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코스모스(κόσμος) (대침, 생말선, 구원파) 요한복음 1:29

대한예수교침례회에 대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코스모스(κόσμος) (대침, 생말선, 구원파) 요한복음 1:29

바잇 카탄 2024. 6. 28. 02:04

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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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이하 대침) 뿐만 아니라 다른 구원파 교단들인 기쁜소식선교회 등에서와 마찬가지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구절은 그들의 교리 체계에서 매우 중요한 본문이다.
 
구원파의 전도집회나 성경강연회 등에서 “복음”에 해당하는 부분을 듣게 되는 사람들은 이 본문에 대해서 매우 익숙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 구원파에서는 이 본문이 의미하는 바를 “모든 사람의 죄는 이미 사해졌다.”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예수께서는 세상 죄를 모두 지고 가셨으므로 우리 각 개인의 죄는 이미 죄사함을 받은 상태이고, 따라서 이 같은 사실(내 죄가 이미 사해짐)을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또한 이 교리에 의하면 각 개인이 지옥에 가는 이유는 “믿지 않는 죄” 때문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요 16:8). 왜냐하면 사실상 모든 사람의 죄는 “믿지 않는 죄”를 제외하고 모두 예수께서 처리하셨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의 존재 여부는 목사마다 다르다. 참고로 요한복음 16:8은 그런 내용을 지지하는 본문이 아니다.)
 
실제로 나와 대화를 나눈 대침에 소속된 사람들은 요한복음 1:29 본문을 사용하여 위와 같은 주장을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나는 이번 글에서 해당 본문을 통해 그런 교리를 이끌어 내는 것이 사실상 근거가 없는 것임을 주장할 것이다.
 
이 논제의 가장 핵심은 과연 “세상 죄”가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달려 있다. 즉 궁극적으로 이 본문에서 사도 요한이 사용한 용어 “세상”을 우리는 무엇을 뜻하는 것으로 봐야 하는가? “코스모스”의 일반적인 용례는 무엇인가? 그리고 사도 요한의 문서에서 그것은 어떻게 사용되는가?
 
특별히 이 헬라어 단어 “코스모스”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 각 개인을 뜻하는 것인가? 즉 “세상 죄”란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 각 개개인의 죄를 일일이 지칭하는 것을 뜻해야만 하는가? 세례 요한 및 사도 요한 등이 이 용어를 사용할 때에 “개별적인 모든 인간 개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봐야 하는가? 혹은 이것에 "과거, 현재, 미래의 죄"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여겨야 하는가?
 
이제 필자의 글을 통해 위의 것들을 살펴보게 된다면 요한복음의 본문이 말하는 “코스모스”가 인간 각 개인의 모든 존재를 일일이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헬라어 “코스모스”가 매우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신약성경 저자들이 사용하는 의미는 이것과는 또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심지어 이 용어를 현대인이 사용하는 공간적 의미의 “세계”라는 뜻으로 사용한다고 해도, 요한복음에서 이것은 인간 각 개개인을 지칭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코스모스”의 다양한 의미… 각 개인 모두를 지칭하는가?



먼저 헬라어 “코스모스”의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코스모스(κόσμος)”를 이야기 할 때에는 이것에서 파생된 동사 “코스메오(κοσμέω)”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동사 “코스메오”는 “코스모스”의 기본적인 의미에서 파생된 동사이다. 이것은 군대에게 “명령을 내리다”, 혹은 “통제하다, 조절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것은 “꾸미다, 장식하다”의 의미 역시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70인역(LXX)에서도 “코스메오”는 “명령하다”, “꾸미다”의 의미로 사용된다. 신약성경에서는 마태복음 25:7에서 등을 “준비”하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또한 계시록 21:2에서도 새 예루살렘이 “단장”할 때에 이 단어가 사용된다. 이것은 딤전 2:9와 벧전 3:5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코스메오”가 이런 의미를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코스메오”가 파생된 명사 “코스모스”가 현대에 “우주” 등으로 알려져 있는 것과는 달리, 질서, 장식물”의 의미를 가장 일차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각주:1] 특히 “코스모스”는 어떤 “원리”나 “질서”로 연결되어 있는 구성물 전체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런 “원리”와 “질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세계”를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BDAG』에서도 이 단어의 가장 첫번째 의미를 “장식, 치레, 치장”으로 제시하며, 두번째 의미를 “정돈, 질서”로 제시한다.[각주:2] 이것은 『TDNT』에서도 마찬가지이다. 『TDNT』는 성경 외적인 사용을 다루면서 “코스모스”의 의미를 7가지로 제시한다. 그 중 1번에서 4번의 의미는 모두 “질서, 원리, 장식”과 관련이 있다.[각주:3]
 
“코스모스”가 오늘날과 같이 “세계”나 “우주” 등을 지칭하게 된 것은 철학자들이 이것을 사용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전체(totality)”를 나타내기 위해 개별적인 것들을 하나로 묶는 무언가의 개념이 필요하면서 생겨난 것 같다. 왜냐하면 자연계란 어떤 자연 법칙을 통해 움직이는 거대한 총체이기 때문이다. 즉 “코스모스”는 “세계”나 “우주”라는 의미를 지닐 때에도 “우주 질서”로 묶이는 우주 시스템이라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TDNT』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In other words, it is the cosmic system in the sense of the cosmic order.”

 
플라톤은 이 개념을 확장하여 공간적 의미의 “우주(universe)”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안에는 “세계 질서”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만약 “세계 질서”라는 뜻에서 우주 전체를 표현하지 않고 개별적인 존재들이나 물질들 다수를 지칭하고 싶다면 “전체”라는 뜻을 가진 “토 홀론(τὸ ὅλον)”이나, “모든”이라는 뜻을 가진 “토 판(τὸ πᾶν)”을 사용하면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또한 하나의 원리, 법칙, 질서인 “코스모스”를 통해 엮인다.[각주:4]
 
그러므로 그리스 철학자들의 용례에서 “코스모스”는 개별적인 것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어떤 원리, 질서 등을 의미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들은 한 데 모인 “총체성”을 띨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코스모스”는 단순히 세계의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인간 사회의 “코스모스”나, 인간의 “코스모스” 등 어떤 대상의 본질적 질서나 원리를 논할 때 사용될 수 있다. 후에 이것은 철학적 의미에서 더 나아가 단순한 공간적 배경을 뜻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였다. (성경에서 단순한 공간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이 사용된다면 바로 이 의미이다.)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용어를 번역하면서, 70인역(LXX)은 “코스모스”를 “우주”를 뜻하는 것으로 번역하지 않는다. 70인역에서 “코스모스”는 “만군”, “일월성신”을 의미하거나 “장식품”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히브리어에서 우주를 표현할 때에는 “하늘과 땅”으로 지칭하거나 혹은 “모두”를 뜻하는 “콜(כֹּל)”을 사용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기에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생활했던 유대 철학자들의 경우 “코스모스”를 그리스 철학자들이 사용했던 의미로 활용하길 좋아했다. 유대 철학자 필로(Philo) 역시 마찬가지였다.[각주:5] 따라서 지혜서나 마카비서의 헬라 번역본의 경우에는 “코스모스”가 철학적 용어로서 하나의 원리로 전체를 아우르는 “세계”를 뜻하는 것으로 등장한다.
 
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이 “코스모스”를 언제나 완전히 그리스 철학자들의 용례대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학자들은 특히 사도행전 17:24에서 “코스모스”와 “판타(만유로 번역됨)”가 구분되어 서술된 것은 아직 세계를 하나의 통일체로 생각하지 않았던 히브리적 사고관이 신약시대에도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각주:6] 반면에 신약성경의 어떤 곳에서는 “코스모스”와 “판타”가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이것은 유대 철학자들의 문헌들에 대해 성경 기록자가 알고 있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 수도 있다.
 
이처럼 신약성경 저자들에게 “코스모스”는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들은 어떤 때에는 이것을 “우주”의 의미로, 어떤 곳에서는 “공간적 확장”의 의미로,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을 반대하는 원리”의 의미로 사용한다. “코스모스”의 의미는 각 저자에 따라 다를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같은 저자의 문헌 속에서도 문맥과 주제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코스모스”를 해석할 때에는 반드시 그 단어가 사용된 성경의 전체 주제와 사용례, 그리고 문맥을 살펴 보아야 한다.
 
 
 

요한복음에서 “코스모스”는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모든 사람” 의미하는가?



대침 분들이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대침에서 요한복음 1:29의 “세상 죄”를 말할 때 이것을 하나님의 창조물 전체의 죄를 아우르는 것으로 확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하나님의 창조물 전체로 확장하여 생각한다면, 우리는 사탄이나 귀신들도 구원을 얻을 것이라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대침은 이런 결론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반면에 만약 사탄과 귀신을 제외한 인간을 포함하는 우주 전체의 죄를 지칭한다고, 그 중에서도 영적인 존재인 인간의 죄를 지칭한다고 아주 편리하게 “세상 죄”를 정의한다면, 이것은 “코스모스”를 하나님의 창조 세계 전체로 확장한 것은 아니다. 즉, 대침은 “코스모스”를 “전체”를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대침은 특별하게 “인간 전체의 죄”만을 가리킨다는 의미에서 “코스모스”의 범주를 자기들 방식대로 한정하여 이해한다.
 
그러므로 대침의 “세상 죄”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 속에서 태어나고 죽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인간의 죄”

 
그리고 이 “모든 인간”이란 총체적 의미에서 “인류”를 뜻한다기 보다는 “individual person”, 즉 “모든 인간 개인”을 뜻한다. 그래서 대침에서는 이 본문의 말씀을 활용하여 각 개인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이미 사해졌다고 주장한다.
 
과연 요한복음은 이런 사상을 지지하는가?
 
학자들은 사도 요한의 문서들은 “코스모스”를 가장 특징적으로 많이 활용한다고 입을 모아 지적한다. 또한 사도 요한은 “세상”이라는 단어를 다른 저자들이 사용하는 의미보다 더욱 특수하고도 선명하게 사용하는 것 같다.
 
크레이그 키너(Craig S. Keener)는 “코스모스”가 비록 “우주”를 가리킬 수 있는 용어인 것은 맞지만(요 21:25), 그것은 사도 요한의 일반적인 용례가 아니라고 말한다.[각주:7] 특별히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일반 대중”(7:4; 12:19; 18:20), 이스라엘과 대조되는 “열방들”(1:11), 어두움 안에 있는 자들(1:10), 사탄의 권세에 지배 당하는 자들(12:31; 14:30; 16:11), 하나님과 유리되어 있는 자들(14:17, 19; 17:9, 25), 도덕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적대시하는 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등장한다(7:7; 15:18-19; 16:20; 17:14).[각주:8] 즉 요한에게 “세상”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반대하는 원리”를 의미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 혹은 그분의 제자들은 지속적으로 “세상으로부터 난 자들이 아닌 것”으로 정의된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7:16에서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세상 속에 아직 거하는 자들이다(요 13:1). 즉 제자들은 “세상 중에서” 예수님께 속한 자들이다(요 17:6). 하나님의 자녀들은 사도 요한의 사고 속에서 세상, 즉 하나님을 반대하는 원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이다.
 
이런 점에서 사도 요한의 서신들에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권면이 자주 등장한다. 만약 세상이 하나님을 반대하는 원리를 의미한다면, 세상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을 반대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과 동일한 것일 것이다. 반면에 세상을 따르지 않는 것은, 죄악된 인성에서 나오는 하나님을 반대하는 삶의 양태를 따르지 않는 것과 동일하다.[각주: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말은 상당히 충격적인 표현이다(요 3:16).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사랑하시며, 이방 민족들은 종말에 멸망할 것이라고 믿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시지, “세상”을 사랑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악한 세상, 곧 하나님을 반대하는 원리를 가진 자들(유대인들 입장에서라면 이방인들) 또한 차별 없이 사랑하신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의 글을 참고하라:
 

 

요한복음 3장 16절 묵상 (요 3:16) Meditation on John 3:16 (Jhn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장 16절 아마 현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성경 구

littlebiblicaltheology.tistory.com

 
 
『BDAG』는 사도 요한의 서신에서 세상은 하나님과 대조적이며(요일 2:15) 하나님을 아는 것에 무능한 것으로 묘사된다고 언급한다(요 17:25).[각주:10] 그렇다면 사도 요한의 “세상”이란 하나님께 적대적인 어떤 원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이 단어에는 “하나님의 적으로서, 즉 죄에 타락한 자, 하나님의 본성과 완전히 반대되는 자, 멸망에 빠진 자들이 나타난다.”[각주:11]
 
『TDNT』는 이것을 보다 명확하게 주장한다:

“요한이 κόσμος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미워한다고 말할 때, κόσμος는 구속사에서 구원자의 거대한 적으로 의인화된다.”[각주:12]

 
D. A. 카슨(D. A. Carson)의 다음과 같은 설명은 사도 요한이 사용하는 “세상”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세상’은 좀 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어떤 이들은 요한복음에서 ‘코스모스’라는 단어는 때로는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때로는 중립적인 의미를 지니며, 흔히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해 왔지만,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면 소수의 본문들에서는 중립적인 의미를 보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압도적인 다수에서는 대단히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 드러난다. 명백하게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경우는 없다.

흔히 ‘이 세상’으로 표현되는 ‘세상’은 만유가 아니라, 조물주를 거역하여 반역 가운데 있는 피조 질서(특히 인간들과 인간사의 질서)이다.”[각주:13]

“사실, 요한의 용법에서 ‘세상’이라는 표현 속에는 믿는 자들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각주:14]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코스모스”를 모든 인간 개개인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했다기 보다, 하나님께 반대하는 질서, 원리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이것은 위에서 살펴본 “코스모스”의 헬라어 용법, 즉 “어떤 하나의 질서나 원리로 통합되는 총체”를 의미하는 용법과도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도 요한은 “코스모스”를 사용할 때에 대부분 이런 의미로 사용한다. 그에게 있어 “세상”이란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리를 가진 어떤 것이다.



더욱이 요한복음에는 인간 각 개인과 “코스모스”를 구별하여 사용하는 용례도 존재한다. 요한복음 1:9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참 빛”으로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ἦν τὸ φῶς τὸ ἀληθινὸν ὃ φωτίζει πάντα ἄνθρωπον ἐρχόμενον εἰς τὸν κόσμον.)”

 
이 본문의 헬라어 단어 중 “세상에 와서”, 즉 “에르코메논 에이스 톤 코스몬(ἐρχόμενον εἰς τὸν κόσμον)”과 “각 사람”, 곧 “판타 안뜨로폰(πάντα ἄνθρωπον)”이 동일한 것인가 아닌가에 대해서 다소 애매하다. 관건은 해당 본문에 사용된 “코스모스” 구문을 남성형으로 보고 “판타 안뜨로폰”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코스모스” 구문을 중성형으로 보고 “참 빛”, 즉 “토 포스 토 알레띠논(τὸ φῶς τὸ ἀληθινὸν)”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것인가이다.
 
만약 사도 요한이 “세상”을 “각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았다면, 이 본문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야 한다: “세상에 오는 모든 사람에게 비취는 참 빛이 있다.” 만약 “세상”이 “각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이 본문은 절대적인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반면에 “세상”과 “각 사람”이 구별된다면 다음과 같이 번역하여야 한다: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다.” 이 경우에는 “각 사람”의 보편성 보다는 예수께서 “세상 안으로 왔다”는 사실 자체를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학자들은 사도 요한이 “세상”과 “각 사람”을 분명히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세상”은 “각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각 사람”을 의미하기 위해 “세상에 오는 모든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항상 이것이 복수형으로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각주:15] 그러나 “에르코메논 에이스 톤 코스몬(ἐρχόμενον εἰς τὸν κόσμον)”은 단수형 구문이다. 더욱이 “세상에 온 것”으로서 그리스도 예수를 말하는 것은 사도 요한의 특징적인 사용례이다. 또한 해당 본문의 문맥 역시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 대해 말한다.[각주:16]
 
그러므로 사도 요한의 사고 속에서 “세상”은 “모든 사람”과 구별되는 어떤 원리인 것으로 보인다. 만약 “세상”이 모든 각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1:9 본문 뿐만 아니라 바로 그 다음 본문부터 의미가 모호해진다. 왜냐하면 1:10에서 세상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반면, 1:12에서는 갑자기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만약 “세상”이 “모든 사람”을 뜻해야 한다면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알지 못했으나 동시에 “영접하는 자들” 역시 존재한다는 어색하고 모순된 결론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반면에 “세상”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리”로 이해한다면, 그리고 요 17:16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속에 살아가는 “세상으로부터 기원하지 않은 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라는 적절한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들을 13절에서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로 묘사한다. 즉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난 자들이 아닌 것이다.
 
 
 

과연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는가에 대한 요한복음의 시각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모든 인간 각 개인”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한정된 범위의 인간을 위해 죽으신 것이라는 듯한 본문들이 등장한다. 비록 나는 더 이상 개혁주의적 관점을 유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본문들은 개혁주의의 입장에서 소위 “제한속죄”를 입증하는 데에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0:15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이 본문에서 예수께서 “목숨을 버리는 것”은 죄를 사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죽음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위하여”로 번역된 “휘페르(ὑπὲρ)”는 요한복음에서는 거의 언제나 희생이라는 맥락 속에서 등장하기 때문이다.[각주:17] 그리고 명확하게 예수께서는 “모든 각 개인”이 아닌 자기 자신의 양들을 위해 죽으시는 것으로 말씀하신다.
 
이 양의 범주가 한정된 것이라는 점은 그 다음 구절인 16절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니”

 
예수께서는 처음 자기가 “위하여” 죽는 대상을 “이 우리”에 들어 있는 양으로 말씀하시면서 이것이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신다. 또한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을 추가적으로 언급한 것은 앞의 양 무리와 뒤의 양 무리가 구분되며 이들이 각각 “모든 각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 주제는 또한 앞에서 살펴보았던 세상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으나 그 중 세상에서 나지 아니한 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사도 요한의 사고관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비록 세상의 구원자이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셨지만, 그 중에서 세상으로부터 나지 않은 자들, 곧 자신의 양들을 위해 죽으신다. 예수님의 죽음은 특별히 자기 양들을 위한 것이다.[각주:18]
 
이제 “세상 속에 거하는, 세상으로부터 나지 않은 자들을 위해 죽으심”이라는 사도 요한의 주제가 요한복음 11:52에서도 암시된다. “또 그 민족만 위할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여기서 예수께서 “위하여(ὑπὲρ)” 죽으시는 대상은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로 묘사되며 예수께서는 이들의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 죽으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어째서 이들이 흩어져 있는 상태인 것으로 묘사되는 것인가? 이것을 “세상 속에 있는 예수님의 양들”이라는 주제 안에서 바라본다면 굉장히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난 자들이 아니며, 따라서 세상 속에 흩어져 살아간다.
 
요한복음 10:15-16과 11:51-52는 이런 점에서 “민족을 뛰어넘는 차별 없는 복음”과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두 본문 모두 예수님을 따르는 유대 민족 내의 하나님의 자녀와, 그 무리 밖의 또다른 무리인 이방 민족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은 먼저는 유대인 중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양들을 위해(요 10:26-27), 그 다음으로는 유대 민족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들 중 흩어진 자들인 또다른 양들을 위해 죽으신 것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세상”에 거주하는, “세상”을 따르지 않는다는 자들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D. A. 카슨(D. A. Carson)은 “세상 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하나님의 어린양이 지고 가는 것은 ‘세상 죄’, 즉 서문이 이미 분명히 보여 주었듯이(1:11-12)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은 아니지만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의 죄이다.”[각주:19]

 
 

광활한 우주.. 코스모스(κόσμος)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위의 논의들을 고려한채로, 이제 요한복음 1:29의 본문으로 돌아와보자. 여기서 말하는 “세상 죄”라는 용어가 인간 각 개인의 과거, 현재, 미래 죄를 의미한다는 것을 요한복음의 전체 문맥과 사도 요한의 “코스모스” 사용례를 통해서 과연 유추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도 요한은 단순히 모든 인간들의 죄를 포함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이 아닐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요한복음에서 최대한 복음의 절대적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양들이 존재하고, 흩어진 자들이 존재하며, 세상을 따르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나지 않은 자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듯싶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바로 이들을 위해 죽으셨다. 왜냐하면 “세상”, 곧 하나님을 반대하는 원리를 따르는 자들은 예수님의 양 무리에 속하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을 이기는 자들이다(요일 5:1-5). 즉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 예수님을 반대하는 원리인 세상을 따르지 않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세상 속에 거하고 있다. 이들은 세상 속에 흩어져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셨다(요 3:16). 그리고 예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신다(요 1:29).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질서”인 “세상”을 정말로 사랑하신다는 것이 아니다. 즉 하나님께서 악한 것을 사랑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을 뜻하는 것이다(롬 5:8-9). 우리가 아직 세상에 거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양들을 모으시고 세상에 거하지 않는 자들로 만들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다.
 
더욱이 이 “세상”이라는 용어는 이것이 단지 유대인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사도 요한의 방식으로 강조한다. “코스모스”는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하는 모든 장소에서 발견될 수 있는 근본적인 악한 원리이다. 예수께서 이것을 겨냥하여 오신다는 것은 이 문제를 유대인들만의 민족적 메시지로 여길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코스모스”는 이방 민족들 속에서도 활동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신 것이다.
 

 



 

결론



사실 학자들은 요한복음 1:29에서 “세상”이 어떤 범주를 의미하는 것이냐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서론이나 요한복음 1장 초반부에서 일반적인 의미의 “코스모스”와 사도 요한이 말하는 “코스모스”의 의미를 해설하고 이것을 기본 전제로 해서 해당 본문을 주해하기 때문이다.
 
또한 학자들은 여기서의 “세상 죄”라는 단어를 보면서 “세상은 전체를 뜻하니까 모든 인간 개개인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포함하는 것이다”라고 극대화하여 굳이 생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애초에 신약성경을 연구해본 사람이라면, 헬라어 “코스모스”나 “판타” 등이 물리적으로 모든 개체 요소들 하나 하나를 시간까지 초월하여 지칭하는 것이라고 극단적으로 해석하지 않을 것이다. 헬라어 용례에서 그와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사도 요한 역시 요한복음에서 “세상 죄”가 인간의 개개인의 모든 죄를 시간을 초월하여 포괄한다는 것을 암시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반대의 것들을 암시하는데, 그것은 곧 예수께서는 자기 양들을 위해 죽으시며, 자기 양이 아닌 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 “세상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니까 인간 개개인의 모든 죄를 시간까지 초월하여 지칭하는 것이다”라는 식의 자기 망상, 곧 헬라어 용례와 맞지도 않고, 요한복음 본문에서 증명되지 않는 성경 외적인 추가적인 추론적 극대화에 의해 이것을 옹호하는 것이 아닌, 보다 성경적이고 특히 사도 요한의 서신을 통해 이 같은 교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필자에게 알려주기 바란다.
 
필자의 생각에 “세상 죄”가 “인간 개개인의 모든 죄, 심지어 시간적 요소까지 초월한 것”을 뜻하려면 헬라어 사전과 성경 본문에는 나오지 않는 상당한 양의 자의적 해석이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여기서 “영원한 속죄”를 근거로 가져오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필자가 아래에 쓴 글을 먼저 참고하고 오길 바란다. 왜냐하면 그 본문은 “인간 개개인의 죄의 과거, 현재, 미래의 속죄”를 말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는 본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원한 속죄와 기독교적 적용, 히브리서 9장 12절 묵상 (히 9:12) feat.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장 12절 주로 구원파, 그 중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이하 대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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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침이 요한복음 1:29를 이같이 이상하게 해석하게 된 것은 그들이 헬라어 “코스모스”라는 단어에 무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들은 사도 요한의 문서들에서 “코스모스”가 특수하게 사용된다는 점을 잘 몰랐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이 점에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도 요한의 주제를 간과하면서 요한복음을 독해할 것이다. 여기서 요한복음은 그들의 교리 체계를 옹호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버린다.
 
혹자는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의 죄가 반만 사해졌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력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모든 것을 초월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요한복음 본문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고 여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 본문을 읽는 그 사람이 정말 정직한 사람이라면 내 말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본문 그 어디에도 “과거, 현재, 미래” 등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혹은 “모든 인간의 죄는 이미 해결되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가르침 역시 나오지 않는다. 이런 내용들은 해당 본문 만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나는 특별히 후자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요한복음 1:29에서 이 같은 것들을 추출해내는 자들은 성경 본문을 당시의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방식이 아닌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본문에서 말하지 않은 내용들을 추가적으로 추론해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 추론은 성경 원어인 헬라어 용법이나 사도 요한의 사용례와는 무관하며, 자신들이 지지하는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 그리고 “세상”이라는 단어를 현대인의 시각에서 무리하게 극대화 시킨 것에 근거한다.
 
또한 사도 요한이 세상 속에 있는 “세상으로부터 나지 않은 자들”의 구원에 대해 말하는 것, 그리고 그가 다른 서신들에서 지속적으로 신자들의 특징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을 제시하는 것은 적어도 사도 요한이 제시하는 복음은 “모든 사람의 죄가 이미 사해졌다. 그러므로 나의 죄도 이미 사해졌다. 이제 이것을 믿기만 하면 된다.”라는 식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심지어 사도 요한 뿐만 아니라, 다른 복음서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도 “내 죄가 이미 다 사해짐”을 단순히 믿는 것을 복음으로 제시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상당히 신중하라고 조언하신다. 그것은 아주 깊은 고민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눅 14:28-32). 예수님의 양들은 “모든 사람의 죄가 이미 다 사해졌고 나도 포함되니까 그냥 믿으면 된다”라는 생각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에게 반응하며 따르는 자들이다.
 
이전에 인천교회 여고생 사망사건에 대해 글을 쓰면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란 “내 죄가 용서 받았다”는 자들이 아니라 “변화된 자들”이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그들이 먼저 변화된 자들이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도 바울을 따라,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와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분은 우리를 부르신다.
 
그러나 이 부름에 응답하는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다.” 즉 우리는 “변화된 자”로서 삶을 살아간다. 이것은 “내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에만 집중하고 집착하며 다른 사람 역시도 이와 같은 존재로 만드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나의 인생의 최우선 가치로 설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이런 가치를 삶의 중심으로 갖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실현되고 확장된다.
 
대침이 “나의 죄가 용서 받았다”에 집중하는 것은 요한복음의 본문을 왜곡해서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지에 집중하지 않고, 사도들의 서신에 집중하지 않은 채, 오직 자기들의 안위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 본문에 없는 “모든 인간 개인의 죄”, “과거, 현재, 미래의 죄” 등의 내용을 무리하게 추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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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his verb was used in class. Gk. from the time of Hom. Its meanings derive from the basic sense of κόσμος, i.e., order or adornment. In the sense “to order” κοσμέω is a technical military term for the placing of a host or the ordering of combatants
     
    Gk. Greek.
     
    Hom. Homer, of Chios (?), the classical Greek epic poet, around whose name were grouped the older epics of the Ionians in the 9th and 8th centuries B.C., ed. G. Monro and T. W. Allen, 1908 ff.
     
    Hermann Sasse, “κοσμέω, κόσμος, κόσμιος, κοσμικός”, ed. Gerhard Kittel, Geoffrey W. Bromiley와/과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 867. [본문으로]
  2. Walter Bauer, BDAG, trans. Jeong Ui Lee, Word of Life Press, 2017, 850. [본문으로]
  3. A. Non-biblical Usage: 1. κόσμος == That which is Well Assembled; 2. κόσμος == Order between Men; 3. κόσμος == Order generally; 4. κόσμος == Adornment; 5. κόσμος == World I, Development and Meaning of the Greek View of the Cosmos; 6. κόσμος == World II, God and the Cosmos for the Greeks; 7. κόσμος as World in the Sense of Earth, Inhabited World, Humanity.
     
    Hermann Sasse, “κοσμέω, κόσμος, κόσμιος, κοσμικός”, ed. Gerhard Kittel, Geoffrey W. Bromiley와/과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 868. [본문으로]
  4. The spatial sense of κόσμος, and its identification with the universe, are found in Plato, though the older idea of world order is still present. For Plato the cosmos is the universe, elsewhere called τὸ ὅλον14 or τὸ πᾶν,15 inasmuch as in it all individual things and creatures, heaven and earth, gods and men, are brought into unity by a universal order
     
    14 E.g., Phileb., 28d; Gorg., 508a.
     
    15 E.g., Polit., 270b, 272e; Tim., 28c, 30b, 69c, 92b; Crat., 412d.
     
    Hermann Sasse, “κοσμέω, κόσμος, κόσμιος, κοσμικός”, ed. Gerhard Kittel, Geoffrey W. Bromiley와/과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 871. [본문으로]
  5. Hermann Sasse, “κοσμέω, κόσμος, κόσμιος, κοσμικός”, ed. Gerhard Kittel, Geoffrey W. Bromiley와/과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 881. [본문으로]
  6. The indication of the world by an enumeration of its constituent parts, like the distinction between the κόσμος and its contents, may be attributed to the influence on the NT of the older OT concept which did not yet envisage the world as a unity
     
    NT New Testament.
     
    OT Old Testament.
     
    Hermann Sasse, “κοσμέω, κόσμος, κόσμιος, κοσμικός”, ed. Gerhard Kittel, Geoffrey W. Bromiley와/과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 884. [본문으로]
  7. Craig S. Keener,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trans. Ok Yong Lee, Christian Literature Center, 2018, 837. [본문으로]
  8. Ibid. [본문으로]
  9. Ibid., 838. [본문으로]
  10. Walter Bauer, BDAG, trans. Jeong Ui Lee, Word of Life Press, 2017, 852. [본문으로]
  11. Ibid. [본문으로]
  12. When Jn. says of the κόσμος that it does not know the Son of God, that it does not know God, that it does not believe, that it hates, the κόσμος is in some sense personified as the great opponent of the Redeemer in salvation history Hermann Sasse, “κοσμέω, κόσμος, κόσμιος, κοσμικός”, ed. Gerhard Kittel, Geoffrey W. Bromiley와/과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 894. [본문으로]
  13.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NTC), trans. Mun Jae Park, Solomon Press, 2017, 211. [본문으로]
  14. D. A. Carson, Ibid., 212. [본문으로]
  15. D. A. Carson, op. cit., 209. [본문으로]
  16. Craig S. Keener, op.cit., 1234. [본문으로]
  17. D. A. Carson, op. cit., 710. [본문으로]
  18. Ibid., 712. [본문으로]
  19. D. A. Carson, op. cit., 26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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