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골로새서 3장 23~24절.
이 구절은 많은 사람들에게 흔히 오해되어 왔던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대개 이 구절을 두고 마치 바울이 모든 사람에게 이것을 말하는 듯한 인상을 받아 그런 방식으로 먼저 받아 해석하는 경우가 상당히 흔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이 구절이 바울의 편지를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여기는 것은 매우 합당합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바울이 이 구절을 적을 때에는 적어도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대상으로 하는 사람들은 교회 회원들 전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당시에 천대받던 사람들인 종들을 향하는 것이 바울의 가장 우선적인 의도였습니다.
이것을 알려면 먼저 골로새서 3장 18절 이하의 부분에 대하여 대략적으로나마 알아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18절 이하는 주석가들이 흔히 “가족 법전”이라고 부르는 부분에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18절에서 부부 관계를 시작으로 종과 상전이라는 당시의 가족과 일상생활에 관련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도덕 윤리에 대한 설명이 이 18절 이하의 가장 주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지금 묵상을 하고자 하는 구절은 22절 이하부터 시작하는 종들에 대한 부분에 해당합니다. 다음은 22절의 내용입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이다음에 위치한 23절의 내용과 직전의 22절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22절의 내용에 대한 부연 설명이 곧 23절~24절의 내용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타인에 대한 우리들 스스로의 태도로 인용하곤 했던 이 구절이 사실은 바울이 당시 그리스도인이었던 종들을 목표로 하여 말한 교훈이었던 셈입니다. 이 같은 점을 유의하면서 묵상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이제 여기서 말하는 “무슨 일”의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22절에서 명시한 “모든 일에”를 바울이 다시 한번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단순히 “모든 일”에 해당하는구나 하고 생각함으로써 바울이 이 말을 재차 사용한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여기서 과연 “종”들의 업무란 것이 무엇이었는지, 특히 현대인이 생각하는 “종”의 개념과 다른 고대 세계의 “종”이란 어떤 존재들이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고대 세계, 특히 로마의 종들이란 쉽게 말해 가축의 일종이었습니다. 종들은 매매나 재산 증여 및 재산 소유도 할 수 없었고 결혼하거나 이혼하는 등에서 많은 제약이 있었으며 심지어 자녀를 낳아도 자신과 관련 없는 곳을 끌려가는 것이 흔했습니다. 주인들은 부유한 경우 많은 종들을 거느렸고 그들을 사고팔았으며, 마음껏 죽였습니다. 많은 노예들이 검투사 등으로 원형 경기장에서 사람들의 죄악 된 유희와 오락거리를 위해 동료를 죽이고 또 동료에게 죽임 당했습니다. 심지어 당시 이교도 철학자들은 이러한 노예 제도를 매우 예찬하며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기도 했으며, 많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어린 아이나 여성들의 지위와 마찬가지로 노예 역시 매우 비천하게 여겨졌고 또 그것이 당연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여기서 “무슨 일”이든지, 혹은 “모든 일에”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강조하기 위함도 있겠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당시 로마의 노예들은 사실상 주인의 모든 것을 책임졌고 그들의 경제적인 가치를 매일의 노동과 섬김을 통해 증명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쓸모 없어짐”이란 곧 팔려가거나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말한대로 “무슨 일을 하든지”라는 범주는 다만 담담하게 그들이 당대에 해야만 하는 업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 또한 이 “무슨 일”이라는 범주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야말로 하나님의 종들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자 세상에서 사람들을 섬기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로마의 노예들에게 그러한 의미에서라도 “모든 일”을 그들이 해야 할 의무로 설정하였다면, 더더욱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바울이 말한 의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종이 상전을 섬기듯이 섬겨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를 섬겨야 한단 말입니까? 그것은 물론 하나님이 가장 최우선으로 생각될 수 있겠지만, 여기 이 구절에서의 주제가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한 것임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누군가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비슷한 질문을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사실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사람들이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교훈을 베푸셨습니다. 그것은 곧 “자비를 베푼 자가 그 이웃이다”라는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은, 우리가 섬기는 사람이 누구든지 곧 그 대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백방으로 다니며 누구를 만나든지 그를 섬겨야 하며 섬길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마치 고대 로마의 종이 상전을 섬길 의무가 있었듯이, 마땅히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섬길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심지어 예수님 조차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학생이 선생보다 크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선생이 한 모범을 실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한이 지적한 대로,만약 형제가 어려운 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겠습니까? 우리가 마땅히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인만큼,또한 섬겨야 마땅한 줄 압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 부분은 22절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의 부분을 부연설명한 것입니다.
만약 적절히 비교될 수만 있다면, 고대의 종들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것은 우리 현대인들 입장에서는 막 취업하여 직장을 다니는 고용된 사람들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용된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자신의 이득보다는 회사, 즉 기업 등의 이득을 위해 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생산직이나, 서비스직이나 거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심지어 기업의 회장이라고 하여도, 그들 또한 국가와 사회를 섬기고 그들을 위해 자신들의 이윤을 분배할 도의적 책임을 어느 정도는 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눈가림만 하지 말고…” 과연 우리들이 고용된 입장에서 일을 하면서, 혹은 조금이라도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 일을 하면서, 성실하게 전심을 다하여 마치 나의 개인적인 일인 것처럼 그것을 수행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만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하여, 겉과 속이 다르게 눈가림만 하고 있습니까? 이런 자들에 대하여 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라고 정의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없다는 현실적인 한계점을 적절히 이용하여 앞에서는 친절하고 사려 깊고 성실하게 일하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불쾌해하고 경멸하며 그 섬길 대상을 교만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사람은 기쁘게 할 수 있을지언정, 과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이렇게 사람을 기쁘게 하는 행동을 아무리 잘 연기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음을 다하”는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신명기에서 자신의 임종을 지켜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에 두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강론하는 것이 떠오릅니다. 즉 전심전력으로 뜨거운 마음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섬길 때에 바로 그렇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을 바라볼 때에 사랑스러운 감격에 가득 차서 그분을 향해 헌신하듯이, 우리 이웃을 그렇게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아마 이 대목을 읽을 때에 로마 시대의 노예 신분이었던 그리스도인들은 필시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까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그들은 로마시대에는 그 어떠한 재산도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땅도, 가축도, 심지어 가정도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모든 것은 자신이 섬기는 주인의 것이었을 따름입니다. 그들은 그 어떠한 상속받을 유산도 없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바울이 22절과 23절에서 굳이 지적한 대로, 주인의 사실상 “모든 일”을 도맡아 해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말하길, 그런 그들에게도 물려받을 유업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주 그리스도를 섬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매우 익숙하게 알고 있는 구절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하물며 자신보다 높은 상전에게 한 일은, 그것이 하나님을 생각하여 전심으로 뜨겁게 사랑하여 행하였다면, 그 보상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께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적인 “상급”의 비밀스러운 원리입니다. 그 누가 과연 로마 시대의 하찮은 노예가 유업을 상속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것을 여기서 담담하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따뜻한 사랑으로 대하고 있나요?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하나님께 대하듯 그렇게 행하고 있습니까? 또 과연 우리는 실제로 우리의 이웃을 통하여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사랑의 대상이신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그리스도 예수께 매일매일의 삶에서 어떻게 대우해드리고 있습니까? 혹시 눈가림하듯 사람에게 하듯 우리 사랑스러운 구주께도 그렇게 소홀히 대접해드리고 있지는 않은가요?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대접하고 있습니까?
주님, 나는 당신을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던가요? 나는 어째서 나의 이웃에게 냉수 한 그릇, 겉옷 한 벌을 뜨거운 사랑으로 벗어주지 못하는 것입니까? 나는 어째서 우리 주님께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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