주에서라면 자신은 비록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음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율법교사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오히려 율법교사를 예수님의 의도 안으로 끌고 들어온다. 먼저 예수께서는 삶과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거기서 이 사람의 이웃으로 기대되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 사람을 도와주지 않고 지나가버린다. 아마 이 지점에서 율법교사는 속으로 "또다시 이 따분한 랍비가 성직자들을 비판하기 시작했군."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보나마나 성직자가 아닌 평범한 유대인이 등장해 그 사람을 도와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사마리아인이 등장하더니, 이 사람을 도와준다. 기름과 포도주로 말이다. 어떤 유대교 종파에서는 사마리아인들에게 기름이나 포도주를 전혀 받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에,[각주:57] 이 지점에서 청자들은 아마 경악을 했을 것이다. 또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서로 간의 악감정과 인종적 갈등을 생각해볼 때, 이것은 전혀 기대했던 이야기의 흐름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랑곳 하지 않고 비교적 길고 상세한 설명으로 이 사마리아인이 얼마나 지극 정성으로 생명이 위험한 사람을 돌봐주었는지를 묘사한다.

 

 이제 율법교사는 "이 정신 나간 랍비가 유대인들 보다 사마리아인이 더 낫다고 말하려고 이 이야기를 시작했나?"라고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율법교사는 속으로 반박할 말을 준비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실제로는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보다 더 경건하고 또 더 이웃 사랑을 잘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야기는 율법교사와 청중들의 입장에서는 있을법하지 않은 일을 꾸며낸 허황된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뜻밖의 질문을 던진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강도 만난 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고 권한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는 질문은 율법교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지점을 보여준다. 그래서 율법교사는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강도를 만나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 선 사람의 입장으로 들어간다. 그 입장에서, 과연 누구를 이웃이라 불러야 하겠는가?

 

 유대인들의 상식에서라면 같은 유대 동족인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이웃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다 부질 없다. 오직 자신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진정한 이웃이다. 율법교사는 이웃에 대한 유대 랍비들의 논의들을 익히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도 만난 자의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사마리아인이 참된 이웃이라는 결론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율법교사의 양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벼랑 끝에 몰린 사람처럼, 율법교사는 마지못해 예수님의 이야기 앞에서는 유대교의 이웃 설정이 의미 없는 것이라고 인정한다. 그리고 이야기 속의 이 두 사람을 그런 관계로 이어준 것은 사마리아인이 가졌던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자비로운 마음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율법교사는 이제 이것을 선명하게 인식한다.

 

 예수님의 "행하라(ποίει)"는 명령은 앞에서(눅 10:25) 율법교사가 "무엇을 하여야(ποιήσας) 영생을 얻습니까?"라고 질문했던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이를 행하라(ποίει) 그러면 살리라"(눅 10:28)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도 상기시킨다. 율법교사는 영생을 얻기 위해 이웃 사랑을 할 때에, "그 이웃을 누구로 설정해야 하는가"를 물었다. 왜냐하면 그는 당연히 주변에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전부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질문을 "어떻게 해야 내가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는가"의 문제로 바꿔버렸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을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공감할 만한 상황, 곧 죽음을 앞두고 있는 긴박한 상태에 처한 사람의 상황을 통해 제시하셨다. 죽음을 앞 둔 사람의 입장에서, 유대교 랍비들이 논했던 내 이웃이 누구인가의 문제는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이 인종적, 문화적, 사회적 편견의 틀을 깨버리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실제적 행동을 통해 죽어가던 자의 이웃이 되었던 것처럼, 이와 동일하게 다른 누군가의 이웃이 되라고 명하신다. 그러면 그는 살 것이다(눅 10:25, 28, 37). 1세기의 배경에서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과 그 행동 양식까지도 모방하여 삶을 살았던 것을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의 이 명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걸어가라는 선한 초대이다. 누구든지 그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서 살아갈 것이다(요 15:14).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보고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요 13:35). 미쉬나나 토셉프타를 따르는 사람은 내 이웃이 누구인가를 고민하겠으나,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군가의 어려움과 고통과 필요에 응답하여 기꺼이 이웃이 되는 삶을 산다.

 

  

 

 


 

 

 

 

 결론


 알레고리 해석은 누군가에게는 흥미롭고 자극적이며 재밌는 묵상을 제공할지도 모르지만,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본연의 의미를 가리고 왜곡할 수 있다. 

 

 대럴 벅(Darrell L. Bock)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에번스(C. A. Evans 1990: 178)는 이 비유의 다른 부분들을 다음과 같이 알레고리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잘못된 해석 방법이라고 올바르게 지적한다. 곧 이 비유에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여행길에 오르는 것은 아담의 타락에 견줄 수 없다. 또한 강도들은 사탄을 가리키지 않는다. 제사장은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이 아니다. 또한 레위인은 선지자들을 대표하지 않는다. 이 비유는 구원사가 아니라, 오히려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자비를 베풀라는 윤리적인 핵심 가르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또한 누가복음의 본문은 이 비유를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아무런 근거도 제시해 주지 않는다. 예수는 율법교사에게, 가서 사마리아 사람이 보여 준 것과 같이 행동하라고 권면한다. 따라서 예수는 이 비유에서 기독론과 관련된 가르침을 강조하지 않는다. 예수는 그 율법교사에게 이 비유에서 자신(예수)을 발견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는 그가 이 비유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이웃을 잘 돌보는 사람이 되라고 명령한다."[각주:58]

 

 만약 예수께서 율법교사가 자신이 말한 비유를 표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속에 숨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발견하길 원했는데도 그것을 말씀하지 않고 "가서 사마리아인처럼 행하라"고 오해하도록 명령하셨다고 우리가 생각해야 한다면, 이것은 예수께서 그 율법교사를 기만했다는 결론으로 우리를 안내할 것이다. 

 

 존 놀랜드(John Nolland)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사의 상당 기간 동안에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고, 오늘날의 연구들 중에서도 상당 부분이 이 비유에 대한 기독론적인 이해를 이런저런 형태로 다시 제시하고자 시도해 왔다. 이러한 견해들 중 그 어느 것도 학문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 비유가 예수 자신의 행동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 하고자 하는 훨씬 더 매력적인 견해가 터넌트(Ternant)와 짐머만(Zimmermann)에 의해서 제시되었는데, 그들은 예수의 사역 가운데 원래의 배경 속에서 이 비유는 예수 자신의 긍휼의 실천으로 인해 불러일으켜진 동요에 의해서 촉발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이 비유 속에 사마리아인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설명해 낼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거부되어야 한다."[각주:59]

 

 예수님의 입을 통해 해석된 비유의 내용이 아닌, 추가적인 무언가를 제시하며 이것이 성경 본문을 가장 잘 해석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예수님 보다 더 큰 자인가? 우리는 과연 예수님의 설명 외의 추가적인 무언가를 더하여 예수님의 이야기를 이해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의 본래 의미에 충실하여 그분의 설명을 상세하게 따라가면서 이해해야 하는가?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설명에 충실했다면, 이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알레고리 해석은 흥미롭고 다채로운 묵상을 풍성하게 만드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며 자신이 성경을 가장 잘 해석한다고 주장하는 자의 손에 쥐어진다면 성경 본문 자체 보다 더 큰 권위를 얻으려 할 수도 있다. 역사 속에서 이러한 시도는 정말 무수히 많았다. 그리고 이런 시도들은 결국에 사람들이 성경의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제아무리 알레고리 해석으로 얻은 가르침이 좋아 보인다 해도, 성경 본연의 가르침을 가려버린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좋은 것이 아니다. 알레고리 해석은 정말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한다. 뭔가 숨겨진 엄청난 신비로운 깨달음을 전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호기심을 갖도록 만든다. 마치 선악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보였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흥미진진한 해석은 성경이 말하고자 한 내용과 다른 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래서 결국에 그 끝에는 다른 곳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알레고리 해석은 중세 가톨릭의 교황에게 권력을 안겨주었던 것과 같이 성경 해석자의 권위를 높이고 신령한 가르침을 성령으로부터 받는 탁월한 사람이라는 선전을 하도록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알레고리 해석이 난무하는 교회는 흔히 자신들의 지도자가 성경을 정말 잘 해석한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이것이 극단적으로 나아갈 경우 성경의 모든 단어들을 전부 비유와 상징으로 해석하려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의 결말은 성경을 해석하는 지도자가 자신이 원하는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성경의 텍스트들을 난잡하게 남용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주요 이단들(신천지, 구원파 등)이 알레고리 해석법을 자주 사용하는 것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알레고리 해석은 근거를 제시할 필요가 없는 해석법이기 때문이다. 오직 알레고리 해석을 수행하는 지도자의 권위와 신뢰성에 의해 정당성이 획득된다.

 

 그래서 성경 본문의 권위를 넘어서는 해석이 생겨난다. 모든 편견을 깨고 타인을 불쌍히 여겨 이웃이 되라는 예수님의 사랑 가득한 메시지는, 대침의 L목사에 의해 복음을 전파해 교세를 확장하라는 전투적 명령으로 가려진다. 그리고 대침 신도들은 이 해석을 정말 성경 본문에 확실한 근거가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신들이 숭상하는 유명한 목사가 설교했기 때문에 이것을 올바른 성경 해석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렇게 L목사의 권위는 알레고리에 의한 자의적 해석을 낳고, 이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여기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L목사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실제로 대침에서는 이런 용어를 사용한다)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L목사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L목사의 설교를 그 정도의 권위를 가진 것으로 취급한다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는 L목사가 이끄는 대침이 성경을 가장 잘 가르친다는 망상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이렇게 된다면, 모든 사람들이 대침의 가르침은 대침 내의 목사들의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할 뿐임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L목사 등의 권위가 성경을 왜곡하는 것을 더이상 허용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필자 역시 대침 사람들에게 이런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이것을 위해 오늘도 대침이 성경을 가장 잘 가르친다는 망상을 부수기 위한 글을 쓴다.

 

 


 

 

 

 

이단 생활! 웹툰을 시작합니다.

이단에서 생활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이단 생활!이라는 웹툰을 시작합니다. 웹툰은 제가 제작하는 것이 아니며, 작가님이 따로 계십니다. 웹툰 제작의 목표는 이 이단을 경험한 분들 뿐 아

littlebiblicaltheology.tistory.com

 

 

포도나무 비유에 대한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의 해석을 논함 (요한복음 15:1-17)

대한예수교침례회(이하 대침)의 포도나무 비유를 교회와 과도하게 연결 짓는 해석은 이제는 너무나 유명하고 반박하는 글들도 많기 때문에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이미 많

littlebiblicaltheology.tistory.com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의 의미... 히브리어 "샤마임(שָׁמַ֫יִם)"은 복수의 "하늘들"을 말하고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이하 대침)는 자신들이 성경을 잘 알고 또 잘 가르친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그곳에 다니는 신도들 역시 자신들이 성경을 자주 읽으며 성경 지식이 다른 교

littlebiblicaltheology.tistory.com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의 주장대로 일반 교단들이 복음에 대해 잘 모르는가? (행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이하 대침) 분들이 대침을 떠나 일반적인 교단으로 가지 못하는 가장 중대한 이유는, 다른 교단들이 가르치는 구원에 대한 내용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

littlebiblicaltheology.tistory.com

 

  1. https://ko.wikipedia.org/wiki/%EC%95%8C%EB%A0%88%EA%B3%A0%EB%A6%AC_%EC%84%B1%EA%B2%BD%ED%95%B4%EC%84%9D [본문으로]
  2. Williston Walker,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trans. In Seol Song, Christian Digest Press, 2016, p. 107. [본문으로]
  3. Alister E. McGrath, The Christian Theology Reader, trans. Gi Cheol Kim, The Blessed People Publishing, 2021, p. 191. [본문으로]
  4. Ibid. [본문으로]
  5. Philip S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2, trans. Gil Sang Lee, Christian Digest Press, 2014, p. 677. [본문으로]
  6. Williston Walker, op cit., p. 104. [본문으로]
  7. Justo. L. Gonzalez, The Story of Christianity: Volume 1: The Early Church to the Dawn of the Reformation, HarperOne, 2010, p. 101. [본문으로]
  8. Philip Shaff, op cit., p. 677. [본문으로]
  9. Justo. L. Gonzalez, op cit., p. 102. [본문으로]
  10. Ibid., p. 195. [본문으로]
  11. Williston Walker, op cit. [본문으로]
  12. Philip S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2, trans. Gil Sang Lee, Christian Digest Press, 2014, p. 684. [본문으로]
  13. Ibid. [본문으로]
  14. Ibid., p. 685. [본문으로]
  15. Justo. L. Gonzalez, op cit., 109. [본문으로]
  16. Alister E. McGrath, op cit., 199-200. [본문으로]
  17. Ibid., 206. [본문으로]
  18. https://ko.wikipedia.org/wiki/%EC%95%8C%EB%A0%88%EA%B3%A0%EB%A6%AC_%EC%84%B1%EA%B2%BD%ED%95%B4%EC%84%9D [본문으로]
  19. H.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vol. 1, trans. Tae Hyeon Park, Revival & Reformation Publishing, 2016, 107. [본문으로]
  20. Alister E. McGrath, op cit., 216. [본문으로]
  21. Ibid., 217. [본문으로]
  22. Ibid., 225. [본문으로]
  23. Ibid., 232. [본문으로]
  24. Ibid., 236. [본문으로]
  25. Darrell L. Bock, Luke 9:51-24:53, trams. Gi Cheol Sin, Revival & Reformation Publishing, 2017, 120. [본문으로]
  26. 이것은 이제는 신약학계에서 모두가 인정하는 내용이다. 자세한 논의는 샌더스의 PPJ, 혹은 더글라스 무의 로마서 주석을 참고하라. [본문으로]
  27. Darrell L. Bock, op cit., 119. [본문으로]
  28. John Nolland,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35B, trans. Kyeong Jin Kim, Solomon Press, 2004, 306. [본문으로]
  29. Darrell L. Bock, op cit., 121. [본문으로]
  30. "There can be no doubt that the terms used here, including רֵעַ, denote fellow-members of the covenant or the community who share in the election and the covenant and the implied duties and rights. According to Lv. 19:18 the command to love one’s neighbour applies unequivocally towards members of the covenant of Yahweh and not self-evidently towards all men." Heinrich Greeven, “πλησίον”, ed. Gerhard Kittel, Geoffrey W. Bromiley와/과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 314–315. [본문으로]
  31. John Nolland, op cit., 293. [본문으로]
  32. John Nolland,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35B, trans. Kyeong Jin Kim, Solomon Press, 2004, 307. [본문으로]
  33. https://ko.wikipedia.org/wiki/%EC%98%88%EB%A6%AC%EC%BD%94 [본문으로]
  34. John Nolland, op cit., 307. Darrell L. Bock, op cit., 123. [본문으로]
  35. John Nolland, Ibid. [본문으로]
  36. Darrell L. Bock, Ibid. [본문으로]
  37. Ibid. [본문으로]
  38. Craig S. Keener,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II, trans. Ok Yong Lee, Christian Literature Center, 2018, 2042. [본문으로]
  39. Darrell L. Bock, op cit., 126. [본문으로]
  40. John Nolland, op cit., 310. [본문으로]
  41. Ibid. [본문으로]
  42. Darrell L. Bock, op cit., 126. [본문으로]
  43. Ibid. [본문으로]
  44. Walter Bauer, BDAG, trans. Jeong Ui Lee, Word of Life Press, 2017, 470. [본문으로]
  45. "4. Oil was often used as a means to heal the most divers maladies. With Mk. 6:13 and Jm. 5:14 (→ I, 230), we may also refer to Lk. 10:34: καὶ προσελθὼν κατέδησεν τὰ τραύματα αὐτοῦ ἐπιχέων ἔλαιον καὶ οἶνον …" Heinrich Schlier, “ἔλαιον”, ed. Gerhard Kittel, Geoffrey W. Bromiley와/과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 472. [본문으로]
  46. “A sick person may be rubbed on the sabbath with a mixture of oil and wine”. Ibid. [본문으로]
  47. John Nolland, op cit., 312. Darrell L. Bock, op cit., 128. [본문으로]
  48. Walter Bauer, BDAG, trans. Jeong Ui Lee, Word of Life Press, 2017, 1066. [본문으로]
  49. Cf. Sanh., 43a: Rab Chisda has said: “To him who went forth to be executed there was given a little frankincense mixed with wine to deprive him of consciousness.”19 Jesus’ rejection of the drink shows that He accepted the suffering of the cross to the full, Wine is a means of healing in Lk. 10:34.

    Sanh. Sanhedrim Mishnah-, Tosefta-, Talmud tractate On the court of justice and its procedure (Strack, Einl., 51 f.).

    19 For further information cf. Str.-B., I, 1037.

    Heinrich Seesemann, “οἶνος”, ed. Gerhard Kittel, Geoffrey W. Bromiley와/과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 164. [본문으로]
  50. Darrell L. Bock, op cit., 128. [본문으로]
  51. John Nolland, op cit., 312. [본문으로]
  52. Darrell L. Bock, op cit. [본문으로]
  53. A brief word might be added about an institution which proved necessary with increasing commerce, that of the inn,130 which is found from the 4th cent.131 This, too, found its origin in religion, for the first hostelries were in the shadow of temples (Delos, Delphi etc.) and were open to pilgrims (πανδοχεῖα or ξενοτροφεῖα). The hospices connected with synagogues132 and Christian places of pilgrimage133 are a par. to this pagan institution, and a development of it. But soon the vigorous commercial life of the Hell. period produced similar inns under many different names,134 including πανδοχεῖον,135 κατάλυμα,136 and ξενία,137 in the NT.

    130 Already in the Homeric period there were λέσχαι, public resting-places which, like the caravanserais of the East, offered only shelter for the night, and were strictly used only by the poor and beggars, cf. Hom. Od., 18, 329; Egerer, 24.

    131 Blümner, 450 ff.; Lübker, 401; Friedländer, I, 343 ff.; Mau, Art. “caupona,” Pauly-W., III (1899), 1806–8; E. Ziebarth, “Beiträge zum gr. Recht,” Zschr. f. vergleichende Rechtswissenschaft, 19 (1906), 291–298.

    132 Cf. Deissmann LO, 379 f., with n. 5.

    133 Bolkestein, cf. also the great pilgrim houses at Hindu shrines, with free reception and board.

    par. parallel.

    134 ξενών (Ditt. Or., 609, 21), which passed into Lat. (Ziebarth, 298), ξενίδιον (P. Tebt., II, 335, 17), ξενοδονξεῖον (cf. Suid. ξ 40; in modern Gk. “hotel”), καταγώγιον, Lat. caupona and taberna (cf. Ac. 28:15), more fashionably deversorium and hospitium.

    135 Lk. 10:34. Inns were usually primitive, dirty and noisy; ἐν τῷ πανδοχειῳ ἐλέπρησα καὶ αὐτὸς ἐγώ, says the leper in P. Lond. Christ., 1, 35 (Fr. of an Unknown Gospel, ed. H. I. Bell-T. C. Skeat [1935], 11), though lepers were usually excluded from public inns (ibid., 19). Comedy and art portray the conditions, Friedländer, II (1920), 113 and 116; cf. also the comparison of a πανδοχεῖον with a heart full of demons, Cl. Al. Strom., II, 114, 5; cf. also Aboda Zara, 2, 1.

    136 Lk. 2:7 might well be a public caravanserai, whereas a private house is called κατάλυμα in 22:11 (→ n. 143).

    137 Cf. Hesych. and Suid., s.v., perhaps also Sir. 29:27 B* (Rahlfs οἰκίας). This meaning is supported by the use as a loan-word (אכסניא) in Rabb. speech, b.Ar., 16b; Ex. r., 35, 5; cf. S. Krauss, Gr. u. lat. Lehnwörter im Talmud etc., II (1899), s.v.; b. Sanh., 107b uses in the same sense the Lat. loan word אושׁפיזא hospitium. ξενία seems to have much the same meaning as hospitium elsewhere. Originally it had the abstract sense of “hospitality” for which the NT uses the compound φιλοξενία → 20, but it took on several concrete senses in Hell. Gk. (not mentioned in Pass.): 1. “guest-chamber” (P. Greci e latini, 1, 50, 16 f., also Phlm. 22); 2. “inn,” → n. 33; 3. “quarters,” “lodging,” usually in private houses, as prob. in Ac. 28:23 (Liddell-Scott: “lodging”; cf. Cadbury, 320 ff., though not Moult.-Mill., et al.), hence materially the same as the more specific μίσθωμα (v. 30: if Paul found lodging, not in the house of a friend, but in a hired room, this was not because the Roman Jews or Christians were wanting in hospitality, but because he was a prisoner under Roman guard, as against Riddle, 152, n. 10). ξενία often has this sense in Ps.-Cl. Hom., e.g., 14, 1, in the same phrase as Ac. 28:23: ἐλθεῖν εἰς τὴν ξενίαν (the class. sense “to be received, to come to table, as an invited guest,” cf. Pind. Nem., 10, 49; Jos. Ant., 5, 148 is not very likely here in view of Paul’s situation), cf. also 12, 2: τὰς ξενίας ἐτοιμάζειν, “to lodge” (Phlm. 22) etc. A special use 4. is for “soldiers’ quarters” (Preisigke Sammelbuch, 3924, 8. 15. 17 in an edict of Germanicus; cf. SAB, 38 [1911], 796), then 5. “monks’ cells” (Pall. Hist. Laus., p. 74, 7; 136, 16). Play on the loan-word ξενία in b. Sanh., 107 (→ n. 33) suggests also 6. “hostess.”

    NT New Testament.

    Gustav Stählin, “ξένος, ξενία, ξενίζω, ξενοδοχέω, φιλοξενία, φιλόξενος”, ed. Gerhard Kittel, Geoffrey W. Bromiley와/과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 18–19. [본문으로]
  54. Darrell L. Bock, op cit., 128. [본문으로]
  55. Darrell L. Bock, op cit., 129. [본문으로]
  56. Ibid. [본문으로]
  57. Ibid., 128. [본문으로]
  58. Ibid., 130. [본문으로]
  59. John Nolland, op cit., 304. [본문으로]
반응형

이 글이 도움이 되었다면 ♡를 눌러 주세요. 익명성이 필요한 질문일 경우 Q&A 카페를 이용해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