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리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아가서 8장 6절~7절
본 글은 나의 사랑하는 동료 그리스도인과 교제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을 주석, 혹은 묵상 형태로 정리한 것이다. 아직 목표로 하는 아가서의 주석을 읽지는 못했기 때문에, 이 글에 있는 것들은 말이 주석이지 거의 묵상이며, 정확한 것은 없고 오로지 나의 개인적인 견해뿐임을 밝힌다. 어서 빨리 로마서 주석을 끝내고, NICOT 아가서 주석을 구해 읽어봐야겠다.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우리는 하나님의 도장이다. 도장(인:seal)은 무언가를 확정하거나 공인할 때 주로 쓰며, 특히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사도 직분을 변호할 때 이 표현을 많이 사용하였다. 또한 동시에 창세기 17:11은 할례를 언약의 “표징”이라고 하였고, 이것을 바울은 로마서 4장 11절에서 인용하여 할례 및 성례 교리를 설명할 때에 쓰기도 한다. 또한 이 인은 계시록에서 택자들의 이마에 인을 치는 장면에서도 어김없이 나온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우리가 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언가 표징이 될만한 것의 의미가 있다는 뜻일까? 그러나 여기서는 도장이나 인이라는 것의 엄밀한 의미보다는 “마음에 품고…팔에 두라”라는 표현 자체에 방점이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창세기 38장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다말은 유다를 속여 성관계를 한 뒤에 약조물로 “도장”과 그 밖에 끈, 지팡이를 요구했다. 유다는 상당한 재물을 소유했을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개인 도장을 지니고 다녔을 것이다. 또한 굴려서 찍는 원통형 모양의 도장과 눌러서 찍는 일반적인 도장 양 쪽 모두가 당시 가나안에서는 이 창세기의 시대 때부터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창세기에 소개된 고대의 도장은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중요한 물건이었는데, 소중하고 귀한 가치 있는 것이란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여기서 그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치 우리 인간들이 공증된 도장을 소중히 보관하시고 각별히 신경 쓰는 것처럼 우리들 그리스도인을 그렇게 여기시며 소중하고 각별히 몸에 지니고 다니실 만큼 가치 있게 여기신다는 것이다. 마치 도장을 우리가 지니고 다니듯이, 그리고 함부로 아무에게나 넘기지 않는 듯이, 술람미 여인은 자신을 왕이 그렇게 대해주시기를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마음에 품고… 팔에 두라”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것은 마치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에게 강론하면서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라고 말한 것을 상기시키는 듯 하다. 또한 “팔에 두라”는 것은 민수기 15장 38절에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와 같이 그들의 옷단에 달린 것을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라는 명령을 상기시키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두 표현은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던 것, 즉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고 준행하며 항상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라고 하신 명령의 표현 방식을 따 온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왕이 요구해야 할 것을 술람미 여인이 왕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부분이 놀라운데, 왜냐하면 영적으로 보자면 술람미 여인은 성도들을 가리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구약의 옛 시대에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명령을 기억하고 준행하며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신약의 새 시대에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당당히 하나님께 나아가며 이러한 것들을 요구하고 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이 언약이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고 따라서 사실상 무효화되었는데, 신약의 시대에서는 이 새 언약은 실패할 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언약을 철저히 준행하는 주체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룰 능력이 없어 반드시 실패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는 것으로, 그리고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으로 이 언약의 요구를 스스로 완전하게 이루신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음에 품고 성품을 다하여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옷단에 두어 매일 기억하시고 항상 생각하신다.
따라서 여기서는 분위기가 마치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 왕이 언약을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뒤의“사랑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는 분명 맹세를 할 때에 신의 이름에 하듯, 하나님 앞에서 언약의 서약을 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언약은 무엇인가? 즉 왕이 술람미 여인만을 사랑하겠다는 것이다. 뒤의 “투기”는 이 사랑하는 대상이 제한적이며 한정적일 것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술람미 여인은 당당하게 왕에게 요구하는데, 즉 그 왕이 아무리 궁에 여성을 많이 두고 있을지라도 자신만큼은 특별하게 대해주는 것이 옳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제한적으로 베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만인구원론, 혹은 보편속죄론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에서 보이는 이러한 의미에 대해 아마도 완강하게 거부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은 보편적이며 동일하며 따라서 마지막 백보좌 심판 이전까지는 모든 인류가 일종의 구속, 혹은 속죄의 상태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주의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매우 제한적이며, 특별하게 편중된다. 비록 일반은혜의 작용으로 전지구적인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있어 보존하고 계심을 부인할 수는 없을지라도, 구원하시는 은혜인 특별은혜는 분명히 제한적이며, 또한 그래야만 한다. 따라서 제한적으로 속죄되고, 제한적으로 구속받는다.마치 왕이 다른 여러 여성들이 있음에도 술람미 여인만을 사랑하듯이 말이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죽음은 인류가 보기에 피해 갈 수 없는 필연적인 종말이다. 모든 사람은 어떠한 방법을 써도 물리적인 죽음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 여기서 사랑을 그러한 죽음의 속성에 빗대어 표현한 것은 매우 엄격하며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동시에, 이 사랑의 불가항력적인 필연성을 강조한다. 술람미 여인이 왕에게 요구하는 이 사랑이란 인간이 죽음을 필연적으로 맞게 되듯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그러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즉 인간의 힘으로 저항할 수 없고, 설사 저항하더라도 결국에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결론인 셈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성도에 대해 갖고 계시는 사랑 역시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약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분의 사랑은 말 그대로 “필연적”인데, 저항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이라는 면에서 그렇고, 그 누구도 외부의 제 3자가 이것을 중단시키거나 개입할 수 없다는 면에서 그렇고, 또한 하나님께서 이 사랑의 귀결로 직접 끝까지 밀고 나가셔서 스스로도 중단하지 않으신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우리는 바울에게서 그러한 예정된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예수님을 핍박하려고 다메섹까지 기독교인들을 추적했지만,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저항 한번 할 수 없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은 “투기”인데, 이것은 사랑이 매우 제한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동시에 사랑받는 대상이 생각해야 할 점이 있음을 경고하듯이 말해준다. 사랑의 대표적인 성격은 소유욕인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랑의 가장 완전한 면을 갖고 계신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동시에 가장 확실하게 소유하고 계신 셈이다. 이 하나님의 소유물인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 행동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투기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분과 언약적 관계로 맺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모든 면에서 하나님으로 만족해야 하고 하나님 만으로만 만족해야 한다.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리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이 사랑의 속성에 대한 상세한 부연이 다시금 시작된다. 특별히 이 사랑의 “필연적인 속성”, 즉 절대로 최소되거나 중단되거나 폐기되지 않을 것이란 불가항력적 속성이 다시금 강조된다. 6절에서 묘사한대로, 이 사랑은 여호와의 불에 비유된 것인데, 따라서 이 구절에서는 이 불을 끄려는 외력에 대해 묘사하고(홍수) 그것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강조한다. 또한 이 사랑의 가치에 대해서도 강조하는데, 이 사랑을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없음이 드러나면서 그렇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공의로우신 속성(여호와의 불) 만큼이나 취소될 수도 중단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큰 외력이 있다고 한들, 절대 사그라들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이 사랑의 가치를 나름의 방식으로 환산하려 할 수도 있다. 어머니의 사랑에 비유하거나, 연인들의 사랑에 비유할 수도 있다.(사실 아가서가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가치에 대해서 말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왜냐하면 그분의 사랑은 가치를 매길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 하나님은 여러 속성이나 성품으로 구성된 복합체가 아니시다. 다만 하나님은 단일하실 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단순성이라는 고고한 신학적 교리인데, 이것에 의하면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다. 즉 하나님을 이루고 있는 여러 가지 중에 한 가지가 사랑이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과 동일하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자체에 대해 가치를 매길 수 있는가? 할 수 없다. 그분은 무한하시며 끝이 없으시며 이 세상에 그 무엇으로도 가치를 매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분께서 발하시는 사랑은 다른가?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그분이 사랑 자체이신데 그분이 값을 매길 수 없는 분이시라면, 그분에게서 발산되는 사랑 역시 값을 매기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하물며 다만 종이조각일 뿐인 돈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은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우리 인간들은 자본주의의 현대의 시선에 맞게 하나님을 실용적으로 판단하며 자신의 이윤을 위해 취하려 할지도 모른다. 그분을 통해 지옥을 면하고 천국으로 나아가려는 거대한 빅딜(big deal)의 투자를 할 셈인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그럴 가치를 매길 수 없다. 그분 앞에서 그러한 계산들과 투자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다만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입장에서 돈으로도, 선행으로도, 심지어 그들의 “믿음”으로도 살 수 없기 때문에, 다만 얼굴을 가리고 은혜를 베풀어주시길 조용히 간청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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