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누가복음 15:17–21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양의 비유’와 ‘되찾은 드라크마의 비유’의 연장선이다. 즉 이 비유는 예수께서 누가복음 15장 7절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회개할 것이 없는 다수의 의인 보다 회개할 것이 있는 한 명의 죄인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중요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우리는 죄인이 돌이키는 것과 그것에 대한 반응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
누가복음 15장 2절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고 식사하시는 것을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실제로 고대 사회에서 사회적 연대를 위해 사람들은 서로를 대접하고 친교의 식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로마 및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이런 식사가 손님들의 지위와 명예에 따라 차별대우 되었고 사람들은 제각기 품위 있는 고귀한 자들과 어울리길 좋아했다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 1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이 매국노, 도둑, 성매매 여성 등과 어울린 것은 좋은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예수께서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말씀하시는 동시에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메시아 잔치”, 곧 하나님 나라의 회원 자격을 죄인들에게 약속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2즉 이것은 예수께서 죄인들을 그들의 현 상태와 무관하게 그들을 용서하는 것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께서는 그것이 맞다고 응수하신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어떤 것을 잃었다가 도로 찾는 것이 매우 큰 기쁨이 된다는 것을 예화를 들어 설명하신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죄인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위해 일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의 자격 없음, 가치 없음과는 무관하게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그런 메시아이다.
이런 예수님의 따뜻한 포용의 사상이 가장 극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되찾은 아들의 비유’, ‘돌아온 탕자의 비유’로 불리는 누가복음의 본문 내용이다. 나 자신이 엉망이라는 생각을 가진, 그리고 실제로 그런 상태에 있는 절망적인 사람을 그 사람 있는 그대로 그저 안아주는 이 돌아온 탕자의 장면은 망가진 인간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하이라이트 부분이다.
어떤 둘째 아들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들고 아버지의 집에서 멀리 떠나 자유롭게 마음대로 탕진해버린다. 그가 돼지들이 먹는 사료를 먹고자 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비로소 그는 자신이 찾아온 자유로운 그곳이 낙원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그는 이제 아버지께로 돌아가고자 한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εἰς ἑαυτὸν δὲ ἐλθὼν ἔφη· Πόσοι μίσθιοι τοῦ πατρός μου περισσεύονται ἄρτων, ἐγὼ δὲ λιμῷ ὧδε ἀπόλλυμαι·)
“이에 스스로 돌이켜”로 번역된 “에이스 헤아우톤 데 엘똔(εἰς ἑαυτὸν δὲ ἐλθὼν)”은 직역하자면 “그리고 자기 자신 안으로 가는”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정신을 차리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관용구이다. 3그는 외부의 모든 것이 다 소진되어버렸을 때, 비로소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처지가 비참하다는 것을 어쩌면 그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에게 많은 유산을 물려받고 상당한 재력과 지위를 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유대인들이 부정한 짐승이라 말하는 돼지를 치는 일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 자신과 괴리감이 있다고 느끼겠는가? 처음에 그는 이것을 쉽사리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그는 종을 부리는 꽤 부유한 집안의 태생이다. 그리고 그가 아버지의 유산을 받은 것은 자신이 받을 만한 것을 미리 땅겨서 받았을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선택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이 도착한 나라에 흉년이 들고 자신의 돈이 모두 사라져도(눅 15:14), 그는 여전히 거기서 떠나지 않고 완고하게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자기 자신에게로 눈을 돌렸을 때 그는 비로소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비참한 거지를 발견한다.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 아픈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한 사람의 가치가 ‘명예’나 ‘지위’로 결정되었던 고대 사회에서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자아가 분열될 정도의 굉장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인간인 것이다!
이것은 비단 고대 사회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고나서 내린 결론이 ‘나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나는 잘 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나는 항상 실패만 하는 사람이다.’이라면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도 매우 불행한 일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내면에 연약하고 불안한 자기 자신이 숨어있다. 우리는 그것을 감추기 위해 다양한 것들로 우리의 외면을 두른다. 아무리 강한 척하여도, 아무리 자만해도, 아무리 우리가 프라이드(pride)가 있어도, 사실은 이 모든 것이 깨지기 쉬운 자아를 감추기 위한 눈속임에 불과하다. 우리가 만약 자신의 내면으로 스스로 들어가 천천히 살펴 본다면 그곳에서 ‘아무것도 아닌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제서야 ‘나’는 ‘나 자신’을 진정으로 바라보게 된다.
재산을 탕진한 이 사람이 수행하는 이런 ‘자기 객관화’는 상당히 뼈 아프다. 그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아버지가 사는 지역에서 멀리 있는 타국에 왔다. 그는 아버지에게 어떤 불만이 있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아버지 밑에서는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현재 처지가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품꾼들 보다 못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버지를 피해 자유롭게 왔던 자기 자신이 사실은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아버지는 좋은 주인이었다. 그분은 자기 품군들에게 빵을 풍족하게 준다(“περισσεύονται ἄρτων”). 반면에 자기를 돼지 치는 자로 고용한 이 주인은 돼지들이 먹는 사료조차 제공해주지 않는다(눅 15:16).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미련한 것이었나를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ἀναστὰς πορεύσομαι πρὸς τὸν πατέρα μου καὶ ἐρῶ αὐτῷ· Πάτερ, ἥμαρτον εἰς τὸν οὐρανὸν καὶ ἐνώπιόν σου, οὐκέτι εἰμὶ ἄξιος κληθῆναι υἱός σου· ποίησόν με ὡς ἕνα τῶν μισθίων σου.)
그는 이제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사실 그가 아버지에게 유산을 먼저 달라고 말한 것은 매우 무례한 행동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 있는데 그것을 요구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이런 행동에 대해 매우 비판적으로 언급한다. 4어떤 유대 문헌은 아버지들에게 자기의 재산을 너무 일찍 나눠주지 말라고 권면하기도 한다. 5또한 어떤 학자들은 둘째 아들이 사실상 아버지가 죽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둘째 아들이 멀리 타국으로 떠난 것은 그에게 아버지와 연을 끊으려는 의도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6
따라서 그가 아버지에게 이렇게 행동한 것은 천륜을 거스르는 굉장히 비도덕적인 악행이다. 그래서 그의 악함은 단순히 아버지에게만 죄를 지은 것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하늘, 곧 하나님께도 죄를 지은 것이라고 고백한다. ‘세상에, 내가 아버지께 무슨 짓을! 그리고 신 앞에서도 당당하지 못한 짓을 했구나!’라고 그는 생각한다.
이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은 이 청년은 자신이 요구할 권리라는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도 깨닫는다. 아버지를 죽은 사람과 같이 대하고 연을 끊으려 했던 그가 과연 ‘아들’이라고 불리는 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렇게 불릴 만한 가치라는 것이 자신에게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큰 죄를 짓고 아버지의 사랑을 배신한 그는 ‘아들’의 자격이 없다.
사실 품꾼의 위치도 그에게는 감지덕지다. “종”, 곧 “둘로스(δοῦλος)”는 낮은 계층에 속하긴 했지만 한 가정의 구성인으로서 인정 받았다. 반면에 품꾼, 곧 “미스띠오스(μίσθιος)”는 특별히 필요할 때에만 일시적으로 고용된 자들이었다. “ 7둘로스”가 현대적으로 “집사”나 “비서” 등을 뜻할 수 있다면, “미스띠오스”는 “일용직 노동자” 정도로 취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대 사회에서 이들에 대한 대우는 썩 좋지 않았다. 둘째 아들은 지금 아버지에게 자신을 이와 같이 취급해달라고 청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아버지에게 몹쓸 짓을 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일용직 노동자로 아버지의 밑에서 일하는 것도 그에게는 과분한 영광이다. 모든 것은 아버지의 처분에 달려 있다. 아버지께서 이것을 거절하신다고 해도, 그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καὶ ἀναστὰς ἦλθεν πρὸς τὸν πατέρα ἑαυτοῦ. ἔτι δὲ αὐτοῦ μακρὰν ἀπέχοντος εἶδεν αὐτὸν ὁ πατὴρ αὐτοῦ καὶ ἐσπλαγχνίσθη καὶ δραμὼν ἐπέπεσεν ἐπὶ τὸν τράχηλον αὐτοῦ καὶ κατεφίλησεν αὐτόν.)
그는 이 사고과정을 거친 뒤에 즉시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향한다. “일어나 가다“를 뜻하는 “아나스타스 포레우오마이(ἀναστὰς πορεύσομαι)” 혹은 “아나스타스 엘뗀(ἀναστὰς ἦλθεν)”은 ‘곧바로 간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8이것은 둘째 아들의 결정적인 방향 수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9그는 자신이 가던 길에서 돌이켜 아버지에게로 향한다.
회개와 관련이 있는 히브리어 “슈브(שׁוב)”나 헬라어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는 흔히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 둘째 아들은 여기서 회개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를 잘 보여주는 좋은 표본이 된다. 그것은 자신의 방향을 수정하여 아버지께로 향하는 것이다. 이 때 그는 아버지에게 그 어떠한 권리도, 대우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모든 것은 아버지의 손에 달려 있으며 그는 그러한 사실에 자신의 온 자아를 내던진다. 그는 어떠한 처분도 달게 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 설령 아버지가 그를 거부한다고 해도, 그는 받아들일 것이다.
이제 시점은 둘째 아들에게서 아버지로 옮겨간다.
이 배은망덕한 탕자가 아직 멀리 있을 때, 놀랍게도 아버지는 정확히 이 사람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한 순간에 알아본다. 둘째 아들은 오랜 세월 고생하고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알고 있던 모습과 완전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행색이 남루하고 거지 차림을 한, 거의 반 죽어가는 이 청년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멀리서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부모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변해버린 아들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버지는 그를 불쌍하게 여겼다. “스플랑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죽어가던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장면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되었다(눅 10:33). 이 감정은 사마리아인이 자신의 시간과 비용을 깨서 낯선 사람을 도와주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 감정을 이웃 사랑의 핵심으로 제시하신다.
“스플랑니조마이”는 여기서 아버지가 뜻밖의 행동을 하게끔 만든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다. 이 행동은 이런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행동은 아니다. 중동 사회에서 어떤 아버지도 아들이 자신을 죽은 것처럼 취급하여 유산을 받아가고 연을 끊었다가 망해서 돌아왔을 때 이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 10사실 이는 현대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더욱이 이 아버지의 세월과 재산 그리고 지위 등을 생각했을 때 예의와 관련된 의례적인 모든 절차를 건너 뛰고 달려 나와 감정을 마구 드러내며 맞이하는 것은 품위에도 맞지 않는다. 11
아버지의 행동 묘사는 돌아온 아들을 향한 그의 반응이 매우 적극적이고 격렬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먼저 아들을 향해 빠른 속도로 질주한다(“δραμὼν”). 그리고 나서 그는 아들의 목 위로 “떨어진다.”(“ἐπέπεσεν ἐπὶ τὸν τράχηλον”)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는 곧바로 아들에게 키스를 퍼붓는다(“κατεφίλησεν”). 접속사 “카이(καὶ)”를 통해 이러한 과정들이 매우 빠른 호흡으로 연달아 나열된다.
이런 극적이고도 감동적인 장면은 아버지가 아들을 그의 과거 혹은 그의 현 상태의 가치와는 무관하게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버지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에게는 그저 사랑하는 아들이 돌아왔다는 사실 뿐이 중요하다.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할 말을 열심히 고민하고 준비한 것과 다르게, 아버지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먼저 몸으로 행동한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사랑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εἶπεν δὲ ὁ υἱὸς αὐτῷ· Πάτερ, ἥμαρτον εἰς τὸν οὐρανὸν καὶ ἐνώπιόν σου, οὐκέτι εἰμὶ ἄξιος κληθῆναι υἱός σου.)
그러나 아들은 여전히 자신이 미리 준비한 말을 아버지에게 들려준다. 그는 타국에서 고생하면서 철저하게 알게 되었다. 자신이 아버지에게 저지른 죄악이 얼마나 배은망덕한 것인지에 대해 말이다. 그리고 지금 아버지가 자신을 따뜻하고 사랑스럽게 맞아주는 것은 그의 양심을 더욱 아프게 만든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버지가 현재 보여주는 아름다운 태도는 자신이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 도망간 것과 현저한 대조를 보여준다. 자신은 이것저것 재고 계산하여 아버지의 자산을 빼가는 것이 자기에게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기 때문에 이 같은 큰 피해를 봤는데도 그런 것들을 일절 따지지 않은 채 환영해주는 것 아닌가? 이런 선하고 자비로운 아버지를 자신은 어째서 배신했단 말인가? 대개 죄라는 것은 그것을 당하게 된 피해자가 선하고 좋은 인물일수록 더욱 죄책감을 갖도록 만드는 법이다.
하지만 아들은 두번째의 말, 곧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한다. 많은 학자들은 아버지의 다음 행동이 아들의 이 말을 끊게 했다고 이해한다. 12반면에 아들을 사랑으로 맞아 들이는 아버지의 행동을 보고나서, 둘째 아들이 “나를 품꾼으로 보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모욕하는 것일 수 있다. 13무엇이 되었든, 둘째 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여 아버지에게 돌아온 이 시점에서, 그런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아들이 무슨 말을 하든 아버지는 이미 그를 사랑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결론
구원파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그들이 몸 담았던 이단의 잘못된 교리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 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구원을 얻게 된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생긴다. 필자는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이하 대침)에서 나온 뒤 이와 같은 교리를 따라가는 사람들을 정말 많이 보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 각자 나름대로 구원 얻기에 합당한 가치를 지닌 인간이 되기 위하여 무언가를 지키거나 행해야 한다고 결론 내리는 듯 보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얻게 된 그 결론이야말로 진정한 복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모르는 자들은 구원을 얻기 힘들며 그러므로 자신이 특별한 구원의 길에 들어섰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을 비방하고 불쾌하게 여기며 논쟁한다. 그들은 죄에 대해 무감각하게 보이는 자들을 적대하기로 마음먹은 듯이 보인다. 즉 그들은 구원파에서 나온 뒤 새로운 배타성을 또다시 형성한 셈이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 듯 보인다. 그분은 범죄자들과 함께 식사하고 일상을 보내신 분이다. 아마 이것을 지켜보는 많은 유대인들 뿐 아니라 제자들 역시 이것을 불편하게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그분은 ‘저렇게 살면 구원 얻을 자격을 갖추기 힘들 것이다’라고 생각할 만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분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분이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상대방의 가치와 무관한 사랑의 정신’은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정말 잘 드러난다. 예수님은 죄인들이 자신에게 돌아오기까지 사랑의 마음으로 기다리시고 함께 식사하시는 분이다. ‘이런 것들을 해야 구원 얻을 자격이 있다’가 아닌, ‘너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한다’이다. 그리고 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이례적인 사랑은 자신의 처지에 절망하고 망가진 한 영혼의 정신을 기적적으로 바꿔 놓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죄가 많은 사람일수록 자신이 받은 은혜를 더욱 실감한다(롬 5:20). 우리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어떤 무해한 인간을 보면서 의아해하며 이해하기 힘들어한다.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의 장발장(Jean Valjean)같은 인물의 희생과 사랑은 그를 체포하기 위해 뒤쫓던 강경한 자베르(Javert)의 세계관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런 장발장의 탄생은 그에게 무조건적인 은혜를 베풀었던 미리엘 주교(Monseigneur Myriel)의 사랑으로 인해 가능했다.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의 은식기를 훔쳐 달아났는데도, 주교는 그것에 더 얹어서 은 촛대를 베푼다. 그리고 미리엘 주교의 이런 충격적인 사랑의 행동은 장발장의 세계 안으로 침투해 들어가고 그의 세상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한 죄인이 하나님에게로 돌아와 기독교인으로 변한다. 이것은 그가 받은 사랑을 타인에게 베푸는 그런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다.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가 보여준 사랑의 반응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회의 찌꺼기이자 쓰레기들에게 보여준 사랑의 손짓은 이것을 읽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큰 도전이다. 교회는 약자들과 부족한 자들의 여린 정신을 있는 그대로 감싸주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사회에서 극단에 이른 자들을 아무도 받아주는 곳이 없을 때, 이들이 포근하게 안길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한다.
또한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처음 만났을 당시를 회고하도록 만든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분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롬 5:8). ‘나는 아직 부족해’라고 생각할 때 ‘그 상태 그대로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께 엄청난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안아 주시는 예수님을 이 본문 말씀을 통해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랑에 감화되어 우리는 그분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다.
지금 하나님께 큰 죄를 짓고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면, 그분은 우리를 보고 불쌍히 여기시며(σπλαγχνίζομαι) 달려오시며(δραμὼν) 우리의 목에 뛰어들어(ἐπέπεσεν ἐπὶ τὸν τράχηλον) 사랑의 입맞춤을 하실 것이다(κατεφίλησεν).
그러므로 매일 그분께로 돌아가자. 그리고 그분의 사랑에 감화되자. 그리고 누군가에게 또한 기꺼이 그런 존재가 되자.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방식이다.
- Anthony C. Thiselt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trans. Ji Cheol Sin, Holy Wave Plus, 2022, 1487. [본문으로]
- E. P. Sanders, Jesus and Judaism, trans. Jeong Hui Lee, rMAENGe, 2022, 345. [본문으로]
- John Nolland,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35B, trans. Kyeong Jin Kim, Solomon Press, 2004, 615. [본문으로]
- John Nolland, op. cit., 612. [본문으로]
- Darrell L. Bock, Luke 9:51-24:53, trans. Gi Cheol Sin, Revival & Reformation Publishing, 2017, 525. [본문으로]
- Ibid. [본문으로]
- Ibid., 530. [본문으로]
- Ibid., 529. [본문으로]
- John Nolland, op. cit., 615. [본문으로]
- Darrell L. Bock, op. cit., 531. 각주 22의 블롬버그(Blomberg)의 설명을 보라. [본문으로]
- John Nolland, op. cit., 616. [본문으로]
- Darrell L. Bock, op. cit., 531. [본문으로]
- John Nolland, op. cit., 617. 벅(Bock) 역시 놀랜드(Nolland)의 이 견해에 동의한다. [본문으로]
'성경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사야 40장 31절 묵상: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이,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2) | 2024.10.11 |
---|---|
이사야 41장 10절 묵상: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0) | 2024.08.16 |
시편 23편 묵상: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 Meditation on Psalm 23. (0) | 2024.06.22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너희는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라 (마태복음 6:33; 누가복음 12:31) 묵상 (0) | 2024.06.03 |
시편 17장 8절 "나를 눈동자(이숀 밧 아인) 같이 지키시고" 묵상 (시 17:8). Meditation on Psalm 17:8. (0) | 2024.04.15 |
이 글이 도움이 되었다면 ♡를 눌러 주세요. 익명성이 필요한 질문일 경우 Q&A 카페를 이용해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