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장 25~26절.
이 다소 모호한 구절에 대하여 많은 해석적 견해 간의 차이와 연구들 간의 논쟁적 다툼이 있어왔다. 그러나 이번 묵상에서는 그런 세세한 내용들을 전부 다룰 생각은 없다. 묵상은 묵상으로 머물러야 하며 신학의 학문적인 바탕은 배경적으로만 기능해야 한다. 신학이 묵상의 영역을 강압적으로 넘나들 때 우리는 그곳에서 교조주의의 섬뜩한 이면을 발견할 것이다.
이 구절은 나사로를 부활시키는 유명한 장면 중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을 다룰 때에, 예수님의 신적인 권능을 강조하고 아울러 그분의 교리적 참된 계시를 선포하는 이중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나사로의 부활은 나사로가 거의 회생 불가능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예수님께서 도착하실 때쯤에는 이미 나사로의 시신은 장사된 지 4일째 되는 날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살리시기를 기대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굉장히 불행한 일일 수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당대의 유대인들은 사람이 사망한 뒤 망자의 영혼이 3일 동안 시신의 주변을 배회하면서 다시 살아날 기회를 엿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4일의 시간이 경과한 것, 거기에 더해 이미 그 시신에서 썩은 내가 난 것(39)은 나사로가 혹시라도 다시 살아날 모든 조건들이 사라지는 것으로 보였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이 같은 나사로의 상태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에, 다소 모호한 두 병행 문장을 통해 그렇게 하셨다. 이 애매한 병행 문장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나사로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보다 영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듣거나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소 헷갈리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모호한 설명은 오히려 교리적으로 풍성하고 깊은 것을 전달하는 데에 더욱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또한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마르다가 한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24절에서 마르다는 자신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마지막 때에 부활할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마르다의 말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말씀하신다.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둔 채로 본문을 묵상하도록 하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25절과 26절의 전체적인 구조는 예수님의 이 최초 언급을 병행적으로 설명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부활”과 “생명”은 각각 25절의 끝 문장과 26절의 처음 문장에 대입될 수 있다.
즉 다음과 같다:
“나는 부활이니-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25b)
나는 생명이니-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26a)”
따라서 여기서 예수님께서 “부활”과 “생명”을 말씀하실 때에는, 뒤따르는 구절이 이 각각의 단어의 의미를 부연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또한 이 같은 병행에서 중점적으로 강조되는 주제는 부활도, 생명도 아닌 “믿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부활을 경험할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지닐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그렇다면 이 “믿는 자들”이 겪게 될 부활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지금 마르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구절을 만약 물리적인 부활의 의미로 생각한다면 예수님을 믿는 자는 물리적인 사망에 이른 뒤 심지어 4일의 시간이 경과하여 시신이 썩을 지경에 이를 찌라도 물리적으로 생명 활동을 다시 하는 “생명체”로 다시 소생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이 물리적 부활의 견해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본문에 “살겠고”로 번역된 제세타이(ζήσεται)가 단순히 “살다”라는 의미 보다는 “소생하다”라는 의미에 더욱 가깝다는 점이 되겠다. 그리고 실제로 4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신 이 말씀을 그대로 실현시키시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다.
그러나 반면에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마르다의 마지막 때의 부활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나사로가 예수님의 기적에 의해 살아났을 찌라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모두 마지막 때에 부활을 경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여기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소생하겠고)”라고 말씀하신 것은 물리적인 의미의 부활뿐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신령한 몸으로 다시 태어날 신자들의 부활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라 여길 수 있다. 또한 사실 이 영적인 의미에서의 부활을 염두에 두신 것이라 여기는 것이 더욱 타당한 견해일 것이다. 왜냐하면 나사로의 물리적인 소생은 미래에 있을 신자들의 신령한 부활을 예견하고 확증하며 인 치는 훌륭한 예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신 “부활”의 의미는 지금 나사로가 곧 겪게 될 물리적인 생명 활동의 재개와 후에 있을 영광스러운 몸으로의 신령한 부활을 모두 이중적으로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그것에 더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이 기적을 통해 후에 있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속의 행위가 얼마나 확실하게 성취될 수 있을지,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런 신적인 권능이 충분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기대할 수 있다.
예수님의 이 신적인 부활에 대한 권능의 확실함은, 그분이 나사로를 다시 일으킨 것을 통해 우리에게 확증되고, 따라서 그분의 죽으심에서 3일 만에 부활하신 사건 또한 확증되며,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믿을 때 우리 역시 마지막 날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을 소망하는 확실한 근거가 될 것이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다음으로 “생명”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살아서”(ζων)의 의미는 다소 모호하다. 이것은 지금 현재 이승에 살아있는 사람들이 아직 물리적인 죽음을 경험하기 이전에 예수님을 믿는다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과연 죽어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있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굳이 예수님께서 여기서 살아있는 사람이 믿을 때를 구분하실 이유가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사실상 모든 신자들은 물리적으로 살아있을 때에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며, 죽은 뒤에 예수님을 믿을 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살아서”는 물리적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생명활동의 지속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의 “살아서”는 4:10~11과 7:38의 “생수” 그리고 6:51의 “산 떡”의 의미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 해석은 요한이 빈번하게 자신의 복음서에서 강조하는 주제와도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적절하다. 고후 5:14~15의 “산 자들” 또한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즉 여기서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란 계시록 20:4의 “살아서”처럼 “영적인 생명을 지닌 채로”와 “부활한 채로”를 모두 의미할 수 있다. 더욱이 원문은 “살아서”와 “믿는” 사이에 “그리고”(και)가 들어간다. 따라서 보다 깔끔한 번역으로 “살아있는 그리고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결코 죽지 아니하리니”가 옳다.
그렇다면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 즉 생명을 지닌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며 그것을 결단코 잃지 않는다는 선언이 될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그들의 물리적인 생명활동과는 별개로 영적으로도 참된 생명을 소유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역을 하실 때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임했다(마 12:28).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한 것이 아니라(눅 17:20), 우리들 안에 존재한다(눅 17:21).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자는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날 것이기 때문이다(요 7:38).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현재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미 실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물리적 생명활동이나 사망과는 상관없이, 우리들은 참으로 살아있는 자들이며 영원히 죽지 않는 자들이다.
이 같은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로써 입증되고 인 쳐졌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신인(神人)이시며, 그분의 말에는 거짓이 없고 항상 참된 진리만이 있다는 것을 확증했다. 따라서 첫 신령한 부활의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분이 영생하시는 것처럼 영원히 살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지금 현재 이루어진 현실이며, 동시에 미래에 다가올 더욱 풍성한 부활의 보증일 것이다.
우리의 몸이 신령하게 바뀌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의 이름을 높이며 영원히 찬양할 그날을 사모하는 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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