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4장 6~7절 묵상(빌 4:6~7) Meditation on Philippians 4:6-7 (Phil 4:6-7)

성경 묵상

빌립보서 4장 6~7절 묵상(빌 4:6~7) Meditation on Philippians 4:6-7 (Phil 4:6-7)

바잇 카탄 2020. 1. 6. 15:22

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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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서 4장 6~7절

로고스 프로그램의 빌 4:6 헬라어 원문
빌 4:6 헬라어 원문
빌 4:6 헬라어 원문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헬라어 원어로는 “μηδεν μεριμνατε”가 사용되었다. 이것의 직역적 의미는 “너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의 의미이다. 이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냥 단순히 어떤 일이든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일정 부분에서 염려할 것을 명령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구절 다음에 등장하는 8절에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 “생각하라”(λογίζεσθε)는 명령을 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난 이후에도 특정한 고민을 하기 마련인데, 그것은 주로 자신의 상태에 대한 고민임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완전한 삶을 살아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상태를 요구받는 칭의의 상태와, 그러나 그것에 따라가지 못하는 정도의 성화의 수준의 극명한 현실적인 격차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매일 고뇌에 빠지게 하는 일상의 주제인 것이다. 이런 방식의 고뇌는 사실 매우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염려”란 그런 방향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혹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여기서 의도된 “염려”라는 것이 우리가 일상 다반사에서 부딪히는 여러 어려운 일들, 문제들, 해결하기 힘든 골칫거리들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런 입장에서 보자면, 이 구절의 의미는 매우 단순하고 쉬워진다. 다만 바울은 그런 세상의 여러 고민들에 대하여 “더 이상 고민하지 말라”고 조언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것은 가능성 있는 제안이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그렇게 간단한 문제로 권면을 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비록 이것이 이 구절을 가장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세상적인 염려에 대한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말했을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것의 해결책으로 기도와 간구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을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와 간구가 비록 세상적인 여러 염려들에 쓰일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빌립보가 처해 있는 상황과 거의 상관이 없는 권면이다. 또한 기도와 간구는 일반적으로 세상적인 염려 보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것과 관련해서 더욱 많이 드려져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요즘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하고 있지 않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바울이 의도한 것은 빌립보 성도들이 현재 처해있는 어떤 특정한 상황과 연관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염려”란 빌립보 성도들이 당시에 할 만한 종교적인 이유의 고민들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당시 바울이 옥에 갇힌 것과 빌립보 성도들이 처해 있는 박해의 염려였다(1:28). 바울이 이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한 것은, 이 문제가 전혀 고민할 거리가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다. 바울이 이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는 것을 중단하라고 했을 때, 그가 이 문제를 경시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 다만 바울은 이 문제 보다 하나님께서 더 크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권면할 수 있었다.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이 문구의 직접적인 번역은 조금 거칠게 하자면,

 

“오직 모든 일에 있어 감사함으로 너희의 기도와 간구로 요청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알려지게 하라”

 

이다.

 

 바울은 염려하지 말라는 권면을 하면서, 그것에 대한 이유를 제시한다. 왜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기도할 수 있는 권능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연약한 우리들이 가진 큰 특권인데, 탁월하신 주님을 향하여 우리의 온 정신을 이끌어 올리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의 수단이 없이는, 우리들의 염려는 해결될 가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마치 하나님께서 무심해 보이는 끔찍한 박해의 상황에서도,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종교적인 따돌림의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는데, 그것은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바울은 그 스스로 이것에 대하여 많은 경험을 하였다. 그는 이미 기도하여 자족하는 법을 배웠고, 궁핍함 속에서도 풍족할 줄 아는 평강을 누리는 사람이었다(11절).

 

 그러므로 바울은 기도의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 이것을 세 가지의 3중적인 단어로 표현한다:

기도(προσευχη), 간구(δεήδει), 구할 것(αιτήματα)이 그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중점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도 자체만이 아니다. 그 기도를 하는 성도의 자세에 대한 것도 여기서는 매우 중요하다.

 

 먼저 그것은 “감사함으로” 드려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염려”라는 것의 개념은, 문제가 되는 대상에 대한 고뇌와 괴로움과 걱정을 포함하고 있다. 그 일은 이미 일어난 일일 수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일 수도 있지만, 앞으로 피해를 끼치거나 원하지 않은 무언가로 발전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감사한다는 것이 그 문제의 해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문제는 해결되지 못할 종류의 무언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염려를 끼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이 문제가 미래에 해결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감사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염려가 결국 미래에 해결되지 않았을 때에는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감사는 다만 하나님께 이것을 “아뢴 것”의 감사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우리가 기도를 할 때에 먼저 감사함으로 기도를 시작하는 것은, 우리가 받은 은혜가 지극한 것도 있지만, 그리고 미래에 이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강한 확신에서 나오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에서 오는 지극한 평강에서 비롯된 감사임이 틀림없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확실하고 가장 안전한 일 중 하나이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그 일이 반드시 잘 되야 한다는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대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오는 기쁨을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덕목 중 하나인 하나님의 의지를 즐거워하고 그 의지대로 모든 일들이 작용하길 원하는 바람과도 관련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기도를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으로 파악한다. 즉 그것은 하나님께 무언가 반드시 응답을 바라고 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외침이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기도를 “하는 것”과 철저하게 무관하다. 더욱이 기도를 하면서 느끼는 “안도감”과 “평안”과 “기쁨”과 “즐거움”은 그 기도가 실현되는 것과 철저하게 무관하다.

 

 그리스도인들의 기도가 실제로 이루어지는가 어떤가의 여부는, 내 생각에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쁨을 생각할 때 매우 부차적이고 중요하지 않다. 바울이 여기서 의도한 것도 그런 것일 것이다. 그는 기도를 통해 자신을 옥에서 빼내주라던가, 아니면 기도를 통해 빌립보 성도들에게 스스로의 박해를 걷어 치워 버리라고 권면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말할 뿐이다.

 

 이것은 절박하게 그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태도와는 동떨어져 있다. 우리는 구약 시대의 절박한 기도들에 대하여 익히 알고들 있다. 모세의 기도라든가 한나의 기도라든가 우리들은 그런 훌륭하다 평가받는 기도들에 대하여 알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바라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기도의 자세는 놀랍게도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바울은 기도 그 자체가 주는, 기도 그 자체에서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안식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모든 일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으로 끝마치는 일을 추구하는 자세이다. 그것은 “하나님은 선하시므로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은 선하시다”라는 기독교적인 사상을 반영하는 자세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을 수용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그런 자세다. 그 일들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고 잔혹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로 기도에서 참된 안식을 누린다. 우리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그 어떤 형태를 띠더라도,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평가했을 때 소름 끼치고 좋지 않은 일들로 평가받을 일이 일어난다 해도, 감사함으로 그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일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우리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선하고 달콤하고 행복하다. 그리스도인들이 끔찍한 박해 속에서도 평강을 누리며 찬양과 기도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시작할 때, 심지어 아직 기도로 무언가 간구하고 아뢰기도 전에 먼저 감사할 수밖에 없다.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손에 맡겨버리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나를 의탁하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며, 우리들의 존재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가 처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아니 그 상황의 어려움과 좋음의 관계없이, 하나님께 감사를 올린다.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항상 아버지의 품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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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리하면”(και)은 결과적인 용법으로 쓰였다. 즉, 그렇게 기도를 하면 이런 결과가 다다른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바로 “하나님의 평강”이다. 이것은 신약에서 오직 여기서 밖에 나오지 않는 희귀한 표현이다. 이 평강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과 법정적인 관계에서 누리는 그런 종류의 평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지극히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평강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의 평강”으로 표현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지극한 평강을 누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에 들어갈 때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이 평강과 안식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거기서 하나님의 진정한 휴식을 맛볼 것이다.

 

 그러나 이 평강은 천국에서 미래에만 맛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지금 현재에도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데, 왜냐하면 이 천국의 맛을 맛보기로 보여주시고 보증하시는 분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천국의 어떤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니신, 원초적인 평강, 진정한 안식이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인들은 평강을 누리는가? 우리는 어떤 사고 과정을 통해 평강을 인식하게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지각에 뛰어”나시다는 인식에서 처음 시작한다. 이것의 헬라어 원문은 “`η `υπερέχουσα πάντα νουν”이라고 되어 있다. 다소 거칠게 직역하자면

 

“모든 정신 위에 뛰어난”

 

이다.

 

 과거에는 이 구절을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평강”으로 번역하고 그렇게 주해하였다. 그러나 빌립보에서 바울이 우려하는 것들과의 관계(1~3장 내용)을 생각할 때, 이것의 의미는 “어떤 지적인 정신보다 뛰어나신 하나님”, 즉 인간적인 그 어떤 노력과 지성의 결과보다 더욱 확고하게 평강을 제공하실 수 있는 강하고 크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

 

 불신자들 또한 세상 속에서 일종의 평강을 누리곤 하는데, 그것은 매우 일시적인 것일 뿐 아니라 매우 빈약한 기반을 갖고 있어서, 금방 쉽게 무너져 내리는 종류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은 그것에 매우 큰 의지를 하고 있다. 계시록에서 세상 사람들은 “바벨론”에게 매우 큰 경제, 문화, 사회적인 의존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그런 의존들은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리는데, 사람들은 그 바벨론의 멸망을 보고 놀라워하며 크게 안타까워하며 곡한다. 처음에는 그들은 그 바벨론의 멸망으로 인해 야기될 평강의 깨짐만을 위해 슬퍼하지만, 곧 이내 바벨론의 멸망이 자신들의 멸망으로도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크게 두려워한다.

 

 마치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이와 같다.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다른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것을 의존하면서 거기서 안식과 평안을 누리고자 한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무수한 엔터테인먼트들과 여가 활동들은 이 같은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의존하는 것은 매우 빈약해서 하루 아침에 사라질 수 있다. 그러한 평강은 사실상 채 반나절도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인간들이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우리들은 어떤 재미난 것을 발견해서 탐구하면서도 이내 금방 식상해하면서 질리기 십상이며 금방 피로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놀잇감들은 진정한 평강을 제공해주지 않고 오히려 대다수는 피곤함만 증가시키기도 한다. 혹은 어떤 즐거움들은 그 자체로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큰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다. 결정적으로, 그러한 무수히 많은 헛된 짓들은 세상 끝에 올 심판에서 우리들에게 진정한 평강을 제공해 줄 힘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고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풀과 같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들의 그러한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지각과 정신과 노력으로 쌓아 올린 여러 평강을 위한 수단들 보다 더욱 “뛰어나신” 능력을 갖고 계신다. 우리들은 이 사실을 보면서 과연 이러한 하나님에게서 어떤 종류의 평강을 얻을 수 있을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분명하게 “초월적인” 평강일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제공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일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바라보기에 매우 의아해할 만한 종류의 것일 것이다.

 

 인간의 지각과 이해로는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고 있는 그 상태를 온전히 이해하긴 힘들다. 왜냐하면 가끔 그리스도인들은 즐거운 상황이 아닌데도 즐겁고 기쁜 상황이 아닌데도 기뻐하기 때문에 미친 듯이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향해 귀신 들렸다거나, 포도주를 마시고 취한자라고 비방하기도 했다. 이제 참된 그리스도인들 주변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거룩해지고 더욱 평강을 누릴수록 이상하게 여기고 괴상하게 여길 것이다. 그들은 그런 종류의 “새로움”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평강은 전인격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음과 생각”을 지키기 때문이다. 이것의 용어는 성경에서 거의 언제나 인간의 중심, 특히 전인격적인 부분을 모두 포괄할 때에 많이 사용한다. 흔히 이 그리스도인들의 평강을 따라하려는 모조품들 중에는 극단적이고 편향적인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은 단지 무미 건조한 침묵만 있거나 미친 듯이 즐겁기 만한 질서 없는 평강을 따라한 거짓 감정들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감정은 언제나 전인격적이어서 매우 고요하면서도 차분하고 그러면서도 열정이 있으며 균형 잡힌 상태에 있다. 그것은 거짓으로 따라 하는 모든 감정들에 대항하여 매우 놀라우리만치 탁월하다.

 

 이 평강의 탁월함은 또한 “지킨다”(φρουρήσει)는 것에 의해 매우 강력한 것으로 표현된다. 이 용어는 도시를 지키기 위해 보초를 서는 등의 군사적 용어인데,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을 굳건하게 방어하시는 모습으로 비유하기 위해 쓰였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들의 진실된 평강은 거의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를 묵상하면서 그 안에 거할 때에 나온다.

 

 또한 우리들의 평강의 근원은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로 인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삶을 따라 실천하면서도 이 평강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을 불가항력적으로 지키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능이다. 그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군사적인 용어로 표현될 정도로 강렬하며, 하나님의 능력에 철저하게 의존하기 때문에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그분으로 묘사해야 할 정도로 초월적이다. 그리고 이 행복은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진정한 안식이다.

 

 이러한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비참한가? 얼마나 안타까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여기면서 이 평강에 대하여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은 얼마나 이 귀한 것을 놓치고 있는가?

 

 이 평강을 누리지 못하고 날마다 새롭지 못한 기독교인들 보다 이 세상에서 더욱 비참한 자들이 어디 있겠는가?

 

 평강의 하나님께서 이 모든 영혼들에게 찾아가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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