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귀를 탄 예수와 행진하는 하나님의 왕국

성경 묵상

어린 나귀를 탄 예수와 행진하는 하나님의 왕국

바잇 카탄 2024. 12. 11. 22:03

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반응형

우리의 왕 예수께서는 화려한 전차가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이 사건은 그 중요성 때문에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를 포함한 4복음서 모두에서 등장한다. 예수님의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향해 들어가는 이 사건만큼 이전의 유대교가 갖고 있던 메시아관, 그리고 이후의 기독교의 메시아관에 대한 사상의 연결점과 변곡점이 되는 것은 없다. 특히 로마 제국 통치하의 황제의 신격화와 그 승리에 대한 사상 속에서 예수님의 이 같은 행보는 정치적으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종교적으로는 세계를 움직이는 질서와 법칙의 체계 변화와 새로운 언약의 도래, 그리고 신적인 왕국의 시대를 여는 종말의 진정한 시작으로 간주될 수 있다.

 

폭력과 억압과 사상의 강요와 피로 얼룩진 정치적 격동 속에서 태어난 예수의 나귀를 탄 놀라운 입성은 독립된 신 국가를 선언하는 혁신적인 퍼포먼스이자 거룩한 행위 예술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께서는 잔혹함으로 진군하는 거짓된 승리와 평화의 연쇄적 순환을 끊어버리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참된 승리와 평화의 원리, 곧 진리의 코스모스를 통해 세상 자체를 거대한 신의 사랑이 살아 숨쉬는 국가로 변화시킨다.

 

그렇게 점진적인 하나님 국가의 예수님의 색채가 주입된 체제는 폭력, 증오, 살인이 보편적 현상이었던 세계의 국가들을 순차적으로 정복하며 21세기의 현대 문명으로 흘러왔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가 목도하는 사회는 신의 사랑에 의해 완전히 정복되지 않았다. 그래서 미래의 급격한 종말적 회복을 우리는 바라고 소망한다. 나귀를 타고 사랑과 평화의 승리를 선언했던 예수님은 자신이 시작한 신의 제국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 이번에는 정복자의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아멘,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로마 황제와 예수 그리스도


이제 많은 신약학자들은 예수 이전에 로마 제국에 있었던 구원자의 의미와 왕국’, 그리고 아버지-아들의 관계가 신약성경의 많은 본문들이 사용하는 의미들을 분명히 밝혀준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인정한다. 예수님이 설교하고 직접 행동으로 설명하고 계시했던 하나님 왕국 역시 1세기에 이것을 듣던 유대인들에게 어떤 의미로 파악되었을 것인가를 고려한다는 점에서 로마 제국의 이 같은 배경을 무시할 수는 없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변화한다는 의미에서 구원이라 생각하는 구원자쏘테르(σωτήρ)” 1세기에나 그 이전에나 그런 죄에서의 구원의 의미로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헬라어 쏘조(σζω)”의 일반적인 의미는 물리적인 삶이나, 건강이나, 이탈된 상태 등 부적절한 모든 것들을 회복시키거나 좋은 상태로 변화시키는 모든 것을 의미했다.[각주:1] 후에 기독교에서는 이것의 의미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 곧 영생을 얻는 것 자체와 동일하게 사용되었지만,[각주:2] 우리는 본래 1세기에 이 용어가 사용되던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쏘테르 1세기 로마 제국의 상황에서 삶의 구원자라는 의미를 갖는 일반 명사였다.[각주:3] 그래서 이 용어는 어떤 곤경에 처한 대상을 도와주는 사람에게 적용되거나 혹은 일반적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들에게 적용될 수 있었다. 철학자들은 이 단어를 사람들에게 자유해방을 주는 누군가(여기서는 철학자들 자신들)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로마 제국의 맥락에서 쏘테르의 가장 부각되고 적절한 사용은 의심의 여지 없이 로마 황제들에게 수여되는 칭호와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로마 황제를 신격화 하는 숭배 사상의 발전에서 쏘테르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사상은 로마 제국이 신이 허락하는 황금 시기의 왕국에 해당한다는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이미 폼페이우스(Pompeius) 때부터 시작하여 이 용어는 로마의 지도자가 온 세계, 곧 로마 제국의 확장을 통해 세상의 평화를 가져오고 민중들을 해방한다는 사상을 표현하는 용어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각주:4]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로마 제국의 지도자로 승기를 잡게 되자 로마의 평화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런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황금 시기의 실현과 도래는 필연적으로 해방자인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신격화와 그런 신학의 확산을 불러왔다. 이 때 아우구스투스는 진정한 쏘테르로 자신을 지칭하였다. 아우구스투스의 취임 비문에서 학자들은 종교-전쟁-승리-평화라는 가시화된 신격화의 틀을 발견한다.[각주:5] 이 비문에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공화국을 위해 전쟁을 벌이고 승리하여 전 세계에 평화를 선사하는 진정한 해방자, 쏘테르로 선언된다. 이후 네로(Nero),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하드리아누스(Hadrianus) 등의 로마 황제들도 자신을 구원자”, 쏘테르라 지칭하였다.

 

그러므로 1세기 로마 제국 상황에서 예수님을 누군가가 쏘테르로 생각하고 지칭하는 것은 이런 정치적 사회적 맥락의 의미 역시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라 여길 수 있다. 더욱이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라 스스로를 선언하신 것은 로마 황제와의 평행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드는 요소이다. 초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신격화된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의 조카인 동시에 그의 양자였다. 또한 아버지파테르(πατήρ)”아들'휘오스(υἱός)”는 로마 제국에서 후원자와 후원을 받는 사람 간의 관계를 묘사할 때도 사용되던 용어였다. 특별히 이런 후원자는 대개 로마의 황제들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 점에서 로마의 시민들은 로마 황제를 파테르, 자신들을 그의 휘오스로 지칭할 수 있었다.

 

로마 제국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맥락적인 관련성은 로마 황제와 예수님과의 대조와 차이를 통해 더욱 깊은 의미를 시사할 있다. 로마 제국의 황제 숭배의 신학은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 표현대로 폭력적인 승리를 통한 평화이다. 로마 황제는 전쟁의 압도적인 폭력과 공포를 통해 타 국가들을 억압하고 지배하여 평화를 이룬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힘에 의한 정의가 세계를 지배하는 근본적 질서인 셈이다. 이것은 현대 사회의 시각에서 약육강식의 세계관의 사상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로마의 군대는 학살하고 포위하며 토성을 쌓고 방화하며 파괴하는 방식으로 국가들을 하나씩 차례대로 멸망시킨다. 그리고 이런 잔혹한 제국으로의 폭력적인 편입을 로마의 관료나 사가들은 민족들의 해방이라고 주장했다. 로마의 황제들은 그런 점에서 해방자이자 구원자, 쏘테르인 것이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

 

 

나귀 새끼를 타고 오는 평화와 승리의 왕 예수


예수님을 기독교인들이 구원자 쏘테르라 바라보고 지칭한 것과 그분이 전파한 하나님의 나라바실레이아 투 떼우(Βασιλεία του Θεού)”를 기다리고 소망한 것은 로마 제국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맥락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많은 유대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기는 것은 종교적인 의미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의미도 분명히 존재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이 예언한 참된 다윗 왕인 메시아가 등장하여 군대를 이끌고 로마 제국을 물리치는 승리와 평화의 시대를 고대했다. 유대인들에게는 로마 제국의 억압의 가장된 평화로부터 해방시켜줄 진정한 구원자 쏘테르인 메시아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메시아 쏘테르에 대한 기대는 쿰란 종파들에게는 묵시적인 급격한 변혁과 관련이 있었고 반면에 랍비 전통에서는 현재적이고 근 미래적인 것과 관련이 있었다. 쿰란 사해에서 발견된 문헌들이 종말적인 영적 전투에서 빛의 아들들을 이끄는 강력한 군사적 메시아를 기대했다면, 랍비들은 보다 현세적인 군대 장관 메시아를 기대했다. 그래서 바르 코크바가 AD 132-135년에 로마를 상대로 군사적 반란을 일으켰을 때 랍비 아키바는 그를 메시아라 추앙했다.

 

하지만 이들 유대 전통들은 고난 당하는 메시아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점진적인 회복적 접근이든, 아니면 유토피아적인 대이변적 접근이든,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다윗 자손의 왕 메시아였다.

 

이제 예수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은, 그가 이런 종류의 사상이 바라고 기대하는 메시아와는 다른 종류의 메시아임을 암시한다. 그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전쟁을 하고 평화와 승리를 가져오는 메시아가 아니었다. 그가 제시하는 하나님 왕국의 통치는 한 국가를 유린하고 억압하는 방식이 아닌, 원수를 사랑하고 약자를 돌보는 새로운 방식의 무언가이다. 이것은 로마 황제의 폭력적인 쏘테르에 대항하는 예수님의 비폭력적인 쏘테르"이다.

 

로마는 무자비한 폭력으로 제국을 확장하고 세계를 통합한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로마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구약성경이 말하는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의 순간들은 거대한 피와 복수의 도가니였다. 인류는 끊임 없이 전쟁을 하고 진멸하며 국가를 세우고 유지해왔다. 모세, 여호수아, 사사 시대에도 이것은 예외가 아니다. 다윗 왕 때에도 우리는 피로 얼룩진 분쟁과 배반과 사기와 모략을 확인할 수 있다. 국가는 분열하고 동족끼리 반목하며 전쟁을 한다. 그리고 끝내 동일한 폭력적인 방식으로 앗시리아, 바벨로니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에게 정복 당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정말 하나님 왕국이 의미하는 것의 전부란 말인가? 하나님의 제국은 마치 실패하여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은 종결되지 않았으며, 언젠가 이 모든 것들에서 백성들을 구원할 구원자가 올 것이라 예언했다. 하나님 왕국의 구원, 해방을 위해 유대인들은 쏘테르”, 메시아를 기다렸다. 로마 제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진정한 다윗의 자손을 말이다.

 

하지만 예수는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하나님의 제국을 세우려는 메시아였다. 예수가 바라본 하나님의 제국은 단순히 로마의 압제에서 물리적으로 탈출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 곧 인류의 잔혹함과 폭력과 억압으로 확장하는 죄의 원리 그 자체의 순환의 사슬을 파괴하는 해방을 제공하는 하나님의 제국이었다.

 

그리고 예수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이 모든 제국 간의 전쟁은 사실상 종결되었다고 선언된다. 왕의 성문 입성은 보통 전쟁에서의 승리의 행진과 관련이 있었다. 특히 제자들과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종려나무를 들거나 흔드는 것은 고대 독자들에게 승리나 왕을 환영하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각주:6] 따라서 분명히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메시아라는 가르침이 확정적 사실로 인정 받기 이전부터 폭력적인 제국을 향한 전쟁 승리를 이미 선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성문에 들어가기 이전부터 사실상 이미 이긴 상태였다.

 

하지만 그의 승리는 군사적인 승리가 아니다. 그 보다 더욱 심오한 승리이다. 왜냐하면 그가 얻은 하나님의 제국은 작은 것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뻗어 나가는, 약한 것에서 강한 것을 사로잡는 그런 왕국이었기 때문이다( 13:31-33). 그런 점에서 그의 왕권은 이미 얻은 승리를 선언하는 평화의 왕권이다. 아마 사람들은 다윗 자손의 메시아가 화려한 보좌나 전차를 타고 입성할 것이라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나귀, 그것도 어린 나귀를 타고 소박하게 들어가는 놀라운 역설을 보여준다.

 

스가랴 9 9절에서 종말에 있을 메시아의 이런 겸손한 특성을 예언하고 묘사한다. 하나님의 왕국의 왕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온다(מַלְכֵּךְ֙ יָ֣בוֹא). 그리고 그 왕의 모습은 공의롭고(צַדִּ֥יק)”, “구원 받은 자이며(וְנוֹשָׁ֖ע ה֑וּא)”, “겸손하다(עָנִי֙)”. 그의 겸손하고 평화로운 성품을 그가 타고 오는 나귀, 심지어 그냥 나귀도 아닌 나귀의 새끼(עַ֖יִר בֶּן־אֲתֹנֽוֹת)가 매우 잘 드러내준다.

 

나귀의 이미지는 이미 창세기 49 11절에서 제시되었다. 여기서 유다 지파에 오는 왕은 황금 시대를 여는 왕으로 묘사된다. 그 왕이 다스릴 왕국은 매우 풍족하고 거대할 것이다. 어찌나 풍족한 시대인지 왕의 가장 작은 나귀 새끼를(בְּנִ֣י אֲתֹנ֑וֹ) 말뚝이 아니라 포도나무 전체에 매어둘 정도이다. 또 귀한 포도주로 옷을 세탁할 정도로 포도주가 넘쳐 흐를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가심으로써 이러한 하나님의 제국의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선언하신다.

 

 

 

작은 사랑의 원리로 행진하는 거대한 하나님의 제국


영웅들과 권력자들과 왕들과 황제의 쏘테르들이 격동하던 시기에, 낡은 옷을 입고 거친 굳은 살이 베긴 손을 가진 30대 초반의 남성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문을 통과하는 것을 누가 중요하게 생각이나 했을까?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예수는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며 기이한 소동을 일으키는 괴짜 목수였을 뿐이다. 최종적으로 예수가 군대를 소집하지도, 권력자들과 연합하지도, 로마에 대항하지도 않은 채 무기력하게 정치적 목적으로 처형 당했을 때 모두의 관심은 시들해졌다.

 

게다가 그의 가르침은 제국을 건설하기에는 너무나 부적합해 보였다.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도 돌려 대며, 속 옷을 뺏으면 겉 옷까지 내어주며, 5리를 징발 당하면 10리까지도 동행하라는 가르침은 로마 제국과 권력자들의 횡포에 순응하라는 것으로 들렸다. 범죄자들을 찾아 다니고, 부정한 것들과 접촉하며, 환자들과 살을 맞대는 그의 모습은 소탈해 보일지언정 왕의 품위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작은 나귀 새끼를 타고 성문을 지날 때 이미 예수의 제국은 시작하였고 그는 승리하였다. 아무 것도 아닌남성의 메시지가 로마 제국을 집어 삼키고 로마가 멸망한 뒤에도 계속해서 확장하여 가난한 자들을 돕고 병자들을 치유하며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의 밑 바탕이 되고 아동과 여성의 복지를 보장하는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였다는 점은 매우 놀랍다. 로마 황제는 칼로 해방하는 쏘테르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해방하는 쏘테르이다. 기독교인들의 제국은 이러한 원리를 가지고 전 세계를 향해 끊임 없이 행진한다.

 

우리의 왕은 나귀 새끼를 탄 왕이다. 그러나 그 어떤 왕도, 황제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내는 왕이다. 그는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여 사실상 '세계 정복'을 이루어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진정한 해방자, 곧 “쏘테르(σωτήρ)”이다.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관련 카페 만들었습니다.

질의응답 목적이 아닌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려는 목적의 일반 카페 하나를 개설했습니다. 이 카페의 주요 스탠스는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를 이단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또한 대

littlebiblicaltheology.tistory.com

 

생명의말씀선교회가 교리적 이단이 아니라는 주장

최근 들어 생명의말씀선교회(대한예수교침례회, 이하 대침)가 교리적으로는 이단이 아니고, 다만 그들의 행태만이 문제라는 주장이 생겨나고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침이 교리적으

littlebiblicaltheology.tistory.com

 

 

'비둘기가 그 보금자리로 날아 오는 것 같이'가 비행기를 타고 오는 것을 말하는가? 이사야 60장 8

저 구름 같이, 비둘기가 그 보금자리로 날아 오는 것 같이 날아 오는 자들이 누구뇨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원방에서 네 자손과 그 은금을 아울러 싣고 와서 네 하

littlebiblicaltheology.tistory.com

 

 

 

이단 생활! -106화- 이해할 수 없어! (기독교 이단 웹툰)

이단 생활! -105화- 싼 거 못 쓰거든 (기독교 이단 웹툰)이단 생활! -104화- 허세? 잘난 척? (기독교 이단 웹툰)이단 생활! -103화- 정욕에 관한 설문 (기독교 이단 웹툰)이단 생활! -102화- 설문 조사 (기

littlebiblicaltheology.tistory.com

 

  1. σζω and σωτηρία for the Saving of Physical Life.

     

    Werner Foerster, “σζω, σωτηρία, σωτήρ, σωτήριος, ed. Gerhard Kittel, Geoffrey W. Bromiley/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 989. [본문으로]

  2. This shows what groups of expressions stand alongside σζω, namely, “to enter into the kingdom of God,” “to enter into life,” “to inherit it.”

     

    Werner Foerster, “σζω, σωτηρία, σωτήρ, σωτήριος, ed. Gerhard Kittel, Geoffrey W. Bromiley/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 991. [본문으로]

  3. In the Roman imperial period σωτήρ is also common in the sense of “saver of life.”

     

    Werner Foerster, “σζω, σωτηρία, σωτήρ, σωτήριος, ed. Gerhard Kittel, Geoffrey W. Bromiley/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 1006. [본문으로]

  4. The Roman imperial period, intimated already by Pompey, brings a gt. increase in instances of σωτήρ and also an extension in content, since we now read of the σωτρ τῆς οκουμένης or το κόσμου,37 and the idea of the golden age crops up along with σωτήρ predications.

     

    37 The former of Caesar, IG, 12, 5, 1, 557. The latter is found only from Hadrian, but the idea is older.

     

    Werner Foerster, “σζω, σωτηρία, σωτήρ, σωτήριος, ed. Gerhard Kittel, Geoffrey W. Bromiley/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 1010. [본문으로]

  5. Robert M. Price, John Dominic Crossan, Luke Timothy Johnson, James D. G. Dunn, Darrell L. Bock, The Historical Jesus: Five views, edit. James K. Beilby, Paul Rhodes Eddy, trans. Hye Suk Son, Holy Wave Plus Publishing Company, 2014, 157. [본문으로]
  6. Craig S. Keener,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III, trans. Ok Yong Lee, Christian Literature Center, 2018, 2359. [본문으로]
반응형

이 글이 도움이 되었다면 ♡를 눌러 주세요. 익명성이 필요한 질문일 경우 Q&A 카페를 이용해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