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2023년 10월 15일자 설교에서 구원파의 L목사는 누가복음 23장 31절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유대인을 말한다. 마른 나무는 이방인이다.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한다면, 구원 받을 수 있는 은혜의 복음이 전해지는데 이 복음을 안 받아들이는 것은 유대인들이 자기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배척한 것과 같다.”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이하 대침)에서 전도집회 말씀을 많이 들어본 사람들이라면 이 해석에 대해 매우 잘 알고 또한 익숙할 것이다. 곧 누가복음 23장 31절의 “푸른 나무”는 유대인들을 뜻하고, “마른 나무”는 이방인 민족들을 뜻하며, 유대인들이 2000년 동안 환란을 당했듯이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배척하면 마지막 때에 이제 환란을 당할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성경 해석자들은 이 본문에서 “푸른 나무”를 유대인,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해석하지 않는다. “푸른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반면에 “마른 나무”가 이 본문에서는 유대인들을 의미할 것이다.
이런 간단한 성경 해석에서도 대침은 쉽게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대침 내에서 배우는 신도들은 성경의 비교적 분명한 문맥조차 파악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보통이다. 이 본문의 의미는 명확하기 때문에 푸른 나무를 예수님으로 해석할 때에 학자들 간에 논쟁이 되는 부분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다. 따라서 이번 글은 매우 간단할 것이다.
예수님과 예루살렘 여인과의 대화
대침에서 성경을 분절하여 마치 비밀스러운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처럼 파악하면서 독해하는 습관을 들인 사람들은 성경이 책으로 존재하며 따라서 전후 문맥과 그 단락의 전체 주제를 고려한 상태에서 각 문장을 그런 맥락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하곤 한다. 여기서도 대침이 “푸른 나무”를 예수님으로 해석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실패한 것은 그들이 전후 문맥을 거의 혹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해당 본문을 해석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 “푸른 나무-마른 나무” 발언은 예수께서 그냥 혼자 중얼거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이동 중에 슬피 우는 큰 무리의 여자들이 뒤따라 오는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다(눅 23:27). 그리고 누가복음 23장 28절에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예수를 위하여 울지 말고 그들과 그들 자녀를 위해 울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푸른 나무”와 관련된 본문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곧, 예수께서는 이 단락에서 왜 예수님을 위해 울지 말라고 하셨는지, 그리고 예루살렘 딸들에게 스스로와 그녀들의 자녀를 위해 울라고 말씀하신 것인지에 대해 설명을 해주실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 주요 대상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아니라, ‘예수님’과 ‘예루살렘의 딸들’임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해 말씀하심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23장 29-30절에서 예루살렘의 성전 멸망 사건에 대해 예언하신다. 그 때에는 자녀가 없는 것, 곧 임신하지 않은 상태, 출산하지 못한 상태가 오히려 축복받은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같은 비극적인 재앙이 일어날 때에는 이런 약자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관점을 바울에게서도 동일하게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 26절에서 “임박한 환난”을 이유로 미혼자와 과부들이 결혼하기 위해 굳이 애쓸 필요가 없다고 조언한다. 이것은 바울 역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과 같은 끔찍한 환난이 곧 닥칠 것이라고 예상하며 준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바울이 이렇게 조언을 한 몇 년 뒤에 예루살렘 성전은 철저히 파괴되고 멸망하였다.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23장 31절에서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라고 말씀하신다. 아마 대침의 목회자들은 여기서 말하는 “이같이”, 곧 헬라어 “타우타(ταῦτα)”가 지칭하는 것이 바로 위 구절들의 29-30절에서 말하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 사건을 가리킨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푸른 나무를 이스라엘에 배정하고, 그 다음 마른 나무를 이방인에 배정하였다.
그러나 “하거든”의 헬라어 “포이우신(ποιοῦσιν)”이 현재형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은 푸른 나무에게 “이같이 하거든(ταῦτα ποιοῦσιν)”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암시해준다. 즉 예수께서는 현재 자신이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들을 여기서 지칭하고 계신 것이다.
또한 위에서 이미 지적한바, 해당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주요 대상이 ‘유대인-이방인’이 아니라 ‘예수님-예루살렘의 딸들’인 것은 이 본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 역시 ‘예수님-예루살렘의 딸들’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갑자기 해당 본문에서는 암시되어 있지 않은 “이방인”이 등장한 것은 본문을 해석할 때에 고려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며, 그것을 벗어난 것이다. 누가복음 23장 27-31절은 이방인에 대해 무언가 말하려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으며, 만약 그런 의미를 갖고 예수께서 말씀하신다고 보는 것은 예수님이 31절에서 갑자기 자신이 말하던 화제에서 벗어나서 주제를 전환하고 있다고 여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어색한 해석이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이 “푸른 나무”로 긍정적인 대상으로 묘사되는 것 역시 신약성경의 주된 묘사들과 맞지 않는다. 특별히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자신 스스로를 “참 포도나무”, 곧 “참 이스라엘”로 제시하신 것을 생각할 때 더더욱 그렇다. 유대인들의 대다수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예루살렘 성전 멸망 때에도 그러했다. 그러므로 여기서 “푸른 나무”는 오히려 예수님에게 어울리며, “마른 나무”가 유대인들에게 더욱 적합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쓴 포도나무 비유에 대한 글을 참고하라.
생명의말씀선교회의 근거 없는 해석에 대한 고찰 및 학자들의 견해
그렇다면 왜 이런 해석, 곧 갑자기 이방인이 등장하는 해석을 그들은 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대침이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과 그 이후의 이방인의 환란이라는 종말론적 극단적 해석의 틀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의 전도집회에서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배척한 죄로 2000년 동안 전세계에 뿔뿔이 흩어지고 환란을 당한다. 그들은 이것을 매우 강조하며 이스라엘이 1948년에 국가를 선언한 것을 기점으로 이스라엘이 “회복”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성경 예언의 성취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의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한다고 주장하며, 무화과나무에 잎이 나는 것이 1948년의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라 근거 없는 해석을 한다.
그리고 그들의 이런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에 연결하는 이미지는 (필자가 추측하기에) 이 본문의 “푸른 나무”를 이스라엘로 해석하는 데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이스라엘이 회복되면 곧 세상이 끝난다고 여기는데, 그 직전에 7년 동안 이방인들이 당하는 대환란의 시기가 있다고 여긴다. 이 때에는 엄청나게 큰 환란이 있을 것이다. 즉 그들은 성경이 종말의 시간표를 제시하고 있다고 여기며, 그것을 ‘유대인의 회복’과 ‘이방인’이라는 두 요소의 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등을 통해 ‘나무’의 이미지가 이스라엘과 연결되고, 이스라엘-이방인의 틀이 성경을 해석하는 중요한 체계로 자리 잡게 되자 이런 요소들이 머리에서 뒤죽박죽 혼합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런 혼란스러운 개념의 카오스와 자의적 소화는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를 어떤 국가나 민족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근거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푸른 나무를 유대인으로 보고 마른 나무를 이방인으로 보는 것에 아무런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런 해석이 성경 문맥과 잘 맞지 않고 학자들 및 믿음의 선진들의 해석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대침 분들도 존재한다. 그래서 깨사모(깨어있는사람들의모임)라는 그들의 커뮤니티의 “성경질의응답”에는 2015년 8월 31일자로 “푸른나무와 마른나무에 대한 해석”이라는 제목의 질문 글이 올라가 있다.
거기서 질문자는 대침이 전도집회 때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를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비유해서 가르치고 있으나, 자신이 공부할 기회가 있어서 찾아보니 많은 유명한 주석들 및 설교자들은 이것을 예수님과 유대인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찰스 스펄전, NICNT주석, 호크마 주석, 메튜 헨리의 설명을 인용한다.
깨사모의 질문자가 인용한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찰스 스펄젼]
오늘의 본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아마 다음과 같이 해석하면 충분히 설명될 것입니다. “죄인들을 위한 무죄한 대속물인 내가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데 마른 나무인 죄인들인 너희가 진노의 하나님 손에 떨어질 때에야 그 고난이 오죽하겠느냐?” 하나님은 죄인의 자리에 선 예수님을 보셨을 때 그를 조금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중생치 못한, 그리스도 없는 죄인들을 보실 때에야 오죽하시겠습니까? 그들을 절대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NICNT 주석]
수분이 많은 푸른 나무가 불에 탄다는 것이 이상한 것처럼 죄 없는 완전한 인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을 당한다는 것은 비순리적이다. 그리고 하나님이나 사람에게 대하여 전혀 죄가 없는 그 분까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되었는데 하물며 불에 타기로 준비되어 있는 마른 나무처럼 임박한 심판을 받기에 무르익어 있는 그 죄 많은 나라의 운명이야 말할게 있겠는가 !
[호크마]
'푸른 나무'는 예수님을, '마른나무'는 유대인을 각각 상징하는 바, 본 구절은 무죄한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 수난을 당하는데 하물며 예수님을 죽이는 패역한 유대인들이 심판을 받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메튜헨리]
그리스도가 받으시는 고난에서 이러한 황폐함을 생각해 내는 것은 당연하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31절). 그리스도는 푸른 나무이시다. 그것도 아주 무성한 푸른 나무이시다. 그것도 아주 무성한 푸른 나무이다. 그에게 이런 일이 닥치는 것을 볼 때 그가 중재하시지 않았다면 전체 인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또한 그들이 번성하도록 모든 것이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른 나무로 남아 있는 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침 측 서울중앙교회의 ‘상담인1 형제’의 답변은 매우 실망스럽다. (2015년 10월 7일자) 그는 누가복음의 해당 본문의 내용이 “전체 문맥상”(?!) 유대인과 이방인에 관한 말씀이 맞다 라고 언급하면서 푸른 나무는 유대인이고 마른 나무는 이방인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별히 필자가 기대한 (그리고 아마 질문자도 기대했을 지 모르는) 왜 마른 나무가 “이방인”으로 해석되어야만 하는 지에 대한 내용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차라리 여기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나았을 뻔 했다. 그러나 그 ‘상담인1 형제’는 많은 탁월한 성경 해석자들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위 본문은 “유대인과 이방인에 관한 말씀”이라고 단정한다.
이제 필자는 깨사모의 질문자가 인용한 견해들 외에 세 명의 학자의 견해를 추가로 인용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 학자의 견해 역시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이 “유대인-이방인”이 아니라, “예수님-유대인들”이라고 여긴다.
존 놀랜드(John Nolland)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는 각각 예수의 무죄와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의 유죄로 해석되기도 하고, 예수께서 대표하는 생명의 충만함과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유대교에 생명이 없음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1
세대주의 학자인 대럴 벅(Darrell L. Bock) 역시 푸른 나무를 예수님으로 해석한다:
“예수는 다음과 같이 대조한다. 곧 예수는 푸른 나무 또는 축축하게 젖은 나무지만, 장차 심판받을 이스라엘은 마른 나무다. 예수는 더 작은 것에서 더 큰 것으로 이어지는 논점을 제시한다. 곧 만약 이 일들이 살아 있는 나무에 일어났다면, 죽은 나무에는 어떤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사건들이 일어나겠는가?” 2
피터 볼트(Peter G. Bolt)의 해석도 대동소이하다:
"예수는 살아 있는 나무와 죽은 나무를 비교하면서 이렇게 묻는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메시아가 이 마지막 세대에 있을 때 그렇게 사악하게 행동했다면, 그가 떠난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룬 지금은 더 나빠질 뿐이다. 남은 것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3
결론
대침의 신도들은 생명의말씀선교회가 성경을 잘 해석하고 올바르게 가르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믿음은 그들이 스스로 조사하고 알아본 뒤에 내린 결론이라기 보다는 대침이 전달하는 내용을 그대로 수용한 뒤 그것을 기반으로 내린 결론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대침은 기본적인 성경 문맥을 파악하고 해석하는 것에서 실패하고 있기에 성경을 “잘 해석”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인정한 교리적 사실, 곧 이스라엘이 회복하고 이방인이 환란을 당한다는 교리적 틀에 근거하여 성경을 문맥과 상관 없이 틀에 맞추어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교리적 사실에 맞춘 성경 읽기는 이들로 하여금 기초적인 성경 해석조차 실패하게끔 만들었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전한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비교해볼 때 이런 혼란스럽고 중구난방의 해석은 매우 실망스러운 부분이다.
그러므로 나는 대침의 목회자들이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들의 성경 해석의 오류를 인정하고 일반 교단들을 향해 나아오길 바란다. 이렇게 했을 때에 그들은 정상적인 교단들의 방대하고 깊은 신학적 유산들을 통해 보다 폭넓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대침이 성경을 있는 그대로 잘 가르친다고 여기는 분들은 필자의 글을 읽고 그들의 성경 해석이 꼭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알았으면 좋겠다. 생각보다 그들의 성경 해석은 생각보다 허술한 편이다.
- John Nolland,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35C Luke 18:35-24:53, trans. Kyeong Jin Kim, Solomon Press, 2005, 486. [본문으로]
- Darrell L. Bock, Luke 9:51-24:53, trans. Gi Cheol Sin, Revival & Reformation Publishing, 2017, 1297-1298. [본문으로]
- https://www.thegospelcoalition.org/commentary/luke/#section-1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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