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누가복음 2장 14절.
언제나 이맘때쯤이 되면, 주일에 경건하게 울려 퍼지는 거룩한 찬송가와 함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설교와 교회 행사로 인해 부산스러운 모습을 접할 수 있다. 그런 것들은 크리스마스가 단순한 공휴일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전 세계가 일제히 한 사람의 탄생을 축하하고 그것으로 인해 기쁨을 누리려 한다는 점에서 바라보는 우리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어떤 방식으로든지 즐겁게 만드는 사실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우리 구주 거룩하신 왕 평강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인류사 전체를 통틀어서, 아니 이 물질세계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감격스럽고 지극히 탁월한 날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이신 그분이 인간의 곁으로 친히 오신 바로 그날이기 때문이다.
또 이맘때쯤이 되면, 어떤 강경하신 분들과 일부의 이단들에서는 크리스마스가 예수님의 탄생일이 엄밀한 의미에서는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축하하는 일들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내기도 한다. 크리스마스가 예수님의 탄생일이냐 아니냐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아니라는 쪽으로 기우는 것이 맞지만, 그것을 아무도 특정해 낼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에 대한 논쟁은 내 생각에 거의 유익하지 않을 것 같다. 더욱이 혹시라도 크리스마스가 예수님의 탄생일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축하하는 사람들의 행동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일제히 한 날에 예수님의 탄생의 사실 자체를 축하하고 기념한다는 그 의미를 크게 보며 깊이 마음에서 그것만을 고요하게 생각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것이 절기나 날짜의 논쟁으로 번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실제로 오셨다는 놀라운 그 사실에 비해 매우 부차적이기 때문이다.
시즌이 시즌인만큼, 나 또한 크리스마스다운 구절을 가지고 묵상을 하였다.
이 구절은 전체적으로 양을 치는 목동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 계시를 주는 형태이다. 그러나 계시만이 아니라 구절 여러 곳이 마치 하나의 시처럼 노래와 운율로 가득하다. 마치 천사들이 노래를 부르듯이, 그들은 감격스럽고 놀라운 일을 목동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10절~12절에 걸쳐 드러나는 이 거룩한 소식은 감동적인 장면과 방식으로 소개되는데, 읽는 이들로 하여금 몇 가지 놀라움을 갖게 하는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먼저,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오신다는 것인데, 그 구주가 “너희를 위한”다는 사실이다. 구주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구원자, 구세주라는 용어를 뜻하는 것은 맞지만 우리는 너무 섣불리 구원자로 오시는 그분이 당연하게도 우리들을 구원해야 한다고 속단하고는 한다. 그것은 어찌 보면 엄청난 거만한 마음일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 각자는 그 누구도 구원을 얻기에 적합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시도 빠짐없이 쉬지 않고 매 순간순간을 하나님을 모욕하는 데에 시간을 할애한다. 우리는 거의 모든 시간의 사용을 하나님의 영광과 전혀 상관없는 데에 쏟는다. 우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매우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뜻을 저항하며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들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 한다. 나의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감히 말하건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거의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이 말이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면, 매우 유감스럽게도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이 구원받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거의 혹은 전혀 체감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하나님을 향해 전심으로 저항하고 반항하고 증오하고 혐오하는 우리들을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돌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그 구주는 놀랍게도 아가의 모습으로 구유에 뉘인 상태로 오신다. 그분은 매우 높고 매우 탁월하시고 다른 차원에 계시며 우리가 범접할 수 없고 지극히 거룩하신 절대적인 분이신데, 그러한 그분이 가장 낮은 형태의 “아기”의 모습으로 가장 천한 장소인 “구유”에서 처음 등장하신다. 그분은 하늘을 찬란한 휘광으로 밝히면서 오시지도 않으셨고, 천군 천사와 함께 오시지도 않으셨고, 큰 나팔소리와 많은 물소리로 오시지 않으셨고, 수정과 같은 바다와 무지개 빛과 빛난 주석과 같은 발과 빛나는 눈과 흰 백색 옷과 입에서 날카로운 검이 나오는 모습으로 오시지도 않으셨고, 백마를 타고 웅장하게 등장하지도 않으셨고, 심지어 면류관, 하다 못해 가지 면류관이나 십자가를 지고 나타나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다만 조용히 오셨다. 그분은 몇몇 사람들에게만 자신의 탄생을 예고하셨을 뿐이다. 그분은 아무에게도 자신이 나타난다는 것을 홍보하지 않으셨다. 마치 요즘 현대 종교 지도자들이 그러하듯이, 혹은 정치인들이 선거 유세를 하듯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대접을 받으면서 오시지 않으셨다.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되시는 데도 말이다.
이러한 두 가지 점에서의 놀라움은 우리에게 이 땅에 오시는 우리 구주가 어떤 성품인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인지 조금 엿볼 수 있도록 만든다. 그분은 매우 겸손하신 분이심에 틀림없다. 우리가 겸손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몇 가지 전제가 붙는데, 그 중에 하나가 “본래 높은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겸손은 본래 높은 위치의 존재가 자신을 스스로의 의지로 낮은 위치를 향해 낮추는 것이다. 여기 그것에 가장 알맞은 사람이 계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존재 보다도 높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이 겸손하다는 용어를 스스로에게 사용하는 것은 매우 교만한 행동이다. 왜냐하면 인간들 중 그 누구도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높다고 생각하는 자만이 자신이 겸손하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 스스로 본래 높은 위치에 있다고 자만하는 자는 자신이 조금이라도 남을 위해 배려했을 때에 ‘아, 나는 얼마나 겸손한 사람인지!’하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여기 참된 겸손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탄생이다. 그분은 “실제로” 높으신 분이시고, “실제로” 자신을 낮추는 분이시다. 그분은 악하고 더럽고 징그러운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가 아무런 자격이 없고 다만 가증스러운 것들뿐인데도 구원으로 이끄시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그런 분”이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천사들은 이 놀라운 사실의 연속을 전달한 후에 찬양으로 이것에 대하여 서로 화답한다. 이 찬미는 두가지의 행으로 구조가 나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한데, 첫 행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이고, 두 번째 행은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이다. 두 행이 “지극히 높은 곳”과 “땅”이라는 장소적인 특성을 중심에 두고 나뉘어 있다. 이것은 실제로 장소적인, 물리적인 어떤 기준이 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천상적인 곳과 인간적인 세계 간의 구분을 여기서는 하고 있는 것이다. 각자의 이러한 세계에서 예수님의 탄생이 갖는 파급력은 이 노래에서 매우 감동적으로 서술된다.
먼저 “지극히 높은 곳”이란 어디인가? 이곳은 단순히 하늘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성경에서 접하는 단어인 “하늘”이라는 용어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듯이, 천상적인 장소를 의미한다. 그곳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자들인 천사들이 거하는 곳이다. 그곳은 천상적이며 동시에 거룩한 모든 존재들의 처소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그곳에서도 매우 주목하는 일이었다. 땅에서만이 아니라, 하늘에서도 예수님께서 인간 세상에 태어나신 그날을 매우 주목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하나님께 영광이요”
즉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점에서 천상 세계에서도 매우 주목하는 일이었다. “영광”이라는 용어는 헬라어로 읽으면 “독산”이라고 읽히는데, 주로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의 드높아짐의 선포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여기서의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것은, 분명히 예수님의 탄생이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는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어떠한 이유로 그렇게 되는지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일종의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승리하시는 매우 큰 계기가 되는 사건이었다. 이것은 감히 마귀의 세력이 하나님의 세력과 동등했다거나 그런 싸움의 과정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귀의 모든 행동과 그것으로 인한 결과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의 통치 아래에 철저하게 통제된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가 어떤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은 결국에 하나님의 지고하신 예정된 계획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결국에 그 존재 또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 마귀의 계획은 근간부터 손쓸 도리 없이 철저하게 망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결정적으로 이룬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지상에 오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시점부터 이미 마귀는 망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그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송사하던 그 일에 있어서 그는 자기 자리를 잃고 말았다. 계시록 12장 9~10절과 13절의 내용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탄은 이제 자신이 누리던 일종의 지위, 하나님의 백성들을 송사하며 고발하며 누리던 지위에서 땅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자만하고 교만하게 생각하던 그 마지막 지위마저 잃어버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지상으로의 탄생과 그분의 사역과 그분의 희생은 더 이상 마귀로 하여금 송사할 이유를 찾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미 죄 값이 치러졌고, 이미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것이 다 끝나고 정산되었기 때문에, 마귀가 지금까지 누려오던 송사하던 자리는 그 자체가 이미 불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마귀는 그 위치를 박탈당하고 땅으로 떨어진다.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18)
마귀의 이러한 자격 박탈은 하나님의 결정적인 매우 큰 승리였고, 하나님의 이름이 매우 드높아지는 사건이었다. 따라서 하늘에서 천사들은 그 지고한 지혜에 감탄하며 감격스러워하며 그분의 이름을 찬양한다. 베드로전서 1:12에서는 이 예수님의 복음의 능력과 결과에 대하여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매우 탁월하고 신비롭고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매우 지혜롭게 마귀의 지위를 그것도 매우 합법적으로 합당하게 박탈하셨다. 이제 하나님의 천상의 세계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의지만으로만 돌아가게 되었다. 그분이 처음과 끝이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중간과 끝을 주관하신다. 그분은 처음부터 그러하셨고, 지금도 그러하시며, 세세토록 그러하실 것이다. 따라서 천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탄생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찬란하게 드러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제 천사들의 찬양은 천상 세계에서 땅, 즉 인간들이 사는 지상을 향한다. 물질적인 세계에서 예수님의 탄생이 가지는 의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평화”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축복의 상태다. 이 평화는 기본적으로 인간들이 생각하는 안녕의 상태를 뜻하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아니다. 일차적인 이것의 의미는 문맥으로 봤을 때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화평이나 혹은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받는 것으로 인해 있게 되는 평화의 상태를 의미한다. 즉 구속적인 의미의 평화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해 궁극적으로 화평을 누리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니라 성도들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예수님의 탄생 이후에도 전쟁과 기아 그리고 부조리함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그것을 근거하여 화평의 상태에 있다. 먼저 우리들은 그리스도에게로 연합한다. 그분에게서 끊어질 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사랑의 상태에 있다. 우리는 외부의 그 어떤 압력에 의해서도 이 관계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절대적인 안정의 상태에 있는 셈이다. 우리는 그 어떤 마귀의 송사를 받지 않는다. 우리는 그 어떤 혐의로도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지옥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견인의 은혜로 인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동일하게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유지할 수 있는 거룩한 힘을 공급받는 상태에 있다. 우리의 매 순간과 매시간은 항상 일분일초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각별한 관심 속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매 순간 체험하며 살 수 있는 환경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끊어지기 않는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실제로도 마음에 온유와 평화가 있다. 하나님의 이러한 보호하심과 성령의 능력으로 지탱하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최적의 상태에 있도록 돕는다. 또한 하나님의 탁월하신 능력으로 인해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비로소 볼 수 있고 맛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일종의 “감각”을 얻는다. 이것을 역대의 기독교인들은 시각 후각 청각 미각 촉각 등의 표현들을 사용하여 아름답게 묘사하곤 했다. 그 정도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평화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구원받았다는 사실 때문도 있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의 성품을, 그분의 지고하심을, 그분의 아름다운 속성을, 그리고 그분의 행하신 선하신 일들을 비로소 옳게 바라보면서 생기는 지극한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땅에는 평화가 있다.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사랑스러운 존재로 참되게 인식할 수 있는 근원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인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애초에 경험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들은 천국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같은 평화와 사랑의 감각은 천국에서 영원히 그리고 확실하게 더욱 선명하게 경험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의 보증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바로 “성령”이다.(고후 1:22; 5:5)
이 평화가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평화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바로 이 평화를 누리게 될 수혜자들을 묘사하는 부분이다. 이 평화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실현되는 종류의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이란 분명하게 성도들을 뜻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은 성도들을 미리 예정하셔서 택하신 자들로, 기뻐하시는 자들로 부르시기 때문이다.(롬 8:30) 이렇게 부르신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칭하시는데, 하나님께서는 의인들만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들이란 분명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의롭다 칭하신 자들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왜 성도들을 기뻐하시는지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분에게서 나온 자들이기 때문이다.(요 1:13)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공로로 의롭다 칭함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그 누구도 각자의 공로나 각자의 어떠한 뛰어남이나 이유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만 그렇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탁월하거나 뛰어나서가 아니라, 우리가 더 선해서가 아니라, 심지어 우리가 믿음을 가져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께서 복음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셨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선하게 보시는 것은 예수님의 공로, 즉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그분은 매우 거룩하시기 때문에 자신 외에 다른 것을 보고 절대 기뻐하실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외에 완벽하고 절대적인 것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 보다 불결하고 더럽고 하찮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참 존재이자 존재의 바다이시고 존재의 근원이시다. 그에 비해 우리들은 비존재에 가깝다. 우리들은 사라지는 안개와 같고 시들어가는 꽃과 같고 먼지나 티끌과 같다. 우리들의 존재는 거의 없는 듯하다. 반면에 하나님의 존재는 매우 강렬하다. 그러한 그분이 무엇을 보고 기뻐하겠는가? 오직 자신의 공로만을 기뻐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기뻐하시는 것은 그분의 공로로 인한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로 인해 또한 더욱 기뻐하는데, 이로써 하나님의 이름은 더욱 드높아지며 그분의 명예는 더욱 높아지고 그분에게로 더욱 큰 영광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구원의 시작도, 과정도, 끝도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하나님에게 속하고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 성부의 계획하심이 성자에 의해 완성되고 성령에 의해 유지되고 지탱된다.
결론
우리가 크리스마스에 자주 접하는 이 구절,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이 구절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여 그분을 드높이는 송구이다. 우리들은 흔히 교만한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을 보면서 인간들을 위해 이 구절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분이 세계 평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오셨다는 듯이 말이다. 물론 일반 은혜의 측면에서 그런 점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기본적으로 이 구절은 문맥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들과 관계되는 것이 맞다. 천상으로부터 지상에 이르기까지, 이 구절에서 묘사되는 모든 것이 세계 평화라든가 그런 것들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이 선포되고 높아지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평화와 기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이 같은 절대적인 사실이 즐겁지 않다면, 그런 사람은 매우 불행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맛보는 것의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상태에 있다. 그들이 지옥에 갈 것이기 때문에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목격하고 음미하지 못하는 상태는 지옥의 그것보다 더욱 나쁘다.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천국에 가느니 하나님을 맛보고 하나님에 대해 알고 하나님의 성품에 감격할 수 있는 상태에서 지옥에 가는 것이 더욱 낫다. 이 구절이 말하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그 현실 앞에 천국이며 지옥이며 그것이 무엇이 중요한가. 천국이 천국이 되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을 지금 이 땅에서 보다 더 확실하게 묵상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참으로,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해 하늘에는 지고한 영광이 있고 우리 땅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진정한 평화가 있다! 만왕의 주인 되시며 장차 심판하러 오실 지극히 거룩하고 의로우신 그분께만 받으시기에 합당한 바로 그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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