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장 38~39절.
이 구절은 본격적이고 적극적이며 대표적인 예정과 견인에 관한 구절입니다. 아마 이 구절을 읽는 많은 종교인들이 마땅히 생각해야 할 바는 어떻게 바울이 이토록 자신 있게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다는 점을 주장할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종교들의 경우들을 보자면, 그 종교 일원들의 믿음이나 신념이나 신앙심의 자체만을 놓고 보았을 때 그것은 당연히 변형될 수 있으며, 배도할 수 있으며, 그 종교를 버리고 다른 종교로 갈아탈 수 있는 종류의 것으로 간주되곤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그러한 가능성들을 일체 배제하고자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는 지금 할 수 있는 한 모든 다양한 표현을 동원하여 신자 개개인이 하나님에게서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합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성도들은 하나님에게서 “어떤 경우에도, 어떤 힘에 의해서도,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가장 설득력 있고 강력하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 구절이 예정론과 관련된 것이 아니며, 다만 신자가 “그 믿음을 유지하는 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유지된다는 의미일 뿐이라고 주장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런 입장에서는 이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렇게 장황하게 다양한 예시와 표현으로 강력하게 설명한 이유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내놓을 수 없습니다. 만약 바울이 다만 “믿음을 유지하는 자들”이 그런 관계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이 구절을 썼다면, 굳이 이렇게 장황하게 써 나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울의 이 글을 읽어보면 그가 어떻게 해서든지 모든 경우를 포괄하려 노력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여기서 모든 경우의 모든 힘에 대하여 반박하고자 합니다. 혹시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떤 것”이 끊을 수도 있다는 식의 모든 주장을 논박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믿음”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신자의 “믿음”에 의하여 하나님의 관계가 끊어진다면, 바울의 이 논증은 잘못된 것, 적절하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바울의 논증에는 “믿음”을 포괄하는 범주가 있습니다.
바울이 모든 대상,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을 자신이 반박하고자 하는 범주에 우겨 넣었다는 점은 바울 자신이 예정론에 입각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아주 강력하게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는 어떤 한 예외 사항도 남겨 두지 않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하나님의 사랑에서 성도가 떨어져 나가는 경우는 단연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는 바울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28절, 29절, 30절, 33절은 바울이 매우 당당하고도 공개적으로 예정에 대하여 주장한 구절들입니다. 이런 구절들의 강력한 논증은 38~39절로 연결되는 이 큰 흐름의 예정론에 대한 바울의 사상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부분입니다.
이상의 예정론적인 바울의 사상적 배경 속에서 본문 구절을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해당 구절의 원문에는 “πέπεισμαι”이라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완료형태의 시제를 보이고 있는데, 그 용법상 강의적 문체로 현재의 시점에서 마치 강의하듯이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완료적 용법은 다르게는 바울의 강한 확신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마치 이미 그 일이 일어난듯이, 즉 이미 자신이 확인하여 확신을 가지게 된 듯이 강한 어조로 현재 자신의 개인적인 신념을 피력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그에게 있어 신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에서 떨어져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은 매우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도 마치 두 눈으로 이미 그 결말을 확인하여 이미 완료된 것을 생각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의 시각에서 이 문제는 너무나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한 자신의 확신을 이미 벌어진 일을 다루듯 완료형의 형태로 전달합니다.
우리 개개인의 신자들은 보통 어떤 인간의 신념이 변하느냐 아니면 유지되느냐에 대하여는 상당히 불확실한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는 매사에 다양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에 대해 백 퍼센트 신뢰할 수는 없다는 것을 배우며 살아갑니다. 하물며 그 인간의 개인적인 사상이나 신념이 변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온전하게 유지될 것이라는 결론은 인간의 능력 내에서는 매우 불가능해 보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지금 마치 성도들의 임종을 미리 지켜보고 온 듯이 그들의 신념이 절대로 변하지 않고 계속 유지될 것임을 강하게 확신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소수의 개개인이 아닌 성도들 전체의 보편적인 현상으로 확장시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바울의 강한 확신의 외침이 이 완료형 시제의 “확신하노니”라는 짧은 말에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강하게 확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위에 제가 주장했던 대로 그 역시 예정론적인 사고관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시고 부르신 자들(30)인 성도들은 단지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이유 때문에 그 관계에서 제멋대로 이탈할 수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일들은 그들의 자유 의지대로 개별적으로 나오는 듯 보여도 하나님의 크신 역사와 권능 안에서 합력하여 모든 것이 선을 이룹니다(28).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매우 강한 확신에 찬 어조로 성도들이 하나님의 관계에서 절대로 떨어질 수 없다고 외칠 수 있습니다. 만약 교회의 회원 중 한 사람이 배도를 하거나 실족한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떤 자가 계속 끝까지 믿음을 굳게 유지한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자입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이 확신하는 것의 확실성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부연 설명을 시작합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5가지의 카테고리로 나뉠 수 있습니다.
1. 사망과 생명
2. 천사들과 권세자들
3. 현재 일이나 장래 일
4. 능력
5. 높음이나 깊음.
이렇게 다섯 가지의 범주를 통해 바울이 사실상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을 전부 담으려고 애쓰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사망이나 생명이나”
“사망”이 목록의 가장 첫 번째에 등장한 것은 분명 36절에서 바울이 인용한 구절과의 연관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도 제 생각에는 “사망”이라는 현상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불가항력적이자 가장 절대적인 힘이기 때문에 이것을 맨 처음에 넣은 것 같습니다. “생명”은 이 “사망”의 수사학적인 대조를 위해 추가한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 목록의 가장 처음을 ‘가장 강력한 힘 조차도 성도들과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순교의 위협으로도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끊을 수 없다는 식의 논증은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인간에게 가장 거대한 적이자 인류가 극복해 낼 능력 밖의 문제인 “죽음”이라는 근본적인 존재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상 이 시점에서 바울의 논증은 인간의 전체 인생을 향하는 셈입니다. 인간의 전체 인생, 태어나서 죽는 그 모든 과정, 그것도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그 과정인 세월 속에서도 성도들은 그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들이 인생을 살면서 세월이 흘러 언젠가 자신이 지녔던 위대한 생각들을 포기하고 초심을 잃으며 변개되는 매우 많은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점은 성도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성도들은 참되게 믿고 죽을 때까지 믿을 것입니다. 심지어 모든 인간이 반드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죽음”도 이 작은 성도 하나의 믿음을 바꿔 놓을 수는 없습니다. 인류는 역사 속에서 죽음을 정복하지 못하고 매번 그 싸움에서 패배했지만, 성도들은 그 믿음으로 죽음조차 이겨냅니다.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천사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천사를 의미할 수도 있고, 혹은 악한 영인 사탄 마귀의 권력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선한 천사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뒤이어 나오는 “권세자들”이 부정적인 영적 실체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고, 그것이 수사학적인 문체를 사용하는 바울의 의도에도 맞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권세자들”은 세속적인 권력 이외에도 공중에 권세 잡은 자인 악한 영적 세력을 의미하는 데에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단어의 사전적인 문제에서는 그렇게 명확하게 단정지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는 영적인 권능을 포괄하기 위한 바울이 선택한 용어라고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합니다.
기독교 세계관에 흔히 퍼져 있는 미신들 중에 조금 오래된 것들을 살펴보자면 마치 사탄이 성도들의 믿음을 흔들어 그 뿌리를 잘라내고 실족하게 만들 수 있다는 식의 인식이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 같은 것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어떤 실체라도 성도들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그것을 유지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작정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 영적 실체들이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고 어떤 힘이 있든 간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이길 수 있는 영적 실체가 하나도 없다면,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에서 성도들을 끊어 낼 능력을 지닌 영적 실체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마귀가 우리를 미혹하여 죄를 짓도록 어느 정도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성경을 통해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영향은 하나님의 성도들을 붙들고 있는 강한 권능에 비해 매우 미미한 작은 힘일 뿐입니다. 성도들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관계는 그 정도의 영향력으로는 끄덕하지도 않습니다. 설사 마귀가 우리를 죄를 짓도록 미혹한다고 해도,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절대 방관하시지 않고 다시 하나님께 합당한 자로 양육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가장 온전하신 참된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여기서 바울은 시간적인 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영적인 어떤 힘을 가리킨다고 하여 뒤의 “능력”과 한데 묶어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근거가 희박합니다. 이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은 분명 과거나 미래의 “사건”을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즉, 성도들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과거에 자신이 했던 어떤 일이나 혹은 미래에 할 어떤 일에 의해 없던 것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자신이 지은 죄나 혹은 심지어 조상의 죄를 이유로 자신의 현재의 상태에 대하여 의문을 품기도 합니다. 혹은 미래에 지을 죄나 미래에 자신이 범할 어떤 알 수 없는 사건에 대하여 그것으로 인해 믿음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곤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한 이단들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같은 것들은 성도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도들의 구원은 자신의 과거에 지은 죄의 정도나 그 사실에 입각하여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미래에 어떤 죄를 지어서 그것이 취소되는 것도 아닙니다. 혹은 성도들은 미래에 자신이 믿음을 잃어버릴 것을 염려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성도라면 말입니다. 그런 과거의 일이나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일은 어떤 능력이 있어서 우리들의 구원을 저해하거나 취소시킬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또한 모든 일(사건)은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 있습니다. 실로 그분은 만물을 다스리시며 모든 것을 감찰하실 뿐 아니라 실제로 모든 일들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성도들의 모든 일은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바울은 이미 말한 바 있습니다(28).
“능력이나”
이 능력은 원문에 “δυνάμεις”로 돼 있는데, 그 사전적 의미는 “기적, 이적”을 뜻합니다. 이것은 어떤 기적적인 힘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당대의 마술사들이나 술객들, 우상숭배자들 중에 일부는 이런 사기적인 기적을 행함으로 군중들을 속이고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들의 경우 몇몇은 매우 많은 존경을 얻기도 했고 사람들의 두려움을 샀으며, 심지어 신의 대리자라고 불리기까지 했습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했을 당시에 믿지 않는 자들이 바울을 ‘쓰스’라 하여 섬기려 했던 점도 이런 당대 분위기를 잘 알려줍니다.
바울은 이들의 기적적인 힘이나 능력들로도 성도들의 믿음은 바꿀 수 없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 능력의 범주에는 사기적인 기적이나 이적이 아닌 실제 기적적인 일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기적들은, 심지어 이것들이 천상에서 온 어떤 것이라고 해도 성도들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이제 바울은 공간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대상을 확장합니다.
이 “높음”이나 “깊음”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이것이 각각 천국이나 지옥을 의미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혹은 더 단순한 의미로는 지구의 하늘과 바다 깊은 곳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여간 바울은 여기서 어떤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을 포괄하기 위해 이런 확장적인 용어를 사용합니다.
또 바울은 혹시 자신이 무언가를 놓쳤을까봐, 어떤 독자들이 다른 생각지도 못한 존재들을 들고 나올까봐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라는 말로 미처 표현하지 못한 모든 존재들을 포괄하려 노력합니다. 이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의 전범위적인 포괄성은 심지어 성도들 자신까지도 포괄한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35절의 “누가… 끊으리요?”의 “누가”는 모든 사람을 예외 없이 지칭하는 것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을 제외하고 생각해야 할 그 어떠한 이유도 찾을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그 자신 또한 바울의 이 범주에 포함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믿음을 자신의 의지로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에게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또 벗어나려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자유 의지를 신봉하고 예정론을 반대하는 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비록 성도라 하여도 자신이 믿음을 포기하면 그 믿음은 사라지며 구원이 취소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그런 일체의 취소성을 거부합니다.
그 누구도 성도들을 하나님에게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도들 자신도 예외 없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이길 사람이 우리 중에 과연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의지로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붙드시면 우리는 그것에 저항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35절의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기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즉,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의 머릿속에서 우리들은 삼위일체의 초기 형태의 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동일하시며 그러나 구분되십니다. 또 여기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확장함으로써 그 사랑의 강력함을 표현했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 어떠한 존재도 “방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떤 경우에라도 절대적으로 저해되지 않고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에는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에 저항하여 떨어져 나올 수 있는 것은 단언컨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모든 존재를 넉넉히 이기시는 참된 존재이신 하나님께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이단 생활!>
'성경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글이 도움이 되었다면 ♡를 눌러 주세요. 익명성이 필요한 질문일 경우 Q&A 카페를 이용해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