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최근 들어 생명의말씀선교회(대한예수교침례회, 이하 대침)가 교리적으로는 이단이 아니고, 다만 그들의 행태만이 문제라는 주장이 생겨나고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침이 교리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은 정통 교단의 횡포나 대침을 탈출한 사람들의 망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교리적인 문제점이나 그들의 가르침의 오류들에 대해서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단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흔히 대침을 비판하기 위해 모인 그룹 내에서도 교리적인 문제는 논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거나, 성경에 대한 얘기는 해봐야 각자가 의견이 다양함을 확인할 뿐이라고 말하면서 그런 논의들을 배제하고 대침 내에서 일어나는 인간 관계나 건축 문제 등등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 왔다.
이제 이번 글은 이런 주장들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얘기해보고자 한다. 나의 블로그 글을 읽어본 분들은 예상 가능하다시피, 나는 이런 주장들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곧, 나는 대침의 문제점의 본질은 교리적인 문제가 그들의 행동들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자와 후자를 두부 자르듯이 딱 분리하기란 불가능하다.
배타성은 교리적 문제에 뿌리 내리고 있다.
나는 블로그에서 생명의말씀선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배타성’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제 어떤 사람들은 그 배타성이라는 것이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행태적’이라고 주장하려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적어도 대침 안에서 배타성을 유지하고 있는 신도들은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제로 교리적인 이유 때문에 자기들의 배타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통 교단에는 복음을 제대로 가르치는 곳이 거의 없다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
필자가 대침에 출석하고 있는 분들과 정통 교단에 대해 대화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내용은 ‘정통 교단은 행위 구원을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혹은 ‘정통 교단은 원죄는 사해졌지만 나머지 자범죄는 행함으로 갚아야 한다고 가르친다’라는 것이었다. 즉 그들은 어느 방식이든지 간에 교리적인 이유에서 자신들의 배타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이런 교리적 이유에서의 배타성은 한국 교회를 향한 시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가 한국에 왔을 때, 구원파의 창시자인 권신찬 목사는 빌리 그래함 목사의 설교를 듣고 나서 그가 복음을 잘 모른다고 말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의 복음을 빌리 그래함이 동일하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제아무리 일반 교단들이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의 내용을 말해도, 구원파가 가르치는 강조점을 정확하고도 동일하게 강조하지 않는 이상 구원파 입장에서는 그 교단은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교단으로 남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 교회가 오든, 미국 교회가 오든, 독일 루터교가 오든 영국 성공회가 오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대침의 L목사는 자신의 설교에서 정통 교단들의 목록을 나열하고 그들을 욕하면서 ‘교리로는 정통인데 생명이 없다’라고 비난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대침 입장에서도 정통 교단들의 교리를 오류가 있다고 비판하긴 힘들다. 그런데 그렇다고 정통 교단이 가르치는 복음의 내용이 자신들이 다듬은 내용과 정확하게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정통 교단은 전도집회 시스템을 통하지도 않고, 영원한 속죄와 죄사함을 단번에 깨달아 믿는다는 내용을 그리 강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침의 입장에서는 정통 교단이 자신들이 제시하는 정확한 내용과 그 정확한 정보를 인지하는 방식의 믿음을 강조하지 않다 보니, 저 곳에는 생명이 없다고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L목사의 설교는 이러한 특성들이 잘 드러난다.
그래서 장로교를 다니던 사람이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더라도, 대침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전도집회 영상을 보여주고 자신들의 교회 안에서 상담을 다시 받도록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강조하는 그 강조점이 정확하게 들어있는 바로 그 내용을 담고 있는 복음의 내용(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보다 더 극대화 되어 있다.)을 알아야 구원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기준으로 다른 교단의 ‘복음을 잘 가르치는가’의 여부를 판단한다. 그 판단 결과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배타성을 합리화하고 공고히 만든다.
이것이 ‘교리적’ 이유로 배타성을 띠게 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그들의 배타성은 ‘행태적’이라고 말하기에는 매우 선명하다. 그들은 정확하게 교리적인 이유와 교리적인 목적으로 타 교단들과 갈라 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런 교리적 기준이 되는 것은 그들이 섬기는 대침 교단의 극대화된 복음 내용과 피상적인 믿음 교리에 근거한다.
분명하게 존재하는 교리적, 성경 해석적 오류들
과연 대침이 성경 해석상의 오류가 없고 그 오류로 인해 생겨난 교리적 입장이 없다고 우리는 봐야 하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전에 쓴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대침이 가르치는 복음은 순수하다고 보기는 애매하다. 그들의 복음은 복음의 내용 중 특정 내용을 지나치게 극대화 시킨 것이다. 어찌나 이것을 극대화 시켰는지 복음의 다른 측면들이 거의 무시되어서 대침에 다니는 분들은 자신들이 배운 내용이 복음의 전부일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 내용에서 반드시 ‘영원한 속죄’ 등의 개념이나 키워드가 들어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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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복음을 받아들이는 믿음 자체에 대한 시각도 오류가 있다. 대침이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할 때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의 용법은 ‘인식적으로 아는 것’과 거의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파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들이 왜 영지주의라 불리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연구해보지 않는듯 보인다.) 그들은 어떤 교리적 명제를 사실로 인정하면 그것이 믿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피스티스’라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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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은 어떠한가? 음모론을 가져와 성경 본문과 실제로 일대일 대응시켜 해석하는 설교들이 난무한다. (그들이 그렇게 자랑하는 전도집회를 보라.) 이것은 명백하게 음모론을 교리적 입장으로 차용한 것과 같다. 그래서 어떤 대침 사람들은 일반 교회들의 요한계시록 해석이 전부 틀렸다고 생각한다. 정말 웃긴 얘기지만, 러시아, 핵폭탄, 이스라엘 독립, 베리칩 정도는 나와줘야 계시록을 잘 가르치는 것이라 여긴다.
그 밖에 너무 무수하게 많아서 다 다루기도 힘들 정도의 성경 해석 오류들도 있다. 이것들 중 일부를 내 블로그에서 다루기도 했다. 예를 들어 심각한 죄를 지어도 육신만 죽이고 영혼은 구원을 얻는다고 여기는 교리는 성경 해석의 오류와 그들의 영육 이원론적인 사고관의 오류에서부터 기원했다. 이런 교리를 갖고 살아가는 대침 사람들은 그 어떤 죄를 짓더라도 자신의 상태를 살펴보기 보다는 징계 받고 끝이라는 생각을 갖기 쉽다. 정말 이런 것들을 ‘교리적’인 것으로 우리는 여겨서는 안 된단 말인가? 나는 이런 지점들이 명백하게 교리적인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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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쁜 것은 그들이 이렇게 배운 내용들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내용이라고 실제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한 시각에 맞춰 성경을 해석한다. 만약 자신의 견해에 반대하는 듯이 보이거나 좀 모호하게 보이는 성경 구절이 있다면 자신이 설정한 대침 교리의 핵심 기준(영원한 속죄 등)에 부합하게 각색하고 잘라서 다듬어버린다.
그리고 여기서 벗어나는 교리나 성경 해석들을 ‘잘못 가르치는 것’으로 규정하고 일반 교회들이 소위 ‘성경적인지’에 대해 끊임 없이 시험한다. 그들이 잘못 가르치는 내용들이 도그마를 형성하고 신도들에게 배타적인 시각을 심어주는 것이다.
행태적 문제만 해결하는 것이 가능한가?
교리적으로는 문제가 없고 행태적인 부분들만 해결하면 된다고 누군가는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대침의 신도들이 교리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계속해서 다른 일반 교회들에게는 제대로 된 복음이 없으며 혹 있더라도 잘 가르칠 능력이 없다고 여길 것이다. 실제로 대침이 교리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절대 다수는 아직도 이런 착각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리적인 부분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대침에서 나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교리적인 부분을 미해결 상태로 남겨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을 때의 상황을 가정해보자. 이런 사람들의 사고 속에서는 계속해서 대침은 복음 만큼은 정말 제대로 가르치는 곳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대침 외에는 복음을 효과적으로 가르치고 전도할만한 곳이 마땅히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침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록 매우 유리한 입장에 서 있게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실상 이런 사람들의 사고 속에서 복음을 ‘독점’할 수 있는 권력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대침에만 제대로 된 복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늘어날 수록, 대침은 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그렇다면 대침 입장에서 소위 ‘행태적인 부분’을 굳이 바꿀 이유가 있는가? 없다. 어차피 대침에게만 복음이 있으며, 대침이 이것을 독식하고 있고, 따라서 사람들이 복음을 제대로 배우려면 대침에 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대침은 굳이 행태적인 것을 바꿀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것을 바꾸나 바꾸지 않으나 사람들은 계속해서 찾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고, 또한 한 번 온 사람은 밖으로 잘 나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어차피 다 잡은 물고기인데 그런 물고기들의 사소한(?) 불만, 곧 행태적 문제를 바꾸는 것을 그들이 중요한 것으로 바라볼까? 아닐 것이다. 그 보다는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복음 전파가 중요하다고 그냥 계속 강조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편할 것이다.
즉, 이런 식으로 모든 사람들은 ‘교리적인 이유’로 대침의 배타성 안으로 젖어 들어가고, 그것은 행태적 문제를 해결 불가능한 것으로 남겨두도록 만든다. 대침에 다니는 사람들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배타성을 갖게 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인가? 그들도 자신들 나름대로 생각해보고 나서 내린 결정이 대침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런 결론으로 나아가게 되었는가? 그것은 대침의 교리적 특이성이 다른 교회들에서 발견하기 힘든 요소가 있다는 것이고, 그런 특이성을 강조하는 것이 제대로 된 복음의 핵심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침의 행태적인 모습을 고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복음의 일부분을 극대화한, 그리고 ‘믿음’의 일부분 요소를 극대화하여 강조한 그들의 교리적 틀을 해체해야 한다. 이 교리적 틀이 해체가 된다면 대침의 사람들은 진정으로 대침 밖에 복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즉 그렇게 했을 때에 비로소 배타성의 참된 붕괴가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 대침의 배타성의 철저한 종말이다. 나는 대침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정말 아무런 양심적, 의식적, 사상적 거리낌 없이 다른 교단들로 자유롭게 옮길 수 있는 미래를 바란다. 대침 내의 모든 신도들이 자신이 사는 동네에서 각자가 교회를 선택하고 그곳으로 이동했을 때에 아무도 그들을 향해 ‘실족했다’거나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라고 말하지 않을 그런 미래를 바란다.
그리고 이렇게 되었을 때에 대침의 행태적인 문제들도 개혁이 일어날 것이다. 대침 신도들은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빠르게 다른 지역이나 교회로 갈아타는 습성이 있다. (어떤 면에서 생각보다 냉철하다고 생각한다.) 대침 분들 중에는 ‘복음’만 존재한다면 어디든 괜찮다는 생각을 가진 분들도 많다. 따라서 대침이 자신들의 행태적 문제점들을 수정하지 않는다면, 신도들은 정말 빠르게 이탈할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침은 자신의 문제점을 성찰하고, 수정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자유로운 이동과 선택은 정말 건강한 현상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최근에 이런 이동들에 분노하고 어떻게든 막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사람들이 감리교나 장로교 등에 나가는 것을 정말 질색한다. 정통 교단은 전부 썩었으며 이런 교단들에 다니느니 차라리 대침 안에 머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흥미롭게도 보통 이런 사람들은 대침이 교리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들은 대침이 행태적인 문제점만 고치면 정말 쓸만해 진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대침의 신도들 전체가 대침 밖에 복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하기 전까지는 이런 문제점들이 결코 시원하게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을 그들은 모르는 것 같다.
![알파남 예수님](https://blog.kakaocdn.net/dn/xH7S8/btsK3Sb8Gz6/KBPyzHnjLKmNUIEc181X11/img.png)
교리적인 것과 행태적인 것은 분리할 필요가 없다.
대침의 교리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힘을 얻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것은 기독교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거의 항상 교리적인 것과 행태적인 것이 함께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대침의 ‘이방 결혼’ 교리는 어떠한가? 이 교리는 대침 밖에서 결혼하는 모든 사례들에 대해 정죄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리고 그곳의 신도들은 실제로 이것을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고 있다. 그들에게 ‘이방 결혼’에 대한 내용은 분명하게 교리적인 신념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기독교 세계의 이단들은 실제적인 교리를 만들고, 그 안에서 생활하는 신도들은 이런 교리들에 의해 실제 일상이 영향을 받는다. 만약 교리적인 것과 행태적인 것이 딱 정확하게 분리가 되는 것이었다면 신도들이 대침의 이런 ‘이방 결혼’에 대한 교리에 대해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교리적 가르침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자주 듣는다.
또한 대침 측에서 탈대침한 사람들을 향해 성령훼방죄를 짓고 있다고 정죄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이것은 대침 내의 유명한 목사들의 설교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는 주제다. 자신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해 성령훼방죄를 짓고 있는 것이라 가르치는 과격한 내용은 신도들에게 그대로 흡수되어 대침에서 나오고 나서도 큰 두려움을 느끼게끔 만든다.
마찬가지로 징계 교리 역시 신도들의 실제적인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친다. 많은 사람들이 필자에게 자신이 대침에서 나가게 되었을 때 성령훼방죄를 짓게 되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징계를 받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고민하는 내용의 질문을 하기도 했다. 이것은 단순히 ‘행태적’인 것이라 일축 될 만한 것들에 해당하는가? 아니면 실제적인 교리에 대한 고민인가? 나는 이것을 둘 다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진지한 기독교인들에게 교리는 언제나 실제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논쟁하며 다들 싸우는 것이다. 교리적인 것과 행태적인 것(나는 이제 이러한 표현 자체가 맞는 지도 의문이 든다.)은 많은 경우에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함께 공존한다. 이 둘을 분리하겠다는 것 자체가 사람들이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문제를 사소한 것으로 무시하고 피상적으로 파악하여 축소하겠다는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대침의 피해자 분들의 경험은 교리적인 것과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분들의 아픔은 더 거대한 무언가의 일부에 연루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들이 대침을 나올 때에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경의 메시지를 자신들이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계속해서 불안해 하면서 찾아보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 교리가 정말 실제적이었으니까 말이다.
다른 교회들도 다 똑같다?
간혹 대침을 비판하는 글을 쓰면 ‘다른 교회들도 다 그런 오류가 있다’라고 누군가 주장하기도 한다. 나는 이것이 고도의 논점 흐리기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대침의 오류가 다른 교회들에게도 동일하게 있는 것이라면, 대침은 자신들이 다른 교회들 보다 성경을 잘 가르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다른 교회들 정도로 가르친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더 정확한 묘사일 것이다. 그런데 대침은 자기들이 다른 교회들 보다 더 낫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이건 어떻게 된 일인가?
그리고 만약 대침이나 다른 교회들이나 동일한 오류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왜 굳이 대침에 있어야 하는가? 대침에서는 자신들 교회에서 나가는 사람들을 실족했다고 욕하고 대침 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가족들에 의해 절연 당하기까지 한다. 반면에 일반적인 교회들은 그런 요소들이 거의 없다. 그냥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교회로 옮기면 그만이다. 즉 대침 정도로 과격하지 않다. 따라서 동일한 오류를 갖고 있다면, 대침 보다는 일반 교회가 더 나아 보인다. 왜 굳이 대침에 다녀야 하는가?
더욱이 대침이나 대침 밖이나 똑같다면, 왜 이 같은 사실을 적극적으로 대침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는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불쌍하지도 않은가? 재밌는 것은 대침이나 일반 교회나 똑같다고 말하는 바로 그 사람이 탈대침한 사람들에게 대침 안으로 다시 들어가라고 조언하는 이상한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또한 대침과 일반 교회들이 동일한 오류가 있을 뿐이라면, 대침은 왜 이단해제절차를 밟지 않는 것인가? 어차피 동일한 오류가 있고 동일한 교리라면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이단해제절차를 밟을 때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정통 교단과 동일한 교리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단 꼬리표를 가지고 힘들게 전도하는 것 보다 차라리 이단해제절차를 밟고 당당하게 전도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왜 대침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모두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대침이 일반 교회들과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침이 다른 교회들 보다는 낫다?
대침이 다른 교회들 보다는 더 낫다고 하는 증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대침 측의 사람들이 일반 교회를 평가하는 것에 대하여 이전에 쓴 글들에서 나는 그런 증언들이 신뢰하기에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일반 교회들에 실망하고 대침을 다니게 된 사람들로 구성된 표본 집단의 증언은 정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이 몇몇 교회를 돌아보고 실망을 하였을 수 있다. 그리고 대침은 이런 사람들을 빨아들인다. 대침에 있는 일반 교회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전부 이런 종류의 나쁜 경험을 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이 기억하고 증언하는 정통 교단은 전부 이상하고 괴상하며 나쁠 수밖에 없다. 과연 이런 사람들로만 구성된 집단의 경험들을 우리는 신뢰할 수 있는가?
또한 반대의 순서를 따르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대침을 먼저 다닌 다음에 내가 위에서 설명한 교리적 오류들을 실제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그 후 어떤 이유로 대침을 나온 다음 다른 교회들을 돌아본다. 그런데 맙소사.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을 제대로 가르치는 교회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대침에서 처음 배운 것들을 성경이 실제 가르치는 내용으로 인식해버리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대침 외에 복음을 제대로 가르치는 곳이 드물다’라는 괴담을 퍼트린다. 그런데 대침 밖에서 정상적인 교회에 잘 다니고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런 사람들의 말들이 정말 어처구니 없게 느껴진다. 저 사람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제대로 교회를 다니고 있는 나는 뭐란 말인가?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 그리고 이제까지 내가 경험한 교회들은 전부 다 복음을 잘 가르치고 있었는데 말이다.
결론: 교리적인 부분을 왜 제외하려고 하는 것일까?
대침의 이단성을 논할 때 ‘교리적인 부분’을 제외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일까? 이들은 아마 대침이 교리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점을 어떻게든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려고 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대침 내에 머물면서 대침의 ‘비교리적인’ 문제들을 작게 다듬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려는 것 같다.
이들의 이런 생각은 구원파 내의 사람들의 이탈을 최소화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이 대침을 나온 사람들에게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조언하기까지 한 것을 보면 이것이 그들의 의도일 수도 있어 보인다.
그리고 이들의 의도대로 대침에서 이탈이 최소화되고, 오히려 그 안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 대침의 배타성은 약해지기는커녕 더욱 단단해진다. 대침은 ‘그것 봐라. 우리가 복음을 제대로 가르치니까 사람들도 이탈하지 않고 우리를 찾아오는 것 아니냐’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을 더욱 휘두를 것이다. 이제까지 대침이 그렇게 해왔던 것처럼 말이다.
이 자리를 빌어 내가 바라는 방향을 말해보고자 한다. 나는 대침이 이단해제절차를 밟아 그 과정에서 정통 교단의 지도 아래에 신학을 겸손히 배우길 바란다. 그러나 그 때까지는 대침 내에 사람들이 머물러 있거나 그 안으로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단해제절차를 밟을 때까지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밖으로 나오길 바란다.
그렇게 하기 위해, 대침을 탈출한 우리가 그들을 위한 ‘외부의 목소리’가 되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꾸 대침 안에 머물러라, 대침으로 돌아가라, 대침 안에서 바꿔야 한다는 분들에게 한 말씀 드리겠다. 왜 신도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서 대침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 그걸 왜 불쌍한 신도들이 부담해야 하는 문제로 만드는가? 그냥 대침 목회자들이 당장 바뀌면 되지 않을까?
나는 소위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봐라'라는 말이 정말 가스라이팅 기법을 제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가스라이팅 화법은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다고 착각하게끔 만들어서 그 사람이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조종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봐라'라는 말은 대침을 다니면서 생기는 모든 문제가 '사람을 보는 너의 문제'가 되도록 만든다.
교회에 문제가 있으면 목회자들이 바꾸면 된다. 신도들을 가둬두고 그들에게 문제의 짐을 전가하지 말라. 차라리 대침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이단해제절차를 밟을 때까지 대침 밖에 나와 있는 것이 신도들에게 더 나은 방법일 것 같다.
아울러 이 글을 볼 일반 기독교인 분들이 계시다면, '교리적 이단'이니 '행태적 이단'이니 나누는 것을 신경 쓰시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이단은 그냥 이단이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한가. 구원파를 이단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만 이것을 교묘하게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복잡하고 난해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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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feat. 생명의말씀선교회 깨사모의 해석) (4) | 2024.09.28 |
고린도후서 13장 5절: 구원 확신을 해야 한다는 본문인가, 바울의 사랑의 권면인가? (5) | 2024.09.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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