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장 16절
아마 현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성경 구절을 뽑으라고 한다면, 이 본문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나는 왜 이 본문이 그렇게 유명 해졌는가를 찾아보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그것은 추적하기에는 무리일 정도로 아주 오래전부터 인 것 같다. 따라서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 이것이 우리들의 머릿속에 강력하게 각인된 것은 아닌 듯하다. 오히려 이 본문이 그 자체로 내재하고 있는 능력,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인 신(神)이 희생을 통하여 인간에게 사랑을 드러내고 이를 통해 인류를 구원으로 이끈다는 진리의 명제를 선포하는 강력함 때문에 모든 기독교인들(심지어 비기독교인들까지도)의 이목을 집중시켰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본문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염두하여야 한다. 우리가 성경이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를 향해 달려가는 ‘책(book)’임을 인정한다면 어떤 문장의 의미를 바르게 읽는 것에는 반드시 그 문장이 단락에서 어떤 목적으로 위치해 있으며 전체 주제와는 어떤 맥락 안에서 결합되어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신앙고백인 요한복음 3장 16절은 빈약한 슬로건의 무의미한 반복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므로 요 3:16이 니고데모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상황(요 3:1-21)에서 나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저자(나는 사도 요한으로 믿는다)가 의도한 주제인 사람이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내용의 전체 맥락에서 이 구절을 해석해야 함을 보여준다. 또 요한복음을 주의 깊게 읽은 사람이라면 이 복음서가 쓰인 배경인 박해받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상황에서 믿음을 끝까지 지키며 인내하는 참된 기독교인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요한이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표적(sign)’을 보고 믿는 피상적인 믿음에서 벗어나 끝까지 지속되는 참된 믿음을 갖는 것이다. 마치 빛이 어둠을 비추면 그 안의 것들이 드러나는 것처럼 말이다(요 1:5). 세상에 속한 어둠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지만(요 1:10) 위로부터 난 자들은 빛을 받아들인다(요 1:13). 그리고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그 빛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요 1:1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요 1:12). 단순히 기적을 보고 믿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다시 태어남(born again), 곧 위로부터 난 사람들이 소유하는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 이기는 믿음이 그에게는 중요하다(요 2:11; 6:69; 8:31; 16:30-33).
cf.) 추가로, 요 3:16이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인지, 아니면 요한의 주석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논의도 있다. D. A. 카슨(D. A. Carson)은 3장 16절에서 21절을 사도 요한의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보충 설명으로 본다. 16절의 “독생자(τὸν ⸀υἱὸν τὸν μονογενῆ; 톤 휘온 톤 모노게네)”라는 표현은 사도 요한의 고유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 사본에서 초기 문헌들이 인용 부호 등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 제안은 매력적이긴 하다. 비슬리 머레이(Beasley Morray)는 11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끝난다고 여긴다. 니콜슨(Nicholson)은 10절에서 끝난다고 생각한다. 혹은 몇몇 성경 번역본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21절까지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진다고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크레이그 S. 키너(Craig S. Keener)의 말대로 이것들을 구분하는 것에 근거는 없다고 본다. 물론 구분은 유익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의 보충설명이냐, 예수 그리스도의 자신의 말이냐에 따라 독자가 느끼는 감정은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구분할 근거가 결정적으로 부족하다. 편집 비평이 등장한 이후로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핵심을 자신들의 언어와 표현으로 재진술한다는 이론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같은 내용이라도 각 복음서의 저자에 따라 미묘하게 다르게 진술된다. 따라서 이것을 엄밀히 구분하려는 시도는 무리가 있다(Segovia). 카슨은 이에 대해 반발하지만, 단순히 복음서의 다른 인물들의 말과 예수님의 말을 비교하는 것에서 그 근거를 이끌어내는 것은 설득력이 덜해 보인다. 또 막 10:18을 볼 때 ‘하나님(ὁ θεὸς; 호 떼오스)’이라는 단어를 예수께서 통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주장 역시 엄밀하게 적용되기 힘들 것이다.
그러므로 해당 본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발언하셨을 가능성 역시 열어 두어야 한다.
이처럼… 하셨으니
(Οὕτως… ὥστε)
일반적으로 "in this way"를 뜻하는 "Οὕτως(후토스)"가 사용되었다. 즉 "이 같이", 혹은 "이 같은 방식으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how) 행하셨는가를 말한다. 이 "Οὕτως(후토스)"가 가리키는 "방식"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앞의 요 3:14-15의 '모세의 놋뱀과 같이 들리는 것'을 지칭하거나, 아니면 뒤의 '독생자를 주신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독생자를 주셨으니"의 "ὥστε(호스테)"는 어떤 결과를 나타내는 "그러므로", "그렇기 때문에", "그래서"를 의미하므로 이 "Οὕτως(후토스)"는 뒤의 '독생자를 주신 것'을 의미하진 않을 것 같다. 오히려 앞의 요 3:14의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리는 사건을 지칭할 것이 분명하다.
"Οὕτως(후토스)"와 "ὥστε(호스테)"의 직설법을 결합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강도와 그것으로 인한 결과가 실제로 일어났음을 강조한다. 특히 「BDAG」는 "ὥστε(호스테)"가 종속문장을 끌어들이는 경우 "실제로 따르는 결과", 즉 "그런 고로", "그래서"를 의미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Οὕτως… ὥστε" 구문은 의미상 이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놋뱀이 들린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그 결과 독생자를 주셨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읽는 독법인 '얼마나 사랑하셨는지!'와 같은 의미 역시 이 본문에 녹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의 주안점은 '얼마나 많이 사랑하셨는가'이기보다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셨는가'이다. 그리고 "Οὕτως(후토스)"는 우리의 눈을 먼 옛날 광야에서 모세가 들었던 놋뱀을 향하게 한다. 놋뱀은 또다시 우리를 에덴동산에서 저주받은 뱀의 이야기로 인도한다. 모세가 그것을 장대 위에 매달았을 때, 저주의 상징인 뱀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도구가 되었다.
사실 70인역에서 "장대(σημεῖον; 세메이온)"로 번역된 히브리어 "נֵס(네쓰)"는 "깃발"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용도로 사용된다. 이때에도 "들어 올림"의 개념이 함께 들어있다. 또 "σημεῖον(세메이온)"은 "표적", "상징"을 뜻하는 "sign"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매달다"로 사용된 히브리어 "תלה(탈라)"와 헬라어 "ὑψόω(휩소오)" 모두 저주받은 자를 매달아 죽인다는 의미와 동시에 어떤 자의 신분을 높인다는 의미를 이중적으로 갖는다. 특히 이 단어들이 1세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흔히 십자가형을 의미하는 데에 사용되었다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모세의 놋뱀이 들어 올려지는 것과 자신의 들어 올려지는 것을 비교하여 설명하신 것은 분명 십자가 사건, 곧 저주받은 자로서 매달려서 죽는 것을 뜻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굳이 놋뱀에 주목하도록 한 것은 그것을 쳐다보면(ראה, נבט) 살았다는 것(민 21:8-9)과 연결하여 예수를 믿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일 수 있다. 왜냐하면 가장 큰 표적(σημεῖον; 세메이온)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그분의 승귀를 보고 믿는 자들은 누구든지 영생을 얻기 때문이다("쳐다본즉 살더라"; 민 21:9).
이런 비교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표적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이 더욱 크다. 모세의 놋뱀은 어디까지나 도구적인 목적을 위해 소비되는 수단일 뿐이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을 위한 수단이자 동시에 목적이 되신다. 모세의 놋뱀이 저주받을 뱀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반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이자 광채이다(히 1:3). 놋뱀은 뱀에 물린 자들의 물리적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에 그쳤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근원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미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Οὕτως γὰρ ἠγάπησεν ὁ θεὸς τὸν κόσμον ὥστε τὸν ⸀υἱὸν τὸν μονογενῆ ἔδωκεν,)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방식은 곧 놋뱀처럼 매달리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이다. 즉,
"하나님이 십자가 처형의 방식을 쓸 정도로 세상을 사랑하셨다."
성경에서 "세상(κόσμος; 코스모스)"이 주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선언은 꽤 충격적이다. 일반적으로는 "세상(κόσμος; 코스모스)"은 우주 전체를 가리킬 수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신학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더욱 빈번한데, 보통은 어둠 속에 있는 "대중"을 의미한다(1:10; 7:4; 12:19; 18:20). 따라서 요한복음은 일관되게 "세상"을 악한 것으로 정의한다(7:7; 12:13; 14:17, 19, 30; 15:18-19; 16:11, 20; 17:9, 14, 25). 그런데 동시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며 그들을 계몽시키기 위한 대상으로 보신다는 것도 말한다(1:29; 3:16, 17, 19; 4:42; 6:51; 8:12; 9:5, 39; 12:46-47; 14:31; 16:8; 17:21, 23).
1세기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이스라엘"뿐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사랑하시지, "세상", 즉 유대교 밖의 이방인들을 사랑하시지 않는다. 이처럼 구약의 기본적인 정서는 외부인들과 구별되고 그들의 문화를 따르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표시인 '구별됨'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요소이다.
반면에 겔 18:10-13, 23은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렘 48:31, 36은 이스라엘 밖의 악한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한다. 비록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들의 완악한 마음의 저항과 반역 그리고 거절로 인해 제한받고 있지만 말이다. 신약성경 역시 악한 세상과 그런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긴장을 그린다. 우리는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3)"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악한 세상(κόσμος; 코스모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ἀγάπη; 아가페)은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근거이자 마지막 희망이다.
아마 요한 당시의 기독교 공동체는 이 점을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당하는 매일의 박해가 세상의 악한 원칙과 체계를 증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복음을 수호하고 전파해야 하는 그들의 처지는 '악한 세상을 사랑하사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행동에 의해 위로받고 격려받았을 것이다. 또 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강조한 대로,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 이기는 믿음이란 바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을 향한 사랑과 그 희생을 나타내는 믿음이었음을 이 본문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세상을 사랑한 하나님은 그래서 어떻게 행동하시는가?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주신다(ἔδωκεν; 에도켄)". 신(神)이 인간에게 무언가를 '준다'는 것, 즉 선물 따위를 제공한다는 것은 고대 사회에는 흔한 주제였다. 로마 시대에는 개인적으로 느끼는 신보다는 수호신으로서의 의미가 더욱 강조되었다. 그래서 집집마다 작은 신상을 두고 그 앞에 공물을 담는 그릇을 놓았다. 신상에게 선물을 드리면 그 대가로 신은 그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일종의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심지어 길거리에서도 이런 목적의 신상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반면에 기독교의 하나님은 공물을 받고 그 대가로 선물을 제공하는 신과는 다르다. 하나님의 선물은 기본적으로 희생을 통한 무조건적 사랑으로 표현된다. 심지어 유대인이라면 쉽게 떠올렸을 "토라"를 선물로 주는 것과도 다르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하나님의 하나뿐인 아들, "독생자(τὸν ⸀υἱὸν τὸν μονογενῆ; 톤 휘온 모노게네)"를 주시기 때문이다.
형용사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ής)"는 "오직", "홀로"를 뜻하는 "모노스(μόνος)"와 "되다", "발생하다"를 의미하는 "기노마이(γίνομαι)"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유일한"으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ής)"는 단순히 "독자"를 의미하는 것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는데, 이것은 그 용어가 70인역에서 히브리어 "야히드(יָחִיד)"를 번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야히드(יָחִיד)"는 "독자", "무남독녀", "고독한 자"를 의미하며, 랍비들은 후에 이것을 "바하르(בחר)", 즉 "선택하다"와 동의어로 사용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 용어가 사용된 것은 아마 그의 유일성, 독특성, 선택받은 자임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또 우리는 이 용어가 유대인들의 토빗서 6:14와 8:17에서 특별하게 사랑받는 아들을 잃는 슬픔에 관해 말할 때 사용되었음에도 주목해야 한다. 고대 세계에서 자신의 유산을 상속받을 유일한 장자를 잃는 것은 큰 비극이었다. 이 때문에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ής)"는 점차 "특별히 큰 사랑을 받는" 대상을 지칭하기 위한 용어로 자연스럽게 발전했다(Keener). 요세푸스 등의 유대 문헌에서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ής)"가 아브라함의 사랑받는 유일한 독자인 이삭을 묘사하는 데에 사용된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창 22:2의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에서 "독자"에도 히브리어 "야히드(יָחִיד)"가 사용된 것에 주목하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십자가 처형의 방식을 사용할 만큼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결과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시선을 모세의 놋뱀에서 창세기 22장의 이삭을 희생시키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아브라함으로 이동시키는 셈이다. 그때에 아브라함은 자신의 유일한 아들이자 가장 특별한 사랑을 받는 아들인 이삭을 희생시키기 위해 모리아 땅의 산으로 출발했다. 이처럼 하나님도 자신의 유일하고 사랑받는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놓는다. 거기서 느끼는 아버지의 비통함은 토빗서 6:14에서와 같이 부모의 죽음을 재촉할 정도로 강력하다.
다른 점은, 아브라함의 유일한 아들인 이삭은 죽음을 피해 생존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대신할 희생양을 미리 준비하셨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사랑받는 유일무이한 아들인 예수님은 죽음을 온전히 맞는다. 그분을 대신할 제물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분이 세상을 대신할 제물로서 희생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지만, 하나님은 다른 누구의 명령 없이 자신의 의지로 아들을 넘겨준다.
우리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장면에서 그의 믿음과 순종에 감동을 받는다면, 여기서는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넘겨주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을 느낀다. 이때 우리의 입에서 자연스레 터져 나오는 탄식은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이다(시 144:3). 사람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 15:13). 인간의 머리는 이런 사랑을 불가해한 것으로 인식한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ἵνα πᾶς ὁ πιστεύων εἰς αὐτὸν μὴ ἀπόληται ἀλλὰ ἔχῃ ζωὴν αἰώνιον.)
"이는"으로 번역된 "히나(ἵνα)"는 부사적 목적을 나타내기 위한 접속사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방식을 쓰시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신 것은 그 결과 유일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주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제 그렇게 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즉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하셨는가를 여기서 설명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자들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사도 요한은 자신의 저서에서 "믿음"을 강조하기를 좋아하는데, 특별히 그가 동사 "피스테우오(πιστεύω)"를 사용할 때에 "에이스(εἰς)"라는 전치사와 함께 결합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요한이 "~을 믿다"를 나타낼 때에 거의 항상 이것을 사용하는 것은 그의 대표적인 문체적 특징이다. 일반적인 헬라어 문헌과 70인역에서는 "피스테우오 에이스(πιστεύω εἰς)"라는 구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창 15:6에서 "헤에민 바도나이(הֶאֱמִ֖ן בַּֽיהוָ֑ה)"을 사용하여 동사 "아만(אמן)"과 전치사 "베(בְּ)"를 결합하고 있기는 하지만, 70인역에서는 이것을 여격과 함께 번역하기 때문에 요한의 용례와 다르다(요한은 대격에 가깝다). 따라서 "피스테우오 에이스(πιστεύω εἰς)"는 통상적인 헬라어 문법에서 벗어난 것으로, 요한이 고안한 특이한 구문이거나, 아니면 매우 드물게 사용되는 희귀한 표현일 것이다.
"에이스(εἰς)"는 주로 "~안에", "~안을 향하여", "in"의 의미로 사용된다. 아마 요한이 "피스테우오(πιστεύω)"와 "에이스(εἰς)"를 결합하는 것은 믿는 주체와 믿음의 대상 간의 긴밀한 관계를 나타내고 강조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즉, 신자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개인적인 친밀함이 요한의 "피스테우오 에이스(πιστεύω εἰς)" 구문을 통해 적절히 표현된다.
또 우리가 요한복음 전체 주제를 고려한다면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단순히 표적을 보고 믿는, 즉 사라질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인내하고 이기는 믿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은 많은 곳에서 표적을 보고 믿은 자들의 끝까지 인내하지 못하는 모호한 상태에 대해 묘사한다(4:41-42, 48, 50, 53; 6:30, 36; 7:31; 11:40; 16:30-31; 20:29-31).
요한의 관심은 시종일관 무엇이 정말로 참된 믿음인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인내하게 만들지만, 거짓된 믿음은 중간에 넘어진다. 표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따랐지만, 그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버린 것처럼 말이다. 베드로는 무려 세 번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밤에 찾아온다. 도마는 실제적인 표적을 보기 전까지 자신은 믿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는 날 밤에 그 곁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요한이 말하는 믿음이란 그것을 뛰어넘어 궁극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다. 이것은 요한복음이 쓰일 당대 박해받던 기독교 공동체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계시록에서도 요구하는 것이었다. 참된 믿음은 환난과 고통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인내한다. "믿음"을 뜻하는 히브리어 "에무나(אֱמוּנָה)"가 "신뢰할 만 함", "성실함"을 의미하듯, 신자들의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러므로 어떤 외부의 상황에 의해 변하는 것이 아닌, 불변하는 하나님의 속성에 의지하여 확고하게 서는 것이 바로 참된 믿음의 특징이다.
요한의 "믿음"은 구원파의 "믿음"과는 사뭇 다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사실을 믿고 인지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인내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서는 교리나 기적, 혹은 사실 따위를 믿는 자들이 아니라,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하는 자들이 구원을 얻는다.
이들은 결국 "영생"을 얻을 것이다. "생명"을 뜻하는 "조에(ζωή)"는 요한복음에서 "영원한"을 뜻하는 "아이오니오스(αἰώνιος)"와 함께 쓰여 "영생(ζωή αἰώνιος)"을 의미하는 데에 사용된다. 헬레니즘 시기 로마에서 "영생(ζωή αἰώνιος)"은 단순히 늙지 않고 지속되는 삶을 의미했다. 헤르메스주의 문헌(Hermetica)에서 그것은 '신적인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었으며, 영지주의자에게 그것은 영적인 지식인 그노시스(γνῶσις)를 깨달아 물질계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
반면에 유대교의 배경에서는 이것이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메시아가 도래하는 날, 장차 올 세상에서 부활할 때 얻는 새 생명을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요한 당시의 기독교인들 역시 "조에(ζωή)"를 이런 의미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이것을 현재시제의 동사와 함께 서술하여 새로운 의미를 추가적으로 부여한다. 즉 그에게 있어 종말에 얻을 새 생명은 지금 현재에 우리가 미리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신자들이 영생을 소유했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유효하다.
성경은 이 영생의 보증, 인(seal; 印)으로 성령이 신자들에게 부어진다고 말한다(고후 1:22; 5:5; 엡 1:13-14; 4:30). 특히 고후 5:5의 "보증"은 헬라어 "아르라본(ἀρραβών)"으로, "보증금", "공탁금", "계약금"이라는 법적, 상업적 용어이다. 마치 부동산 계약할 때에 계약금을 내고 나머지 잔금을 치르듯이, 성령은 종말에 있을 영생에 대한 계약금의 개념으로 우리에게 먼저 주어진 것이며, 하나님은 이에 대해 반드시 지불하셔야 할 책무를 지신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영생을(ζωὴν αἰώνιον)"은 현재 능동태 가정법 동사인 "에케(ἔχῃ; 얻다)"와 결합한다. 사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우리들의 구원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반면에, 요한에 의하면 영생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단지 우리는 영생에 대한 보증으로 성령을 받아 그것을 미리 맛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요한의 신학에서 종말론적 영생의 부활이 현재의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누림으로 예견되고 획득된다.
요한의 신학은 이미 구원을 얻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배제한다. 오히려 그의 신학은 끝까지 인내하고 이기는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보증으로 미리 주어지는 성령을 말한다. 요한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정적인 시점의 문제가 아니라 역동적인 현재의 문제다. 시편에서 의인이 하나님의 길을 따라 걸어가듯이(הלך), 기독교인 역시 믿음을 지니고 삶을 끊임없이 살아가는 현재적 실체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는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μὴ ἀπόληται; 메 아폴레타이)!
결론
요한복음 3장 16절은 놋뱀을 장대에 매다는 이미지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이미지를 한데 결합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심오한 사랑이 희생의 정신 속에서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그것의 목적은 바로 제물로 바쳐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믿는 자들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비록 이 영생은 신자에게 미래의 일이겠지만, 성령을 통해 미리 누릴 수 있는 현재의 보증된 사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니고데모가 예수께 질문했던 "거듭남"에 대한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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