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비교적 최근인 2023년 12월 17일 자의 설교에서 대한예수교침례회(이하 대침)의 H목사는 십일조를 구원론과 연결하여 거듭난 신자들의 의무로서 십일조를 강조하는 내용의 주장을 하였다.
그는 창 28장 22절의 야곱이 세운 돌, 모퉁이의 돌 비유, 그리고 사닥다리의 꿈, 벧엘 등을 연결하여 알레고리적인 무리한 해석을 감행한 뒤 하나님의 집은 곧 교회이며 교회의 머리와 모퉁이 돌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면서 야곱이 하나님을 향해 십일조를 바치겠다는 서원을 곧 교회에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는 내용으로 둔갑시킨다.
그러면서 창 14:18의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전리품의 십 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바쳤다는 것, 시 110:4와 히 7:1-7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라는 것에 호소한 뒤, 마 23:23에서 예수께서는 십일조를 바치라고 명령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고후 9:7절의 내용은 십일조에 대한 것이 아니므로,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의무적인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위의 내용들을 종합하면서 다음과 같이 연이어 주장한다: "야곱의 십일조를 보라. 십일조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이며, 하나님 앞에 '물질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신앙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물질생활을 철저히 하면 신앙을 배울 수 있다. 안 한 분들은 십일조를 지금 하라. 이렇게 결심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 '영혼이 구원받은 사람은 지갑도 구원받아야 한다'는 말은 맞다."
사실 H목사가 설교한 본문 내용들 전체가 성경 해석 상의 오류가 굉장히 많다. 그래서 들으면서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난감할 정도였다. H목사의 성경 해석 방식은 문맥과 원문의 내용을 통해 성경 본문의 본연의 의미에 집중하기보다는, 단어와 알레고리에 치중하여 다른 본문들과 억지로 연결하고 본문이 말하지 않는 새로운 내용을 이끌어내는 방식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그의 성경 해석은 군데군데 근거가 빈약하고 많은 부분이 지나친 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그 중 십일조와 관련된 내용을 다루기로 했다. 대침에서는 십일조가 신앙생활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 강조한다. 물론 과거에는 이렇게까지 십일조나 건축헌금 등등을 강조하진 않았다. 그러나 근 10년 동안 대침의 설교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들의 논점은 매우 선명하게 교회 생활 중심과 헌금 중심으로 이동한 듯 보인다. 대침은 지금까지 자신들은 교회 생활이나 헌금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정통교단들과는 다르며 순수하고 차별화가 되어 있다는 것을 자신들의 주력으로 삼아왔다. 그런데 교회 봉사와 헌금을 강요하고 이를 의무적인 것으로 둔갑시킨 뒤 지속적으로 설교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비판하는 교단들 보다도 자신들은 더 나아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소위 '타교단들보다 더 낫다는 것'은 어쩌면 타교단들보다 더욱 교회 생활과 헌금을 강조하고 강요하겠다는 의미였던 것일까?
이제 H목사 및 대침에서 주장하는 대로 십일조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무이며 구원의 영역에 있는 신자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 다뤄보겠다.
마태복음 23장 23절 및 누가복음 11장 42절은 십일조를 지키라는 예수님의 명령인가?
원래는 십일조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글을 먼저 시작하려고 했다. 그런데 일단 많은 기독교인들을 속이고 있는 마태복음 및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 십일조를 명령했다는 주장에 대해 다루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 주장은 정말 많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퍼져 있으며 인터넷으로 십일조에 대해 찾아보는 사람들 앞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장이다. 흔히 기독교에 대한 내용을 나무위키 같은 곳에서 찾아야 하는 기독교인들이라면 이런 주장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나무위키는 이 주장을 근거로 십일조를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로 제시한다. 그밖에 많은 인터넷 기사들과 기독교 블로그들에서도 이런 주장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그런데 마 23:23과 눅 11:42에서 십일조의 명령을 이끌어 내는 것은 정말 성경을 문맥과 상관없이 읽겠다는 악착같은 의지를 보여주는 아주 좋은 표본이다. 이런 해석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비유로 말씀하실 때 정말로 좁은 문을 찾아야 되는가 하고 생각해야 할 정도로 성경을 단어나 문자에만 치중하여 편협하게 해석하는 자들이다. 오히려 우리는 성경 본문에서 예수께서 '정말로 말씀하고 싶은 내용'이 무엇인가에 집중해야 한다.
마 23:23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눅 11:42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
이제 성경을 정말 기계적으로만 읽는 자들은, 여기서 예수께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내용에 착안하여 십일조도 행하고 의나 사랑의 마음도 버리지 않아야 한다고 해석한다. 과연 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정말 그것인가?
이것은 이 본문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가, 그리고 이 본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이것도 저것도 행하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가에 대해 알면 간단하게 해결된다. 먼저 아마 십일조 의무론자들 역시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이 본문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외식에 대하여 화가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는 문맥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 본문은 바리새인들이 세세한 일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일, 곧 하나님의 의와 인과 신 및 사랑과 공의를 소홀히 한 것에 대해 지적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본래 명령한 십일조의 원리에 더욱 나아가서 "박하와 회향과 근채"라는 약초들까지도 포함하여 십일조를 바쳤기 때문이다. 이는 "운향"이나 "모든 채소"를 포함하는 누가복음의 본문에서도 잘 나타난다(눅 11:42; 18:12). 1 2
따라서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본래 구약의 율법에서 명한 십일조의 범주에서 훨씬 멀리 나아간 행동에 대해서 다소 신랄한 어조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십일조의 정신, 곧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정신은 간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을 따라 십일조를 꼼곰하게 지켜야 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과연 예수께서 여기서 그런 의도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라고 우리가 봐야 하는 근거가 있는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다고 선언하시는 이 본문에서 십일조의 원리를 이끌어내는 것이 과연 문맥과 전체 주제와 예수님의 의도에 부합하는 해석인가? 그렇지 않다.
혹은 바리새인들까지는 아니어도 십일조 자체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강조하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인가? 이 본문의 내용은 그런 것을 말할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우리는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강조하고자 하신 바가 '십일조를 지켜야 하느냐 마냐'가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거짓된 율법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십일조의 원리에 대해 예수께서 암시하셨다고 해석하는 것은 예수님의 의도를 무시하고 본문 주제와 어울리지 않는 내용을 억지로 추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라고 명령하신 것인가? 이것은 바리새인들처럼 십일조를 확대하여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혹은 바리새인들까지는 아니어도 십일조 자체는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도 아니다. 혹은 십일조를 지킬 때의 자세를 말씀하신 것도 아니다.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는 약간의 실마리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헬라어 문장 구조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의 헬라어의 원문은 "ταῦτα ἔδει ποιῆσαι κἀκεῖνα μὴ ἀφιέναι.(타우타 에데이 포이에사이 카케이나 메 아피에나이)"이다. 여기서 "에데이(ἔδει)"가 사실과 반대되는 현재의 상태에 대하여 '해야 한다'라는 의무를 표현하기 위한 뉘앙스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타우타(ταῦτα)", 즉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마땅히 행해야 하는 율법의 참된 정신을 의미하고, "카케이나(κἀκεῖνα)", 즉 "저것"은 바리새인들이 일반적인 영역뿐 아니라 정원의 약초들에까지 십일조의 범위를 확대 적용하여 실천한 것을 가리킬 것이다. 3 4
그러므로 문장 구조를 살펴보면 사실 예수께서 여기서 하고 계신 말씀은 문자적으로 "율법의 좋은 정신도 행하고 너희가 확대 적용한 십일조의 실천도 버리지 말아라"는 말이 된다. 만약 이 말씀에서 정말 십일조의 원리를 도출해 내는 것이 성경적인 해석이 맞다면, 우리 모두는 십일조를 지킬 때에 바리새인들이 확대 적용한 극히 세밀한 방식을 따라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카케이나"를 통해 지칭하신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십일조'가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확대 적용한 십일조'를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으며, (십일조 의무론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여기서 예수께서는 그것 역시 버리지 말고 행하라고 명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만으로 '바리새인들의 극단적 십일조는 아니지만, 일반적인 십일조는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이다'라고 이해할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극단적 방식의 십일조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바리새인들을 겨냥하여 말씀하셨다. 이것을 무시하고 여기서 일반적인 십일조를 지키라고 명령하셨다는 내용을 이끌어 내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경에서 확인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지, 성경을 적절하게 해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편집증적인 율법 행위를 긍정적으로 검토하셔서 모든 교회들이 지키게 하시는 분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예수께서는 유대 선생들이 논쟁하고 규정했던 안식일의 세세한 조항들을 신경 쓰지 않으셨다(마 12:1-8; 막 2:23-28). 도날드 헤그너(Donald A. Hagner)가 지적하는 바, 오히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마치 구약의 선지자들과 같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만약 너희 바리새인들이 가장 작은 풀과 약초들까지도 세세하게 십일조를 드리고자 한다면, 너희는 동시에 율법의 가장 중요한 사항들인 주변 이웃들의 복지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사항들에도 동일하게 세세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5
즉 예수께서는 '십일조를 바리새인들의 방식대로 세세하게 지키고 율법의 높은 정신에도 집중해라'라는 의미가 아니라, '십일조를 세세하게 지키는 너희가 왜 율법의 좋은 정신인 이웃 사랑에는 세세하게 하지 않느냐?'라고 비판하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십일조를 매우 극단적으로 세밀하게 지키려는 열정을 가진 너희는, 마땅히 십일조의 정신인 이웃 사랑에도 동일한 극단적인 방식의 열심을 내어야 한다. 그런데 너희는 그렇게 하지 않는 외식하는 자들이다.'라는 고발을 여기서 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은 '너희가 십일조를 극단적으로 지킨다. 그런데 외식하는 너희들은 십일조의 정신에는 동일한 기준을 들이대지 않는다. 만약 너희가 단지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높은 수준의 십일조를 지키려 한 것이었다면, 율법의 정신을 행하고 극단적인 십일조의 실천도 버리지 않았어야 한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여기서 어떤 십일조를 실제적으로 지키는 것에 필요한 원리 따위를 도출해 내는 것은 본문의 의도한 바를 벗어난 억지 해석이다. 사도들이 교회에 대하여 권면할 때 십일조와 관련된 그 어떠한 명령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 본문 말씀을 그들은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마 23:23과 눅 11:42의 주요 논점은 '십일조를 지켜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가 아니라(혹은 '십일조를 지킬 때의 자세'가 아니라), '십일조를 지키는 것에 극단적으로 열심을 내며 뽐내는 바리새인들이 정작 십일조의 정신인 사랑은 소홀히 한다'라고 고발하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십일조를 지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의도가 없으셨고, 복음서 저자인 마태나 누가 역시 그런 의도를 내비치지 않는다. 혹은 십일조를 지킬 때의 자세 등의 실제적인 실천의 내용 역시 여기서 관심을 갖는 논점이 아니다. 오히려 십일조를 지켜야 한다는 명령이나 십일조를 실천할 때의 자세 등으로 이 본문을 해석할 때, 본문의 진정한 의미는 왜곡되고 퇴색된다.
십일조의 고대성과 멜기세덱, 아브라함, 야곱
H목사는 십일조가 소위 '율법시대 이전'이기 때문에 율법의 범주 위에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구약 율법과 별개로 십일조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마 아브라함과 야곱 시대에 십일조가 있었다는 점에 호소하여 구약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로 인해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었더라도 이 십일조에 대한 명령은 그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 것 같다. 과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옳은 것일까?
H목사가 간과한 사실은(그가 간과한 것인지 아니면 아예 지식이 전무했는지 모르겠지만) 십일조는 종교적인 의미에서 처음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십일조라는 시스템은 하나님께서 율법과 같은 형식으로 지키라고 계시하여 주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고대 근동 지역에서 널리 알려진 형태의 세금 징수 방식이었다. 또 아브라함이 한 것과 같은 전리품의 십일조를 드리는 풍습은 고대 세계에 널리 퍼져 있었다. 6 십일조는 일반적으로 성소와 왕에게 바쳐졌으며, 대상의 축복이나 보호를 받으려는 목적으로 시작하였으나 점차 국가의 세금 징수 방식으로 굳어졌다. 7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바친 십일조나, 야곱이 하나님께 바치겠다 서원한 십일조 역시 이런 배경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는 아직 레위인들이 가져가는 십일조의 율법으로서의 개념이 등장하기 이전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시기의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율법으로 지켜야 할 의무적인 십일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예고하는 원시적인 의미의 십일조를 말하는 것이라고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제사장이자 왕이었던 살렘 지역의 왕 멜기세덱의 축복에 응답하여 관습적으로 십일조를 바쳤다. 이것에 어떤 종교적 의무의 느낌은 보이지 않는다. 이후로도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종교적 의무로서의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다.
또 야곱 역시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친다고 서원한 것은 십일조의 징수 체계를 실천하겠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야곱은 아브라함의 행동을 모방하고 뒤의 이스라엘이 국가 형태를 띠게 되었을 때 시행될 십일조의 모범이 되는 의미로 십일조 서원의 신학을 선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종교적 세금으로서의 십일조의 의미가 아니라 십일조의 정신, 즉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그의 권리를 인정하는 야곱의 고백이다.
만약 고대 근동 지역의 일반적인 관습이었던 십일조가 율법 시대 이전에도 있었다는 이유로(둘은 다름에도 불구하고) 십일조가 율법을 지켜야 하냐 와는 무관하게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왜 안식일은 지키지 않는 것인지 의아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무려 창세기 2:2-3에서 예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직접 축복한 날로 등장한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제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고, 초대교회의 관습에 따라 그것은 주의 첫날, 즉 주일로 대체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십일조는 그러리란 법이 왜 없겠는가?
그러므로 원시적인 십일조와 율법으로의 십일조는 구분되어야 한다. 둘을 동일한 것으로 여기거나 혼동하는 것은 십일조라는 용어가 무조건적으로 종교적 율법의 의미를 지닌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십일조는 고대 국가의 세금 징수 체계이자 축복과 보호와 섬김의 의도를 나타내는 근동 지역의 관습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을 현대에 '십일조'의 형태로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으며 시대착오적인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으며 그것이 반드시 고대 근동 관습의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기자가 7장 1-10절에서 왜 멜기세덱의 반차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고 언급하는 것인가? 혹시 이것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큰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가 여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 해석은 정말 독해력의 문제 때문에 생겨난다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7장에서 히브리서 기자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으로서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히브리서 저자는 먼저 예수께서 레위 지파가 아닌데도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할 자격이 된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다. 따라서 그는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의 근거를 레위 지파 계통이 아닌, 더 이전의 살렘의 왕 멜기세덱에게서 찾는다(히 7:11).
그런데 이렇게 주장하기 위해서는 멜기세덱이 레위 지파들보다 앞선다는 것을 먼저 설명해야 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것을 아브라함에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가져온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율법을 생각할 때 레위인 이전에도 이스라엘에게 십일조를 받았던 제사장이 존재한다면, 율법에 의해 그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보다 마땅히 앞선 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8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이 멜기세덱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 보다 얼마나 더 우월한지에 집중한다. 그래서 그는 "지극히 높으신... 제사장이라"(1), "이 사람이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4) 등의 표현으로 멜기세덱이 레위 제사장 보다 더 우월하다고 강조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쳤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친 제사장이 있다면 그는 당연히 후대의 레위 계통 제사장보다 더 중요한 제사장일 것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는 십일조를 현재에도 예수 그리스도께 바쳐야 한다는 논지를 전개하지 않는다. 그에게 십일조는 오로지 멜기세덱이 레위 계통보다 앞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논리적 수단일 뿐이다. 이것을 확장하여 레위 지파에게 바치는 십일조가 이제 예수께로 넘어갔다는 방식의 해석을 할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혹 멜기세덱에게 바친 아브라함의 십일조가 예수께 연속하여 드려져야 한다는 해석 역시 부적절하다. 이 본문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히브리서 기자의 의도를 넘어서는 것이고, 히브리서 기자가 주목하게 하려는 요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심지어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다는 것이 멜기세덱의 역할을 예수께서 단순히 그대로 연장한다는 의미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 듯 보인다. 11절과 17절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를 의미하는 헬라어 "κατὰ τὴν τάξιν Μελχισέδεκ(카타 텐 탁신 멜키세덱)"은 15절의 "멜기세덱과 같은", 곧 "κατὰ τὴν ὁμοιότητα Μελχισέδεκ(카타 텐 호모이오테타 멜키세덱)"의 문장으로 인해 더 의미가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TDNT」에 의하면 "카타 텐 호모이오테타"의 "호모이오테타(ὁμοιότητα)"는 소크라테스 시대 이전부터 "모양", "같은(like)", "유사함"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윌리엄 레인(William L. Lane)은 이것이 "특징" 또는 "질"을 의미하는 것이라 여긴다. 따라서 멜기세덱에게 바친 십일조가 예수께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제사 직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로 인해 변했다면, 율법도 반드시 변해야 한다(12절). 9
유대교의 율법으로서 십일조와 초대교회
아마 H목사는 십일조는 구약 율법 이전부터 있었으므로 모세 이후의 십일조를 논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초대교회 당시 십일조가 어떻게 운영되었을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모세의 십일조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또 이 모세의 십일조는 기독교 교회가 성직자를 위한 생계비를 지원하는 개념의 바탕이 된다.
본래 이스라엘인들이 지켰던 십일조는 기업을 받지 못한 레위 지파와 제사장들의 생활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이스라엘은 종교적 제의가 곧 국가 통치 체계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고대 관습으로서의 세금 징수 개념인 십일조의 특성을 하나님께서 채택하셨다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은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에게 왕이 그들의 곡식과 포도의 십 분의 일을 취하여 관리들과 신하들에게 줄 것이라 경고하기도 했다. 10
십일조는 예수님 당시까지도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위해(민 18:21-24), 그리고 성전 내의 기구를 수리하고 잔치 등을 준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신 12:6-7, 11; 14:22-27). 그 밖에 가난한 자들이나 사회에서 법적 권리를 주장하기 힘든 사각지대의 고아나 과부 등을 지원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레 25:5; 신 26:13-15). 11
현대에는 월 소득에 따라 십일조를 납부하는 문화가 있지만, 본래 이스라엘에서는 세 번째 달(5/6월, 오순절과 곡식 추수기)로부터 일곱째 달(9/10월, 장막절기와 채소 포도주 추수기)까지의 기간에 십일조를 드렸다. 또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십일조가 희년을 기준으로 매 3년과 6년째에 드려져야 했다. 12 이것은 성전에 주로 모아 보관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으로 여겨졌다(말 3:6-12). 13
신구약 중간기에는 미쉬나 제라임에서 곡식, 채소, 과일 그리고 땅에서 경작되고 자라서 식량으로 쓰일 수 있는 모든 것이 십일조의 대상으로 나온다. 미쉬나 쉐비잇(Sheviit) 9:1에서는 랍비들이 쇠비름, 고수, 셀러리 등의 식물들을 포함하여 겨자의 잔재물이나 양배추나 밭채소 등의 십일조 포함 여부에 대해 토론한다. 결국 예수님 시대에 십일조 규례는 굉장히 복잡한 체계를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예수께서는 이것에 대해 논쟁하며 열심을 보여 자랑하면서도 십일조의 정신인 이웃 사랑에 대한 부분을 유대인들이 소홀히 했다고 지적하신다. 14
예수님 이후의 초대교회에서는 십일조를 따로 지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초대교회 당시에 예루살렘의 성전은 70년 완전히 파괴되기까지 여전히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에 초대교회 신자들은 두 부류로 분류될 수 있었는데, 유대 기독교인과 이방 기독교인이다. 유대 기독교인은 주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했던 배경으로 인해 유대교의 여러 율법들을 지키면서 동시에 기독교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이었다. 키너(Craig S. Keener)는 70년 이전의 유대 기독교인들은 율법을 여전히 준수했으며, 유대교의 한 종파(Jewish sect)의 기능을 하였기 때문에 유대교로부터 각종 혜택을 누렸다고 말한다. 따라서 유대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동시에 성전을 위한 십일조도 납부하였다(이들은 주일뿐 아니라 안식일도 함께 지켰다). 15
반면에 이방 기독교인들이 초기부터 십일조를 드렸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바울의 여러 서신들에서 이방 기독교인들이 유대 기독교인들을 위해 지원하는 "연보"라는 개념은 자주 등장한다(고전 16:1-2; 고후 8:2, 20; 9:5, 11, 13). 초대교회에는 성직자들이 성도들의 자발적인 헌금에 의존하여 생계를 꾸렸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 자신은 스스로 노동하여 생계비를 벌었지만,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명함으로써 사역자들이 자발적 헌금에 의해 지원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고전 9:9-10). 16
이것이 관습적인 형태로 등장한 것은 성전이 파괴된 이후 2세기 초엽부터였다. 성직자와 평신도를 분리하고 성직자 계층의 지위가 상승하면서 그들을 세속적인 업무로부터 분리시키고 교회 재정에서 생활비를 받도록 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이때 교회의 재정은 자발적인 기부와 주일 헌금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 이 시기부터 교회 내에서 십일조가 다시 등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필립 샤프(Philip Schaff)는 십일조가 아직 법적인 강제력을 띠지는 않았으나 자발적인 관습으로 이것이 시행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유대 기독교인들의 배경을 따라 십일조가 시작된 것으로 추측한다. 17 따라서 2세기 초의 디다케에서는 교회 가운데 거하고 있는 참된 선지자들은 "식물을 공궤 받을 자격"이 있는 것으로 말하며, 포도즙틀과 타작마당 및 소떼와 양 떼의 첫 열매를 취하여 선지자들에게 첫 열매로 드리라고 명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너의 대제사장"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이미 2세기 초부터 모세의 십일조에 대한 개념에서 성직자를 지원해줘야 한다는 개념으로 나아갔던 것 같다. 그러나 5세기에도 여전히 자급자족하는 성직자들이 있었다. 18 19
이와 같이 초대교회 시기에 교회 내에서 십일조를 시행했다는 증거는 없다. 반면에 유대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십일조를 드렸으며, 성전이 파괴되자 이것이 기독교 교회 성직자를 지원하는 수단으로 변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십일조는 구원받은 자의 의무인가?
대침에서는 십일조를 구원받은 자의 의무라고 주장한다. 대침 외에도 새벽기도나 주일성수나 십일조를 구원의 공로나 구원의 조건이나 구원 받은 자의 마땅한 의무 등으로 주장하는 잘못된 교회들이 많이 있다. 재밌는 것은 "한국장로신문"의 기사 중에서 대한예수교침례회가 "기성교회에서 행하는 예배 의식과 십일조와 기타 연보들, 그리고 기도 생활과 예배 행위까지도 율법적이라 도외시한다"라고 지적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기성교단을 비판하는 그 행위를 대침이 그대로 똑같이 답습하고 있다는 점은 참 아이러니이다. 20
십일조는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성경에서 십일조는 1. 고대 근동 관습으로 제시되거나, 2. 모세 율법의 명령으로서 제시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고 율법은 변혁되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말씀으로 다 이루어진다(갈 5:14-15). 그러므로 십일조를 의무 조항으로 부과하는 성경의 본문들은 예수님의 이 새 언약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어야 하며 기계적으로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나는 십일조가 필요하다고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소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언급했듯이 목회자들도 생계를 위해 교회 재정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레위인들이 십일조를 통해 굶주리지 않고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이웃 사랑이라는 정신의 좋은 구현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교회의 성직자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모른 체 한다면 그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딱 이런 목적으로서만 십일조는 강조되어야 한다. 십일조가 "구원"과 연결되거나 "율법"과 관련되거나 "의무"와 지나치게 가깝게 되는 것은 성경을 진지하게 해석하여 신중하게 적용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의 목회자들이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십일조를 "하나님의 명령"이라거나 "하나님의 곳간" 등의 유대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려 하지 말자. 다만 "목회자의 생계를 위해", "가난한 그리스도인을 돕기 위해" 드리는 것으로 강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형벌이 온다거나, 십일조를 바치면 축복이 임한다고 가르치는 것도 이제 중단하자. 나는 말라기에 명시된 십일조와 관련된 담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 시대로 인해 변화를 맞았다고 생각한다. 이제 하나님께 헌신하는 방식은 정말 다양할 수 있다. 반드시 십일조를 하는 방식을 우리가 지켜야만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강제하는 그 어떤 이유도 성경에 비춰볼 때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다.
아주 솔직하게, 십일조는 교역자들의 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 인정하자. 성경 구절을 내 맘대로 가져와서 마구 짜집기 하고 그것으로 형제자매들을 협박하지 말자. 이런 진솔함이 때로 같은 기독교인들에게 큰 호소력을 지니기도 한다. 어떤 기독교인이 자신의 교회 목사가 일용할 양식을 못 구할 정도로 궁핍하길 바라겠는가? 굳이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여 겁박하여 돈을 갈취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대한예수교침례회의 십일조 해석은 사실상 성경의 지지를 받지 않으며, 하나님을 섬기려는 자들의 돈을 협박을 통해 강탈하는 질 나쁜 수금 방식이다. 대침뿐 아니라 혹 정통 교단의 잘못된 교회에 속한 신자들이라도 만약 이 글을 읽는다면 십일조를 하기 위해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연보 할 때에 분명하게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정해준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 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이 선언에 십일조만은 예외라는 법은 없다. 십일조를 포함하여 모든 헌금은, 바울이 제시한 이 원칙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리고 이 원칙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새 계명 안에서 다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교회의 사역자, 그리고 가난한 그리스도인을 돕는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오직 이 의미로서만 십일조는 참된 가치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이단 생활!>
- Donald A. Hagner,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33B Mattew 14-28, trans. Cheon Seok Chae, Solomon Press, 2000, p. 1037. [본문으로]
- Ibid. [본문으로]
- John Nolland,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35B Luke 9:21-18:34, trans. Kyeong Jin Kim, Solomon Press, 2004, p. 424. [본문으로]
- Donald A. Hagner, op. cit. 처음에 나는 "ἀφήκατε"와 "ἀφιέναι"가 서로 대구 된다고 생각하고 "타우타"가 바리새인들의 십일조 행동, "카케이나"가 율법의 참된 정신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John Nolland, Donald A. Hagner 및 그 밖의 영어 성경의 번역들의 "에데이(ἔδει)"의 뉘앙스를 살린 번역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본문으로]
- Ibid., p. 1037-1038. [본문으로]
- Gordon J. Wenham,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1 Genesis 1-15, trans. Yeong Ho Park, Solomon Press, 2006, p. 553. [본문으로]
- Ralph L. Smith,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32 Micah-Malachi, Cheon Seok Chae & Hun Chae, Solomon Press, 2001, p. 472. [본문으로]
- William L. Lane,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47A Hebrews 1-8, trans. Cheon Seok Chae, Solomon Press, 2006, p. 468. [본문으로]
- Ibid., p. 499. [본문으로]
- Ralph L. Smith, op. cit. [본문으로]
- 이것은 생명의말씀사의 「성경문화배경사전」에서 제시하는 용도이다. [본문으로]
- Raymond B. Dillard,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15 2 Chronicles, trans. Il O Jeong, Solomon Press, 2005, p. 396. [본문으로]
- Duane L. Christensen,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6B Deuteronomy 21:10-34:12, Il O Jeong, Solomon Press, 2007, p. 333. 그 외 생명의말씀사의 「성경문화배경사전」 참고. [본문으로]
- Ralph L. Smith, op. cit. [본문으로]
- Craig S. Keener,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I, trans. Ok Yong Lee, CLC, 2018, p. 534. [본문으로]
- 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3, trans. Gil Sang Lee, CH Books, 2018, p. 100. [본문으로]
- 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2, trans. Gil Sang Lee, CH Books, 2016, p. 136. [본문으로]
- Philip Schaff, op. cit. [본문으로]
- Philip Schaff, op. cit. [본문으로]
- https://jangro.kr/2020/10/14/%EB%8C%80%ED%95%9C%EC%98%88%EC%88%98%EA%B5%90%EC%B9%A8%EB%A1%80%ED%9A%8C-%EC%84%9C%EC%9A%B8%EC%A4%91%EC%95%99%EA%B5%90%ED%9A%8C-%EC%9D%B4%EC%9A%94%ED%95%9C-%EB%B3%B8%EB%AA%85-%EC%9D%B4%EB%B3%B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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