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저 구름 같이, 비둘기가 그 보금자리로 날아 오는 것 같이 날아 오는 자들이 누구뇨
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원방에서 네 자손과 그 은금을 아울러 싣고 와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에 드리려 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드리려 하는 자들이라 이는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니라
이사야 60장 8절
생명의말씀선교회(대한예수교침례회, 이하 대침)에서는 일정 기간마다 ‘성경강연회’, 곧 ‘전도집회’라고 불리는 것을 열어서 사람들을 초대하고 창조과학과 음모론을 주입한 뒤 자신들의 교리를 믿게 만든다. 그들은 이런 시스템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신들에게 소위 구원의 역사라 불리는 것이 활발하게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이유로 이것의 성과를 내세운다.
그리고 이 전도집회에서 흔히 쓰이는 본문이 바로 이 이사야 60장 8절의 본문이다. 그들은 이것을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설명할 때에 사용한다. 그러면서 에티오피아에서 비행기를 타고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했던 사건을 가져와 성경이 말하는 이스라엘의 회복의 예언이 이렇게 정확히 성취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해당 본문은 일단 ‘비행기’에 대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본문에서 ‘날아온다’라는 심상이 있을 뿐이다. 아마 필자가 추측하기로 대침 측에서는 ‘날아온다’라는 표현을 보고 이것이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그런데 해당 본문 다음 구절에서, 곧 이사야 60장 9절에서 8절의 내용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같은 사실을 그들은 몰랐거나, 아니면 알았더라도 의도적으로 고려하지 않기로 마음 먹은 것 같다. 그들은 마치 8절의 구절을 따로 분리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어떤 현상에 대입하여 이해할 수 있다고 여기는 듯 보인다. 해당 본문을 있는 그대로 본연의 의미에 맞게 해석하는 것은 8절 뿐만 아니라 9절의 내용 역시 함께 고려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구약학자들 역시 해당 본문을 주해할 때에 8절 뿐만 아니라 9절도 함께 고려한다. 이것은 ‘책’이라는 형태의 글을 읽을 때에 아주 당연한 부분이다. 책은 한 구절만 똑 떼어서 독해해서는 안 된다. 당연하게도 전체 주제와 문단과 문맥을 함께 고려해서 읽어야 한다.
이번 글은 성경 본문상 상당히 명쾌하기 때문에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본문 내용
본문은 의문사 “who”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미(מִי)”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미 엘레(מִי־אֵ֖לֶּה)”는 “이것들은 무엇이냐?”라고 묻는 수사적인 질문에 해당할 것이다. 여기서 “이들은” 시적인 언어로 표현되는데, 곧 “구름 같이, 비둘기가 그 보금자리로 날아 오는 것 같이”처럼 시적인 언어로 표현된다.
이제 9절에서 이들의 정체가 밝혀진다. “미”라고 물은 문장에 대한 대답으로 “키(כִּֽי)”절이 9절의 시작을 이끈다.(“참으로!”) 이렇게 날아오는 자들의 정체는 섬들, 곧 다시스와 같은 해양 국가들의 배들이다.(“וָאֳנִיּ֤וֹת”) 그들은 이스라엘의 자녀들과 은, 금 등의 재물을 싣고 온다.
즉 해당 본문은 이스라엘로 오는 배들의 모습을 마치 떼 지어 날아오는 비둘기나 구름의 모습으로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과 비슷한 표현을 예레미야 4장 13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보라 그가 구름 같이 올라 오나니 그 병거는 회리바람 같고 그 말들은 독수리보다 빠르도다 우리에게 화 있도다 우리는 멸망하도다 하리라 (렘 4:13)
또한 호세아 11장 11절에는 더욱 유사한 형태의 본문이 나온다.
저희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저희로 각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호 11:11)
따라서 이와 비슷하게, 이사야 본문은 무리 지어 오는 구름의 모습, 그리고 되돌아오는 비둘기의 모습으로 다시스의 배들이나 섬들의 배들이 무리 지어 오는 모양을 시적인 언어로 표현했다고 우리가 여길 수 있다.
학자들은 해당 문장에서 ‘비행기냐 배냐’ 같은 사실을 전혀 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 본문의 문장은 상당히 명쾌한 편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독해하면 되기 때문이다. 다만 학자들이 이사야 본문의 배경으로 설정한 것에 따라 해당 본문을 ‘아닥사스다 왕’이 행차하는 것과 페니키아 및 블레셋(섬들)의 배들이 들어오는 것으로 볼 지, 1아니면 종말에 있을 완전한 이스라엘의 회복에서 거대한 선단이 비둘기 떼와 같이 순항하며 들어오는 것으로 볼 지 2등에 대한 의견이 갈릴 뿐이다.
어느 방향으로 보든, 이 본문은 배들이 해양 국가들로부터 시온을 향해 항해하여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3그 과정에서 이스라엘 자손들과 재물들을 싣고 오기 때문에 이 본문을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본문으로 취급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섬들 및 다시스의 배들이 ‘비행기’로 바뀌고 갑자기 에티오피아가 등장해야 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이스라엘 회복의 모양으로 비행기가 있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해당 본문이 ‘그것을’ 예언했다고 여기는 것은 또다른 문제이다. 왜냐하면 해당 본문은 날아오는 자들을 다시스의 배들과 연결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행기가 나오냐 안 나오냐에 대한 입증 책임은 필자가 아니라 이렇게 주장하는 그들에게 있다.
물론 대침을 옹호하려는 사람들은 이 본문이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말하고 있으므로 그 정도 수준에서 자신들도 말하고 있는 것이라 주장하려 시도할 것이다. 그들은 항상 이렇게 상황을 난해하게 만든 다음 빠져나가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침의 전도집회를 들어본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양심적으로 인정할 수 있듯이 대침은 분명하게 ‘날아온다는 것’을 강조하며 ‘비행기’가 사용되었다는 점을 들어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즉 대침이 이 본문을 사용할 때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여기서 날아온다고 했는데 정말로 날아왔다’라는 요소이다. 대침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이 본문이 비행기로 복귀하는 것을 예언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혹은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든 8절과 9절을 분리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8절은 비행기를, 9절은 배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려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아직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8절의 내용만으로 ‘비행기’를 추론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위에 인용한 예레미야 본문과 호세아 본문도 우리가 ‘비행기’에 대해 예언한 것이라 여겨야만 하는가? 또한 여기서 비행기가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저 단지 ‘날아온다’라는 요소 때문에?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날아온다 혹은 날아간다는 본문들에 대해 그렇게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 즉 ‘날아온다’는 표현이 필연적으로 비행기를 추론할 수 있는가?
또한 8절의 “누구뇨?”로 번역된 수사적 질문 “미(מִי)”에 기대되는 답변은 본문에서 대답하고 있지 않으며 ‘비행기를 타고 오는 자들’로 우리가 추론해야 한다고 여겨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9절의 접속사 “키(כִּֽי)”는 우리가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어떤 학자는 이것을 “because”로 번역하여 8절과 긴밀이 연결된다고 보고 있는데 말이다. 아니면 단순히 “키”를 번역하지 않고 생략해버릴 것인가?
필자는 8절의 수사적 질문에 9절이 확실한 대답으로 제시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개역한글의 번역 역시 이런 방향에 동의하는 듯이 보인다.) 또한 일반적으로 학자들도 8절과 9절을 묶어서 주해한다. 우리는 이사야 63장 1절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수사적 질문에 대한 대답이 곧바로 제시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혹 이것이 아니라 생각한다면 8절의 수사적 질문이 9절을 의미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결론
이스라엘로 자손들이 복귀하고 재물들이 들어오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 이 본문에서는 그것이 배로 들어오는 것을 통해 표현된다. 이스라엘로 들어오는 회복의 물결은 매우 가파르고 재물의 양도 어마 어마하기 때문에 그것은 ‘구름’이나 ‘비둘기 떼’ 등과 같이 묘사되고 그들이 ‘날아온다’라고 표현된다. 마치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물체가 매우 빠르게 도달할 때에 ‘날아온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런데 대침에서는 실제 비행기를 타는 사건을 이 본문과 연결 짓는다. 이것은 성경을 먼저 읽고 그것의 의미를 파악했다기보다는 비행기 사건을 먼저 접하고 그것에 맞아 보이는 성경 본문을 선택한 것이다. 필자가 말했던 대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셈이다. 자신들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성경 본문을 분절하여 취사선택하는 경우에 이런 무리한 해석들이 종종 발생한다.
이런 허술한 성경 해석을 보고서도 과연 대침이 성경을 잘 가르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참고로 어떤 분들은 내가 원어 성경을 사용하는 것 때문에 소위 ‘원문주의자’라고 욕을 하기도 한다. (도대체 무슨 용어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기준에 의하면 구약학자들이나 신약학자들은 전부 원문주의자들에 해당할 것이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이런 학자들이 전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라 말하며 분노하기도 한다. 이들은 킹제임스와 관련된 분들이 많으며 나는 그런 분들에게 내 글이 환영 받을 기대를 하지 않는다고 미리 말해두고 싶다. 특별히 대침을 겪은 분들은 신학을 배척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도대체 그들이 지키는 것 중 무엇이 무너지기에 성경을 원어로 읽는 것이나 학자들의 글을 읽는 것을 그토록 경계하고 분을 내며 비난하는 것일까? 알 수 없다. 그들은 아마 그것이 진리를 지키는 자신들만의 방식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서 ‘원문주의자’라는 이상한 프레임을 만들어 사람들이 자유롭게 연구하고 공부하고 학자들의 책을 읽는 것을 막고 통제하려 한다.
학자들의 글들은 ‘정답’이 아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에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좋은 설명’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학자들 마다 특정 본문들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기도 하고 서로 그것에 대해 토론하기도 한다. 내 글은 그런 학자들의 ‘좋은 설명’을 소개할 것이다. 그것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고 받아들일지는 여러분의 몫이다.
이런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 학자들은 연구하고 글을 쓰며 나 같은 사람은 그것들을 기쁜 마음으로 읽고 생각에 잠긴다. 나는 이것이 기독교 세계를 풍요롭게 만드는 매우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자신이 갖고 있던 어떤 교리적 믿음이 흔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원어 성경 때문에 자신이 지지하던 성경 해석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 세계는 당신이 지지하는 사상과 무관하게 계속해서 흘러간다.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대침의 성경 해석은 적절하지 않다. 그러나 당신이 학자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겠다면, 필자는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할 뿐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각자의 판단에 달려 있을 뿐이다.
위 이사야 본문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다. 해당 본문에서 ‘비행기’는 등장하지 않으며 8절과 9절을 함께 읽어 해양 국가들의 배들이 들어오는 것이라 읽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본문이 ‘비행기’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경험상 대침을 어떻게든 옹호하려는 분들은 성경 본문을 분절하고, 억지로 난해하게 만들어서라도 그렇게 한다. 나는 그런 분들의 생각을 바꾸기는 매우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제 필자의 글을 읽는 일반 기독교인 분들은 조금 황당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성경 본문에서 ‘비둘기처럼 날아온다’를 가지고 “여러분! 이것이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 유대인들을 예언한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것은 구원파로 알려져 있는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의 전도집회에서 실제로 가르치는 내용이다.
혹 성경강연회 가보자라고 권유를 받아 간 교회에서 이런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면, 그곳에서 어서 도망치길 바란다. 그들은 자신들 외에는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는 곳이 적다고 주장할 것이며, 자신들 외에는 구원이나 복음을 제대로 가르치는 곳이 적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면서 당신이 자기들에게서 나가지 못하도록 고립시키려 할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한국에는 교회가 정말 많고 다양하다. 우리는 이것들 중에 자신과 맞는 곳을 찾아 갈 수 있다. 필자는 그런 자유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교회는 전부 다 부패했으며 따라서 자신이 제시하는 방향이 좋다고 말하는 자들을 경계하라. 한국에 있는 대부분의 교회들은 그냥 평범하고 좋은 곳들이다. 이 블로그에 오는 분들이 그런 편협한 시각을 제시하는 자들을 따라가지 않는 분들이 되길 소망한다.
- John D. W. Watt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25 Isaiah 34-66, trans. Cheol Seong Kang, Solomon Press, 2002, 473. [본문으로]
- John Oswalt, The Book of Isaiah chapters 40-66, trans. Yong Jung Lee, Revival & Reformation Publishing, 2016, 655. [본문으로]
- Then the western lands in and about the Mediterranean, led by Tharshish at the mouth of the Guadalquivir, appear like a cloud in the distance bringing exiles and rich gifts
E. Power, “Isaias”, in A Catholic Commentary on Holy Scripture, ed. Bernard Orchard와/과Edmund F. Sutcliffe (Toronto; New York; Edinburgh: Thomas Nelson, 1953), 57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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