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 1:23)
신이 초월적인 영역에서만 머무는 것을 그만두고 인간의 제한적인 영역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놀라운 사건을 말하는 이 구절은 기독교 세계관의 심오한 복된 소식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마태는 여기서 이사야 7장 14절의 성경 본문을 직접 인용하는 것으로 인간의 몸을 입는 하나님이 이사야가 예언했던 예언의 구체적 실현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에게 이사야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사건을 통해 가장 명확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계시된 것이다.
마태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한 것 때문에, 과연 이사야가 해당 본문을 말한 것이 정말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었느냐에 대한 논쟁이 촉발되었다. 보다 보수적인 기독교 학자들의 경우 이 예언이 메시아의 도래를 암시할 수 있는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반면에 다른 기독교 학자들이나 유대교 학자들에게 이 본문은 메시아가 아니라 아하스의 아들을 의미하거나, 아니면 이사야의 아들인 마헬살랄하스바스(사 8:3)를 의미한다. 이것은 이사야 예언의 문맥을 고려할 때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마태가 이사야의 이 예언을 인용하여 메시아의 탄생을 성경의 지지를 받는 것으로 설명하고자 한 것에는 당시 1세기의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게 이 본문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널리 읽히고 이해될 수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들이 이사야의 본문이 문맥에 따라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를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었겠느냐의 문제는 차치하고서, 초대 교회의 시대에 혹은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예언하는 본문으로 남아 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마태는 이사야 7장 14절의 성경 본문을 인용하되, 70인역(LXX)의 본문에 따라 그것을 인용하고 있다. "처녀(παρθένος; 파르떼노스)" 역시 70인역의 본문에서 히브리어를 해석한 용어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이것은 맛소라 사본 등의 히브리어 사본들에서 본래 "알마(עַלְמָ֗ה)"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의미가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처녀"라는 의미보다는 더 포괄적이다. 본래 히브리어에서 "베툴라(בְּתוּלָה)"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것이 "처녀"라는 의미에는 더욱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창세기 24장 16절과 43절 등을 보면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알마(עַלְמָ֗ה)"와 "베툴라(בְּתוּלָה)"는 모두 리브가를 지칭하는 데에 교차하여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창세기 24장 28절에서는 "나아르(נַּעֲרָ֔)"가, 그리고 44절에서는 "잇샤(אִשָּׁ֔ה)"가 사용되어 결혼하기 이전의 리브가에게만 네 가지 용어가 모두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알마"나 "베툴라"는 문맥에 따라 "나아르"나 "잇샤"와도 교차하여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알마"를 "처녀"라는 의미로 한정하는 것은 이 점에서 무리가 있다. 오히려 이 용어는 "성관계를 하지 않은 여성"을 뜻하기 보다는 "결혼 적령기의 어린 여성"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는 심지어 "베툴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래서 히브리어 사전들은 "알마"의 의미를 일차적으로 "virgin"으로 제시하기보다는 "mariageable girl", "a girl who is able to be married", "a young woman"으로 해석할 것을 추천한다. 잠언 30:19에서는 "알마"를 사용하면서 이 여성이 성관계를 한 것인지 하지 않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1
그렇다면 70인역이 이 단어를 "파르떼노스(παρθένος)"라고 해석한 것은 무엇인가? "파르떼노스"는 사실 "처녀"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것은 고대인들이 "알마"를 이해했던 방식을 고려하면 쉽게 해결된다. 특히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결혼할 만한 여성"은 일반적으로 "어린 여성", 곧 처녀성이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여성으로 간주되었다. 고대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에도 이 같은 점들이 잘 나타나 있다. 여성은 결혼 연회를 시작하는 날에 남편과 첫날밤을 보내게 되는데, 이때 그 여성은 반드시 성관계 후 자신의 혈흔이 묻은 침구와 옷 등을 보관하여 자신의 처녀성을 입증하는 물건으로 삼아야 했다. 만약 처녀성이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남편이 여자와 이혼을 원한다면, 여성은 이 증거물을 제시하는 것으로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은 결혼하려는 여성은 처녀일 것이 당연하다는 기본적인 인식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 사회에서 결혼하기 적합해 보이는 어린 여성에게 처녀성을 기대하는 것은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성적인 방종에 특히 엄격했던 유대교에서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2
어린 여성인 "알마"가 비록 성관계를 했느냐 안 했느냐의 여부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도, 유대인들의 사회 통념상 성관계를 경험하지 않은 순결한 여성을 뜻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고대 사회에서 남성은 16-24세 사이에 결혼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었지만, 여성은 훨씬 어린 12-13세가 결혼 적령기로 여겨졌다. 또 비록 남성일지라도 성적인 일탈을 막기 위해 일찍 결혼시켰던 사회적 분위기상 여성에게 엄격한 처녀성의 기준을 요구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따라서 70인역의 번역자들이 "알마"를 "파르떼노스"로 번역하여 "처녀"라는 의미를 부각시킨 것은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하지만 다르게는, 처녀였던 여성이 결혼하여 아이를 잉태하고 낳는다는 설명도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사야의 "알마"가 반드시 결혼하기 '이전에' 잉태한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불명확하다. 비록 "알마"가 처녀인 상태의 젊은 여인을 지칭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 여성이 결혼 한 뒤 아이를 잉태하여 출산하는 상황을 여기서 묘사할 때에도 같은 용어가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처녀였던 그 여성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을 것이다"라는 방식으로 말이다. 또 더욱이 이사야의 예언의 방점이 '처녀이냐 아니냐'에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한 아들이 나올 것이라는 점에 방점이 찍혀있다.
이 "아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기독교에서는 이것이 메시아를 뜻하는 것이지만, 이사야의 문맥을 보면 남유다 왕국의 아하스 왕(BC 736-716 재위) 시대에 일어날 일에 대한 징조로 이 "아들"의 출산과 성장을 말한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아이가 히스기야 왕이거나, 아하스의 다른 왕자이거나, 이사야의 아들 마헬살랄하스바스(사 8:3)라는 견해들을 제시한다. 물론 성경은 이 아기가 누구인지 설명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사야서 7장과 8장의 전반적인 문맥이 BC 732년의 사마리아와 다메섹의 앗시리아에 의한 멸망 및 약탈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여인으로부터 나오는 아이는 이사야가 예언할 시기와 가까운 근래에 위치하는 역사적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또 위의 "알마" 앞에 관사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이를 낳을 여인을 아하스 왕과 이사야 등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 알고 있던 여성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사야의 이 아이가 일차적으로는 이사야의 아들인 마헬살랄하스바스를 의미하는 것이라 여긴다. 이것은 8장 1-4절의 산문적 기록이 7장 15-16절 등의 내용과 평행되는 것으로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 히스기야로 여기는 것은 히스기야의 나이를 생각할 때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이미 최소 6세였음), 아하스의 다른 왕자를 뜻한다는 견해는 입증하기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마헬살랄하스바스로 보는 견해 역시 뚜렷한 근거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에, 이 아이가 이사야의 예언의 문맥에서 어떤 역사적 사람을 지칭하는가를 밝히는 것은 이사야 저자의 의도에 부합하지도 않을뿐더러 무리한 해석을 낳을 위험이 다분할 것이다. 이사야 저자는 그것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하고 있지 않으며, 어떤 역사적 추적을 위한 실마리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아이를 역사적인 인물 중 누구냐에 대해 논하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마헬살랄하스바스와 많은 평행이 있고 가능성이 커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 아이의 이름은 "임마누엘(עִמָּ֥נוּ אֵֽל)"이다. 히브리어에서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를 의미한다. 이것은 이사야 7장 14절에서 한 번 등장하고, 이후로 8장 8절과 10절에서도 등장한다. 존 오스왈트는 이사야 8장 8절의 내용을 미뤄볼 때 "임마누엘"은 단순히 역사적 인물(이사야의 아들 등)로만 여겨지기엔 무리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사야 8장 8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3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사야는 앗시리아가 유다 땅을 침략하여 집어삼키는 모습을 두 가지의 비유로 표현한다. 먼저 그것은 홍수가 나서 물이 땅을 뒤덮는 모습으로, 다음으로는 거대한 새가 날개를 펴서 덮는 것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앗시리아의 침략은 (히스기야 때에 드러나듯이) 유다를 완전히 멸망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물의 범람은 유다에게 매우 치명적일 것이지만, 그의 목에 와서는 멈출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저자는 그 이유를 7장 14절에서 말했던 "임마누엘"과 연관 짓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7장 14절의 "임마누엘"이 단순히 역사적인 의미만을 지닌다면, 8장 8절에서 다시금 "임마누엘"을 등장시키는 것은 설명하기 어렵다. 이븐 에즈라(Ibn Ezra)는 역사적인 시각을 유지하면서, 여기서 마헬살랄하스바스인 "임마누엘"이 언급되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유다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징조로서 주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네 땅에(אַרְצְךָ֖)"가 지칭하는 "네"가 "임마누엘"을 지칭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왜 유다 땅을 "임마누엘의 땅"으로 묘사하고 있느냐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필요하다. 이사야 8장 10절의 "임마누엘"의 언어유희 역시 이 점을 시사한다.
"임마누엘"의 뜻 자체는 매우 긍정적인 함의가 있지만, 이사야가 이것을 예언할 당시에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한 징조 역할을 했다. "임마누엘"이 태어나고 그 아이가 장성하면서 사마리아와 다메섹은 멸망하고 이스라엘도 멸망당할 것이며, 유다에는 앗시리아가 턱 밑까지 침략해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아이의 출생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임을 기억하게 만드는 역할도 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할 것이기 때문에 유다는 앗시리아에 의해서는 완전히 멸망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9장 6절에서는 이 시각을 더욱 발전시켜 다음과 같이 예언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나는 이사야 7장 14절, 8장 8절, 그리고 9장 6절에서 "임마누엘"에 대한 선지자의 설명이 점차 무르익어 완전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7장에서는 "임마누엘"이 이스라엘의 멸망 이후 유다가 겪을 경제적 어려움(사 7:15, 22)을 겪을 것으로 예언된다. 반면에 8장에서 유다의 땅은 마치 "임마누엘"의 땅인 것처럼 묘사된다. 9장은 보다 종말론적인 시각으로 옮겨가는데, 어둠에 거하던 백성들에게 큰 빛이 비추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처럼, 이사야의 "임마누엘"은 이사야 시대의 역사적 인물(혹 마헬살랄하스바스)일지도 모르지만, 이사야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 인물이 가리키는 미래의 종말적 왕을 그린다. "임마누엘"은 아하스 시대에 태어나 이스라엘이 멸망 한 뒤 유다 땅에서 경제적 빈곤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임마누엘"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과 함께 계심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유다는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하지는 않는다. "임마누엘"이 있는 땅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얻는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인가? 아니다. 유다는 결국에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9장에서 또다시 한 아기가 하나님의 백성에게로 온다. 이 아기는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기독교인들로 인하여 후대 유대인들은 이 구절을 해석하지 않고 고유 명사처럼 "펠레 요에쯔 엘 깁보르 아비아드 사르 샬롬"이라 그대로 음역한다. 또는 이 구절이 그저 히스기야 왕을 예언한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탈굼(Targum)에서는 이것이 메시아를 말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한다. 이사야 9장 6절의 여러 이름들은 인간에게 적용되기 힘든 것들이 상당히 많다. 또한 9장 7절에서 이 "아기"가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여호와께서 영원토록 왕국을 보존하심이라는 주제와 연관 짓는 것을 보면 더욱더 이것이 보통 인간을 뜻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그러므로 "임마누엘"은 이사야 시대에 태어나고 살다가 죽었다. 그의 출생은 하나님의 경고인 동시에 유다가 앗시리아에 의해서는 멸망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의 존재는 사실상 이것으로 끝이었다. 그래서 유다는 결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해 역사 속으로 사라진 듯 보인다. 그런데 이 "임마누엘"은 더 나은 "임마누엘", 가장 완전한 의미의 "임마누엘"을 바라보는데, 그의 출현은 하나님의 나라가 더 이상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하나님께서 보호하실 것이라는 확실한 기점이 된다. 7장의 "임마누엘"은 앗시리아로부터 보호받는 징조의 역할만을 할 뿐이었지만, 9장의 "한 아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궁극적인 보존을 바라보게 만드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 두 인물이 "아들(בֵּן; 벤)"이라는 용어로 서로 결합하고 있다. 7장 14절의 "아들(בֵּן; 벤)"은 앗시리아로부터 보호받을 유다를 예언 하지만, 9장 6절의 "아들(בֵּן; 벤)"은 백성들의 "흑암"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할 자로 나타난다. "아들", "아기(יֶ֫לֶד; 옐레드)"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이 인물의 "아이 같은" 특성, 그리고 "아들 같은" 특성과 함께 "탄생"의 측면 역시 강조한 것이다. 이사야에게 "임마누엘"은 한 젊은 여인의 아들이며, 그 아이의 존재는 앗시리아가 제아무리 유다를 짚어 삼키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항상 보호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역할, 그리고 그 성취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여기 또 다른 "아들", "아기"가 있는데, 그 아이는 단순히 앗시리아나 유다에만 해당되는 제한적인 서사만을 담당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 아이는 이사야의 시각에서 종말적인 인물이며, 그때에는 흑암 중의 백성들에게 빛이 비추고 그들이 즐거워할 것이며 다윗의 자리에 앉아 하나님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기 위해 통치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아이들의 "탄생"에 우리는 마땅히 주목해야 한다.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제 다시 마태에게로 돌아오자. 과연 그가 여기서 이사야 7장 14절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려 한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는 자세한 설명은 배제한 채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 뜻하는 바를 독자들에게 설명해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마태는 마리아가 요셉과 동거하기 이전에 예수님을 임신하고, 천사가 요셉에게 이것을 계시하는 장면에서 이 본문(사 7:14)을 인용한다. 마태는 아마 70인역의 "파르떼노스(처녀)"의 번역과 당대 이사야 7장 14절에 대한 메시아적 해석에 기반하여 이 구절을 인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비록 히브리어 성경 문맥에서 이사야 7장 14절의 "알마"가 "결혼 적령기의 어린 여성"을 뜻하고 "임마누엘"이 이사야 시대의 어떤 역사적 인물로 설명될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이 이사야 본문은 역사적 인물인 "임마누엘"의 이야기로 종결되는 예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작일 뿐이며 더 나은 것, 새로운 질서,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바라본다.
이사야 본문의 "알마"가 성관계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는 본문 만으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마리아는 이에 대해 더 완전한 성취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녀는 처녀의 몸으로 임신했기 때문이다. 즉 마리아는 완전한 의미에서 "결혼 적령기의 어린 여성", 곧 "순결한 여인"의 형태인 것이다. 가장 완전한 "알마(עַלְמָ֗ה)"이자 "파르떼노스(παρθένος)"인 처녀 상태의 마리아는 이사야 예언의 훌륭한 성취인 셈이다.
마찬가지로 이사야 본문의 "임마누엘"은 아하스의 알려지지 않은 왕자이거나, 아니면 이사야의 아들인 마헬살랄하스바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완벽한 성취는 곧 하나님 나라를 영원히 세우는 "아들"인 메시아의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는 탄생에 있을 것이다. 마태에게 있어서 참된 "임마누엘"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왜냐하면 참된 "알마"인 처녀 상태의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 "한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는 이사야 7장 14절의 예언의 가장 궁극적인 성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해당 본문의 이사야 예언의 주제인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의 놀라운 실현이다. 이사야에서는 하나님께서 단지 유다의 멸망을 막는 것으로 이것을 나타내셨다. 거기서 "임마누엘"은 미래의 종말적 소망의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실제로' 그가 우리에게로 '오신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시며, 이야기도 나누시고, 같이 식사도 하신다. 마태가 "임마누엘"을 독자들에게 해석해 주는 대목은 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에 주목하게 하려는 의도가 분명히 있다. 그는 "처녀"이냐 아니냐의 여부나, "임마누엘"이 누구인가의 여부 보다, 이것에 더욱 관심이 있어 보인다. 만약 마태가 지적한 대로 이사야가 예언한 인물의 가장 완전한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의 탄생은 정말 놀라운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사실상 문자적으로 실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승천하신 이후의 지금에도, 이 선포는 여전히 유효하다. 예수께서는 떠나시면서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이것을 실현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임마누엘"은 항상 참이며 아멘이 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있다. 그러므로 마태가 이사야 7장 14절을 인용한 것은 매우 적절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아기로 이 땅에 오셨다는 이 복된 소식보다 더욱 잘 "임마누엘"을 성취할 수 있는 사건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20)
<이단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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