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성경을 해석하는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그 자신이 갖고 있는 교리적, 사상적 배경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순수하게’ 성경을 있는 그대로 아무런 사심 없이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여기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성경을 해석할 때에 어느 정도의 해석자의 주관적인 시각이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의 본문의 의미를 곡해하거나, 추론할 수 없는 내용을 억지로 도출해내거나, 본문 자체를 부분 인용하여 없는 내용의 새로운 본문을 개작해 만들어내는 경우에는 우리는 확실하게 이런 해석은 ‘오류’에 해당하며 따라서 거부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자신이 지지하는 사상을 입증하기 위해서나, 아니면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표어나 구호, 명제 등을 성경에서 무리하게 추출하기 위해 본문의 내용을 왜곡한다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생명의말씀선교회(대한예수교침례회, 구원파, 이하 대침)의 S목사는 2024년 8월 4일 설교에서 위와 같은 성경 본문 내용 자체를 무리하게 해석하거나 혹은 본문의 내용을 개작하여 듣는 신도들이 왜곡하여 받아들이게끔 만드는 잘못된 성경 해석을 제시한다. 아래에서 살펴볼 그의 설교에서 S목사가 그런 무리한 해석을 자행하고 그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으로 신도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교회는 어머니이며, 만물 위에 있다’라는 그 자신의 사상을 입증하기 위해 성경의 본문들을 해석하려 시도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그의 설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거의 퀀텀 점프(Quantum jump)로 보일 정도의 심각한 논리적 비약이다. S목사는 성경에서 어떻게 그러한 의미가 나올 수 있는가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다만 그가 전제하고 있는 사상적 기반에 근거하여 주장만을 나열한다. 그래서 S목사의 설교를 처음 듣는 사람들은 어째서 그가 해당 본문에서 그런 내용을 이끌어낼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거의 이해할 수가 없다. 혹은 그는 전혀 관련이 없는 논리적 비약을 통해 억지로 성경 본문에서 본인이 원하는 내용을 끄집어 낸다. 그러면서 마치 그것이 그 본문의 고유한 내용인 것처럼 취급한다.
이것은 S목사의 설교를 듣는 신도들이 성경의 본문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실제로 필자는 구원파 출신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에 매우 난감해질 때가 많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사상을 지지한다고 확신하고 인용하는 성경 본문들에서 그들의 사상을 입증하는 내용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구원파 출신 분들은 자신들이 인용하는 성경 본문들이 당연히 자신들이 갖고 있는 왜곡된 교리를 지지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확신하곤 한다.
이것은 대침 출신의 분들이 성경 본문에서 추론할 수 있는 내용을 뛰어 넘어 어떤 근거가 명확하지 않은 내용을 덧붙여서 혼란스럽게 그것을 독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이 그 성경 본문을 왜 그렇게 해석할 수 있었는가의 논리적 흐름을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사실상 S목사가 성경을 독해하는 방식인 거대한 논리적 비약이 그들의 해석 방식에도 동일하게 존재함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다음으로 S목사의 설교가 신도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험성의 심각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위와 역할을 사실상 교회가 동등하게 누린다는 은근한 사상으로 신도들을 이끌어갈 여지가 있다는 점 때문에 더욱 강화된다. 실제로 아래에서 다룰 그의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특정 본문들이 매우 교묘하게 교회의 지위를 확고하게 하는 것에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포도나무 비유에서 ‘붙어 있어야 할 대상’으로서의 예수님의 고유한 위치를 사실상 ‘교회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으로 그들이 해석하는 대표적인 오류들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부분이다.
이제 S목사의 설교를 분석하면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그의 설교의 논리적 비약,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넘보는 교회의 존재, 그리고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 본문의 내용까지 부분 발췌하여 왜곡하는 그의 교묘한 성경 해석 방식에 집중하길 바란다. 그리고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대침의 신도 분이라면, 과연 S목사의 이런 성경 해석이 옳은 것인지, 그리고 당신 자신의 성경 해석 역시 이러한 애매모호한 논리적 비약과 왜곡을 따르고 있지는 않은 지, 생각해보면 좋을 것이다.
이번 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말씀선교회의 성경 해석이 공식적인 설교단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교회가 어머니라는 교리에 끼워 맞추는 성경 해석
우리는 흔히 “교회를 어머니로 섬기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자격이 없다”라는 표어를 종종 듣는다. 대침에서는 이 말을 루터 등이 한 말로 돌리곤 하지만, 사실 이 발언을 최초로 한 사람은 AD 3세기 경의 교부인 키프리아누스(Cyprianus)이다. 그는 노바티아누스파와의 혼란스러운 대립의 상황 속에서 『통일된 하나의 교회에 관하여(De Unitate Ecclesiae)』라는 저서를 통해 가톨릭적(보편적) 교회관을 매우 강력하게 주장했던 인물이다. 1이 때 그는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노아 방주 밖에 있던 사람들이 홍수를 피할 수 없었던 것처럼 가톨릭(보편)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 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2
그리고 그가 언급한 “교회는 어머니”라는 표어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나 마틴 루터(Martin Luther), 그리고 장 칼뱅(Jean Calvin) 등을 통해서 계속 반복 되었다. 이에 따라 이것은 상당히 자연스럽게 마치 일반 기독교의 교리적 진리이자 참된 명제인 것처럼 우리들의 의식 속에 받아들여지게 된 것 같다. 물론 이런 표어는 성경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선언을 신앙생활의 어떤 측면을 위한 표어로 취급할 수는 있겠지만, 이것을 교리적 진리로 여겨 성경이 곧 말하는 바라고 성급하게 결론 내려서는 안 될 것이다.
문제는 S목사의 경우 갈라디아서 4장 26절의 본문을 설교하면서 이 본문이 위의 키프리아누스가 선언한 표어를 마치 설명하고 있는 본문인양 억지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S목사는 자신의 설교 제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갈라디아서 4장 읽은 본문 중에 26절을 보면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말씀을 했다. 그래서 이 시간 제목을 ‘교회 곧 우리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좀 드려보겠다.”
S목사는 갈 4:21-5:1을 설교하면서, 갈 4:26의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어머니인 교회를 뜻하는 것으로 매우 당연하게 생각한다. 아마 필자가 조심스럽게 추측해보자면, S목사는 해당 본문의 “어머니”라는 단어에 매몰되어 “교회는 어머니이다”라는 기존에 자신이 갖고 있던 (그리고 당연한듯 퍼져 있는) 사상과 이것을 부합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즉, 이미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라는 사상에 익숙한 그의 시각에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어머니”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히 이 본문이 어머니인 교회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왜곡되게 독해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문제는 갈라디아서의 해당 본문은 그런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본문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각각 하갈과 사라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갈 4:24). 그러면서 바울은 하갈이 비유하는 옛 언약은 유형적인 예루살렘으로 나타나고, 사라가 비유하는 새 언약은 무형적인 예루살렘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바울에게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유형적이고 표면적인 어떤 것(토라)의 체계에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무형적이고 신령한 새 언약의 체계(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자유를 얻은 상태임을 암시한다. 따라서 갈라디아 교인들은 옛 언약의 토라 체계로 다시 돌아가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즉 이 본문은 교회를 말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기 보다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대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소망의 영적인 특성을 결정적으로 “위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계시록에 등장하는 새 예루살렘, 곧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상의 예루살렘의 이미지를 예견한다(계 21:2). 따라서 바울이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어머니”로 묘사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근본적인 기원이 하늘에 있다는 것, 곧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라는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빌 3:20). 일반적으로 학자들 역시 해당 본문의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교회”로 해석하기 보다, 마지막 때에 있을 종말적인 개념의 새 예루살렘을 뜻한다고 해석한다(히 11:10, 14-16; 12:22; 13:14; 계 3:12; 21:2 참고). 3매튜 하몬(Matthew Harmon)이나 존 슬롯(John Sloat) 역시 “Jerusalem above”를 “heavenly Jerusalem”이라 표현한다. 4
그런데 S목사는 이 본문이 “교회”를 말한다고 해석한다. (물론 그의 설교를 읽어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교회’란 일반적으로 유형 교회, 그 중 특별히 대침을 뜻한다고 이해할 것이다.) 그가 해당 본문의 “예루살렘”을 “교회”로 이해하는 것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의 이상한 논리적 흐름을 우리는 그의 아래 설교에서 곧 발견할 수 있다:
“즉 구원 받을 때 아들이 되고 아들이 되어야 자유자가 되고, 그리고 그 자유자는 아버지의 유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상속권이 주어진다.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이 자유자이다. 그리고 그 구원 받은 사람의 무리를 가리켜서 교회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이 말씀을 줄여서 ‘교회 곧 우리 어머니’ 이렇게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
위의 설교에서 드러난 그의 논리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구원 받은 우리는 자유자이다.
자유자의 무리는 교회이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이다.
따라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교회이다.
그런데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어머니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우리 어머니이다.
이 주장은 “자유자”라는 단어 하나에 착안하여 오로지 이것의 관계 만으로 구성되고 있다는 점이 확연하게 보일 것이다. 마치 “어머니”라는 단어에 착안하여 교회와 이 본문을 연결 짓는 설교 제목을 S목사가 무리하게 선정하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자유자”라는 단어에 매몰된 억지스러운 어색한 해석은 사도 바울의 설명을 무시하는 신중치 못한 처사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4-26)
곧 사도 바울의 설명에 의하면 하갈은 현재의 유대 땅의 예루살렘을 뜻하며, 동시에 옛 언약을 상징한다. 반면에 사라는 천상의 새 예루살렘을 뜻하며, 또한 새 언약을 상징한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라는 의미를 투사하여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아주 분명하게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새 언약”과 연결 짓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바울의 설명대로 우리는 여기서 “언약”에 대한 내용을 찾는 것이 좋다.
이것은 제 2 성전기에 종말적 구속 신학이 “예루살렘”이나 “시온 산”과 자주 연결되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옛 언약의 체계에서 유대인들의 메시아적 소망과 구원은 현재 지상에 있는 가시적인 예루살렘 도시와 연관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새 언약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새 언약의 시대의 메시아적 소망 그리고 구원은 궁극적으로 지상의 예루살렘이 아닌 천상의 비가시적 예루살렘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의 자녀들은(즉 새 언약에 따른 자녀들은)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이다(갈 4:29).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유대인들의 국가적 회복의 소망과 대조되는 “하늘에 시민권을 가진” 자들의 소망을 엿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S목사는 해당 본문의 새 언약 체계인 천상의 예루살렘을 무리하게 교회와 연결 짓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유자”라는 단어에 집중한다. 그러면서 자유자들의 무리가 교회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여기서 천상의 예루살렘이 교회를 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문의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들”이 아니라 자유자(ἐλευθέρα)라는 단수의 단어로 표현된다. 이것은 바울이 여기서 ‘자유자들의 무리’와 같은 것에 별 관심이 없음을 보여준다. 결정적으로 바울의 다음과 같은 선언은 (바울 그 자신이 말한대로) 여기서 조명되고 있는 핵심 주제가 ‘자유자들의 무리’가 아닌, ‘자유케 하는 언약’과 관련이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 5:1)
이런 두 언약에 대한 바울의 명쾌한 설명을 S목사는 왜곡하여 “교회는 어머니”라는 해석으로 부당하게 덮어버린다. S목사의 교묘한 성경 해석 방식은 “어머니”라는 단어와 “자유자”라는 단어에 매몰되는 논리적 비약을 보여준다. 그는 “어머니”라는 단어가 당연하게도 교회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어떤 증명되지 않은 논리적 흐름 단계를 거쳐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런 잘못된 명제를 전제로 “자유자”라는 단어 역시 “자유자들의 무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갑자기 둔갑해버릴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어머니”라는 단어는 필연적으로 교회를 의미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며, 또한 “자유자”라는 단어 역시 “자유자들의 무리”를 필연적으로 의미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그렇다면 S목사는 왜 이 본문에서 그러한 논리적 흐름이 나올 수 있었는가에 대해 적절한 설명과 단계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그 중간 논의를 모두 건너 뛰고 당연한 듯이 이 모든 것들을 전제한 상태로 성경을 해석한다.
그리고 이런 해석은 바울이 제시한 자신의 요점인 “두 언약”에 대한 대조와 설명, 그리고 그것을 통한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경고와 권면 등의 본문의 주된 강조점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에 실패하도록 만든다. 본래 이 본문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두 언약의 차이와 그것을 통해 바울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S목사의 해석은 이 본문을 읽는 사람들이 (바울이 의도한 바와는 다르게) 갑자기 교회가 우리 어머니라고 생각하게끔 만든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성경을 독해하는 사람들은 어떤 본문을 읽을 때 그 본문이 실제로 말하고 있지 않은 내용이 그 본문에 들어 있다고 자신 있게 착각하게 될 수 있다. 필자가 대침 분들과 댓글 등을 통해 대화하면서 가장 많이 느낀 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이상하게도 성경의 특정 본문들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다고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실제로는 해당 본문에서 그런 내용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본문의 단어 하나 등에 소위 ‘꽂혀서’ 그 본문의 내용에 이상한 내용을 덧붙여 이해하고 있었다.
아마 그들 역시 S목사가 위의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했던 것과 거의 동일한 과정을 거쳐서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S목사가 그런 것처럼 먼저 자신의 입장을 정하고, 그 입장에 맞는 단어를 성경 본문에서 찾은 후, 성경의 문맥과는 무관하게 그 본문의 내용을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는 본문으로 취급하게 되었을 것이다. 놀랍게도 필자가 대침에 다닐 시절 사용하던 성경책의 예전 필기 내용들 역시 거의 대부분이 이런 과정을 거친 교묘한 해석들로 뒤덮여 있었다.
성경 본문의 의도적인 부분 인용
S목사가 자신의 입장을 성경에 투사하기 위해 성경 본문 내용까지 의도적으로 부분 인용하고 사실상 그 의미를 개작하고 있다고 필자가 지적한다면 아마 대부분의 대침 사람들은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부인할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설교는 그가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입증하기 위해서 성경의 일부 내용을 잘라내고 본인이 원하는 것만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는 교회가 “만물 위에”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요한복음 3장 31-32절과 에베소서 1장 22-23절을 인용한다. 해당 본문은 다음과 같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요 3:31-32)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엡 1:22-23)
위 본문들은 모두 만물 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 두 본문이 모두 교회가 만물 위에 있다는 내용은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만물 위에 있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S목사는 성경이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교회도 만물 아래도 아니고 만물 안에도 아니고 만물 위이다. 이제 우리는 위에 계신 예수님과 연결됐기 때문에 만물 위고, 그리고 구원받은 우리 교회도 만물 위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에베소서 1장 22절의 본문을 다음과 같이 부분 인용하여 신도들에게 따라하게 만든다:
“자, 따라해주시길 바란다. ‘만물 위에 교회’ … 그래서 그 구원받은 사람 우리 전체도 만물 위에 교회, 위치가 바뀐 것이다.”
본래 에베소서의 해당 본문은 분명하게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라고 말한다. 그런데 S목사는 여기서 앞 뒤를 자르고 “만물 위에 교회”만을 남긴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S목사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와 같이 독해할 수 있었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는 개역한글 성경을 읽으면서 “만물 위에”와 “교회”가 붙어 있으므로 “만물 위에 교회”를 똑 떼어서 “만물 위에 (있는) 교회”라는 의미로 독해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한국 교회의 몇몇 성경 해석적 오류를 그대로 답습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헬라어 본문을 보면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어색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만물 위에”는 헬라어 “휘페르 판타(ὑπὲρ πάντα)”이고 “교회의”는 (소유격이 아니라) 여격인 “테 엑클레시아(τῇ ἐκκλησίᾳ)”로 되어 있다. 그리고 두 가지 모두 “에도켄 케팔렌(ἔδωκεν κεφαλὴν)”을 설명한다(동사+대격 명사). 즉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주셨는데, 만물 위에 머리로 주신 동시에 교회에게 머리로 주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본문은 “그를 모든 것 위에 머리로 주셨고, 또한 교회에게 머리로 주셨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개역한글 번역 역시 이것을 제대로 번역하였다. 즉 여기서 “만물 위에”는 “교회”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주셨다”는 동사를 설명한다.
쉽게 말해서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만물 위에 머리로 주셨기 때문에 (만물 안에 포함되는) 교회에게도 당연히 머리가 되신다.” 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만물 위의 머리이신 그분이 교회에 주어져 있다는 사상이 분명하게 함축하고 있는 것은 그분이 또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이다.” 5
혹은 스티븐 바우(S. M. Baugh)와 같이 여기서 “판타”, 즉 “모든 것”이 “교회 안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구체적으로 명시할 수도 있다. (스티븐 바우는 『신약성경 헬라어 문법(A New Testament Greek Primer)』의 저자이다) 이 경우 해당 본문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교회 안의 모든 것 위에’ 머리로 주셨다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즉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다.) 따라서 그는 에베소서 1장 22절 본문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and ‘he put everything under his feet’ and gave him as head over and above everything in the church” 6
(강조는 필자의 것임)
만약 만물 위에 있는 것이 교회였다면, 여격 “테 엑클레시아”가 만물 위에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테 엑클레시아” 뒤에 수식하는 관계대명사나 혹은 분사형 동사가 부연 설명의 목적에서 추가적으로 붙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당 본문은 그렇지 않다. 본문은 분명하게 만물 위에 머리로 주어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며("αὐτὸν ἔδωκεν κεφαλὴν ὑπὲρ πάντα"), 만물 위에 교회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모든 것 위에 있기 때문에,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κεφαλὴν... τῇ ἐκκλησίᾳ").
사실 헬라어를 볼 것도 없이 개역한글 내용만 봐도 만물 위에 ‘교회가’ 있다는 내용을 이끌어내기엔 부족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본문의 강조점은 교회의 지위의 높음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교회의 머리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S목사는 의도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내용인 ‘만물 위에 교회가 있다’라는 가르침을 뽑아내기 위해 에베소서의 본문 내용 중 “만물 위에 교회”라는 문구만을 부분적으로 도려낸 뒤 이것을 신도들에게 읽게 만든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성경 본문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개작하여 받아들인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해당 본문 내용에서 교회가 만물 위에 있다는 내용은 얻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S목사는 마치 해당 본문이 그런 내용을 말하고 있는 듯이 부분적으로 인용하여 그 의미를 새롭게 만들어버린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렇게 함으로써 S목사는 만물 위의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교회’를 올려놓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가 인용한 두 가지 본문 (요 3:31-32; 엡 1:22-23) 모두 만물 위에 있는 존재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것은 요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예수님의 자리에 교회를 올려놓은 그들의 이전 해석의 내용과 매우 닮아 있다.
결론: 예수님이 아닌 교회를 높이는 무리한 해석
S목사의 이 설교는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 같다. 2011년 8월 17일 수요설교에서도 동일한 주제와 동일한 본문을 가지고 설명하는 그의 설교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 설교는 S목사가 정기적으로 반복해서 설교하는 내용일지도 모른다.
왜 S목사는 성경을 해석할 때에 위와 같은 오류들에 빠지게 된 것일까? 그것은 그가 교회를 높이려는 목적을 위해 성경을 틀에 맞춰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는 “교회는 어머니”라든가 “만물 위의 교회” 등의 도그마에 맞춰 성경을 주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야 할 성경의 설명이나 종말의 완벽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설명 역시 교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성경 해석에서 천상의 예루살렘과 예수 그리스도는 모두 교회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준다.
이것은 대침에서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포도나무 비유를 그들이 바라보는 관점을 떠올리게 만든다. 가지인 성도들이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사랑으로 붙어 있어야 한다는 본문의 말씀이 교회에 잘 붙어 있어야 한다는 강조점으로 갑자기 전환되는 것처럼 말이다. 마찬가지로 새 언약이 바라보는 천상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메시지는 갑자기 ‘교회는 어머니이다’라는 표어로 전환되고, 만물 위에 머리로 있으신 예수님의 이미지는 교회가 그 자리를 꿰 차는 것으로 전환된다. 필자는 대침 분들이 이렇게 성경의 메시지를 약화시키는 설교를 하는 목회자에게 배우는 것이 별로 좋지 않다고 권고하고 싶다.
어떤 사람들은 S목사의 이러한 해석의 오류가 다만 의도하지 않은 실수 때문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에베소서 1장 22절의 본문을 필요한 부분만 어색하게 잘라서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 부당하게 인용하는 것은 과연 S목사가 의도하지 않은 실수를 한 것인 지 의심하게끔 만든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매우 잘 이해하고 있었을 지 모른다. 또한 만약 의도하지 않은 실수로 이런 성경 해석을 한 것이라면, 더더욱 대침 분들은 이런 목회자에게 성경을 배워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설교는 이런 성경 해석의 오류들을 중심으로 내용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S목사의 성경을 다루는 방식은 성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보기에도 매우 폭력적으로 보일 만큼 노골적이다. 심지어 필자가 이 S목사의 설교를 검토하고 있을 때 필자의 와이프가 옆에서 보면서 “아니 저렇게 노골적으로…”라고 황당해 하며 한 마디 하기도 하였다. S목사는 성경 본문이 본래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지 거의 전혀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성경 본문을 매우 신중하지 못하게 마구 해석하며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목회자에게 성경 해석하는 법을 배우는 대침의 신도들 역시 성경을 이런 방식으로 취급하게 되기 쉽다.
특별히 자신들이 성경을 정확하게 잘 가르친다고 자부하는 교단의 꽤나 유명한 목회자의 설교에서 이런 이상한 성경 해석 방식이 등장하는 것을 생각할 때 상당히 실망스러운 부분이다. 적어도 필자가 확인한 이 설교 내용은 성경을 정확하게 잘 가르친다는 것과는 매우 거리가 있다. 오히려 자신들이 지지하는 도그마의 내용에 성경 본문을 종속시키고 있다. 대침이 정말 성경을 잘 가르치는 교단이라면, 이 보다는 더 나은 성경 해석을 설교에서 보여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교회를 강조하는 내용으로 성경의 본문을 곡해하는 그들의 일반적인 양상을 생각해볼 때 과연 그들의 의도가 순수한 것인지 매우 의심이 된다. 그들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인가, 교회인가? 하나님의 나라인가, 교회인가? 하나님인가, 교회인가? 왜 그들은 교회를 높이기 위해 예수님에 대한 본문들의 의미들을 희생시키고 퇴색시키기로 결정한 것일까? 그들이 제시하는 섬겨야 할 대상은 과연 예수님인가, 아니면 교회인가? 혹 그들은 예수님과 교회를 동등한 것으로 간주하여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높이고 교회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예수님을 높이고 교회가 예수님께 순종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사명은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섬기는 바른 교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발 아래에 모든 만물은 놓여져 있다. 그리고 이것에서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만물(“판타”; 모든 것)의 머리로 주셨다면, 교회는 그것(만물) 안에 속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예수님을 머리로 섬겨야 한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엡 1:23)
교회는 만물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그리스도의 충만이다(엡 1:23; 골 1:18-19 참고). 그리고 에베소서 1장 23절에서 “토 쏘마(τὸ σῶμα; 그 몸)”는 “토 플레로마(τὸ πλήρωμα; 그 충만)”와 동격이다. 예수께서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이시며, 교회는 이러한 충만으로 채워지는 대상이다(엡 4:10). 7따라서 교회는 몸이지, 머리가 아니다("ἥτις ἐστὶν τὸ σῶμα αὐτοῦ"). 교회는 만물 위가 아니라, 만물 안에 있다("τὸ πλήρωμα τοῦ τὰ πάντα ἐν πᾶσιν πληρουμένου").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만물 위에 존재한다("αὐτὸν ἔδωκεν κεφαλὴν ὑπὲρ πάντα").
- Philip S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2, trans. Gil Sang Lee, Christian Digest Press, 2014, 174. [본문으로]
- Ibid., 175. [본문으로]
- Richard N. Longenecker, WORD BIBLICAL COMMENTARY Galatians, trans. Deok Sin Lee, Solomon Press, 2003, 505. [본문으로]
- https://www.thegospelcoalition.org/commentary/galatians/ [본문으로]
- Andrew T. Lincoln, WORD BIBLICAL COMMENTARY Ephesians, trans. Yong Deok Bae, Solomon Press, 2006, 245. [본문으로]
- https://www.thegospelcoalition.org/commentary/ephesians/ [본문으로]
- Andrew T. Lincoln, WORD BIBLICAL COMMENTARY Ephesians, trans. Yong Deok Bae, Solomon Press, 2006, 26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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