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의 식탁 교제... 모이기를 힘쓰라? 어떤 모임인가? (feat. 대한예수교침례회, 생명의말씀선교회, 하계수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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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의 식탁 교제... 모이기를 힘쓰라? 어떤 모임인가? (feat. 대한예수교침례회, 생명의말씀선교회, 하계수양회)

바잇 카탄 2024. 7. 19. 19:18

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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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이하 대침)에서는 이맘 때가 되면 하계수양회라는 것을 합니다. 그들에게 “모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들의 거의 모든 설교에서 “교제”에 대해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모임”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모이기를 힘쓰는 것”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모이는 것”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겠죠. 왜냐하면 모임을 중시하는 것은 대침 외에도 다른 이단들 및 심지어 일반 교단에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약 단순히 모이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라면 우리는 이런 자들의 모든 모임에도 동일하게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다들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단지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어떤 모임이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즉 중요한 것은 “어떤 모임에 모이느냐”입니다. 따라서 만약 대침의 교제에 모이는 것이 중요하려면, 그들의 모임이 정말 성경이 말하는 좋은 모임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역사 속에서 초기 기독교가 중시했던 모임의 목적과 비슷하거나 동일한 무언가를 제시할 수 있는가를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초기 기독교의 모임이 어떤 분위기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가를 살펴볼 것입니다. 제가 예상하기로는 아마 거의 대부분의 현대 교회들과 초기 기독교의 교제 형태는 일치하지 않는 것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 글에서 우리 모두가 초대 교회의 교제 형태로 돌아가자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초기 기독교의 모임에서 무엇을 강조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 기독교인들이 모임을 선택할 때에 무엇에 방점을 두고 선택해야 하느냐에 대해 약간의 정보를 제공하는 정도면 저는 만족할 것입니다. 또한 기존의 모임들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좋은가에 대해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줄 수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의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


대침에서 교제에 참석해야 한다는 명분을 위해 인용하길 좋아하는 사도행전 2장 42절에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생겨났을 때의 모임의 성격을 대략 간략하게 언급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 중 “교제”로 번역한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는 제가 말하고자 하는 이 주제를 가장 집약적으로 설명하는 용어일 뿐 아니라 그 당시의 모임의 성격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살펴보게 만드는 용어입니다.
 
“코이노니아”의 일반적인 의미는 “교제, 사귐, 참여” 등입니다. 이 용어는 “공통된”을 의미하는 “코이노스(κοινός)”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학자들은 이 “코이노스”라는 단어가 일차적으로 어떤 것을 ‘공동 소유’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형제 사랑과 관련된 이 단어는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자신의 소유권,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는 것을 내포합니다.[각주:1] 모든 이기적인 방향성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궁핍한 형제들을 돕기 위해 재물을 기꺼이 포기하려는 의지로 인해 극복되어야 하며, 이것이 신약성경의 “코이노스”의 핵심적인 사상입니다.
 
그래서 이것에서 파생된 단어 “코이노니아”는 다음의 3가지 주된 내용을 포괄할 수 있습니다:[각주:2]

1. 어떤 것을 다른 누군가와 공유하는 것
2. 어떤 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주는 것
3. 친목, 동료애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에 묘사된 “코이노니아”는 “함께 무언가를 누리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친교”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식사


이런 “코이노니아”의 형태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예배 시에 이루어졌던 친교의 식사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매 주일마다 성찬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찬식과 별개로 신도들이 함께 모여 자신들의 음식과 물품들을 챙겨와 함께 나누며 돕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랑의 식사는 예수께서 죄인들과 식사하시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을 교회 내에서 그대로 실현하고 실천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묘사된 “떡을 떼며”는 성찬식을 묘사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성도들이 널리 행했던 함께 식사를 즐기며 교제하는 공동의 모임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예배 모임의 시간은 상당히 즐거운 분위기로 진행되었습니다. 후스토 곤잘레스(Justo L. González)는 이런 모임이 신실한 회개나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갖는 등의 부정적인 감정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고 지적합니다.[각주:3] 그래서 초기 기독교의 모임의 성격은 사도행전에서도 상당히 행복하고 즐거운 경험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대한 기념과 축하에 대한 내용들이 식사 자리의 주요 화제였습니다.
 
초대 교회 교제의 분위기는 “기쁨과 감사”였으며, “슬픔이나 회개”가 아니었습니다.[각주:4] 그리고 이런 친교의 중심에는 “식사”라는 것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신자들은 자신의 소유 중에서 좋은 음식들이나 헌납물 등을 가지고 모임에 참석하였으며, 공동의 식사 시간에 이것을 사랑으로 서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거나 특별한 어려움, 가난에 있는 자들을 위해 성직자들은 이것을 보관하였다가 필요에 따라 배분하였습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 Martyr)의 다음과 같은 묘사는 그들의 모임의 성격을 잘 묘사해줍니다:

“일요일이라 불리는 날에 도시와 촌락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 사도들의 회고록(복음서들)과 선지자들의 글(구약성경)을 낭독한다. 독서자가 낭독을 끝내면, 사회자가 이 아름다운 교훈을 따라 살라고 말로 권면한다. 그 뒤에 곧바로 사람들이 일어서서 기도를 올리며, 이후에 빵, 포도주, 물이 제공된다. 사회자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며 음식에 대해 감사하고, 회중들은 ‘아멘’이라 화답한다. 그러면 축사된 음식들이 분배되어 성도들이 참여하며,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집사들이 음식을 보낸다.

원하는 자들은 자유롭게 좋은 것들을 모임의 사회자에게 헌납한다. 이것으로 사회자는 고아와 과부, 그리고 병들거나 어떤 이유로 인해 이것이 필요한 자들에게, 또는 감옥에 갇히거나 나그네로 체류하는 자들을 섬긴다.”[각주:5]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공유하고 이를 어려운 사람들과 공유한다.”[각주:6]

 
이 모임의 사랑의 성격은 공동의 식사 이전에 거의 언제나 “평안의 키스”의 시간으로 이것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각주:7]
 
헤르만 바빙크(H. Bavinck) 역시 초기 기독교의 사랑의 식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초기에 성찬은 일상적인 식사와 연관되었다. 그래서 보다 부유한 교회 회원들은 이 식사를 위해 필요한 재료들, 떡, 포도주, 기름, 우유, 꿀 등을 가져왔는데, 이것들은 아마도 집사들에 의해 받아들여져 감독을 위해 주된 식탁과 보조 식탁에 놓였고, 식사 때 사용되었고 그 뒤에 봉사자들의 생활 유지와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사용되었다.”[각주:8]

“교회의 집회소마다 사람들이 교회의 회원들로서 함께 사랑의 식탁과 주의 만찬을 즐기기 위한 하나 이상의 식탁이 있었다. 교회의 부유한 회원들은 주로 자신들이 재배한, 자연의 선물을 이 식탁에 놓아두어 가난한 회원들이 이것을 사용하고 나중에도 여전히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식탁들은 주의 식탁들이었다. 여기에 놓여진 것은 주님께 속했다. 사람들이 이 식탁에서 사용한 것은 주님의 음식과 음료였으며, 여기서 남아 분배된 것은 주님의 선물이었다. 예루살렘의 일곱 사람은 이제 이 식탁들을 섬기도록 임명되었다. 즉, 그들은 식사 때 사람들을 돕고 더 나아가 성도들의 필요를 따라 주님의 선물을 공평하게 나누어 주도록 임명되었다.”[각주:9]

 
공동의 식사는 본래 유대인들이 절기를 지킬 때에 가족 친지들과 함께 식사를 즐기는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교회 공동체 전체로 확대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안에서 참으로 형제이며, 자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것을 형제애를 나누는 “사랑의 잔치”, “사랑의 식사”라고 불렀습니다.[각주:10]
 
바클레이(John M. G. Barclay)는 이러한 공동의 식사 교제가 기독교 공동체의 생활에서 핵심 요소였다고 말합니다.[각주:11] 초대 교회 신자들은 대접하는 것(롬 12:13), 친교의 식사(롬 14:1-2), “거룩한 입맞춤”(롬 16:16)에 따라 모든 민족적 차이와 신분의 차이를 초월하는 새로운 사회적 사랑을 실천합니다.[각주:12] 이것이 그들의 모임을 정의하는 가장 핵심적 본질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어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만든 것은(고전 11:21-22) 성찬식과 함께 이루어졌던 공동의 식사와 관련하여 발생한 문제였습니다. 부유한 자들은 자신들의 좋은 음식을 가져와 빈곤한 자들, 약자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본래 이 공동 식사의 올바른 취지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부유한 자들은 사회적 지위가 높고 고귀한 명예를 가진 자들끼리 어울려 소위 “엘리트 그룹”을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도들을 두 부류로 암묵적으로 나누고 차별하였습니다. 상류 사회에 속한 고귀한 신분의 신자들은 자기들끼리 좋은 음식으로 서로 대접하면서 “최고급 손님”들을 위해 트리니클리니움이라는 좋은 방에서 비스듬하게 누워 식사를 즐겼습니다. 반면에 사회적 지위가 낮은 비천한 신자들은 아트리움(복도)에서 “이류 식객”으로서 남은 음식과 값싼 포도주를 제공 받았습니다.[각주:13] 그리고 바울은 이것에 대해 매우 비판적입니다(고전 11:22).
 

1세기 기독교인들이 식탁 교제를 나눈다.

 
 
 
 


 
 
 

이웃을 사랑하는 모임


공동 식사의 분위기가 즐거움과 사랑, 그리고 연약한 자들을 돕고 그들과 함께 생활과 모든 것을 공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 신자들의 일상은 타인을 돕는 것에 매우 익숙하게 습관화되어 있었습니다.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의 권리를 일정 부분 포기하는 것, 이것이 초기 기독교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 중 하나입니다.
 
회중들이 자유롭게 내는 헌금은 집사들에 의해 빈민 구제의 목적으로 활용되었습니다.[각주:14] 그리고 이런 교회 내의 보편적인 문화는 기독교인들의 위대한 이웃 사랑의 실천과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삶의 양태로 나타나게끔 만들었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가 공동의 식사를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 식사는 다소 지나치다 싶을 만큼 넉넉했다. 그러나 가난한 자를 위하는 것이라면 다소 많은 비용이 들어도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가난한 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는 사랑의 식사이기 때문이다.”[각주:15]

 
그래서 이교도들은 기독교인들을 보며 “보라, 저들이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가!”하고 감탄하곤 했습니다.[각주:16] 그리고 이런 보편적인 형제 사랑은 가난한 자들, 병자들, 과부들, 고아들, 나그네들, 갇힌 자들에 대한 극진한 선행으로 표현되었습니다.[각주:17] 초기 기독교는 모든 지교회마다 구제를 담당하는 그룹이 존재했으며 매 공예배 때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연보를 했습니다.
 
집사 라우렌티우스(Laurentius)는 이교도인 로마 장관에게 교회의 과부들, 고아들, 시각 장애인들, 불구자들과 병자들에 대하여 “교회의 가장 소중한 보물들”이라고 소개했습니다.[각주:18] 이런 자들을 마치 그리스도에게 하듯이 환대하고 섬기고 보살피고 귀한 옷과 음식으로 섬기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 주부, 특히 여성 집사들의 의무로 권장되었습니다.
 
기독교를 혐오했던 루키아누스(Lucianus)는 기독교인들을 광신자들로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결핍을 돕는 열정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것도 아끼지 않는다. 그들의 첫 입법가가 그들의 머릿속에 그들이 모두 형제들이라는 생각을 넣어주었다.”[각주:19]

 
그리고 이런 아름다운 사랑의 선행은 비단 교회 공동체나 가정 내에서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살아가던 사회 전반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마다 교회와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재물을 헌납했습니다. 사회에 재난 상황이 있을 경우 주교들은 금식을 선포하고 특별 헌금을 모아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구제했습니다. 심지어 이것은 자신들을 박해하는 원수들을 향해서도 그러했습니다.
 
필립 샤프(Philip Shaff)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갈루스 치하에 박해가 자행되는 동안(252) 카르타고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이교도들은 감염을 우려하여 시체들과 환자들을 거리에 버리고 도망치는 한편,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전염병이 돌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키프리아누스는 자기 교인들을 소집하여 원수들을 사랑하라고 권고했으며, 그 권고를 들은 교인들은 모두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섰다. 부자들은 돈을 내고 가난한 자들은 노동력을 제공하여서 시체들을 매장하고 병자들을 간호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으며, 이렇게 해서 폐허가 될 뻔한 도시가 되살아났다.”[각주:20]

 
마찬가지로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이교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여러분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을 해하려고 음모를 꾸미기는 커녕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고 선을 행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여러분의 신들에게 아무것도 갖다 바치지 않지만 여러분 가운데 가난한 자들을 구제한다는 것과, 우리가 여러분의 거리에서 내는 구호금이 여러분이 여러분의 신전에서 내는 예물보다 더 많다는 것을 여러분은 잊고 있습니다.”[각주:21]

 
초기 기독교가 사회의 약자들을 구제하는 삶을 사는 것에 많은 시간과 비용을 쏟았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오죽이나 했으면 어떤 이교도 황제는 “불경한 갈릴리인들은 자기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까지 먹이고 입힌다”라고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의 식탁 교제, 곧 서로 사랑하는 것을 실제적으로 실천하는 교제가 기독교인들의 모임의 중심이자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기독교에 입교하는 동시에 가장 먼저 배웠던 것은 바로 서로 사랑하는 법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회를 향하여 봉사하고 섬기는 것을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좋은 기관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결론


초기 기독교의 “코이노니아” 정신은 “우리들끼리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약자들과 함께 공유하고 함께 누리고 함께 섬기는 것이 참된 기독교 모임의 특징임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초대 교회의 이런 모임의 사랑의 성격은 기독교가 로마 제국 전역으로 아주 빠르게 퍼져 나가는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바로 그 방식으로 복음을 전파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런 구제 사역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교회는 사랑의 구제 사역이 가장 잘 진행될 수 있도록 기능하였으며, 교회 안에 돈이나 보물들을 쌓아놓지 않고 사회를 향해 베풀고 개방하였습니다. 고대 로마 제국에서 신전들은 은행의 역할을 하여 시민들의 돈을 쓸어 담았지만, 교회들은 신자들의 헌금을 사용해 사회의 시민들을 섬기는 데에 썼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대침에서 하는 모임의 성격은 이것과 비교했을 때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대침은 “성도는 가난해도 교회는 부유해야 한다”라며 교회의 건물을 늘리고 복음 전파를 명목으로 막대한 자금을 운용합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교단의 회원을 늘리기 위해서 돈을 가장 많이 사용합니다. 건축, 하계수양회, 선교 등등 거의 모든 것이 교회 회원을 늘리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들은 사회의 약자들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교회 내의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건축헌금을 작정하는 자들이 무리하여 헌금하기라도 하면, 그것은 그 사람의 사정이지 자신들이 알 바가 아니란 태도를 취하곤 합니다. 오히려 교회는 그런 가난한 자들을 위해 모금을 해야 하며 그들의 생활을 지원하는 것을 가장 큰 목적으로 설정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사회의 빈자들을 구제하는 것보다 전도집회나 건축을 위해 돈을 더 많이 사용한다는 것은 정말 비극입니다. 하계수양회에 비용을 지출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혹자는 이것이 예수께 바쳐진 향유 옥합처럼 불쌍한 이웃을 돕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가장 작은 자에게 베푼 것이 곧 예수께 베푼 것입니다(마 25:40). 만약 예수님을 가장 잘 섬기려 한다면, 우리는 주변의 불쌍한 자들을 위해 우리의 재물을 사용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사실상 이것은 예수님의 삶을 따라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걸어갔던 길을 인생 속에서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이전에 “구원파의 윤리적 실패”에 대해 다룬 글에서 말한 것처럼, 교회는 “나는 천국 간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양산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아니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같은 사람”을 만드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같은 인간”을 늘려 나가기 위해 전도하고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교회의 건물을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유익을 위해 병원, 학교, 고아원, 보호 기관 등을 짓는 것을 위해 돈을 사용해야 합니다.
 
또한 만약 복음 전파를 위해서라고 해도, 사회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사회 속에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초기 기독교가 로마 제국을 장악하고 매우 빠른 속도로 번졌던 것은 그들이 선교 단체를 조직해서가 아닙니다. 켈수스(Celsus)가 말한대로, 그들은 부엌에서, 가게에서, 시장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일상을 보내는 중에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각주:22] 건물을 크게 확장하고 새로운 행사를 열고 선교 단체를 조직해서 전도하는 것은 본래 사도들이 취했던 전도 방식이 아닙니다. 목회자들이 시원한 방에 앉아서 성경 공부를 하다가 설교하고 다시 자기 방으로 가버리는 것은 이들의 복음 전파 방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들은 그 현장으로 들어가 병자들, 빈자들, 범죄자들, 정신병자들과 함께 몸을 부대꼈습니다. 사도들 뿐 아니라 일반 평신도들도 일상 속에서 섬기는 모습을 통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예수의 사랑의 정신을 몸소 보여줌으로 전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모임은 엄숙하지도, 무겁지도, 우울하지도, 고요하지도 않고 즐겁고 사랑스러우며 기쁨이 가득합니다. 교제를 할 때에 자존감을 깎는 듯이 서로의 부족한 면이나 전도할 대상에 대한 실패들을 나누며 죄책감에 시달리지도 않습니다. 이들은 전도를 못하는 것에 대해 고민한 것이 아닌, 어떻게 하면 더욱 사랑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예수를 사랑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해서 더욱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내의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돕는 것을 통해 행복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루키아누스가 제대로 본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들은 사랑에 미친 자들이었으며 예수의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따르는 광신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그 당시 교회는 부유하지 않았고, 가난했으며, 오히려 과부, 고아, 장애인, 빈자 등 사회적 약자들을 부유하게 하기 위해 힘썼다는 것입니다. “개인은 가난해도 교회는 부유해야 한다”라는 말을 이들에게 감히 제시할 수나 있을까요? “복음 전파”라는 명목 하에 이웃을 돕는 것에서 멀어지고 전도집회, 선교, 건물 올리기에 열중하는 교회를 이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모임에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회, 예수와 같은 사람들을 양성하는 교회, 그리고 그것을 위해 시간과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는 교회의 모임에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회에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그런 모임에 우리는 나가야 합니다.
 
물론 저는 이런 이상적인 상태의 모임을 현대의 교회가 완전히 잘 충족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모임과 거리가 있는 교제나 행사에 참석할 의무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대침에서 나와 일반 교단에 다니면서 상당히 흥미로웠던 점은 그들의 모임이 대침의 것과 상당히 달랐다는 것입니다. 어떤 지역교회는 지역 사회에 교회의 마당이나 건물이나 주차장을 개방했으며, 주말에 에어바운스나 간식들을 통해 지역 아동들이 자유롭게 뛰어 놀고 시원한 음료를 마음껏 마실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봉사에는 많은 성도들이 자원하여 동네를 돌아다니며 어려움을 살피고 필요한 것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수련회는 참석이 매우 자유로웠습니다. 심지어 어떤 교회의 성도 분들은 자기 교회의 수련회에서 평소에 뭘 하는지 잘 모르기도 했습니다. 제가 목격한 어떤 교회의 수련회는 말이 수련회이지 형제 자매들의 순수 친목을 위해 즐거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교회는 그런 좋은 환경과 재밌는 놀이를 위해 비용을 지출했으며 아무도 참석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흔히 한국에서 기독교가 “개독교”라 욕 먹은 것은 이들이 복음을 전파해서가 아닙니다. 즉 이들은 복음 전파 때문에 핍박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다는 자들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었으며 자기들끼리 잘 먹고 잘 살려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혐오감이 들어서 그렇게 불리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사회에 아무런 유익을 끼치지도 않으면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부르짖는다면 과연 누가 예수님을 따르고 싶어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간디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웃 사랑에 무관심한 기독교인들을 반성하도록 만듭니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닮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이 아닌 이상, 대침이 말하는 “모이기를 힘쓰라”라는 말을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아무리 그들이 “복음 전파”를 부르짖는다고 하여도 말입니다.
 
간혹 대침에 다니시는 분들 중에 대침의 교제를 빠져도 되는지 댓글 등을 통해 물어보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는 그것이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떤 모임이냐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대침에서 하는 모임들은 굳이 참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복음 전파는 반드시 대침의 방식을 따를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그들의 교제에 모이기를 힘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방식대로 복음을 전파하길 노력하는 교회의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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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iedrich Hauck, “κοινός, κοινωνός, κοινωνέω, κοινωνία, συγκοινωνός, συγκοινωνέω, κοινωνικός, κοινόω”, ed. Gerhard Kittel, Geoffrey W. Bromiley와/과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 796. [본문으로]
  2. Ibid. [본문으로]
  3. Justo. L. Gonzalez, The Story of Christianity: Volume 1: The Early Church to the Dawn of the Reformation, HarperOne, 2010, 117. [본문으로]
  4. Ibid. [본문으로]
  5. 후스토의 영역본과 필립 샤프 한글 번역본의 내용을 토대로 필자가 번역한 것이다. [본문으로]
  6. Ibid., 120. [본문으로]
  7. Ibid. [본문으로]
  8. H.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vol. 4, trans. Tae Hyeon Park, Revival & Reformation Publishing, 2016, 649. [본문으로]
  9. Ibid., 408. [본문으로]
  10. 『성경문화배경사전』, 602. [본문으로]
  11. John M. G. Barclay, Paul and the Gift, trans. Il Song, Holy Wave Plus Publishing Company, 2019, 851. [본문으로]
  12. Ibid. [본문으로]
  13. Anthony C. Thiselt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trans. Ji Cheol Sin, Holy Wave Plus, 2022, 54. [본문으로]
  14. Philip S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2, trans. Gil Sang Lee, Christian Digest Press, 2014, 232. [본문으로]
  15. 『성경문화배경사전』, op. cit. [본문으로]
  16. Philip Shaff, op. cit., 358. [본문으로]
  17. Ibid. [본문으로]
  18. Ibid., 359. [본문으로]
  19. Ibid. [본문으로]
  20. Ibid., 360. [본문으로]
  21. Ibid. [본문으로]
  22. Justo. L. Gonzalez, op. cit., 12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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