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13장 5절: 구원 확신을 해야 한다는 본문인가?

대한예수교침례회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13장 5절: 구원 확신을 해야 한다는 본문인가?

바잇 카탄 2024. 9. 19. 19:01

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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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확실하게 구원의 상태에 있는가에 대한 지식, 곧 구원의 확신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 구원에서 필수적인 조건이 아니라는 필자의 글을 접한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이하 대침) 사람들은, 대개 고린도후서 13 5절의 본문을 가져오며 구원 확신은 개인의 구원에서 필수적이다라고 주장하곤 한다.

 

필자는 분명하게 구원 확신은 구원에서 필수적 조건은 아니며, 반면에 구원 확신은 예수를 믿고 구원의 길에 있는 자가 가져야 할 것으로 권장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구원 받은 상태에 대해 언제나 100퍼센트 감각하고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확신은 주관적인 영역에 속한다. 그 대상이 객관적 대상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은 자신의 상태에 따라 강해졌다가, 약해질 수 있다.

 

이것을 구원의 필수적인 조건으로 만드는 것은 자기 자신이 구원을 얻었는가의 자의적 인식의 여하에 따라 자신의 구원을 판단하겠다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더욱이 대침 사람들이 타 교단의 기독교인들의 구원을 이 구원의 확신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그것은 더더욱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자의적 확신의 잣대에 근거하여 타인의 구원 여부 역시 판단하겠다는 것과 다를 것이 없어진다. 나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반대하는 바이다.

 

이제 대침 측에서 가져오는 고린도후서 13 5절의 본문을 다루면서, 필자는 그 본문이 구원의 확신을 우리가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보일 것이다. 바울은 해당 본문을 쓸 때에 그런 의미로 읽히도록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해당 본문의 문맥과 전체 주제, 그리고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특별히 고린도 교회에게 보내는 두 가지 서신에서 의도하고 있는 독자층을 추적하는 것을 통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고린도 교회가 처해 있던 상황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므로 먼저 필자는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편지 수신인들과 고린도 교인들이 처해 있던 상황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다. 그 다음 그 같은 요소들의 전제 하에 고린도후서의 해당 본문을 헬라어 원어와 함께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필자의 설명을 잘 따라온다면 이 본문이 구원 확신을 가져야만 구원 받은 사람이다라는 명제를 지지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이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으로 권면하려는 목적에서 기록되었다.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의 거짓 교사들


필자는 이미 이전에 초기 영지주의 운동에 대한 글을 쓰면서 고린도전서에서 이러한 영지주의적 움직임들이 원시상태로 등장하고 있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의 글을 참고하라.

 

초기 영지주의 운동과 배타적인 기독교인: 고린도전서의 신령한 자들과 요한계시록의 니골라당

나는 이전에 대한예수교침례회의 가장 큰 문제는 다른 것 보다도 그들의 배타성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배타성은 건강한 수준의 신념이나 사상의 배타성이라기보다는 배타성을 위한 배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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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고린도전서 서신을 보낸 뒤에 고린도 교인들이 원시-영지주의의 가르침을 가지고 있었던 집단을 완전히 몰아내거나 배척한 것 같지는 않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고린도전서나 고린도후서가 정확히 동일한 상황을 상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두 서신 모두에서 초기 영지주의 운동의 가르침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각주:1]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모두에서 부활 신학에 대한 영지주의적 오류들을 바울이 반박하고 수정해주는 대목이 존재하며(고전 15; 고후 4:16-5:10), 이것은 예수가 말하는 부활이 미래의 부활이 아니라 이미 자신들에게서 영적으로이루어졌다고 가르쳤던 자들의 영지주의적 철학이 횡행했음을 암시한다.

 

이런 원시적 형태의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우월한 이미 앎, 즉 특별하고 신령한 지식을 이미 소유하고 있다고 여겼으며 어떠한 죄를 지었을 때 그 악함과 더러움이 자신들의 신령한 상태를 침범할 수 없다고 여겼다. 이러한 태도들은 고린도 교인들을 미혹하여 그들이 음행 및 근친상간과 같은 악한 죄들을 지속적으로 범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각주:2]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이러한 자들을 교회 밖으로 내쫓으라고 권면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나 고린도 교회가 이것을 철저하게 시행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고린도후서에서 여전히 바울은 여러 사람들(πολλοί)” 자신들이 지은 음행이나 호색과 같은 죄들에서 회개하고 있지 않을까봐 두려워한다(고후 12:21).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도덕적으로 무감각한 영지주의 가르침에 맞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재차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권면한다(고후 7:1).

 

이러한 배경들은 분명히 영지주의 선구자들혹은 원시-영지주의자들이 고린도 교회에 계속해서 잔류하고 있었고 무시하기 힘들 정도의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각주:3] 바울이 고후 7:1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가르침을 따라 죄를 범하고 있었음을 우려하고 있는 것은 이것을 잘 나타내 준다. F. F. 브루스(F. F. Bruce)가 사용한 초기 영지주의라는 용어는 고린도 교회가 후에 여러 영지주의 학파에서 꽃 피우게 될 핵심적 사상을 이미 지니고 있었음을 잘 묘사해주는 용어다.[각주:4]

 

그러나 고린도후서가 기록될 당시에 고린도 교회의 상황은 보다 복잡해진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이제 고린도후서의 기록 당시에 거짓 교사들의 종류가 하나 뿐이 아니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고린도후서 당시에는 유대교의 권위를 앞세우려 하는 유대주의자들역시 활발하게 활동을 했다. 이들은 예루살렘 교회와 강한 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극히 큰 사도들의 이름을 등에 업고서 고린도 지역에 대한 그들의 권리를 주장했다(고후 11:5; 12:11).[각주:5]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거짓 교사들이 자랑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고후 11:22)

 

학자들은 이 두 가지 그룹의 거짓 교사들이 서로의 가르침이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고 그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일에서 함께 연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긴다.[각주:6] 초기 영지주의적 가르침들은 고린도 교회에 이미 자생하고 있었지만(고린도전서), 유대주의자 교사들의 경우에는 외부에서 신규로 유입된 자들이었을 것이다(고린도후서 10-13).[각주:7]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잘못된 가르침들에 대해 논하고 반박할 때에, 우리는 이러한 수신자들의 복합적인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고린도 교회의 “강함”에 대한 집착


고린도 지역이 상업 도시였으며 부유한 자들이 높은 명예와 지위를 갈망하고 이것에 집착했던 것은 필자가 쓴 초기 기독교의 식탁 교제여자의 긴 머리와 너울에 대한 글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의 글을 참고하라.

 

초기 기독교의 식탁 교제... 모이기를 힘쓰라? 어떤 모임인가? (feat. 대한예수교침례회, 생명의말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이하 대침)에서는 이맘 때가 되면 하계수양회라는 것을 합니다. 그들에게 “모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들의 거의 모든 설교에서 “교제”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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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긴 머리와 너울: 기독교는 성차별적인가? (고린도전서 11장 2-16절)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구원파)는 남녀 간의 수평적 관계 보다는 수직적 관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대침에서 생활하다가 나온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여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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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고린도에서 사역할 당시에 자신이 생활할 것을 스스로 조달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이제는 많은 학자들이 바울이 가죽 공예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땀을 흘려 일했다는 것에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바울은 사도행전 18장에서 고린도에 이르러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1 6개월 동안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한 것으로 묘사된다( 18:3, 11). 이것은 바울이 가죽 공예와 관련된 일에 상당히 장기간 종사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바울은 작업장에서 땀을 흘리며 많은 시간 동안 일을 했을 것이다.[각주:8] 고린도 지역이 이런 상인들이 모여드는 소위 사업 전망이 좋은 곳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는 사실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고린도에서 가죽 공예 사업을 한 것에 대한 좋은 이유를 제시해준다.

 

바울이 노동을 하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교사가 된 것은 고린도 지역의 사람들에게 결코 긍정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고린도인들은 명예-지위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며, 따라서 그 지역에서는 힘들게 일하는 노동자 보다는 유명한 소피스트들, 전문 설교가들, 전문 연설가들, 전문 수사학자들이 인기가 있었다.[각주:9] 소피스트들이나 수사학자들이 자신들의 화려한 언변으로 '품위 있게' 돈을 벌고 지원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미천하고 멸시 받는 직업을 갖고 있다는 것에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각주:10] 또한 고린도 교인들 스스로의 구성원들 중 지위가 높거나 학식이 있거나 지혜 있는 자들이(소포이) 많지 않았다는 점은 자신들의 지위 불일치의 상황(열등감)과 관련하여 이들의 이러한 불만을 더욱 가중시켰을 가능성이 있다(고전 1:26). 자신들이 따르는 지도자가 명예-지위와는 거리가 있는 일에 종사한다는 것은 꽤나 불편한 사실이었을 것이다.

 

일전에 필자가 쓴 여자의 긴 머리와 너울에서 언급했다시피, 고대인들에게 명예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으며, 이것을 보호하고 증대 시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선전, 홍보하였다. 또한 자신의 명예를 훼손시킬 위험이 예상될 때에는 공격적으로 이것을 방어하였고 때때로 명예를 위해서는 개인과 개인이 결투를 벌이거나 가문 간의 전쟁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고대 사회에서 명예를 위해 리스크를 감수하고 죽음까지 불사하는 이러한 태도는 남성적인 강한자들의 전형적 특징이다. 우리는 이런 강한 자들의 거친 면모를 그리스-로마 신화의 수많은 영웅들의 이야기에서 엿볼 수 있다.

 

반면에 바울이 보여주었던 타인을 배려하는 모습, 낮은 자들과 어울리고 스스로가 비천한 삶으로 들어가는 모습, 노동자들과 만나고 스스로가 노동자의 삶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고대 사회가 기대하는 성공한 사람’, "강한" 사람이라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 더욱이 바울은 빈번하게 자신의 명예를 희생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기꺼이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을 약한 사람으로 보고 비판한다. 바울 역시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을 이와 같은 잣대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에서 말의 지혜가 아니라 전도의 미련한 것을 앞세워 논리를 펼쳐 나가는 것 역시 이러한 배경을 고려할 때 쉽게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결정적으로 그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만드신다고 선언한다(고전 1:27).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스스로를 지혜 있다고 말하는 것을 한편으로 인정하면서 그것을 뒤집어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강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닌, 약한 것에 있다고 말한다(고전 4:10). 이와 같이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보기에 세상의 찌꺼기 같은 존재로 보였다(고전 4:13).

 

거짓 교사들은 고린도 교인들과 바울 간의 이런 긴장 관계를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화려한 언변과 명예로운 모습을 통해 강한 자의 면모를 보여주었으며, 상대적으로 바울보다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자랑하였다.[각주:11] 바울의 육체적 약함과 스스로를 치유할 수 없었던 부분 역시 고린도 교인들 입장에서 어떤 장애 요인으로 보였을 것이다(고후 10:10; 12:7). 바울은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며(고후 11:6), 어리석은 자처럼 취급 받았다(고후 12:11). 그래서 거짓 교사들은 과연 이렇게 카리스마적인 면모를 보여주지 못하고 본인의 병든 몸도 치유하지 못하면서 말도 어눌한 자가 진정한 사도인가에 대해 충분히 의문을 제기할 수 있었다. 또한 기원후 1세기에 고린도에서 소피스트 운동이 번창했다는 증거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 바울의 이러한 약한 자로서의 모습은 많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혐오 거리였을 것이다.[각주:12]

 

이 모든 요소들은, 바울이 왜 고린도후서 10장에서부터 13장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도권에 대해 길게 변호하는가에 대한 좋은 관점을 제시해준다.

 

 

고대 코린토스

 

 

 


 

 

고린도후서 13장 5절의 해석: 약함과 강함


고린도 교회에 초기 영지주의자들과 유대주의자들의 거짓 교사들이 존재했고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했으며, 강함을 좋게 여기고 약함을 나쁘게 여기는 사상적 배경과 함께 초기 영지주의자들을 따라 지속적으로 죄를 짓는 자들이 여전히 존재했다는 상황을 고려하면 고린도후서 13 5절의 본문의 의미는 보다 명확해진다.

 

바울은 고후 12:20-21에서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 다시 갈 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우려를 표한다. 그리고 이것은 바울에 의하면 세 번째 그들에게 방문하는 것이다(고후 13:1). 그리고 이번 방문 때에는 저번과는 다르게(고전 10:1, 10) 약하게 대응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여 따져볼 것이고, 두번째 대면했을 때 봤던 죄 지은 자들을 이번에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고후 13:2).

 

바울이 이렇게 강경하게 대응하겠다고 선언하는 이유는 그들이 바울에게 증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연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고 계시냐는 것에 대한 증거이다(고후 13:3). 곧 고린도 교인들은 거짓 교사들의 선동에 의해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상태가 되어 바울에게 증명을 요구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인지에 대해서까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고후 10:7).

 

고린도 교인들이 경험하기로, 바울은 편지에서는 매우 강한 사람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 만났을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바울의 성품의 온유함은 그들이 보기에 그의 연약함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약하다고 평가한다(고후 10:10). 바울 역시 이 점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그는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떠나 있을 때에는 담대하지만, 그들을 직접 대면할 때에는 마음이 눈처럼 녹아 한 없이 약해진다는 점을 이야기한다(고후 10:1). 왜냐하면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직접 대면할 때에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약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은 역설적이게도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하는 듯이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에게 과연 자신들이 그를 신뢰할 수 있을 만한 강한 것, 즉 강력한 남성다운 사도적 권위를 제시하라고 요구한다. 고린도 교인들이 보기에 자신들에게는 그리스도가 매우 강하게 역사하는데, 바울에게는 마치 약한 것처럼 나타나기 때문이다(고후 13:3). 바울의 약한성품은 이것을 극명하게 잘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즉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라고 스스로를 부르는 거짓 교사들이 겉으로 드러내는 거창한 행동과 "강한" 모양새들을 그리스도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과 동일시 했던 것이다.[각주:13] 고린도 교회는 많은 능력과 지혜와 카리스마적인 은사들을 소유했던 것으로 유명했다(고전 1:4-7). 이들은 자신들의 이런 강한모습이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임재 해 계신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각주:14] 그렇다면 자신들의 이런 강한능력이 바울에게도 있는 것인가? 그들은 이것을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제기하는 이런 기준이 실제 그리스도의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유익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은 결코 강한모습을 보여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기준에 의하면 약한모습에 가깝다(고후 13:4). 바울이 보여준 희생하는 약한 모습은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약한 모습과 닮았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약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약한 모습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곧 그리스도의 약함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함이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자신의 능력은 자신이 약한 모양을 취할 때에 비로소 강해진다고 선언한다(고후 12:8-10).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약한 모양새를 자랑하고 약한 것에 머무른다.

 

어떤 영지주의자들이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사탄과 귀신의 세력에 굴복하는 것과 동일하게 본 것을 생각해볼 때, 바울은 이 같은 그리스도는 강해야 한다”, 혹은 그리스도의 사도는 강해야 한다는 세속적인, 혹은 영지주의적인 기준에 도전하는 셈이다.[각주:15] 바울이 두번째 그들에게 나아갔을 때 죄를 지은 고린도 교인들이 아직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강하고 담대하게 처벌하거나 징계하지 않은 것은, 곧 바울이 약하게 대응한 것은 바울이 소위 열등한 사도였기 때문이 아니다. 고린도 교인들이나 거짓 교사들이 제시하는 기준과는 다르게, “가혹하게 대하는 것과 우월감을 나타내며 고압적으로 행하는 것(고후 11:19-21)”은 참된 사도의 자세가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약하고 부드러우며 사랑스러운 성품을 지니고 용서하는 것이 올바른 사도의 특징일 것이다.[각주:16]

 

이제 고린도후서 13 5절에서 바울은 이러한 자신을 향한 평가와 판단의 잣대를 돌려서 고린도 교인들 스스로를 살펴보라고 말한다. 우리는 각자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하며, 타인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6:4). 따라서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의 상태와 자신들의 행동들을 돌아보는 것이 더 낫다.[각주:17]

 

그들은 믿음에 있는가살펴야 한다. 특별히 헬라어 에이나이(εναι)”(ν)”의 조합은 고수하다, 순응하다혹은 계속하다, 거주하다를 의미할 수 있다.[각주:18] 이것은 바울이 그들에게 믿음 안에 있는가살피라고 말할 때, 이것이 어떤 지속적인 상태로 자신이 드러나고 있는가를 살피라고 말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이미 얻었다라고 말하며 자만해서는 안 되며, 마치 자신들이 직접 경기장에서 뛰기 보다 관중석에 앉아 바울이 강한 지 약한 지 판단해야 할 그런 위치에 이미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믿음의 상태에 지속적으로 머물고 있는가에 대해 평가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기준이다. 어떤 사람이 외양적으로 강한가, 약한가가 아니라, 지금 나의 상태가 믿음에 머무르고 있는 모양인지가 더욱 중요하다. 바울은 이미 거짓된 소망을 토대로 부주의하게 삶을 사는 것은 구원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암시한 바 있다(고전 9:27; 고후 6:1; 갈 6:3 참고).[각주:19] 초기 영지주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고린도 교인들의 거룩하지 않은 삶의 모습은 그들 스스로가 과연 정말로 믿음 안에 있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평가해봐야 할 필요성을 대두시킨다.

 

시험과 평가의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면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제시한 시험의 기준을 수사적인 방식으로 비틀어 활용한다. 이미 앤서니 티슬턴(Anthony C. Thiselton)은 고린도전서 연구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의 주장에 새로운 의미 부여와 심지어 코드 전환을 통해 색다른 의미를 가져와 자신의 논증에 더욱 힘을 실어주는 수사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각주:20] 예를 들어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초기 영지주의자들에게 영향 받아 갖게 된 영적인 사람이라는 개념을 비틀어 무엇이 정말 참으로 영적인 사람인가에 대해 논하는 데 사용한다.

 

이와 같이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말하는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라는 시험 기준을 가져와 수사적으로 도전한다(고후 13:3 참고). 그들은 자기네들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이미 여기고 있었다. 그들에게 이것은 강한자기들의 모습을 통해 증명되는 것으로 드러나는 듯 하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은 이것을 기준으로 버리운 자”, 곧 헬라어 아도키모스(δόκιμος)”인가에 대해 가려내려고 하였다.

 

이제 바울은 그들이 말하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다라는 시험적 틀을 가져와 그들에게 동일하게 적용해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이 제시하는 시험적 기준은 그들이 주장하는 기준인 강한 자의 체계와는 다르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지금 믿음 안에 있는가, 곧 영지주의적 비윤리적인 삶과 거짓된 교사를 따르는 행동들을 중단하고 사도 바울의 권면에 따라 선한 삶을 살고 있는가이다.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 바울을 향해 아도키모스인가 평가하려고 했던 그 잣대는 이제 고린도 교인들 스스로를 향한다. 그들 스스로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자신들 안에 있는지 그들이 증명해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아도키모스로 드러날 것이다. 그들은 이 증명이 능력 있고 강한 모습과 관련이 있다고 착각했다.

 

반면에 바울은 그러한 세속적인 평가의 기준이 그리스도 안에서 전복됨을 보여준다. 그리스도는 약함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능력의 강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타인을 위해 자신이 모욕 당하는 것을 감내했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갖고 있었던 평가 기준이 그리스도에게는 적용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 점에서도 그들은 믿음 안에 있는 것으로 발견될 것인가? 그들은 이 기준에서도 그들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이 제시한 새로운 기준에 시험을 통과한 자들로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13 6절의 내용은 바울이 이것을 긍정적으로 소망했음을 보여줄 것이다.[각주:21]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상태와 바울 선교팀의 상태를 서로 긴밀하게 연결하여 생각한다(고후 10:7). 바울은 아마도 고린도 교인들이 이 서신을 읽고 회개하여 자신이 제기한 이 시험에도 통과한 자로 드러날 것이라 소망한다. 그래서 그들이 자기들에게 이와 같은 약함의복음을 전해준 사도 바울 측에 대해서도 그 권위를 인정해주기를 바란다.

 

바울이 6절에서 우리가(사도 바울 선교팀)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고린도 교인들) 알기를바란다라고 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이 제기한 이 기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자기 자신을 살펴보면서 회개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바울은 그럴 것이라고 소망한다.

 

그래서 13 7절에서 바울이 이 서신을 쓰는 주된 목적이 무엇인가가 드러난다.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고후 13:7). 만약 고린도 교인들이 이 서신을 읽고 자신들을 살펴보고, 바울이 참된 하나님의 사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회개하여 자신들의 악행들(호색함이나 음행 등)에서 돌이킬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바울은 세번째 방문에서 그들을 가혹하게 대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만약 고린도 교인들이 회개하여 사도 바울이 그들을 강하게 대할 필요가 없어진다면, 어떤 사람들은 또다시 바울이 약한모습을 보여준다고 혹평할 지도 모른다.

 

즉, 강한 자로서의 시험에서 바울은 또다시 실패하고 말 것이다. 바울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라고 여기서 말하고 있다.[각주:22]

 

바울은 또다시 담대하지 않고 소심하며 유약하고 느슨하고 쉬운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지도 모른다(고후 10:1, 10). 하지만 바울이 바라는 것이 바로 정확히 그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그런 강함의 기준에 버리운 자”, 아도키모스로 드러날지언정 차라리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강하게 사용할 필요가 없어지길 바란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을 "강하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약하게" 보듬어주고 싶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고후 13:1-2에서 자신이 말한 상황이 실현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바울의 관심사는 자신의 사도권이 어떤 방식으로든 증명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즉 바울 선교팀이 시험을 통과한 도키모이(δόκιμοι)”로 드러나는 것에 주요한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보다는 차라리 바울이 앞으로도 그의 대적들에게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아도키모이(δόκιμοι)”약한 사람으로 평가 받더라도 고린도 교인들을 강하게 책망하고 징계해야 할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곧 그들이 선을 행하게 하고자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각주:23]

 

바울은 자신이 강하게 나갔을 때에 고린도 교인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을까 우려한다. 그에 의하면 바울이 받은 사도적 권세는 파하는 데에 있지 않고 세우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고후 10:8; 13:10).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갔을 때에 고린도 교인들이 회개하지 않는 상황, 곧 바울의 강함을 드러내야 할 상황이 올까봐 두려워 한다(고후 12:20-21). 그렇게 되느니 차라리 그는 약한 자라는 조롱, 아도키모이라는 평가를 달게 받을 것이다. 바울은 그들을 엄하게 대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후 13:10).[각주:24] 바울은 차라리 자신이 약하다는 모욕을 받고 고린도 교인들이 온전해지길 원한다(고후 13:9). 그런 점에서 바울은 참으로 약할 그 때에 강하다(고후 12:10). 바울은 사랑의 마음에 이끌려 약한 사람으로 남길 원한다.

 

 

 

 


 

 

 

결론


머레이 해리스(Murray J. Harris)는 고린도후서만큼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하는 바울 서신은 없다고 말한다.[각주:25] 고린도전서와 후서의 내용을 종합하고, 서신서의 주제와 본문의 문맥을 파악하며 1세기 당시의 코린토스 지역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는 것은 고린도후서 13 5절의 본문을 우리는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로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바울의 의도에서 벗어난 해석인가를 보여준다.

 

오히려 바울은 13 5절을 통해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평가하던 잣대를 돌려 스스로를 살피고 악을 행하는 것을 중단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이 본문을 기록하였다. 대침이 이 본문을 구원 확신에 대한 것으로 가져오는 것은 이들이 고린도후서의 전체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실패했음을 암시한다.

 

이 본문에서 바울은 그래, 너희들 말대로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있는지 없는지를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 이것이 중요한 것이었다면 바울은 구원 확신이 정말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너희들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너희는 주장하는데, 정말 그런가? 만약 이것을 진지하게 살펴본다면 너희는 나의 권면을 따라 회개하고 선을 행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필자가 초기 영지주의에 관한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고린도 교인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구원을 매우 크게 확신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미래에 얻은 영광을 지금 현재에 모두 다 얻었다라고 자랑했으며, 따라서 왕 노릇 하듯이 이미 살고 있었다(고전 4:8). 이런 자들에게 바울이 구원 확신이 중요하다라는 취지로 해당 본문을 말했다라고 우리가 여겨야 하는가? 고린도 교인들의 상태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여기는 것이 얼마나 부적절한가에 대해 감이 올 것이다.

 

바울에 의하면 중요한 것은 현재 그들이 자신들의 구원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분명 죄사함의 복음을 알고 있었고 이것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상태에 대해 지나치게 확신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강한 자라고 여겼으며, 교회 내의 약한 자들을 차별하고 심지어 약한 모습을 보이는 바울의 사도성과 구원 여부까지도 의심했다.

 

반면에 바울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구원의 확신이나 강한 자로 드러남이 아니라 그들이 현재의 삶에서 회개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고후 13:7). , 그들이 현재 믿음 안에 거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고후 13:5).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좋아하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시험을 통과해야 참된 그리스도인이다라는 두 가지 틀을 가져온다(고후 13:5). 이것은 바울이 그들이 제기하는 시험 통과의 체계를 교리적으로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7절에서 그들이 제기하는 기준에 시험 통과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만약 바울에게 이 본문을 가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구원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는 황당해 할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런 내용을 강조하려고 이 본문을 기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고린도 교인들이 사용하는 기준을 가져와 수사적으로 도전하는 글을 썼을 뿐이다. “너희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느냐고 의문을 표하는데, 그 의심의 눈초리를 너희 스스로에게 돌려봐라. 너희는 계속해서 많은 자들이 죄를 짓고 있다. 그렇다면 너희는 정말 믿음에 있는 자들인가? 너희가 믿음에 있는 자들이라면 지금 짓고 있는 죄에서 떠나 회개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바울에게 이런 버리운 자운운하는 것은 결코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바울은 어떤 점에서 그가 버리운 자로 드러나도 그는 괜찮다고 말한다(고후 13:7). 중요한 것은 강한 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 등의 기준을 통과해서 버리운 자냐 아니냐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고후 13:5, 7). 중요한 것은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하며(고후 13:7), 온전하게 되며(고후 13:9), 거룩함을 이루어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는 것이다(고후 7:1). 이것을 위해서라면 바울은 기꺼이 버리운 자”, "약한 자"로 남을 것이다.

 

이 점에서 바울이 이 본문을 통해 어떤 버리운 자로 드러나는 기준, 곧 시험 통과의 기준, “아도키모스의 기준을 제시하려 한다는 해석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선호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느냐의 여부를 구원의 어떤 통과 기준으로 제시하는 것은 바울의 견해가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의 태도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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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o multifarious were the forms of anti-Paulinism in the early church that most scholars regard it as antecedently improbable that the opposition everywhere was, for instance, Gnostic (Schmithals) or pneumatic (Ellis). And Gunther’s description of Paul’s antagonists as everywhere “syncretists, gnostics and pneumatics in the same sense that the terms are applicable to the Essenes or Qumranians” (317) is so generalized that they are effectively reduced to faceless entities.

    If we now restrict our attention to the Corinthian letters, again we discover that some argue for identity of opponent at each stage of Paul’s relation to the church at Corinth as reflected in 1 and 2 Corinthians. To mention two scholars whose research is separated by a century, Godet identifies Paul’s rivals as intruding proto-gnostics, forerunners of the fully developed Gnosticism of the second and third centuries (74–79), while Marshall depicts them as principally Corinthian “hybrists,” educated Hellenists of high social status who contemptuously denigrated Paul, using traditional forms of invective (364–80, 403–4; “Hybrists”; “Invective”).

     

     

    Murray J. Harris,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Milton Keynes, UK: W.B. Eerdmans Pub. Co.; Paternoster Press, 2005), 78–79. [본문으로]

  2. that they can continue practicing these sins yet inherit the kingdom of God. He immediately proceeds to cite two or perhaps three libertarian slogans used at Corinth, as he inveighs against sexual license (vv. 12–20):

     

    Murray J. Harris,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Milton Keynes, UK: W.B. Eerdmans Pub. Co.; Paternoster Press, 2005), 82. [본문으로]

  3. But there are two further characteristics of these opponents, evident only in 1 Corinthians, that lead us to prefer the label “precursors of Gnosticism” or more simply “proto-gnostics.”

     

    Murray J. Harris,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Milton Keynes, UK: W.B. Eerdmans Pub. Co.; Paternoster Press, 2005), 83. [본문으로]

  4. Ralph P. Martin,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40 2 Corinthians, trans. Cheol Kim, Solomon Press, 2007, 45. [본문으로]
  5. Ralph P. Martin,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40 2 Corinthians, trans. Cheol Kim, Solomon Press, 2007, 47. [본문으로]
  6. two sets of opponents, Corinthian “proto-gnostics” and Palestinian “Judaizers.” Since both groups had a virulent antipathy to aspects of Pauline teaching and to Paul himself, it would have been strange if they had not closed ranks in their common opposition to the apostle and formed a temporary, if uneasy, alliance.206

    Our overall conclusion is this. Paul’s opponents were probably Jews from Judea—perhaps Jerusalem—who came to Corinth as self-appointed agents of a Judaizing program. They claimed to be Christian, illegitimately invoked the authority of the Twelve, and found common cause with a group of Corinthian “proto-Gnostics” in their attempt to undermine Paul and his apostolic work.

     

     

    206 This proposal of an “alliance of convenience” between two distinct groups, legalistic Judaizers and libertine “proto-gnostics,” overcomes the difficulty with Ellis’s view that the opponents were strict, conservative Jews of an Essene type who nevertheless themselves shared the libertine sentiments of some of the Corinthians (Prophecy 104, 115), or with Hughes’s description of the rival apostles as both “judaizers” and “libertines” (357). And it is of interest to note that Jewett claims to have discovered a similar alliance or alignment of agitators from outside the church and “pneumatic libertines” from within the church in the case of the Galatian congregation (“Agitators”). For Marshall’s suggestion of an alliance between Corinthian “hybrists” and Pauls rival apostles, see n. 188† above. In a similar way Murphy-O’Connor (12–15; cf. “Judaizers,” “2 Corinthians,” and Paul 302–4) perceives an alliance between the Corinthian “Spirit-people” (pneumatikoi; cf. 1 Cor. 2:15), who were influenced by Philonism through Apollos and alienated by 1 Corinthians, and the intruding Judaizers who came from the conservative Jerusalem church. These two groups of opponents found “tenuous common ground” in the figure of Moses. “The Judaizers revered him as the Law-giver, while the Spirit-people probably saw him as the perfect wise man who embodied all the Hellenistic virtues” (15). Then again, according to Kee, it was a reconstituted “Christ party,” composed of Christians with Gnostic tendencies, that formed the nucleus around which Paul’s adversaries—Hellenistic Jews propagating “spiritual gnosticism” (69)—built up their opposition (74).

     

    Murray J. Harris,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Milton Keynes, UK: W.B. Eerdmans Pub. Co.; Paternoster Press, 2005), 86–87. [본문으로]

  7. Ralph P. Martin,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40 2 Corinthians, trans. Cheol Kim, Solomon Press, 2007, 46. [본문으로]
  8. Anthony C. Thiselt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trans. Ji Cheol Sin, Holy Wave Plus, 2022, 79. [본문으로]
  9. Anthony C. Thiselt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trans. Ji Cheol Sin, Holy Wave Plus, 2022, 80. [본문으로]
  10. Ibid. [본문으로]
  11. Ralph P. Martin,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40 2 Corinthians, trans. Cheol Kim, Solomon Press, 2007, 46. [본문으로]
  12. Anthony C. Thiselt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trans. Ji Cheol Sin, Holy Wave Plus, 2022, 63. [본문으로]
  13. Ralph P. Martin,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40 2 Corinthians, trans. Cheol Kim, Solomon Press, 2007, 887. [본문으로]
  14. Ibid. [본문으로]
  15. Ibid., 888. [본문으로]
  16. Ibid., 889. [본문으로]
  17. that the Corinthians ought to examine their own status and conduct rather than his.

     

    Murray J. Harris,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Milton Keynes, UK: W.B. Eerdmans Pub. Co.; Paternoster Press, 2005), 919. [본문으로]

  18. It may mean “adhere/conform to” or “continue/live in,”11 or this construction could be a periphrasis for an adjective, so that στ ν τ πίστει = στ πιστοί, “you are believing/true believers.”

     

    11 Cf. the classical use of εναι ν in the sense “be engaged in” (LSJ 488 s.v. εμί C.IV.3.a.).

     

    Murray J. Harris,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Milton Keynes, UK: W.B. Eerdmans Pub. Co.; Paternoster Press, 2005), 919. [본문으로]

  19. Ralph P. Martin,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40 2 Corinthians, trans. Cheol Kim, Solomon Press, 2007, 894. [본문으로]
  20. Anthony C. Thiselt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trans. Ji Cheol Sin, Holy Wave Plus, 2022, 112. [본문으로]
  21. Paul now appeals with confidence to their theological self-awareness. πιγινώσκετε need mean no more than “you realize/recognize” (γινώσκετε), but in a rhetorical question that expects the answer “Yes, indeed!” the intensifying prefix πι- may well prompt the sense “you know for sure.”

     

    Murray J. Harris,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Milton Keynes, UK: W.B. Eerdmans Pub. Co.; Paternoster Press, 2005), 920. [본문으로]

  22. Finally, in v. 7 the test is the proof of apostolic authority shown in his discipline of unrepentant sinners; this test he will gladly fail.

     

    Murray J. Harris,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Milton Keynes, UK: W.B. Eerdmans Pub. Co.; Paternoster Press, 2005), 925. [본문으로]

  23. Finally, the emphatic position of μν56 shows that Paul’s focus, his pastoral preoccupation, was on their restoration, not his own vindication (cf. v. 7).

     

    56 See the commentary on 12:19.

     

    Murray J. Harris,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Milton Keynes, UK: W.B. Eerdmans Pub. Co.; Paternoster Press, 2005), 928. [본문으로]

  24. If 13:1–4 is basically a warning about impending discipline, 13:5–10 is essentially an exhortation to avoid that discipline. By indicating in v. 10 the purpose of his writing, Paul shows the intensity of his desire that the Corinthians should make his punishment unnecessary through their repentance and restoration.

     

    Murray J. Harris,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Milton Keynes, UK: W.B. Eerdmans Pub. Co.; Paternoster Press, 2005), 928. [본문으로]

  25. Every Pauline letter arose, at least in part, from pastoral needs. But among Paul’s extant letters none is more closely tied to the vagaries of historical circumstance than 2 Corinthians. There is therefore all the more reason to examine carefully the circumstances that gave rise to this letter and formulate the critical assumptions, both literary and historical, on which its exegesis will proceed. Four literary and five historical problems demand consideration and the positing of such solutions as will enable a consistent interpretation of the whole canonical letter.

     

    Murray J. Harris,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Milton Keynes, UK: W.B. Eerdmans Pub. Co.; Paternoster Press, 2005), 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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