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5장 13절 묵상 (갈 5:13) Meditation on Galatians 5:13 (Gal 5:13)

성경 묵상

갈라디아서 5장 13절 묵상 (갈 5:13) Meditation on Galatians 5:13 (Gal 5:13)

바잇 카탄 2019. 7. 4. 14:44

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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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갈라디아서 5장 13절. 

갈 5:13 헬라어 원문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 "다른 복음"이란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복음의 진리에 할례를 추가하여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 자들의 복음을 뜻한다. 이것은 바울에게는 매우 민감한 주제일 수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할례라는 의식은 구약의 "옛 것"에 속해 있는 것이었고,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새것"에 의해 생활하고 움직인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우리의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복음에 "의식"이나 "규례"를 추가해 버리면, 구원의 궁극적인 원인을 따지는 것에서도 매우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것은 인간이 믿어 구원에 이르는 것에 인간 스스로의 무언가를 추가하여 행위에 의한 길을 열어 두는 셈이 된다. 더욱이 만약 할례가 구원에 어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을 이루신 이유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다만 할례와 공존하는 그 정도 수준의 무언가란 말인가? 

 따라서 바울은 매우 강력하게 기존의 자신이 전하던 복음을 변호한다. 율법을 통해 어떠한 의로움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모두 율법의 규정과 그 방식에 의해 나아가는 길이다. 그러나 이 율법의 방식이란, 율법이 제시한 거룩의 완전성의 기준을 온전하게 충족해야 하는 것으로 진행되는데, 이것은 바울이 보기에는 매우 불가능한 것이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그러한 완전성의 기준을 의도적으로 낮춰 주실 수도 없는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매우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러한 불합리를 두고 보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목적을 설명하면서 이러한 자신의 주장에 확실한 근거를 세운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율법의 경계 안에 속해 있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계셨다면, 우리를 구원할 이유는 없어진다. 그것은 정확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와 반대되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오셨고, 죽으셨고, 또 부활하신 것이 참으로 진리라면, 그분께서 오신 이유는 다만 우리를 그러한 옛 영역의 속박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임이 틀림없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패러다임의 전환 그 이상이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하심은 영광스럽게도 그럴 가치가 없는 인간들이 율법의 영역에서 종노릇 하는 것을 그만두도록 만들었다. 왜냐하면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정죄의 방식이 아니라 사랑의 방식으로 작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용은 분명하게 이제 더 이상 율법의 기능이 엄밀한 의미에서는 필요하지 않음을 뜻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전혀 다른 영역의 힘에 의지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본래 앞의 12절에는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가 있다. 그리고 이 문장의 첫 부분 "형제들아"는 뒤의 "그러나"와 묶여야 문맥에 맞다. 본래 원문에는 첫 문장에 "for"가 위치해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처음 부분은 앞의 12절의 이유에 대해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라 보는 것이 옳아 보인다. 즉,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는데, 그 이유는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이다"가 된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행위와 규례의 강조는 매우 황당한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은 기본적으로 율법의 속박과 정죄에서의 자유와 탈출을 일차적으로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무엇에서 구원을 얻는단 말인가? 지옥에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지옥의 고통보다 자신의 죄로 인한 고뇌와 고통이 더욱 근본적이고 더욱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율법의 영역"에서 자유롭도록 "부르"셨다고 봐야 한다. 우리 각자는 율법의 영역에서 자유로운데, 왜냐하면 이제 우리들은 율법이 작용하는 방식에 의해 행동하거나 혹은 판단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자유"는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아예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만 율법이 요구하는 "정도"에 대한 자유이다. 즉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않도록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율법이 요구하는 완전성에 도달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에서 자유롭다. 그렇기에 우리는 율법의 기준에 의해 정죄받거나 판단받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그러한 수준으로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않아도 말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우리는 실제로 율법을 지키지 않고 어겨도 정죄를 받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자유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도 정죄받지 않는다. 또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부분에서 율법을 어길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정죄받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완전하신 공로가 율법을 무한히 충족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의미에서도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있는 셈이다. 

 이 자유는 또한 하나님의 작정의 계획에 이미 창세 전부터 포함된 것이었다. 그분은 신자 개개인을 예정하시고 부르실 때에, 이러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향해 부르신다. 이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한 것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자유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바로 하나님의 뜻하심과 그분의 선하심에서 온다. 이 자유는 피동적으로 부산물처럼 자연히 발생했다기보다 하나님의 치밀하시고 정확하신 계획과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의도된 자유"이다. 하나님께서는 본인 당신께서 죄인인 우리들이 율법에서 자유롭기를 "실제로" 원하신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것인데, 왜냐하면 율법을 만드시고 계시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은혜로운 것인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폭군처럼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애롭게 행하시길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당혹스럽기도 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 어떠한 존재도 이런 은혜를 받을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을 실제로 의도하시고 계획하셔서 우리를 그렇게 되도록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두렵고 또 얼마나 은혜로운지!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바울은 이 은혜로운 사실에 대해 쓰면서도, 한 가지 우려하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이 교리가 도덕폐기를 향해 나아갈 위험이 매우 높다는 점이었다. 율법에 대한 자유를 단순하게 이해하는 자들은, 마치 구원파가 그러한 것처럼, 이제 자신은 구원을 "받았고" 그러한 점에서 상황은 일단락되었으니 죄를 지으며 살아도 상관은 없으며 또한 조금 양심에는 찔릴지라도 정죄는 받지 않기에 괜찮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지금 현대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것은 "지속적으로 매우 악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지적하고 우려했던 점도 이렇게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것은 현대에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듯이, 조금 죄를 짓고 조금 편하게 살고 조금 타협하면서 요령 있게 살아가는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왜냐하면 "기회"라는 단어는 표면적으로 동일한 상태를 뜻하는 용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원문에서 "아포르멘"으로 쓰여있는 이 단어는, "기원, 원천"을 의미한다. 즉, 조금 교회적으로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살 수는 있을 테지만,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육체의 "근본"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육체"라고 쓰인 단어는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 것인데, 우리가 구속되기 이전에 속해 있던 "옛 영역"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획득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기반으로 자신이 옛 영역에 속해 있을 때에 사랑했던 많은 것들을 행하며 살아가기도 했다. 바울이 우려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율법의 자유라는 것을 근거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들을 합리화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매 순간 있는 일은 아닐지라도, 그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 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에서는 무한히 멀어질 것이다. 더욱이 그런 일에 대한 우리들의 합리화가 하나님께서 선하게 의도하신 자유에 근거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자유"라는 용어에 직접적으로 대조되는 용어가 있다면 "종노릇"이라는 이 단어가 가장 그럴 것이다. 바울은 신자들에게 전혀 새롭지 않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부분을 상기시키려 애쓰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자유롭지만 동시에 종노릇 하고 있다는 점이다. 곧 바울이 로마서 5장 21절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인 것이다. 또한 로마서 6장 19절에서 권면한 바와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인 것이다. 즉 바울의 머리 속에는 이제 두 영역, 두 왕국이 있는데, 하나는 죄로 인해 율법적인 방식으로 사망이 왕노릇 하던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의로 인해 은혜의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왕노릇 하는 영역이다. 우리는 전자의 영역에서 후자의 영역으로 "옮겨졌다". 우리는 마치 어떤 한 사람이 국적을 포기하고 새로운 국가의 시민권을 따낸 것 같이(빌 3:20), 완전히 국적이 이동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전 국가와는 다른 새로운 국가의 법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롬 6:14)는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즉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완전히 어떤 것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그러한 마구잡이식의 난잡한 의미의 자유가 아니다. 다만 이전 영역, 옛 영역, 옛 국가로부터의 탈출이자 진정한 자유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영역, 새 국가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곳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이주한 새로운 국가의 법에 의해 지배를 받고, 속박되어 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유롭다기 보단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전 영역에 대해서는 자유롭지만, 지금 영역에 대해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실로 인해 즐겁고 행복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 자유는 "악한 것"에 대한 탈출이고, 이 종노릇은 "선한 것"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입어서 옛 영역에서 탈출하였지만, 우리는 새로운 국가, 새 예루살렘, 진정한 낙원, 아름다운 하나님에게 속하여 새 영역에서 사랑으로 종노릇 하고 있다. 이 새로운 법에서는 이제 서로 미워하거나 악하게 대해야 할 필요도, 의무도 없다. 우리는 그 영역에서 이제 벗어났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마음껏 사랑할 수 있다. 이 새로운 국가에서는 "서로 사랑하라"라는 예수님의 법(요 13:34;15:12)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는 자유롭지만, 사랑에 대해서는 결코 자유롭지 않다. 사랑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해내야 한다. 그리고 정말 은혜롭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럴 만한 능력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사랑하라는 법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 모든 아름다움과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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