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17장 6절 묵상 (잠 17:6) Meditation on Proverbs 17:6 (Prov 17:6)

성경 묵상

잠언 17장 6절 묵상 (잠 17:6) Meditation on Proverbs 17:6 (Prov 17:6)

바잇 카탄 2019. 2. 19. 15:02

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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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동료 그리스도인 형제와 교제를 나눈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먼저 올리는 묵상입니다. 매우 주관적이며, 객관적인 것은 거의 없습니다.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잠언 17:6.

잠 17:6 히브리어 원문
잠 17:6 히브리어 원문



 이 묵상을 접하게 된 계기를 말씀드리자면, 구원파 내에서 저와 연락을 주고받는 어느 청년형제가 구원파의 청년 부서별 교제방에 올라온 청년 임원의 짧은 묵상을 제게 보내주었습니다. 그 내용은 직접 공개할 수는 없지만, 대략 "아비는 자식의 영화"라는 구절에 집중하면서 우리의 아버지의 지위가 높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겠냐는 식의 묵상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고귀하심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기죽어서야 되겠느냐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그 내용이 그 자체로 잘못 되었다거나, 절대적으로 틀렸다는 식의 생각은 결단코 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기독교의 세계관이 세상과 교회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이원론적인 바탕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위 묵상이 그다지 지향하는 방향의 묵상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특정적인 성향, 곧 하나님을 거역하려는 세상 전반의 성향(우리가 흔히 세속이라고 낮춰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삼가서 판단해야 하겠지만, 세상에서 하는 생활 자체가 극복이 필요하다거나 혹은 견뎌내야 하는 무엇이라던가 혹은 하나님의 뜻을 방해한다거나 혹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준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세상과 교회를 이원론적으로 파악하고, 마치 세상은 그 자체로 악한 것에 비해 교회의 기독교적인 것은 수준에 상관없이 그 자체로 거룩하고 선하다고 보는 것으로, 매우 좋지 않은 생각입니다.

 

 물론 더욱 큰 이유는 그냥 제가 묵상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것과 조금 다른 방향으로 묵상을 할 것입니다.

 본문의 구절은 두 부분으로 나뉘며, 편의상 α와 β로 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α: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β: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두 부분에서 뚜렷한 대조를 볼 수 있습니다. 손자는 노인에게 면류관이 되는 반면, 반대로 자식은 아비에게 영화의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낮은 것이 높은 것에게 어떤 대상이 되는 반면, 다음으로는 높은 것이 낮은 것에게 어떤 대상이 됩니다. 낮은 것(손자, 자식)과 높은 것(노인, 아비)은 서로에게 특정한 관계가 있으며 그것은 각각 면류관과 영화로움입니다. 이 대조에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먼저 α에서 "손자"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베네 바님"이며, 그 뜻은 "of children of son"입니다. 여러 주석가들은 이것을 '손자'라고 번역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만, 대체로 그 뜻은 '손자'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자손'  혹은 '후손' 등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낫습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이유는 히브리 문학에서 이러한 어법이 대체로 자주 쓰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바님"의 경우 "of son"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히브리 사상에서 "아들"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는 '자손'을 뜻하는 것으로 많이 사용됩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마태복음 1:1에서 사용된 표현을 들 수 있는데, 예수님을 설명하는 단어인 헬라어 "휘오스"는 "son"의 의미이지만 다윗과 아브라함과의 관계에 쓰임으로서 '자손'이라는 의미를 뜻 하도록 의도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노인"으로 번역된 단어 "제케님"은 종종 '조상'을 뜻하는 것으로 많이 사용됩니다. 따라서 α는 엄밀한 의미에서 '조상'과 그 '후손'들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라고도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전반부 구절은 그 의미가 분명합니다.

 

 구약의 히브리인들의 전통적인 견해 및 당시 근동 지방의 풍습을 생각해 볼 때, 가문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내용에는 땅에 대한 언급뿐만 아니라 자손에 대한 약속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에게 자손의 개념이 얼마나 중요할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창세기를 통해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특히 성경 여러 부분에서 이에 대한 사상들이 드러나는데, 만약 고대 히브리인의 남자가 대를 잇지 못하고 아들을 갖지 못한다면, 그 남자는 자신의 형제들의 자녀들 중 하나를 자신의 아이로 입양하여 이름이 끊기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수혼법의 경우도 이것과 관련이 있는데, 왜냐하면 자신의 남편이 아들이 없이 죽었을 경우 남편의 이름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아내는 그 남편의 형제와 혼인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α의 구절에서 자손이 있는 것을 "면류관"이라고 부른 것 또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면류관은 그것을 쓴 사람이 영화롭다는 것을 나타내는 사물입니다. 즉 면류관을 쓴 사람은 그 면류관이 그 사람에게 영광스러운 것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면류관이 아무에게나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면류관 자체에는 어떤 실제적인 영광이 있지는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면류관을 쓴 사람에게 영광이 있을 뿐, 면류관 그 자체로는 영광이 아닙니다. 다만 그 영화로움을 표현하는 사물이 될 뿐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그 다음의 β 구절에서 드러납니다. 자식의 영화로움은 아비에게 있습니다. 이 말은, 자식은 그 스스로 영화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식의 영화로움은 그 근원이 아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위의 α 구절과 의미 면에서 통하는 셈입니다. 자손의 생육과 번성은 그 자손에게 영화로움이 된다기보단 그 자손을 낳은 조상에게 영화로움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자식은 비록 영화롭기는 하지만, 그 영화로움의 근원은 자식 스스로가 아니라 그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즉 아버지로 인해 자식은 영화로워집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영광에 대한 관계를 신학적으로 은유를 통해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솔로몬이 일차적으로 자기 자식에게 왕가의 후손으로서 생각해야 할 덕목과 사상을 가르치려 한 것이 먼저이겠지만, 이러한 아버지-자식의 개념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많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아주 오래전부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으며,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녀들로 종종 여겨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α 구절에 따라 먼저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면류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수단이 되며, 하나님의 고귀하심과 탁월하심을 드러내는 매개체입니다. 그들의 생육과 번성, 즉 교회의 확장과 발전은 하나님에게는 굉장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점들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한없이 영화로우신데, 그것을 우리가 나타내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지만, 하나님의 능력, 즉 그분의 영광의 능력으로만 그러합니다. 면류관을 탁월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은 그 면류관 자체가 아니라 면류관을 쓰신 하나님이십니다.

 β 구절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우리는 영화로운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그 영화로움은 오로지 하나님에게서 근원한 것이지, 우리 스스로가 발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광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탁월함의 출처도 하나님이십니다. 즉 우리의 영화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은 하나님 단 하나이고, 우리가 나타내야 할 것도 하나님 단 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영광스럽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 영광스러울 뿐입니다.

 결론적으로 자손의 번성함이 그 조상에게 영광이 되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적 세계의 확장과 거룩한 발전을 위해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영광스러워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광스러울 만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스러운 것을 받았을 뿐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영광을 나타낼 수 있을 뿐입니다. 마치 자식이 아비의 영화로움을 나타내듯 말입니다. 마치 자식이 자신의 아버지를 영화롭게 바라보듯 말입니다. 이것은 면류관을 쓴 왕의 모습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인 면류관입니다. 면류관은 그 아름다움으로 고귀한 분을 드러내지만, 진정한 아름다움의 근원은 그것을 쓰고 계신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사실로 인해 더욱 즐거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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