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이하 대침)의 신도들 간의 커뮤니티 사이트인 “깨어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하 깨사모)에 2022년 4월 26일에 “바자회 유감”이라는 제목의 글이 성경질의응답 카테고리에 올라왔다. 질문자는 거기서 비록 바자회가 선교 등 좋은 목적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알고 있고,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이라고 하면서도 요한복음 2장 16절 본문을 인용하며 교회 당에서 물건을 파는 행위가 아무리 목적이 좋다고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 책망 받는 행위가 아닌 것인지 염려한다. 즉 좋은 목적이라고 할 지라도 방법이 성경적이지 않다면 옳은 것이 아닌 것 같다는 것이다.
몇 주 뒤인 2022년 5월 28일에 서울중앙의 상담인1 형제는 이에 대해 답변을 달았다. 그는 장사를 하는 것 자체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답변을 피하면서,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뜰에서 장사를 하였고, 곧 이방인들을 종교적으로 차별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라는 내용의 대답을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어구에서 “만민”이 강조된다며 이방인의 공간을 뺏은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라는 자신의 논지를 강화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복음을 위해서 죄가 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우리는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복음을 위해 바자회를 여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여기서 상담인1 형제라는 그가 생각하는 논지가 명확하게 무엇인지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는 단지 이방인을 차별하는 유대인들의 행동을 지적한 뒤에 갑자기 복음을 위해 최선을 다 해야 하며 따라서 복음을 위해 바자회를 하는 것은 문제 삼을 수 없다고 말할 뿐이다. (여기서 갑자기 어떤 논리적 비약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가 제시하는 이방인 차별에 대한 내용으로 해당 본문을 독해해야 하는 충분한 근거는 제시되지 않는다.
물론 필자는 교회 안에서 바자회를 열거나 장사를 하는 행위 자체를 막아야 한다고 굳이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행위들에 “복음을 위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에는 반대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이런 종교적 이유를 목적으로 하는 행위는 언제나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이 동원되거나 거절하지 못할 분위기가 형성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대침 외에 다른 한국 교회들 내에서 이루어지는 장사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필자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번 글에서는 과연 서울중앙의 상담인1 형제가 주장하는 “이방인에 대한 차별”이 해당 본문에서 핵심적인 주제이며 또한 예수께서 분노하신 이유인가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겠다. 아울러 그렇다면 해당 본문, 그리고 이 본문을 넘어서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실 때에 그토록 분노하신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또한 현재 대침이 교회 내에서나 하계수양회 등에서 여러가지 물품들이나 굿즈(Goods)들을 판매하며 수익을 올리는 그런 행위들이 과연 “복음을 위해서”라는 동기로 합리화가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언급할 것이다.
성전 정화 사건은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21장 12-17절, 마가복음 11장 15-19절, 누가복음 19장 45-48절, 요한복음 2장 13-22절이 그것이다. 학자들은 과연 이 여러 본문들이 하나의 성전 정화 사건을 다루고 있는지, 아니면 적어도 두 번 이상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번 글에서는 그것에 대해 다루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전 사건이 단일한 사건이든 아니든, 예수께서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보고 분노하시며 행동에 나서신 것에 대한 동기나 목적은 별반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당 본문들에 대한 것을 종합적으로 취급하여 살펴볼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상업적 상황
1세기에 예루살렘 성전 내에서 상업적인 행위들이 있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요한복음 2장 14절에서는 “소와 양과 비둘기”가 성전 안에서 판매되고 있었다고 증언한다. 소, 양, 비둘기는(“βόας καὶ πρόβατα καὶ περιστερὰς”) 성전의 희생제사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려는 사람들, 특별히 상당히 먼 거리에서 예루살렘 명절을 맞아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이었다.
특별히 제 2성전기의 유대인들이 상당히 디아스포라화 되어 있던 것을 고려할 때 명절에는 유대아(Judea) 지역 바깥의 외국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명절을 지키기 위해 모여야 했을 것이다. 당연히 이렇게 장거리 여행을 하는 유대인들이 짐승을 자기들이 사는 곳에서부터 끌고 올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는 중에 희생제물을 구입하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예루살렘 안에서 희생제물을 마련해야 했다.
요한복음의 본문은 추가적으로 돈을 환전하는 환전상들(“καὶ τοὺς κερματιστὰς”) 역시 함께 앉아 있었다고 증언한다(요 2:14). 그리고 절기를 지키려는 자들에게 환전상의 존재는 상당히 중요했다. 왜냐하면 세계 곳곳에서 모여드는 유대인들은 각자가 거주하는 국가들의 다양한 화폐들을 갖고 있었고 이것은 통일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화폐들을 성전에서 한번에 거둬들인 뒤 일일이 단일한 주화로 바꾸는 것은 무리였다. (각 화폐마다 은 함량에서 차이가 있었다.) 더욱이 20세 이상의 남성들이 바치는 성전세는 반드시 은의 함량이 가장 높은 ‘두로의 은화’로만 드려져야 했기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순례객들은 자신들이 가져온 다양한 주화들을 환전상을 통해 두로의 은화로 교환해야 했다. 이 때 환전상들은 교환의 대가로 일정한 수수료를 받았다. 1
본래 이런 상업적 서비스는 성전에서 떨어진 기드론 골짜기 너머, 곧 감람산 비탈길에 위치해 있었다. 기드론 골짜기 너머라는 장소는 성전으로 직접 곧바로 출입할 수 있는 ‘황금문’과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성전으로 제물과 성전세 등을 가지고 들어가려는 순례객들에게 적절한 편의성을 제공하면서 성전 경내를 침입하지 않는다는 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후에 점차 이 상업적인 시장은 성전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2
우리는 유대인들이 순례자들에게 희생제물을 공급하려는 상업적인 서비스를 제공한 것 자체를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 수많은 인파가 예루살렘 성전에 몰려들 때 정상적인 예배가 이루어지려면 당연히 수많은 동물들이 제 때에 공급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기드론 골짜기 너머의 상점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이러한 요구와 성전의 공적인 명절의 진행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성전에서 예배가 시작된 이후로 이러한 제물을 판매하는 사업들은 끊임 없이 존재했다. 환전상들의 주화 교환의 행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 자체를 우리는 비판해서는 안 된다. 3
마찬가지로 샌더스(E. P. Sanders)는 유대인들의 상업적 행위를 다루면서 성전 당국자들이 이러한 편리한 서비스를 마련했다고 언급한다. 그러면서 갈릴래아 사람이 만약 비둘기를 바치려 한다면, 비둘기를 갈릴래아에서부터 운반하여 가지고 오는 것 보다 갈릴래아에서 비둘기를 판매한 뒤 그 돈으로 성전 근처에서 품질보증을 받은 흠 없는 비둘기를 구입하는 것이 나았다고 지적한다. 샌더스와 함께 많은 학자들 역시 이러한 서비스가 성전 당국자들에 의해 제공된 것은 모세의 토라가 말하는 것을 적절하게 지키기 위함이었음을 인정한다. 4
이방인의 뜰이 문제의 핵심인가?
성경에서 명확하게 짚어주지는 않지만, 기드론 골짜기 너머에 있던 상인들이 성전 내에서 들어와 장사를 했던 곳은 아마도 ‘이방인의 뜰’이라 불리는 ‘바깥뜰’에 해당했을 것이다. 이곳은 ‘성전 뜰’이었으며, 성전 건물의 가장 바깥에 위치해 있었다. 5 바리새인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매매 행위가 성전 안으로 들어오는 것에 대해 일반적으로 반대한 듯이 보이지만, 성전 당국자들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었던 사두개인들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상관 없다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6 7
이 점에 착안하여, 그리고 마가복음 11장 17절의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어구에 근거하여, 어떤 학자들은 이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매매하는 행위 자체에 있다기 보다는 이방인의 뜰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만든 것에 있다고 주장하였다(Barrett 등). 또한 이러한 주장은 부분적으로 공관복음서의 "강도의 굴혈"에서 “강도”라는 용어로 번역된 “레스테스(λῃστής)”와의 관련성에 호소하기도 한다. 즉 만민이 예배를 드리는 보편적 장소인 성전을 유대인들이 “민족주의의 요새”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8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견해를 다른 것들과 함께 아울러 취급하거나, 혹은 핵심에서 다소 벗어나 있는 것이라 여긴다. 성전 정화 사건이 기록된 본문들에서 과연 이방인에 대한 관심이 진지하게 표현되고 있는가, 그리고 이것이 곧 예수께서 분노하신 것의 주요 원인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증명된 것이 없으며 근거가 부족하다. 또한 본문은 오히려 “민족주의”의 무언가에 집중하기 보다는 “장사하는 것” 자체를 강조하는 것 같다. 이방인의 뜰에서 좌판을 벌려 놓은 것을 순수한 예배를 위협하는 것으로 여길 여지는 존재하지만, 아마도 그것이 문제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성경 본문은 이방인의 뜰에 대한 것을 강조하지 않으며, 따라서 예수께서 성전 정화를 하신 장소가 이방인의 뜰이었던 것은 어떤 민족주의적인 무언가를 비판하기 위한 결정적 사건이 아니라 우연의 일치로 보는 것이 더 낫다. 9 10
더욱이 공관복음서가 기록하는 “강도들의 굴혈”과 다르게(마 21:13; 막 11:17; 눅 19:46), 요한복음에서는 이것이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로 더욱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요 2:16). 만약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예배에서 소외시키는 차별이 성전 정화 사건의 가장 주요한 현안이었다면, 어째서 다른 공관복음서에서 등장하는 “강도의 굴혈”이라는 지적이 요한복음 2장 16절에서 사라지며, 그 대신 “장사하는 집(οἶκον ἐμπορίου)”, 곧 “시장의 집”이라는 더 노골적인 용어로 이것이 표현되는 것인가? 이러한 강조점의 변화들은 소위 “민족주의적 차별”이 성전 정화 사건의 핵심적인 주제라는 주장에 의문을 표하게 만든다.
또한 1세기의 역사적 상황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차별했다는 것이 핵심 문제라는 주장 자체가 설득력이 부족함을 보여준다. 솔로몬의 성전에서 이방인들이 환영을 받았던 것처럼(왕상 8:41-43), 제 2성전기에도 이방인들은 여전히 성전에서 환영을 받았다. 1세기 유대인들의 상황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유대교로 개종하려는 이방인들, 소위 “문의 개종자들”이 상당히 많았으며 이들이 기독교 선교의 주요 타겟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런 문의 개종자들을 기쁜 마음으로 환영하였다. 요세푸스 역시 유대인과 이방인이 두 성전에 예배드릴 수는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하나됨에 호소하여 이방인들을 환영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11 12
물론 성전의 최외곽에 위치한 이방인의 뜰은 예배의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언제든지 소외될 위험을 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방인들을 이곳에서 예배 드리도록 한 것은 어떤 민족주의적 차별 때문이 아니라 정결 문제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크레이그 키너(Craig S. Keener)는 이방인 차별이 마가복음의 본문에 있어서는 그렇게 해석할 가능성이 있을 수 있을지라도 요한복음에 있어서는 그것이 강조점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고 옳게 지적한다. 13 14
또한 마가복음 11장 17절에서 기록하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을 통해 성전 정화 사건의 핵심 사안이 민족주의에 대한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근거가 부족하다. 왜냐하면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는 용어를 오직 마가복음에서만 그대로 기록하고 있고, 다른 공관복음서들에서는 “만민”이 제외된 채 오직 “기도하는 집”으로 표현되는 것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만민”이라는 보편성을 의미하는 단어가 생략된 것은 여기서의 강조점이 민족적인 무언가에 있다기 보다 “순수한 예배”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 15
특별히 크레이그 에반스(Craig A. Evans)는 이 본문이 이사야 56장 7절을 예수께서 인용하신 것임을 지적하면서, 이사야 56장 7절만을 주목하지 말고 열왕기상 8장 41-43절 역시 함께 고려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인용하시는 이사야 56장 7절은 열왕기상 8장에 나오는 구절들과 어휘에서 병행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16
“또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아니한 자 곧 주의 이름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온 이방인이라도 저희가 …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무릇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호 이루사 땅의 만민으로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옵시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 (왕상 8:41-43)
그리고 이상적인 성전의 역할을 설명하는 이 본문은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요세푸스의 전임 대제사장이었던 예수 벤 가말라(Jusus ben Gamala)는 솔로몬의 이 기도와 이사야 56장 7절을 의식하여 성전이 “그 명성을 듣고 땅 끝에서 온 이방인들에게 높임과 존귀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 말은 성전의 당국자들이 당시의 성전이 성경에서 요구하는 역할에 충실하여 잘 운영되고 있었다고 변증하는 목적의 말일 것이다. 17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의 이러한 시각 자체에 도전하고 계신 셈이다. 예수께서 공관복음서에서 “강도의 굴혈”을 말씀하신 것은 예레미야 7장 11절을 인용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여겨진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7:11)
또한 같은 본문 6절에서 “이방인” 외에도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렘 7:6)
즉, 공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인용하신 두 가지 본문은 그 방점이 “이방인에 대한 차별의 여부”에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성전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순수하게 기능하고 있는가”에 찍혀 있는 것이다. 특히 예수께서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의 시스템을 새로운 메시아 시대의 참된 예배로 변혁시킬 것을 강조하셨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여기서 이방인에 대한 민족주의적 관점만을 예수께서 비판하셨다고 여기는 것은 부적절할 것이다.
성경 본문이 증거하는 것은, 예수께서는 분명하게 성전 경내에서 짐승들을 사고 파는 매매 행위를 중심으로 하여 성전 체제에 관한 관심으로 이의를 제기하셨다는 점이다. 18
폭리를 취해서 비판한 것인가?
몇몇 학자들의 경우에 성전 당국자들의 부정부패에 호소하면서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것의 핵심은 성전 내에서 장사를 하였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부정한 방식으로 폭리를 취하고 경제적인 착취 시스템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분명히 1세기 유대아에서는 성전 당국자들의 부정부패가 존재한 것은 맞았다.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문서들에서 대제사장들은 빈자들의 재산을 빼앗고 부를 축적하며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히는 악한 제사장들로 묘사된다. 요세푸스나 바룩2서, 그리고 후대의 랍비 문헌들 역시 1세기의 고위 제사장들에 대하여 동일한 목소리를 낸다. 예수께서 과부의 두 렙돈을 두고 말씀하신 것 역시 이와 같은 배경과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른다. 19
하지만 과연 예수께서 성전 당국자들이 성전의 사업 시스템을 남용하고 있는 것에 대해 비판하시려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을까? 즉, 성전 내에서 장사하는 것 자체는 괜찮은 일이었으나 제사장들이 그것을 남용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정직하게 착취하였기 때문에 성전을 정화하신 것일까?
많은 학자들은 분명 대제사장들이 부정한 방식으로 폭리를 취한 사례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긴 하지만, 그것이 여기서의 핵심 사안은 아닐 것이라는 것에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만약 예수께서 경제적 착취를 하고 있는 성전 당국자들을 콕 집어서 비판을 하려 하신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행동의 대상은 바깥뜰에서 실제 장사하고 있는 상업 노동자들을 향할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들을 향하는 것이 더욱 적절했을 것이다. 20
더욱이 대부분의 학자들은 유대 문헌들에서 성전에서 희생제물을 파는 것에 있어서 실제적인 비리나 사기적 행동이 두드러지게 존재했다는 근거는 적다고 말한다. 분명 성전의 상업 시스템을 악용하는 사람들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비리들이 만연했을 것이라는 증거는 부족하다. 21 화폐를 교환해주는 환전상들은 수수료를 얻었지만, 대중으로부터 불만을 거의 사지 않았으며, 대개는 도덕적으로 평판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22 예루살렘의 귀족층이 매매나 환전 등을 통해 성전의 사업을 이용하여 직접적인 이득을 얻었다는 증거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제사장들이 타락했다고 비판하는 유대 분파들의 문헌들에서도 제사장들이 성전을 통해 이익을 얻었는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23 24
매매하는 자들이나 환전상들이 성전 당국자들의 공인을 받은 ‘인증된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제사장들이 결탁하여 뇌물을 주고 받거나 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희생 제사를 위해 짐승들을 판매하는 것은 매우 잘 규제되고 있었고 또한 뚜렷한 부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25 성전의 장사하는 행위 자체는 매우 건전하고, 예배 중심적이며, 토라를 지키는 데에 부합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26
왜 분노하셨는가?
그렇다면 도대체 왜 예수께서는 성전 내에서 장사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셨을까? 이 장사 행위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으며, 당국의 공인을 받은 허가 받은 사업이었고, 뚜렷한 비리나 부정부패의 징후도 없었다면, 왜 예수께서는 이것을 비판하셨단 말인가?
D. A. 카슨(D. A. Carson)의 다음과 같은 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는 성전 당국자들이 성전 사업으로부터 경제적 폭리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예수께서 분노한 것은 그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상거래를 하는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이 ‘성전 정화 사건’은 그들의 윤리 의식을 개혁해서 올바른 삶을 살게 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상인들이 성전 경내에서 버젓이 영업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
그런 의미에서 보캄(Bauckham)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옳다. 즉, 그는 이것을 ‘성전에서의 예수의 시위’라고 부르면서, 이것은 ‘희생 제사 제도를 위한 모든 금전적 거래 전체에 대한 공격’이었고, 따라서 제사장 당국자들에게 엄청난 위협이었다고 말한다.” 27
대럴 벅(Darrell L. Bock) 역시 동일한 논점을 제시한다:
“성전에서의 예배를 책임지고 있던 사람들은 예배 드리려고 오는 사람들에게서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있었다. 예배 드리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여러 가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예배와 관련된 그 당시의 관행은 지나치게 상업주의적이었다.” 28
비슬리 머레이(George R. Beasley-Murray)도 동일한 강조점을 말한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은 신성 모독 행위로 여겨졌다. 즉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아마도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스가랴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환상 중 마지막 말씀에 대한 암시가 있는 듯하다. 즉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장사하는 자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슥 14:21, RSV).’” 29
성전의 예배를 위해 희생 제물을 판매하고 주화를 환전하는 서비스를 제공한 것은 토라가 전달하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고 좋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고안된 것들이었다. 이것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 있다. 단, 이것들이 기드론 골짜기 너머에 아직 위치해 있을 때에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성전 내부로 입점해 들어오면서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께 순전한 예배를 드리는 바람직한 모습에서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하나님께 순수한 참된 신령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적어도 예수께서는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신 분이셨다. 그는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으로 삼켜진 분이셨다(요 2:17).
성전의 당국자들이 이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은 그들의 관심이 하나님을 참으로 온전히 섬기는 것이란 무엇인가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심지어 그들의 관행은 바리새인들에게 조차 공격의 대상이 되었을 정도였다.
물론 성전의 당국자들은 자신들 나름대로의 억울한 면이 있을 지도 모른다. 수많은 순례자들에게 가장 효율적으로 희생 제물을 제공하려면 아무래도 황금문 밖에 시장을 위치시키는 것보다 성전의 이방인의 뜰에 입점시키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이지, 그들이 어떤 경제적 폭리를 취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을 좀 더 효율적으로, 그리고 편리하게 섬기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이것은 다소 불가피한 관행이며, 이 정도는 괜찮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것을 뒤집어 엎으신다. 예수께서 모든 사업 노동자들과 환전상들을 전부 쫓아내시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마 이 소란은 소규모였을 것이며, 근처 안토니아 요새에서 로마 군인들이 내려오지 않은 것을 볼 때 예수께서 철저하게 이들을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성전 내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으시면서 마치 선지자 예레미야가 항아리를 경고의 의미로 깨뜨렸던 것처럼(렘 19:10), 일종의 시위를 하신 것이다. 30
성전 당국자들은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데에 그들이 무능하며, 사실은 무관심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여러가지 현실적인 불가피한 상황들, 많은 순례객들과 그들의 다양한 국적, 희생 제물의 공급의 필요성 등등 때문에 성전 내에서 장사하는 시스템을 불가피하게 유지하고 있다고 변명할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을 가장 잘, 효율적으로 섬기는 방법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즉 ‘불가피한 신성모독’인 셈이다.
그렇다면, 좋다.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해결할 방법은 단 하나이다. 그것은 성전이나 제사장을 통한 예배 체계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요 2:19) 그리고 이제 모든 사람이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 신령한 예배를 직접 드릴 수 있게 되면 된다.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모든 사람이 이곳도 아니고, 저곳도 아닌,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리는, 그런 상태가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요 4:23-24). 그 때에 비로소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성전의 궁극적인 역할이 회복될 것이다.
결론
깨사모에 성전 정화 사건을 질문한 질문자는 요한복음 2장 16절 말씀을 보고 대침 내에서 장사하는 행위들에 대해 우려를 표한다. 그러나 상담인1 형제는 어떤 일부 학자들의 주장의 한 단편에 착안하여 해당 본문이 ‘장사’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 차별’에 초점이 있는 것이라 성급하게 주장하고 만다. 정작 ‘이방인 차별’을 주장하는 학자들 역시도 이것만을 핵심 주제로 내세우지는 않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성전 정화 사건은 성전 내에서 장사하는 행위를 하면서 순전한 예배에서 멀어지는 물리적 성전을 허물고, 새로운 시대의 참된 예배를 위해 예수께서 성전 그 자체가 되실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일종의 시위 장면으로 봐야 적절하다. 31
그렇다면 교회 내에서 장사를 해도 되는 것일까? 교회는 성전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 내에서 무엇을 하느냐 마느냐에 대해 이 본문을 통해 일대일로 직접 적용하는 것은 올바른 해석의 방향은 아닐 것이다. 필자는 교회 내에서 어떤 장사 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다만, 이런 장사 행위들을 “하나님의 일”이라거나, “하나님의 뜻”이라거나, “복음을 위하여”라는 명목으로 포장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혹은 이런 장사나 판매 행위를 하는 것에 참여하는 것을 독려하면서 마치 이런 것들을 하는 것이 신앙 생활을 열심히 잘 하는 것인양 주장해서도 안 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기기 위해서 이런 매매하는 행위들이 필요하다는 잘못된 인식을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한 편으로는 교회들이 무언가를 판매하고 이윤을 남기는 것들을 되도록이면 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비단 대침 뿐만이 아니라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로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 장사하는 것은 복음 사역을 위한 것이며, 그 어떠한 폭리도 취하지 않는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전 정화 사건을 살펴보면 그와 같은 정황 속에서도 예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비판적이셨다. 즉 쟁점은 어떤 장사 행위가 하나님을 위한 것이냐 아니냐가 아닌 것이다. 쟁점은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에 과연 장사하는 행위가 들어올 수 있느냐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에 대해 부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상담인1 형제가 “복음을 위해”서는 이런 장사하는 행위들을 “문제 삼을 수는 없을 것”이라 선언하는 것은 상당히 실망스러운 부분이다. 오히려 대침은 이런 지적이 들어올 때마다 더욱 조심하고, 되도록 이런 방식들을 교회 내로 들여오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려 노력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대침 내에 ATM이 들어서고 은행이 입점하는 것은 한국의 대형 교회들이 밟는 수순을 대침 역시도 동일하게 밟아 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치 기드론 골짜기 너머에 있던 상인들이 슬그머니 황금문을 넘어 이방인의 뜰 안까지 들어오는 것처럼, 교회라 불리는 곳 안으로 경제적 편의를 위한 장치들이 점점 침식해 들어오고 있다. 물론 그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동일하게, 당시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 역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위한 것이라 주장했다.
아마 대침이 하계수양회에서 매점으로 이윤을 남기고 여러 다양한 굿즈 상품들을 판매하는 것들 역시 신도들의 편리함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복음을 위해라는 명목으로 시행되고 있을 것이다. 여러 지역교회의 사업을 하는 신도들이 전국 교회를 돌며 자신들이 장사하는 상품을 소개하고 비싼 값에 판매하는 것들 역시 하나님을 위한다는 목적 아래에서 얼마든지 합리화 되고 있을 것이다.
동일한 합리화는 오직 하나님만이 경건하게 울려 퍼져야 할 예배 시간, 곧 설교 시간에 수양관 건축 헌금을 독려하고 복음을 위해 재산을 바치라는 설교 내용에서 절정을 이룬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이 얻는 이득은 별로 없다고 주장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복음을 위해 효과적이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 마치 희생 제물 판매자들과 환전상들이 사람들의 편의와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이유 때문에 황금문을 넘어 갔던 것처럼 말이다.
예수님을 통해 필자가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하나님께서는 효율적인 편리함 보다 순수한 어린 마음을 더 좋아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전의 이런 소위 효율적인 시스템 전체를 폐기하시며 더 나은 것으로 회복시키는 분이시다.
우리가 유대인들의 성전을 통하지 않고도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처럼(요 4:23), 복음을 위해 반드시 교회가 하는 ‘장사하는 일’을 통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는 분이 아니다. 우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오로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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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NTC), trans. Mun Jae Park, Solomon Press, 2017, 316. [본문으로]
- Ibid. [본문으로]
- E. P. Sanders, Jesus and Judaism, trans. Jeong Hui Lee, rMAENGe, 2022, 114. [본문으로]
- Ibid. [본문으로]
- Craig A. Evan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34B Mark 8:27-16:20, trans. Cheol Kim, Solomon Press, 2001, 347. [본문으로]
-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NTC), trans. Mun Jae Park, Solomon Press, 2017, 316. [본문으로]
- E. P. Sanders, Jesus and Judaism, trans. Jeong Hui Lee, rMAENGe, 2022, 111. [본문으로]
-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NTC), trans. Mun Jae Park, Solomon Press, 2017, 317. 각주 16; Donald A. Hagner,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33B Matthew 14-28, trans. Cheon Seok Chae, Solomon Christian Press, 2000, 943. [본문으로]
- Carson이 이 문제를 각주 16에 살짝 언급하고 지나가는 것에 주목하라. [본문으로]
- E. P. Sanders, Jesus and Judaism, trans. Jeong Hui Lee, rMAENGe, 2022, 123. [본문으로]
- Craig S. Keener,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II, trans. Ok Yong Lee, Christian Literature Center, 2018, 1512. [본문으로]
- Ibid. [본문으로]
- Ibid. [본문으로]
- Ibid., 1513. [본문으로]
- Darrell L. Bock, Luke 9:51-24:53, trans. Gi Cheol Sin, Revival & Reformation Publishing, 2017, 917. [본문으로]
- Craig A. Evan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34B Mark 8:27-16:20, trans. Cheol Kim, Solomon Press, 2001, 35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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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raig A. Evan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34B Mark 8:27-16:20, trans. Cheol Kim, Solomon Press, 2001, 342. [본문으로]
- E. P. Sanders, Jesus and Judaism, trans. Jeong Hui Lee, rMAENGe, 2022, 119. [본문으로]
- Ibid., 각주 39. “내가 아는 한 그러한 증거는 없다.” [본문으로]
- Craig S. Keener,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II, trans. Ok Yong Lee, Christian Literature Center, 2018, 1510. [본문으로]
- Ibid., 1511. [본문으로]
- Ibid., 1512. [본문으로]
-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NTC), trans. Mun Jae Park, Solomon Press, 2017, 31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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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NTC), trans. Mun Jae Park, Solomon Press, 2017, 317. [본문으로]
- Darrell L. Bock, Luke 9:51-24:53, trans. Gi Cheol Sin, Revival & Reformation Publishing, 2017, 91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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