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말씀선교회의 복음이 순수하지 않은 이유: 성경이 말하는 복음과 일치하는가? (대한예수교침례회, 구원파)

대한예수교침례회에 대하여

생명의말씀선교회의 복음이 순수하지 않은 이유: 성경이 말하는 복음과 일치하는가? (대한예수교침례회, 구원파)

바잇 카탄 2024. 7. 29. 20:09

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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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폐기론자들은 이러한 확신이 신앙의 본질의 전체라고 이해했다. 이들은 신앙의 다른 모든 활동을 무시하고, 신앙을 단순히 '너희 죄가 용서되었다'는 명제에 대한 지적 수용이라고 이해했다.[각주:1]

 

반율법주의의 잘못은 ... 믿음을 다름 아닌 "네 죄가 사함 받았느니라"라는 선언을 지성적으로 수용하는 것으로만 이해한 것이었다.[각주:2]

 

 

 

얼마 전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순수한 복음”이라는 것을 슬슬 다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개 대침에서 탈출한 사람들은 이것을 비판할 때 매우 오묘하고 애매하고 뭐가 다른 지 잘 모르겠는 것으로 그들의 복음이 이상하다고 지적하곤 한다. 혹은 행함에 대한 부분이나 회개에 대한 부분에서 보다 강화된 무언가를 가져와 그들의 복음을 공격하곤 한다. 물론 이 같은 것들은 대부분 복음 자체의 내용 보다는 구원과 관련된 것을 공격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다 보니 구원파에서 탈출한 사람들은 거의 대다수가 구원파가 전하는 복음 자체는 순수한 것이라고 여긴다.
 
이제 필자는 이번 글에서 그들이 전파하는 복음이 정말 성경이 말하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것인가에 대해 논할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그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순수”하거나 “정확”하지 않았다. 그들이 주장하는 복음은 종교개혁 이후 집중된 믿음-행함이라는 낡은 틀과 속죄를 강조하는 근본주의적 기독교의 산물일 뿐이다. 반면에 성경이 말하고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따르고 또 선포했던 복음의 핵심 내용은 그들이 전파하는 내용과 사뭇 다른 것으로 보인다.
 
이번 글은 대부분 성경 본문을 살펴보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을 것이다. 또한 대략적으로 간략하게 용어에 대한 문제, 이를테면 헬라어 “피스티스(πίστις)”나 “에우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이나 “쏘테리아(σωτηρία)”의 의미를 통해 그 당시의 복음이나 구원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한 번 살펴볼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타겟으로 삼은 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복음의 내용 중 “죄 용서” 혹은 “죄사함”에 집중하는 강조점이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들에 의해서도 동일하게 강조되는가 이다. 그리고 또한 여기서 더 나아가 그들이 말하는 복음의 내용 중 “세상의 모든 인간의 죄는 이미 사해졌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으면 된다.”가 성경이나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말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이 맞는가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세상죄에 대해서는 필자의 아래의 글을 읽어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코스모스(κόσμος) (대침, 생말선, 구원파) 요한복음 1:

비단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이하 대침) 뿐만 아니라 다른 구원파 교단들인 기쁜소식선교회 등에서와 마찬가지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구절은 그들

littlebiblicaltheology.tistory.com

 
 
즉 여기서 쟁점은 과연 복음의 내용 안에 죄사함의 내용이 들어 있는가가 아니다. 당연히 복음의 내용 안에는 죄사함의 교리가 들어 있다. 쟁점은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과연 “너 자신이 죄사함을 이미 받았다는 것까지 믿어야 진정한 구원이다”라고 전파했는가 이다. 그리고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구원을 얻는 인간들이 과연 이런 교리를 믿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구원을 얻은 것으로 선언되는지 이다. 그리고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전파한 복음에서 죄사함이 어떤 식으로 전도 대상들에게나 신도들에게 전파되고 있는가, 즉 과연 복음의 “핵심”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대침이 이런 복음의 “핵심” 혹은 “강조점”에서 성경이 정말로 말하고 있는 것을 순수하게 전달하고 있지 못함을 보일 것이다. 이렇게 복음의 순수한 강조점이 아닌 복음의 내용 중 일부분만을 극대화하여 강조한 것은 그들의 교단이 교세 확장 만을 바라보게 만들었고 윤리적인 실패로 나아가게끔 만들었다.
 
그들이 복음의 있는 그대로의 내용을 전달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특별한 무언가를 강조하기로 한 것은 그들이 “일반적인” 그리고 “평범한” 상태와 분리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복음에서의 “차별화 전략”은 자신들이 최고라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교리적 극대화는 사람들이 “나는 다르다. 나는 제대로 알고 있다.”라고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즉 이것이 배타성의 핵심을 구성하는 교리적 바탕이자 요인이 되었다.
 
“내가 다니는 교회는 복음을 순수하게 전한다.”라는 것이 그곳에 있는 분들이 흔히 주장하는 것이다. 자신이 여러 교회나 교단을 돌아봤는데 대침처럼 순수하게 복음을 전하는 곳은 보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은 성경에서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그런 내용의 복음을 강조하여 전파하였는가를 직접 찾아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혹은 찾아보더라도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기 보다 대침에서 주입한 사상에 맞춰 읽은 듯하다.)
 
만약 그분들이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복음이 성경을 기준으로 했을 때 엄밀한 의미에서 “순수”한 것은 아니란 점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필자의 생각에 대부분의 대침 분들은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곳에 남아 있을 것이다. 혹은 억지로라도 성경의 어떤 내용을 극대화하여 자신들의 교회를 어색하게나마 옹호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들이 원하는 것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대침이 말하는 것을 성경에서 발견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침이 말하는 죄사함 중심의 복음 내용은 아래 링크의 홈페이지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https://jbch.org/kor/seminar/waytogod/view.php?sCode=10r11r13r11r12&psId=995

 

생명의말씀선교회

생명의말씀선교회는 모든 이에게 하나님 은혜의 복음을 전합니다. 대한예수교침례회의 모든 교회들이 복음 전하는 일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www.jbch.org

 
https://jbch.org/kor/seminar/waytogod/view.php?sCode=10r11r13r11r12&psId=993

 

생명의말씀선교회

생명의말씀선교회는 모든 이에게 하나님 은혜의 복음을 전합니다. 대한예수교침례회의 모든 교회들이 복음 전하는 일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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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무엇이 믿음의 대상으로 제시되는가?


성경에서 무엇을 믿음의 대상으로 제시하는가를 살펴보면 성경이 말하는 “순수한 복음”이라는 것이 무슨 내용인지 정말 매우 쉽게 알 수 있다. 필자는 이 과정에서 굳이 학자들의 견해를 많이 인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들은 성경의 내용들을 담백하게 있는 그대로 읽어내기만 해도 금방 파악할 수 있다.
 
성경이 제시하는 복음은 “예수를 믿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예수가 “그 분”, 곧 성경에서 예언하고 기다려왔던 바로 그 메시아,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런 인물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그는 당연히 예수님의 가르침 역시 믿을 것이다.
 
위 복음 내용을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정말 너무나도 많다)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말하며 강조한다. 반면에 “모든 사람의 죄는 이미 사해졌다. 너는 그것까지 믿어야 정말로 구원 받은 것이다.”라고 가르치거나 선포하거나 강조하는 본문은 사실상 찾아볼 수 없었다. 혹시 그런 것이 있다면 필자에게 알려주기 바란다. 물론 대부분의 대침 분들은 어떤 특정 본문의 특정 단어를 극대화하여 해당 본문 만으로는 알 수 없는 내용을 그들의 틀에 맞춰 추가하여 제시할 가능성이 높겠지만 말이다.
 
이제 필자와 성경 본문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면서, 성경이 말하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즉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참고로 이 본문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모르거나 자신의 죄사함 여부를 모른 상태로 구원을 약속 받은 사례들도 등장한다.
 
사도행전 16장 31절에서는 바울이 간수를 전도하는 과정이 나온다. 사도행전의 기록자로 여겨지는 누가는 이것을 매우 간략하게 요약하여 제시하는데(아마 실제로 바울은 더 많은 말들을 했을 것이다), 이 본문을 통해서 누가가 제시하고자 했던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수 있다.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행 16:30-31)

 
여기서 누가는 바울이 간수에게 제시할 복음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요약하여 그 핵심을 기록한다: 그것은 바로 “주 예수를 믿는 것”이다. 물론 필자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대침 사람들이 나타나 “저 내용이 곧 죄사함을 믿으라는 것이다”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이 놀랍고도 중요한 장면에 그러한 내용을 강조하여 넣지 않았을까? 누가는 “예수로 인해 너의 죄가 이미 사해짐을 믿어라”라고 요약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지나치게 길지도 않고 적당한 요약이다. 그러나 누가는 이와 같은 내용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그는 그보다는 “예수” 자체를 믿음의 대상이자 복음의 “내용”으로 제시하길 선택한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6장 30절에서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하면서, 예수”를 믿게끔 자신들을 만들라고 요구한다. 여기서도 믿어야 하는 대상이 “예수님” 그 자체로 제시된다.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요 6:30)

 
예수께서는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하늘에서부터 내려 주시는 “참 떡”을 받으라고 하시면서, 그 떡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고 설명하신다. 그래서 예수님 스스로의 설명에 의하면 믿어야 할 대상은 ”예수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35)

 
예수님의 설명에 의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가 영생을 얻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6:40)

 
그리고 이 본문 만으로는 “대속”이나 “이미 죄사함 받은 것까지 믿어야 한다”는 명제를 이끌어낼 수 없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8장 31절에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이미 죄사함 받은 것까지 믿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다만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라고 하실 뿐이다. 여기서도 믿음의 대상은 예수님으로 제시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요 8:31)

 
 
 
사도행전에서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선포한 복음의 내용은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1세기 유대교에 대한 조금의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메시아 사상에서 복잡한 대속의 어린양이나 “이미 얻은 죄사함”의 교리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예수는 메시아다”라는 복음의 내용을 당시의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은 죄사함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예수는 종말에 오실 바로 그 분이다”라고 이해했을 것이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행 18:5)

 
여기서도 누가는 바울의 설교의 가장 큰 핵심, 곧 “예수라는 인물에 대한 내용”만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같은 내용을 들은 회당장 그리스보는 “주를 믿은 것”으로 묘사된다.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행 18:8)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구원과 믿음을 논하면서 복음의 내용을 정말 분명하고도 선명하게 제시한다. 그것은 예수를 로 시인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린 것을 믿는 것이다. 여기서도 바울은 “죄사함”을 강조할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로마 교회에 보내는 아주 중요한 서신에서 복음의 핵심을 “예수”라는 인물 자체에 집중하는 것으로 제시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롬 10:9)

 
간혹 어떤 대침 분들은 여기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 안에 죄사함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대침의 복음이 순수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데에 거의 아무런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여기서 복음의 핵심으로 “죄사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사람들이 믿음의 대상으로 “예수”에 집중하기를 원했다. 만약 정말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복음을 전파한다면 복음의 핵심으로 “예수”를 제시하고, 사람들이 “예수”에 집중하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형식을 따른다면, 굳이 죄사함의 용어를 사용하여 전달할 필요가 없다.
 
 
 
이제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경건의 비밀”로 예수를 전면에 내세운다. 사도 바울은 예수 자체에 주목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예수가 “세상에서 믿은바 되셨다”라고 그는 말한다. 즉 세상이 믿은 대상, 복음의 내용은 “예수”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딤전 3:16)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다.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요 12:44)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1)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나”를 믿는 사람을 실족시키는 것에 대해 말한다. 여기서도 믿음의 대상은 예수님이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마 18:6)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막 9:42)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기적을 행하신 것을 제자들이 보고, “그를” 믿었다. 여기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지식이 없었으므로, 분명히 “예수” 자체를 믿은 것이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 2:11)

 
 
 
마찬가지로 영생을 얻는 것,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관련이 있다. 사도 요한이 묘사하는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만남에서도 “예수”를 믿는 것이 강조된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15-18)

 
 
 
사마리아 여인의 말을 들은 자들이 “예수를” 믿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을 통해 믿기도 했다. 이들이 믿은 내용이 구체적인 “내 죄가 이미 사해짐”이라고 여길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때에는 제자들까지도 예수께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에 대해 몰랐기 때문이다. 또한 유대인들이나 사마리아인들에게 메시아의 죄를 대신하는 희생이라는 개념은 매우 낯선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기록된 그대로, 그들은 “예수를” 믿었다.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요 4:39-42)

 
대침 분들 중 몇몇은 여기서 “구주”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죄에 대한 구원, 곧 죄 용서의 가르침을 이들이 믿었을 것”이라고 무리한 추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원자”인 “쏘테르(σωτὴρ)”는 그 당시에 “죄에 대한 구원”이라는 의미의 신학적인 전문 용어로 사용되기 보다 “해방자”라는 보다 보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그리스 로마(Greco-Roman) 배경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당시 로마 황제들은 자신들을 “쏘테르”라고 흔히 지칭했으며, 따라서 이스라엘의 왕인 메시아는 “쏘테르”라고 지칭될 수 있었다.
 
또한 여기서 만약 죄에 대한 구속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다고 해도, 예수께서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다는 개념은 이 시점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에야 제자들도 뒤늦게 인지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의 죄가 이미 사해짐”이라는 가르침을 사마리아인들이 알고 믿었다고 여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요한복음 7장 29절에서는 무리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듯한 뉘앙스의 말을 한다. 이것은 그들이 믿은 것이 “예수가 그리스도이다”라는 내용과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 유대인들이 논쟁하는 부분도 예수가 과연 그리스도인가 아닌가의 여부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요 7:27)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찌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요 7:31)

 
즉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바로 그 분,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쫓겨난 소경에게 다가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요 9:35)

 
여기서도 예수께서 집중하는 것은 소경이 과연 예수님을 믿느냐의 여부이다.
 
 
 
간혹 어떤 사람은 이 때에는 예수께서 죽기 이전이기 때문에 이런 것이라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의 구원을 얻을 복음은 죄사함의 내용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누가 만든지도 모르는 이상한 공식에 얽매이지 않으시는 듯하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서 마르다에게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곧 영생은 예수님을 믿는 것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내 죄가 이미 사해졌다”라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요 11:25-27)

 
그리고 마르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정확하게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는 것은 마르다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예수님을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위의 유대인들이 이해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다음과 같은 고백을 들으시고 베드로가 복되다고 선언하신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6-17)

 
이것은 예수께서도 복음의 핵심을 자신을 그리스도로 인식하고 고백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여기셨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성령이 와서 죄에 대하여 심판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16:9)

 
대침 분들은 이 본문을 흔히 모든 죄는 이미 다 사해졌고 다만 “믿지 않는 죄”만 남았다고 주장할 때에 사용한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믿지 않는 죄”란 자신들이 제시하는 “이미 죄사함을 얻었다. 믿기만 하면 된다.”의 복음을 믿지 않는 죄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경 본문에 무언가를 추가하여 읽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예수를 믿지 않는 죄를 말한다. 여기서도 중요한 쟁점은 예수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자신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뒤 제자들의 말을 듣고 믿음을 가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에도, 즉 우리와 같은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에도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 대해 기도한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요 17:20)

 
또한 세상의 사람들이 믿어야 할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예수께서는 분명한 표현으로 말씀해 주신다. 예수님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사실, 곧 예수님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 즉 예수님이 그리스도,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 17:21)

 
사도 바울은 요한의 세례만을 받은 사람들에게 오시는 그 분이 예수라는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것을 들은 사람들은 즉시 세례를 받고 성령을 체험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행 19:4–6)

 
 
 
대침에서 인용하기 좋아하는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도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내 죄가 이미 사해졌다는 사실”을 믿어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라고 말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 2:16)

 
여기서 율법-행위와 예수-믿음이 대조되고 있다. 이것은 기존의 유대교적 구원관과 기독교의 구원관의 결정적 차이가 “예수”에 대한 가르침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도 우리가 받은 은혜가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즉 여기서도 “내 죄가 용서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 예수가 강조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 1:29)

 
 
 
베드로는 믿음의 대상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으로 묘사하고, 그것이 신자들을 구원으로 이끌 것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한다. 즉 “내 죄를 포함하여 세상 죄는 이미 사해졌다. 이것을 믿으면 구원이다.”가 아닌, “예수를 믿으면 그 믿음이 결국에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것이다.”이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 1:8–9)

 
여기서 “코미조메노이(κομιζόμενοι)”가 “받음이라”로 번역된 것은 많은 대침 사람들이 이 본문을 오해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마치 구원을 이미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예수를 사랑하고 믿고 기뻐한다고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헬라어 본문에서는 어떤 이유나 원인의 접속사가 사용되어 있지 않으며, “받음이라”로 번역된 “코미조메노이”는 현재 분사의 시제를 갖고 있다. 참고로 8-9절의 동사나 분사는 전부 현재 시제로 기록되어 있으며, 베드로는 신자들의 현재 상태와 그들의 현재의 반응에 집중하고 있다. (1:5도 참고하라.) 그러므로 베드로는 여기서 신자들이 현재 “예수”를 믿고 사랑하고, 그 믿음의 결과인 구원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여기서도 신자들은 이미 죄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고 그것을 기뻐한다기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결과로 얻을 구원을 기뻐한다.
 
 
 
사도 요한은 요한1서에서 하나님의 증거에 대해 말한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의 증거가 매우 크다며 그것을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찐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요일 5:9)

 
그러므로 여기서도 사도 요한은 사도 바울 및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해 증거하신 것, 그것에 집중하고 있다. 사도들에게 복음의 핵심은 바로 예수가 누구이냐, 곧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셨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이런 증거, 곧 예수에 대한 증거를 믿는 자들은 현재 영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그의 서신을 읽는 당대의 신자들의 믿음을 소망을 향해 강화시킨다. 그러면서 그는 현재형 분사를 통해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것이 지금 지속되고 있는 현재라는 것을 암시한다. 여기서도 신자들이 믿은 것은 “내 죄가 이미 다 사해졌다”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현재 믿고 있는 자들은 영생을 소유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일 5:13)

 
 
 
이런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것은 사도 요한이 쓴 요한복음에서도 여럿 등장하는 개념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의 서론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는 자들의 특징이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묘사한다. (개역한글에서 “영접하는 자”로 번역됨.)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그러므로 요한1서의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것은 곧 예수를 영접하고 맞아들이는 것과 관련이 있다. 많은 신학자들은 여기서 예수의 이름을 믿는 것이란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즉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대리자이자 그의 참 형상으로 왔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각주:3] 그러므로 세상은 예수님을 메시아, 그리고 신으로 영접하고 믿어야 한다.
 
 
 
요한복음 2장 23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는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요 2:23)

 
이 본문에서도 동일한 강조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도행전에서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주셨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이 성령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오시는 것으로 묘사한다. 즉 여기서도 성령은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오신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행 11:17)

 
 
 
디모데전서에서도 영생을 얻는 자들이 “주를” 믿어 그렇게 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딤전 1:16)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어떤 대상의 상태나 조건과 무관한 칭의, 곧 비상응적인 칭의에 대해 말하면서 믿음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설정한다. 이것은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발언을 떠올리도록 만든다. 사도들의 믿음은 “내 죄가 이미 사해짐”을 향한다기 보다 어떤 행위자인 예수님이나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 핵심이다.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5)

 
여기서도 이 본문을 통해 “내 죄는 이미 다 사해졌다. 이것을 믿으면 구원이다.”라는 교리를 이끌어낼 수 없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죄인이더라도 우리 자신을 “의롭다 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설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믿을 것이다.
 
 
 
이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의 마무리 부분에서 자신이 복음서를 쓴 목적을 아주 분명하고 명쾌하게 선언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여기서 “우리가 이미 생명을 얻었음”을 믿어야만 참된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에 주목하라. 혹은 “이미 내 죄가 사해졌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진정한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지도 않는 것에 주목하라. 사도 요한은 믿음의 대상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에 있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이것을 믿어서 그 결과로 따라 나오는 것이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믿음의 대상은 분명하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며, 죄사함에 대한 부분은 핵심으로 강조되지 않는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하면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린 그분의 이름을 믿으므로 나았다”라고 발언한다. 즉 베드로가 고쳐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통해 나은 것이며, 그 스스로 자기 죄가 이미 사해졌다는 것을 믿어서 나은 것이 아니다.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행 3:15–16)

 
여기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린 그분”이라는 용어를 보고 베드로가 말한 것이 “죄사함”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는 죽음과 부활을 “죄사함”에 대한 것으로 제시하기 보다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를 전파하는 근거로 제시하였다. 베드로 역시 여기서 예수의 이름이 권능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그분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더욱이 베드로는 “이미 죄가 없어진 사실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 함을 “받으라”라고 말한다. (헬라어로는 수동태 부정사로 되어 있어서, 죄 씻게 되기 위하여”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참고로 헬라어에서 부정사의 부정과거 시제는 과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지지 않은 시기를 뜻한다.[각주:4]) 즉 죄사함은 하나님께로 돌이켜 예수님을 믿는 것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인 셈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행 3:19)

 
즉, 적어도 사도 베드로는 이미 죄가 다 씻어졌으니 그것을 믿으라는 복음의 내용을 믿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는 죄를 씻음 받기 위해서는(부정사) 하나님께로 돌이키라고 권면한다. 이것은 죄가 그 이전에 이미 사해졌다거나, 세상 죄 안에 내 죄가 포함되기에 “믿지 않는 죄” 외의 모든 죄는 사라졌다거나 하는 등의 내용들을 베드로가 지지한다고 생각하기 어렵게 만든다. 베드로는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그 결과로 죄 씻음을 받는다고 여긴 듯하다. 이것은 위의 요한복음 20:31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믿음의 결과로 따라오는 무언가를 묘사한다.
 
사도행전 13장에서도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이 예수를 믿는 것과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곧 “내 죄가 이미 사해졌다를 믿는다”라는 가르침이 아닌, “예수를 믿으면 (그 결과) 죄사함을 얻는다”라는 가르침에 더욱 가깝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행 13:38–39)

 
“예수를 통해 얻는 죄사함”에서 “내 죄가 이미 사해진 것을 믿으면 구원”이라는 교리를 이끌어내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다. 죄사함이 예수님을 통해 온다는 것이 이미 모든 사람의 죄가 예수님에 의해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필연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나 사도 바울 모두 “예수께서 이미 죄 값을 치렀으니 이것을 믿으면 구원이다.”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회개하고 돌이켜 믿어라. 예수가 오실 그분이라는 것을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그분을 통해 죄사함을 얻을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즉 선후관계가 다른 것이다. 이미 얻은 죄사함에 대한 믿음이 아닌,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얻는 죄사함이다. 죄사함은 믿음을 통해 얻는 결과에 해당한다.
 
 
 
빌립 역시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해 “전도”한다. 그리고 이 내용을 믿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는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행 8:12)

 
만약 복음의 핵심이 “예수께서 이미 죄 값을 다 치루셨고 이것을 믿으면 구원이다”였다면,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나 빌립과 같은 전도자들이 전하는 복음은 이런 내용으로 묘사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명백하다. 오히려 사도행전에서 묘사된 복음은 그 핵심이 “예수님”이다.
 
 
 
또한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세상 사람들의 죄가 이미 다 사해졌다는 내용을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활용한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행 17:30–31)

 
즉 바울의 사상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가 메시아,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것을 본 사람들은 회개하여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사람들에게 “죄가 이미 사해졌다”라는 메시지를 핵심적인 내용으로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아볼로 역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메시지를 자신의 전도 사역에서 핵심 가르침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의 그런 메시지는 믿는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다. 즉 누가가 바라본 아볼로가 전한 복음의 핵심 내용은 “예수는 그리스도이다!”인 셈이다.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행 18:28)

 
 
 
사도 베드로는 구약성경의 모퉁이 돌에 대한 본문을 가져오면서 예수를 믿을 것을 전파한다.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벧전 2:6)

 
 
 
예수를 믿는 것은 그분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내용인 죽었다가 다시 사신 것 역시 믿는 것이다. 즉 여기서도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체이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살전 4:14)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롬 10:9)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3)

 

후광이 비취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복음에서의 죄사함의 위치


그렇다면 복음을 말할 때에 죄사함에 대해서는 아예 말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생각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복음의 내용 중에는 죄사함이 당연히 포함된다. 그러나 필자는 그것이 복음의 중심이자 핵심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죄사함은 예수님을 믿는 것의 바탕에서 설명되어야 하고, 예수님을 믿은 것의 결과, 곧 믿어서 얻는 대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은 죄사함을 복음 안에서 그렇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0장 43절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죄사함을 “받는”다고 증언한다. 즉 믿는 자들은 자신들의 죄가 이미 예수님에 의해 전부 다 처리되었음을 믿었다기 보다 그것 이전에 이미 예수님을 믿은 것으로 묘사된다. 즉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통해(전치사 διὰ) 죄사함을 받는 것(λαβεῖν)이다. 여기서도 죄사함을 받는 것, 곧 “라베인(λαβεῖν)”부정과거 부정사로 기록되어 있으며, 불특정의 시기에 이 죄사함 받는 것이 일어남을 암시한다. (위에서 지적한대로, 헬라어 부정사에서 시제는 시상만을 전달한다.)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행 10:43)

 
그러므로 사도행전 3장에서 한 베드로의 설교의 가르침이 사도행전 10장에서도 일관되게 이어지고 있다. 곧 베드로가 전파하는 복음의 내용은 예수를 믿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을 통해 죄사함을 받는다.
 
베드로의 이 가르침은 대침의 복음과는 선후관계가 다르다. 대침은 세상 죄 안에 나의 죄가 포함되고, 예수께서 이미 이것을 다 처리하셨으며, 우리는 그 사실을 믿으면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베드로의 가르침은 만약 당신이 예수를 믿는다면, 당신은 죄사함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당신이 죄사함을 얻을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죄사함을 얻는 것이 아니다. 혹은 이미 내 죄가 다 사해졌다는 사실을 믿어야 죄사함을 얻는 것이 아니다. 혹은 죄사함을 믿어야 이미 사해진 죄사함이 나에게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은 그 결과 우리는 죄사함을 받는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다.
 
사도행전 26장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예수님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행 26:18)

 
이 본문에서 “죄사함과 나를 믿어”라고 모호하게 번역한 것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 본문을 통해 “나의 죄가 이미 사해졌다는 사실”을 믿어야 진정한 구원이라고 잘못 추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한 번역체 때문에 생겨난 오해이다. 왜냐하면 실제 헬라어 본문에서 “믿다”의 “피스테이(πίστει)”는 “죄사함”인 “아페신 하마르티온(ἄφεσιν ἁμαρτιῶν)”에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해당 본문의 헬라어 원어는 다음과 같다:

“ἀνοῖξαι ὀφθαλμοὺς αὐτῶν, τοῦ ἐπιστρέψαι ἀπὸ σκότους εἰς φῶς καὶ τῆς ἐξουσίας τοῦ Σατανᾶ ἐπὶ τὸν θεόν, τοῦ λαβεῖν αὐτοὺς ἄφεσιν ἁμαρτιῶν καὶ κλῆρον ἐν τοῖς ἡγιασμένοις πίστει τῇ εἰς ἐμέ.”

 
“아페신 하마르티온”을 받는 것은 부정과거 부정사인 “라베인(λαβεῖν)”이다. “카이(καὶ)”와 함께 이 부정사는 “클레론(κλῆρον)” 역시 대격으로 받는다. 그리고 이 “라베인”과 같은 부정과거 부정사가 18절에는 3개가 등장하는데, “열게 하다”의 “아노익사이(ἀνοῖξαι)”, “돌아가다”의 “에피스트렙사이(ἐπιστρέψαι)”, 그리고 마지막으로 “받다”의 “라베인(λαβεῖν)”이다. 따라서 “라베인”을 다른 부정사들과 같이 의미를 살려서 번역을 하면,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좋다:

“그들이 죄 용서와 기업을 받게 하기 위해”

 
즉 “죄사함과 나를 믿어”는 사실 “죄사함과 기업을 얻게 하리라”라는 기본적인 의미에다가 “엔 토이스 헤기아스메노이스 피스테 테 에이스 에메(ἐν τοῖς ἡγιασμένοις πίστει τῇ εἰς ἐμέ.)”의 전치사 “엔(ἐν)”절의 내용을 그것이 수식하고 있는 “클레론(기업)”에 부연설명으로 추가하다 보니 이상한 번역체가 된 것이다.
 
따라서 이 본문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죄사함과 (나를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자들 안에서) 기업을 얻게 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대침에서 좋아하는 KJV에서도 이것을 “they may receive forgiveness of sins”이라고 제대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죄사함은 믿음의 대상으로 제시 된다기보다 믿음의 결과로 "얻는 것"으로 제시된다.
 
특별히 여기서도 부정과거 부정사 “라베인”이 사용된 것은 위의 행 10:43을 떠올리게 만든다. 즉 여기서도 죄사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결과 우리가 받는 것이다. 내 죄가 이미 사해졌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죄 사함을 얻는 것이다.
 
눅 3:3, 24:47 그리고 마 26:28; 막 1:4은 전치사 “에이스(εἰς)”, 곧 “~을 향해 안으로 가는” 혹은 “위하여(for)”의 의미를 지닌 전치사로 죄사함을 묘사한다. (여기서 “for”의 의미로 이것을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성경에서 죄사함을 부정사 “라베인”과 관련해 “얻게 하기 위해”로 전달하는 의미와 상당히 일치하는 대목이다.)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εἰς)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눅 3:3)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εἰς)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 24:47)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εἰς)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 26:28)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εἰς)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막 1:4)

 
즉 죄사함은 이미 얻은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믿을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분의 가르침이며, 이것을 믿는 자는 죄사함을 얻을 것이다. 회개, 곧 하나님께로 돌이킴은 죄사함을 얻도록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내 죄가 예수님에 의해 이미 사해졌으며 이것을 믿으면 구원이다”라는 가르침을 찾아낼 수는 없다. 오히려 회개의 결과, 죄사함이 주어진다.
 
 
 
사도 베드로도 죄사함에 대하여 비슷한 방식으로 설명한다. 누가가 옮긴 그의 설교에서, 죄사함은 회개하여 세례를 받고 얻는 것으로 등장한다. 즉 베드로는 “너희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먼저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고 그 이름으로 입교 세례를 하면서 죄사함은 얻는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8)

 
재밌는 것은 여기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는 오역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본래 헬라어로 “밥티스떼토 헤카스토스 휘몬 에피 토 오노마티 이에수 크리스투 에이스 아페신 톤 하마르톤 휘몬(βαπτισθήτω ἕκαστος ὑμῶν ἐπὶ τῷ ὀνόματι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εἰς ἄφεσιν τῶν ἁμαρτιῶν ὑμῶν)”으로 되어 있다. 눈썰미가 좋은 분은 여기서 또다시 전치사 “에이스(εἰς)”가 “너희 죄사함”, 곧 “아페신 톤 하마르톤 휘몬(ἄφεσιν τῶν ἁμαρτιῶν ὑμῶν)”절을 이끌고 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죄사함을 위한 세례를 받으라"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KJV에서도 이것을 “for the remission of sins”이라고 훌륭하게 번역하였다.
 
그러므로 회개, 세례 등의 예수를 향한 믿음의 입교는 죄사함을 “얻도록 하는 것”이지, 우리의 죄가 이미 사해졌음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골로새서 1장 14절 역시 죄사함을 말하면서 그 아들 안에서 속량(ἀπολύτρωσιν), 곧 죄사함을 얻는다(현재형)라고 묘사한다. 그리고 이 본문을 통해서 내 죄가 이미 사해진 것을 믿어야 참된 구원이라는 교리는 끄집어낼 수 없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골 1:14)

 
그리고 이 “죄사함을 얻는 것”은 또다시 현재형의 동사를 통해 에베소서 1장 7절에서 표현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엡 1:7)

 
“받았으니”와 같이 과거형으로 번역된 “에코멘(ἔχομεν)”은 1인칭 복수의 현재형 동사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속량을 받고(혹은 받고 있고), 죄사함을 받는(혹은 받고 있는) 셈이다.[각주:5] “내 죄는 이미 도말되었다. 이것을 믿으면 구원이다.”라는 사상은 이 현재형 동사를 활용한 설명과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죄사함에 대한 지식 없이 구원이 선언된 사례들


더욱이 결정적으로, “내 죄가 사해졌다는 사실”을 믿었다고 보기 힘듦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의해 구원을 약속 받는 사람들이 성경에 등장한다.
 
특별히 마태복음 9장 18-22절의 열두해를 혈루병으로 고생한 여인에 대한 본문은 이것을 잘 보여주는 좋은 예시다. 이 여인은 자신의 죄가 사해질 것이라든가,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내 죄가 대속될 것이라든가 하는 내용을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거의 확실하다.) 그녀는 다만 어떤 방식으로인지는 몰라도 자신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에서의 구원이든, 아니면 자신의 운명에서의 구원이든 구원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 여인의 믿음이 그녀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다. 학자들은 여기서의 “구원”이 단순히 질환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믿음이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시며, 실제로 예수께서는 그런 구원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혈루병 여인이 자신의 죄의 사함 여부에 대해 먼저 믿고 그것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시에는 제자들도 이에 대해 잘 몰랐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옆에 달린 십자가 상의 강도는 자신의 죄가 이미 사해졌다는 것을 믿어서 그것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다. 그런 내용은 누가복음 23장 39-43절 본문에서 찾아볼 수 없다. 십자가 강도가 믿은 것은 다만 예수가 행한 것은 옳은 것이며,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 강도는 예수에게 “나의 죄를 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을 믿겠습니다.”가 아니라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고백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전통적인 유대교의 메시아관을 잘 보여준다. 메시아는 종말에 하나님의 왕국의 도래와 함께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러한 시각을 즉각 교정해준다. 십자가 강도는 미래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예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이 순간에 이미 임해 있다. 물론 십자가 강도는 이에 대한 심오한 지식에 대해 알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예수님이 지금 죽어가는 것이 대속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당시 제자들조차 이것을 몰랐으니 말이다.) 다만 그가 믿은 것은 예수는 메시아, 그리스도,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는, 곧 예수에 대한 사실이다.

 

 

또한 누가복음 17 11-19절에서는 예수님께 치유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예수께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신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병을 고침 받은 듯이 보인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예수께 다시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을 경배함으로써 예수에 대한 올바른 반응을 보여준 것은 단 한 명의 사마리아인 뿐이었다. 그리고 이 사마리아인에게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사실이 선언된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 17:19)

 

이 사마리아인이 자신의 죄가 사해졌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믿었기 때문에 구원이 선언되었다고 여기기는 힘들 것이다. 그는 다만 자신의 물리적인 질병이 나은 것을 확인하고 예수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신했을 뿐이다. 심지어 여기서 이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정확하게 어떤 존재로 인식했는지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아마 그를 구원으로 이끈 믿음이란 예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식하고 그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 1842절에도 이것과 비슷한 사례가 등장한다. 거기서 어떤 소경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곧 오실 메시아, 영원한 다윗 왕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그 믿음을 고백하면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청한다. 예수께서는 이 사람의 이러한 믿음에 응답하여 그에게 구원을 선포하면서 그의 눈을 고쳐준다.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눅 18:42)

 

이 사람이 자신의 죄가 이미 사해졌다든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자신의 죄가 대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믿은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 곧 그분이 오실 메시아라는 사실이었다. 여기서도 눈이 보이지 않는 소경은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대럴 벅(Darrell L. Bock)은 누가복음 17장 19절과 같은 이러한 치유 사역과 구원 선언이 연결된 본문들을 주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반응하는 것이다. 또한 믿음은 하나님과 예수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바로 그과 같은 믿음을 보여준다(롬 10:9-13). 이 절에서 또다시 누가는 믿음과 궁극적인 구원의 연관성에 대해 언급한다."[각주:6]

 


혹자는 예수님께서 아직 죽기 전에는 그런 사실을 믿지 않아도 구원이 가능했다며 시기를 나눠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설교를 할 때 “내 죄가 이미 사해진 것을 믿음”에 해당하는 복음을 전하지 않았는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도들은 다만 “예수를 믿음”을 전하고, 그것의 결과로 “죄사함을 얻으라”고 권면했을 뿐이다. 내 죄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이미 다 사해졌고, 나에게 남은 것은 믿지 않은 죄 뿐이며, 따라서 내 죄가 이미 2000년 전에 사해졌다는 사실을 믿으면 구원이라는 내용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그래서 대침은 이것을 주장하기 위해 “세상죄”를 현대적 개념의 “세상”의 용어로 치환한 다음 확대 해석하고, “영원한 속죄”의 “영원”의 종말적인 헬라어의 뉘앙스를 무시하며, “예수를 믿으라”는 복음의 핵심적인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메시지들을 “내 죄가 사해진 것을 믿으라”라는 내용으로 일일이 바꿔 읽도록 만든다.
 
반면에 성경은 예수를 믿으면 그 결과 죄사함을 얻을 것이라 선포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순수한” 복음일 것이다.
 
 
 

피스티스(πίστις), 에우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 쏘테리아(σωτηρία)


성경이 말하는 믿음, 복음, 구원이 무엇인가를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복음의 내용은 무엇인지, 그리고 구원은 어떻게 얻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글이 너무 길어지는 관계로, 여기서는 『TDNT』를 중심으로 이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훑어보도록 하겠다.
 
신약시대의 “피스티스(믿음)”의 사용은 주로 기독교의 교리를 수용하는 대목에서 사용된다. 특히 이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하시는 구원 사역과 관련된 것을 믿는다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특별히 바울의 용법을 살펴보면, 예수를 주님(Lord)으로 인정하는 것이 기독교 교리에서 믿어야 할 핵심 사안에 해당한다. 이것은 그분의 부활의 기적을 통해 그분을 “주님”, 곧 구원자로서 “퀴리오스(κύριος)”로 인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롬 10:9).[각주:7]
 
더욱이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와 개인적인 관계를 갖는 것, 곧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것을 구원을 위한 방법으로 제시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로 강조한다. “피스테우에인 에이스 크리스톤 이에순(πιστεύειν εἰς Χριστὸν Ἰησοῦν)”, 즉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것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안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믿을 뿐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을 믿는 것 역시 포함한다.[각주:8]
 
그래서 기독교 교사들 뿐만 아니라 학자들은 끊임 없이 그리스도 예수가 죽고 부활한 사건이 증거하는 것, 곧 성경이 예언한 오실 그분, 주님, 메시아, 그리스도가 바로 이 예수님이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신자는 자기 자신을 향한 삶에서 돌이켜 떠나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며, 이것은 그가 누구인지, 그가 하신 일이 무엇인지, 또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포괄적으로 믿는 것을 뜻한다.[각주:9] 이 때문에 믿음은 한 사람의 삶을 전반적으로 바꿔놓는 것이며, 따라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예수 그리스도)과 지속적인 “자기 관련”(constant self-relating)을 맺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것은 바울이 “에르곤 피스테오스(ἔργον πίστεως)”, 즉 “믿음의 행위(살전 1:3)”, 혹은 “피스티스 디 아가페스 에네르구메네(πίστις διʼ ἀγάπης ἐνεργουμένη)”, 곧 “사랑으로써 일하는 믿음(갈 5:6)” 등의 용어로 믿음을 행함과 밀접하게 연결 짓는 것을 통해 잘 드러난다.[각주:10]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예수를 메시아,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곧 나의 “주님”으로 믿고 그것으로 인해 모든 것이 뒤바뀌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강력한 과정은 예수를 믿고 “퀴리오스”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닮아가는 삶을 살도록 만든다. 예수를 믿는 자들은 곧 예수에게 감화된 자들, 예수를 사랑하게 된 자들이다.
 
이제 성경을 보면 예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는 것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학자들이 보기에 “에우앙겔리온” 곧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을 선포하는 분일 뿐 아니라 그분 자체가 복음의 주요 내용이 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각주:11] 그래서 복음의 핵심은 신이 이 땅에 스스로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즉 예수님의 인격 자체가 복음의 내용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이다.[각주:12]
 
게르하르트 프리드리히(Gerhard Friedrich)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멋지게 선언한다:

“복음의 내용을 우리가 단 한 단어로 요약해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일 것이다.”[각주:13]

 
그리고 이것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누가, 사도 바울, 사도 요한, 사도 베드로 등 성경의 저자들도 동의할 만한 선언이다.
 
그렇다면 “쏘테리아”, 곧 “구원”에서는 어떨까? 우리는 여기서도 예수 자체에게 집중해야 하는가? 아니면 혹 구원에 있어서는 죄사함을 받았다는 사실까지도 반드시 인식해야 하는 것일까?

 

간혹 예수님의 치유 사역과 관련한 구원의 선언 본문들이 그 사람의 믿음으로 인한 구원이 아닌 치유된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이런 본문들을 구원 선언과 연결지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학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베르너 푀르스터(Werner Foerster)는 성경에서 “구원하다”가 예수님의 치유 사역과 함께 등장하는 본문들에 주목하면서, 예수님의 치유에서 “쏘조(σῴζω)”는 결코 몸의 한 부분만을 가리키지 않으며 언제나 인간의 전체를 가리킨다고 지적한다. 또한 이것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의 문맥에서 특히 의미가 있다.[각주:14]
 
따라서 예수님이 치유를 행하는 대목에서 그들의 병만이 치료되었다고 우리가 여기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즉 성경에서 치유와 구원이 함께 관련되어 등장할 때에도 우리는 이것을 실제적인 구원에 대한 선언의 본문으로 여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본문들을 통해 예수께 치료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사함 여부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여기는 믿음으로 인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원의 현재와 미래적 긴장에 대하여, 특별히 학자들은 막 8:35와 막 10:26 및 당시의 유대교 전통의 사상을 검토하면서 성경의 “구원”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그곳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 그것을 상속받아 소유하는 것에 해당한다고 결론 내린다. 그러므로 복음서에서 묘사되는 “구원”은 미래적인 동시에 현재적이다. 그것은 미래의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동시에 현재 발생하는 사건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각주:15]
 
이런 “구원”의 미래적 양상은 다른 요소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롬 5:9는 죄사함과 하나님과의 화목, 그리고 의롭다 하심이 모두 같은 것이 아니라 구별되는 것으로 묘사한다. 마찬가지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구원을 얻는 것과 구별되어 서술되며, 하나님과 화목된 것 역시 구원을 얻는 것과 구별되는 사건이다. 그래서 흔히 신약학자들은 바울의 “구원”은 언제나 미래적, 즉 종말론적인 함의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각주:16]
 
이에 대해서는 롬 13:11; 빌 1:28; 2:12;[각주:17] 살후 2:13; 살전 5:8을 보라.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사용하는 용어에서 “구원하다” 혹은 “구원”이 등장할 때에는 이것을 최후의 심판과 연관이 있는 용어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 구원”은 종말적인 사건이며, 동시에 그것에 대한 보증을 받은 우리에게 현재적 사건이다. 구원은 종말의 “판결”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미 내 죄가 사해졌다. 나의 판결은 완전히 끝났다.”라는 사상은 신약학자들에 의해 정당하게 거부당할 수 있다. 또한 “내 죄가 이미 사해졌다. 이것을 믿으면 구원이다.”라는 것 역시 신약학자들 입장에서 복음의 내용으로 부적절하다. 믿음, 복음, 구원은 예수님 자체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다만 우리는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가질 뿐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죄사함을 얻을 것을 바라보며, 최후의 심판대에서의 구원을 소망한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 믿고 있다는 사실은 종말에 있을 그 구원을 현재적 사건으로 끌어 온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고 있다면, 우리는 신중하게 우리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결론


 
복음은 분명 죄사함에 대해 가르친다. 사도들도 신자들에게 죄 용서에 대한 교리를 가르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핵심적으로 요약할 때에 “나의 죄사함”이 아니라 “예수가 누구인가”에 집중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가에 주목하길 원한 것이다.
 
심지어 이것은 사도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도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선포하실 때에, “너희들의 죄가 이미 사해졌고 이것을 믿어야 구원이다.”라고 가르치시지 않으셨다. 그분은 “나는 너희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오실 그 분이다. 나는 메시아,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것을 믿어라. 나의 가르침도 믿어라. 그러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라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은 죄사함을 예수님을 믿은 것에 대한 결과로 제시한다. “이미 얻은 죄사함”이 아닌, “믿으면 얻을 죄사함”이다. 그래서 복음은 죄사함의 내용을 포함할 수는 있다. 그러나 복음의 핵심은 “내 죄가 사해졌다”라기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그리스도이다.”라고 여겨야 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순수한 복음”을 전할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강조해야 하는가? 무엇이 핵심인가? “내 죄가 사해졌다”인가? 아니면 “예수는 주님이다”인가? 성경에는 “내 죄가 사해졌다”라는 것을 모르고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을 선언 받은 사례들도 존재한다. 더욱이 사도들은 설교할 때에 “내 죄의 사해짐”에 포커스를 두고 전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신약성경의 엄청나게 많은 본문들이 우리들의 믿음의 대상, 복음의 내용이자 핵심이 곧 예수 그리스도 자체라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대침은 복음의 내용인 예수님에 집중하기보다는 예수님이 가져올 이득, 혜택, 우리가 취할 이익에 집중하였다. 그래서 대침은 복음의 내용 중 “죄사함”을 예수님에 대한 내용 보다 더 앞세운다. 그리고 “죄사함”을 극대화시켜 2000년 전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이 이미 죄가 사해진 상태라고 주장한다. 이것을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용서 받았다”라는 사실을 믿어야 진정한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침은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죄를 짓지 않는 거룩함이 중요하다”는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다. 이것은 “죄로 인해 지옥 가지 않도록 순수한 복음의 내용, 곧 내 죄가 이미 예수님의 보혈로 사해졌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를 의미한다. 그래서 대침의 성경강연회 말씀을 들어보면 “복음”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지속적으로 “내 죄가 속죄 되었다는 사실”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이 없거나 적다면, 아직 복음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고, 제대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그래서 정통 교단 사람들을 비판한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십시오.”라고 선포되는 복음은 가짜 복음이라고 비난한다. 그들이 말하는 “순수한 복음”이란 “영원한 나의 죄의 용서 및 해결”을 확실히 믿는 것에 기반한다. 즉 그들이 죽은 뒤에 얻을 미래의 이득을 확실하게 얻는다고 확신하는 것에 근거한다. 여러분은 이것이 과연 사도들이 전파하던 순수한 복음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대침의 복음은 “순수하지 않다.” 대침 사람들이 과거로 돌아가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전도하는 것을 본다면 “그것은 순수한 복음이 아니다!”라고 입에 거품을 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초기 기독교의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해 “나의 죄의 해결”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집중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내세에서의 안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들의 사상은 복음의 내용을 예수님 중심에서 “죄 용서” 중심으로 둔갑시켜 버렸다. 이것은 순수하지 않다. 정말 순수한 것은 성경에서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전파한 것 그대로를 전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그리스도, 주님이다.”라는 내용이다. 복음에서 예수님의 자리를 내가 얻을 저승에서의 이득으로 바꿔버리는 것은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의 “안위”이다.
 
구원파의 윤리적 실패에 대해서 썼던 글에서 언급했듯이, 예수님 보다 죄사함을 강조하는 이들의 복음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죄사함 받은 사람들”을 양산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도록 만들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구원 받았다”라고 생각하는 영혼을 늘리는 것이다. 반면에 성경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는 누구이고 그분의 가르침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다.
 
이제 그 어떠한 편견 없이 성경의 메시지들을 읽어보자. 성경은 죄사함에 대해서 가르친다. 그러나 그 보다도 예수에 대해 더 많이 가르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복음”이며 복음을 가장 “잘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침은 “우리 교회는 복음을 가장 잘 가르친다. 가장 순수한 복음을 가르친다. 사도들이 가르쳤던 것과 동일한 것을 가르친다.”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내용 중에서 죄사함에 해당하는 부분을 매우 강조하는, 조금 다른 복음을 가르친다.”라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제 필자 앞에서 "대침이 복음만은 순수하지 않냐"는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없기를 바란다.

 

 

 

 

 

추가)

 

"나를 이미 속죄해주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예수"를 믿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이것이 옳으려면 1세기 유대인들 및 헬라인들이 예수님 혹은 사도들의 설교를 들을 때에 "메시아,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 만으로 이렇게 추론하여 믿을 수 있었다는 고고학적인 혹은 1세기 그리스 로마의 사회 문화 배경적인 근거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1세기 유대인들 및 헬라인들의 메시아관은 대속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죄 용서해주신 예수를 믿는 것"이라는 내용도 포함하지 않았다. 성경은 이런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이렇게 은글슬쩍 "죄사함"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것을 "예수를 믿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것은 정확하고 순수한 복음을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곳 치고는 참 실망스러운 부분이다. 성경은 실제로 자신이 죄사함을 이미 받았는지에 대한 지식이 없이 구원을 선언 받는 사례들이 존재한다.

 

참고로 성경에 따르면 제자들도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야 속죄와 죄사함에 대해 완전히 알게 되었다.

 

대침이 이런식으로 나오는 것은 죄사함을 믿는 것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지적에서 은근슬쩍 벗어나기 위해 "죄사함을 해주신 예수님"이라는 방식으로 죄사함에 예수님을 끼워 넣는 것과 같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예수의 죄사함을 말하면서도 예수 자체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즉 강조점이 다르다.

 

우리는 분명 예수의 희생을 통해 죄사함을 얻는다. 이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예수가 모든 사람의 죄를 이미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전부 처리 했으며 이것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내용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강조점과는 다르다. 성경은 예수께서 정확히 언제 어디서 죄를 처리하셨는가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예수를 힘 입어 죄사함을 얻을 뿐이다. 예수를 통해 죄사함을 얻을 것이라는 복음은 옳다. 그러나 당신이 믿든 안 믿든 이미 2000년 전에 죄사함은 끝났고 이렇게 2000년 전에 내 죄가 이미 사해졌다는 것을 복음의 내용으로 제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구원의 확신 자체를 복음의 내용이자 믿어야 할 대상으로 제시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대침의 어느 목사는 일반 교단 신자들이 구원 확신이 적다며 자기들의 "확실한 구원"을 자랑하는 설교를 한다. 물론 성경에 이런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죄사함은 좋은 교리이다. 하지만 이것을 복음의 거의 전체 내용으로 제시하고 믿어야 할 거의 핵심이자 전체 내용으로 강조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복음은 예수의 구원 사역 뿐만 아니라 예수 자체에 대한 믿음과 예수의 가르침이 모두 포함된다. 그리고 성경의 예수님과 사도들의 설교를 보면 사실상 예수 자체에 대한 믿음과 그분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복음 전파할 때에 더욱 전면에 강조된다.

 

간혹 필자의 글을 보고 복음에서 죄사함을 제거하려고 필자가 시도한다는 듯이 잘못 인식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미리 이렇게 글을 쓴다. 필자는 올바른 강조점을 가진 성경의 복음을 살펴보고, 대침의 복음이 이 강조점에서 벗어나 다른 강조점을 가진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사실상 "이미 얻은 죄사함"이라는 내용은 성경에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대침의 복음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들의 복음은 성경의 강조점과는 다른 것을 강조할 뿐 아니라, "이미 얻은 죄사함"이라는 성경에 없는 내용을 추가한다. "이미 내 죄가 사해졌음"을 복음의 내용으로 제시하는 것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내용을 추가하는 것이다.

 

또한 레위기의 안수하는 것을 통해 기계적으로 예수에게 적용하여 죄가 물질적인 보따리에 담긴 것마냥 예수에게 옮겨가고 그것이 십자가에서 처리된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성경에 의해 증명되기 힘들다. 이에 대해서는 기회가 된다면 추후에 글을 쓰도록 하겠다. (물론 이것은 대침 전체의 견해가 아닐 수도 있다.)

 

 

 

특별히 대침의 죄사함만을 강조하는 복음의 내용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해석할 때에 "이웃 사랑"의 메시지를 "죄사함 전파"에 강조점이 있는 것으로 둔갑시켜 해석하는 것을 통해 잘 드러난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아래의 글을 참고하라.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와 알레고리적 해석 (대한예수교침례회, 생명의말씀선교회, 구원파) (누가

이미 웹툰 「이단 생활!」 9화에서 등장하였던 것처럼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이하 대침)는 누가복음 10장 25-37절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알레고리적(즉 풍유적)으로 해석한

littlebiblicaltheology.tistory.com

 

이 외에도 성경에 등장하는 "서로 사랑하라" 혹은 "이웃을 사랑하라"에 강조점이 있는 예수의 가르침을 대침에서는 "교회 내의 생활"이나 "죄사함의 복음 전파"로 한정하여 이해한다. 이것은 그들이 가르치는 내용이 예수님이 본래 의도한 것에서 멀어진 채 배타적인 자신들의 공동체만을 강조하는 것에 집중하거나 혹은 "죄사함"의 측면에만 지나치게 치중되어 있음을 잘 보여준다.

 

 

 

또한 아직도 대침이 타 교단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래의 필자의 글을 보라.

 

한국 교회 및 정통 교단에 대한 생명의말씀선교회의 진짜 입장: 일반 기독교인들을 비방한 적이

최근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이하 대침) 분들과 대침이 한국 교회들을 비판한다는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 대침 분들 중 몇몇 분들이 자신들의 교단은 타 교단이나 한국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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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침 분들 중 타 교단에도 복음이 있다고 인정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침의 유명한 목사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보인다. 타 교단에 대해 가장 많은 악의적인 비판을 쏟아낸 사람은 바로 그 목사이다.

 

 

 

아직도 일반 교단은 행위 구원을 가르친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래의 글을 보라.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의 주장대로 일반 교단들이 복음에 대해 잘 모르는가? (행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이하 대침) 분들이 대침을 떠나 일반적인 교단으로 가지 못하는 가장 중대한 이유는, 다른 교단들이 가르치는 구원에 대한 내용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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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내 주변을 보니 행위 구원이던데..."라는 논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필자의 주변은 단 한 명도 행위 구원자가 없었다. 각자의 주관적 경험을 그 교단 전체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겠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 교단이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봐야 한다.

 

 

 

그런데도 대침이 타 교단을 비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대침이 이단 해제 절차를 밟도록 건의하는 것을 고려해보라. 대침이 이단 해제를 받으면 전도할 때에도 더욱 유리하지 않겠는가? 만약 타 교단에도 복음이 있다는 것을 대침이 인정한다면, 그들이 이단 해제 절차를 밟지 않는 것이 더더욱 이상하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아래 글을 참고하라.

 

대한예수교침례회를 이단이라고 부르는 이유에 대하여 (생명의말씀선교회)

올해 9월부터 시작하여 유독 "대한예수교침례회"(이하 대침)나 혹은 "생명의말씀선교회"라는 키워드를 사용해 대침이 이단이 아니라고 옹호하는 글들이 네이버 블로그를 중심으로 생산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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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필자의 블로그 글들을 보면 대침의 설교에서 등장하는 성경 해석의 오류들을 많이 만나 볼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의 대침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사소하다고 무시하거나 간과하겠지만 말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코스모스(κόσμος) (대침, 생말선, 구원파) 요한복음 1:

비단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이하 대침) 뿐만 아니라 다른 구원파 교단들인 기쁜소식선교회 등에서와 마찬가지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구절은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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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속죄"에 대한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의 해석의 문제점 (feat. 구원파)

대한예수교침례회(이하 대침)와 정통 교단이 교리적인 논쟁에서 부딪히는 지점 중 하나는 히브리서 9장 12절 본문의 소위 '영원한 속죄' 관련 내용이다. 주로 정통 교단 측에서는 대침의 영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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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속죄와 기독교적 적용, 히브리서 9장 12절 묵상 (히 9:12) feat.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장 12절          주로 구원파, 그 중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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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회 여고생 사망 사건: 구원파는 왜 윤리적으로 실패하는가 (feat. 대한예수교침례회, 생명

2024년 5월 16일 인천의 한 교회에서 합숙을 하던 여고생이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교회 측에서는 이것이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라고 주장했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현 시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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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와 알레고리적 해석 (대한예수교침례회, 생명의말씀선교회, 구원파) (누가

이미 웹툰 「이단 생활!」 9화에서 등장하였던 것처럼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이하 대침)는 누가복음 10장 25-37절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알레고리적(즉 풍유적)으로 해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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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 비유에 대한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의 해석을 논함 (요한복음 15:1-17)

대한예수교침례회(이하 대침)의 포도나무 비유를 교회와 과도하게 연결 짓는 해석은 이제는 너무나 유명하고 반박하는 글들도 많기 때문에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이미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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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의 식탁 교제... 모이기를 힘쓰라? 어떤 모임인가? (feat. 대한예수교침례회, 생명의말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이하 대침)에서는 이맘 때가 되면 하계수양회라는 것을 합니다. 그들에게 “모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들의 거의 모든 설교에서 “교제”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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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생활! -49화- 우리 딸이 뭐 어때서!! (기독교 이단 웹툰)

이단 생활! -48화- 다 자기가 보는 대로 보이는 거야 (기독교 이단 웹툰)이단 생활! -47화- 그 교회는 사업에 치중한 쪽이잖아 (기독교 이단 웹툰)이단 생활! -46화- 긴 급 회 의! 긴 급 분 반!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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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trans. Su Kyeong Kwon & Sang Won Lee, Christian Digest Publishing Company, 2000, 759.
    [본문으로]
  2. H.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vol. 4, trans. Tae Hyeon Park, Revival & Reformation Publishing, 2016, 148.
    [본문으로]
  3. Craig S. Keener,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trans. Ok Yong Lee, Christian Literature Center, 2018, 1246. [본문으로]
  4. William D. Mounce, Basic of Biblical Greek Grammar: Third Edition, trans. Myeong Hun Jo, Myeong Il Kim, Chung Jae Lee, The Blessed People Publishing, 2021, 479. [본문으로]
  5. William D. Mounce, Basic of Biblical Greek Grammar: Third Edition, trans. Myeong Hun Jo, Myeong Il Kim, Chung Jae Lee, The Blessed People Publishing, 2021, 228. 현재 능동태 직설법은 “~하고 있다”의 진행형 혹은 “~한다”의 부정적인 현재 상태 둘 중 하나를 묘사한다. 문맥에 따라 적절히 골라서 번역할 수 있다. [본문으로]
  6. Darrell L. Bock, Luke 9:51-24:53, trans. Gi Cheol Sin, Revival & Reformation Publishing, 2017, 669. [본문으로]
  7. it is apparent that acknowledgment of Jesus as Lord is intrinsic to Christian faith along with acknowledgment of the miracle of His resurrection, i.e., acceptance of this miracle as true. The two statements constitute an inner unity. The resurrection is not just a remarkable event. It is the soteriological fact in virtue of which Jesus became the κύριος.
     
    Rudolf Bultmann, “πιστεύω, πίστις, πιστός, πιστόω, ἄπιστος, ἀπιστέω, ἀπιστία, ὀλιγόπιστος, ὀλιγοπιστία”, ed. Gerhard Kittel, Geoffrey W. Bromiley와/과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 209. [본문으로]
  8. c. Faith as a Personal Relation to Christ. The question arises whether the abbreviated expression πίστις (πιστεύειν) εἰς …, which is in the first instance a linguistic phenomenon, can also take on a special sense, i.e., denote a personal relation to Christ, so that—since πιστεύειν εἰς Χριστὸν Ἰησοῦν is the way to salvation—faith in Christ has the same material significance as the relation to God.
     
      Now it is worth noting that in the NT the relation to God is practically never indicated by πιστεύειν εἰς.269 Conversely, the LXX formulae for the relation to God, i.e., πιστεύειν c. dat. and πιστεύειν ἐπί c. dat. (→ 203, 9 f.), are practically never used for the relation to Christ. It is true that πιστεύειν c. dat., which in R. 4:3 (17); Gl. 3:6; Tt. 3:8; Ac. 16:34 (D: ἐπὶ τὸν θεόν) is used for the relation to God,270 does occur commonly in Jn. for the relation to Christ, but it means here, not “to believe in” Jesus, but “to believe” Jesus or His words.
     
     
     
    NT New Testament.
     
    269 There are only 2 possible instances: a. 1 Pt. 1:21 → 208, 1 ff.: if the meaning is “so that your faith and hope might be in God,” the εἰς is governed by ἐλπίς rather than πίστις (similarly 1 Cl., 12, 7), in acc. with usage attested from the time of the LXX (v. 2 C. 1:10; Ac. 24:15; Jn. 5:45 → II, 523, n. 34); b. Jn. 14:1: πιστεύετε εἰς τὸν θεὸν, καὶ εἰς ἐμὲ πιστεύετε, an isolated case, since the formulation is selected to express the unity of Jesus with God.
     
    270 Cf. Ac. 16:15 D: πιστὸς τῷ θεῷ, also Jn. 5:24; 1 Jn. 5:10 πιστεύειν c. dat., though here in a special sense: “to believe” (God).
     
    Rudolf Bultmann, “πιστεύω, πίστις, πιστός, πιστόω, ἄπιστος, ἀπιστέω, ἀπιστία, ὀλιγόπιστος, ὀλιγοπιστία”, ed. Gerhard Kittel, Geoffrey W. Bromiley와/과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 210–211. [본문으로]
  9. In ὁμολογία the believer turns away from himself and confesses Jesus Christ as his Lord, which also means confession that all he is and has he is and has through what God has done in Christ.
     
    Rudolf Bultmann, “πιστεύω, πίστις, πιστός, πιστόω, ἄπιστος, ἀπιστέω, ἀπιστία, ὀλιγόπιστος, ὀλιγοπιστία”, ed. Gerhard Kittel, Geoffrey W. Bromiley와/과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 217. [본문으로]
  10. Hence Paul can speak of an ἔργον πίστεως (1 Th. 1:3), and he uses the phrase πίστις διʼ ἀγάπης ἐνεργουμένη (Gl. 5:6) for the whole sphere of that wherein πίστις must work itself out in individual life.
     
    Rudolf Bultmann, “πιστεύω, πίστις, πιστός, πιστόω, ἄπιστος, ἀπιστέω, ἀπιστία, ὀλιγόπιστος, ὀλιγοπιστία”, ed. Gerhard Kittel, Geoffrey W. Bromiley와/과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 219. [본문으로]
  11. Now there can be no doubt that materially the proclamation of Jesus was good news and that He was One who proclaimed good news (→ 718).
     
    Gerhard Friedrich, “εὐαγγελίζομαι, εὐαγγέλιον, προευαγγελίζομαι, εὐαγγελιστής”, ed. Gerhard Kittel, Geoffrey W. Bromiley와/과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 728. [본문으로]
  12. The question whether or not Jesus used the word εὐαγγέλιον is finally a question of His Messianic consciousness. If He realised that He was the Son of God who must die and rise again, then He also realised that He was Himself the content of the message of His disciples. In this case His Gospel is not a new teaching; He brings Himself. What is given with His person constitutes the content of the Gospel. Hence τὸ εὐαγγέλιον implies for the disciples the disclosure of the Messianic secret.
     
    Gerhard Friedrich, “εὐαγγελίζομαι, εὐαγγέλιον, προευαγγελίζομαι, εὐαγγελιστής”, ed. Gerhard Kittel, Geoffrey W. Bromiley와/과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 728. [본문으로]
  13. If we were to sum up the content of the Gospel in a single word, it would be Jesus the Christ. Gerhard Friedrich, “εὐαγγελίζομαι, εὐαγγέλιον, προευαγγελίζομαι, εὐαγγελιστής”, ed. Gerhard Kittel, Geoffrey W. Bromiley와/과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 731. [본문으로]
  14. In the healings of Jesus σῴζω never refers to a single member of the body but always to the whole man, and it is especially significant in view of the important phrase “thy faith hath saved thee.”
     
    Werner Foerster, “σῴζω, σωτηρία, σωτήρ, σωτήριος”, ed. Gerhard Kittel, Geoffrey W. Bromiley와/과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 990. [본문으로]
  15. In the Synoptists, then, σωτηρία is a future event denoting entry into the (future) kingdom of God, and yet it is also a present event in the sayings about that which was lost and is found.
     
    Werner Foerster, “σῴζω, σωτηρία, σωτήρ, σωτήριος”, ed. Gerhard Kittel, Geoffrey W. Bromiley와/과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 992. [본문으로]
  16. The object of salvation is not the ψυχή; it is either the whole man or his πνεῦμα (1 C. 5:5). Again, forgiveness of sins, reconciliation and justification are differentiated, though not sundered, from σωθῆναι. In R. 5:9 f. δικαιωθῆναι and καταλλαγῆναι are notably distinguished from the future σωθήσεσθαι by the νῦν and the aor. part. Primarily, then, σωτηρία is for Paul a future, eschatological term, cf. 1 C. 5:5: ἵνα τὸ πνεῦμα σωθῇ111 ἐν τῇ ἡμέρᾳ τοῦ κυρίου, 1 C. 3:15: αὐτὸς δὲ σωθήσεται, οὕτως δὲ ὡς διὰ πυρός. Particularly plain is ἐγγύτερον ἡμῶν ἡ σωτηρία ἢ ὅτε ἐπιστεύσαμεν in R. 13:11, cf. Phil. 1:28; 2:12; 2 Th. 2:13;112 1 Th. 5:8 f.
     
    aor. aorist.
     
    part. participle.
     
    111 Whether the transl. should be “will be saved” or “can be saved” is something we cannot decide here.
     
    112 Nestle prefers the reading ἀπαρχήν with B G 33 all f vg syh bo.
     
    Werner Foerster, “σῴζω, σωτηρία, σωτήρ, σωτήριος”, ed. Gerhard Kittel, Geoffrey W. Bromiley와/과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 992. [본문으로]
  17. 빌 2:12의 경우 여기서의 “구원”이 신자들의 안녕이나 “건강” 혹은 분쟁 없는 화평 등 종교적인 구원이 아닌 다른 것을 의미한다고 여기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넓게는 타인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삶을 이루라는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므로, 베르너 푀르스터는 그 본문도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종말적인 용어에 포함시키는 것 같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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