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6장 7~9절 묵상 (갈 6:7-9) Meditation on Galatians 6:7-9 (Gal 6:7-9)

성경 묵상

갈라디아서 6장 7~9절 묵상 (갈 6:7-9) Meditation on Galatians 6:7-9 (Gal 6:7-9)

바잇 카탄 2020. 2. 17. 18:34

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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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장 7~9절.

갈 6:7-9 헬라어 원문
갈 6:7-9 헬라어 원문

 

 위 본문 말씀을 해석하고 묵상하는 데에 있어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갈라디아서의 전체 주제와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모두 익히 아시다시피, 갈라디아서의 시작 부분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다른 복음은 없다”는 취지의 말을 먼저 전합니다. 그다음으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의 적법함을 변호하며, 이후에 갈라디아 사람들이 잘못 받아들이려고 진행 중인 가짜 복음에 대하여 차례로 논박합니다. 심지어 바울은 갈라디아 4장 20절에서 갈라디아 성도들의 믿음의 상태에 대한 의심을 조심스럽게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스스로 속이지 말라”라고 말한 것은 매우 합당합니다. 저는 바울이 한 이 말이 은연 중의 성도라 불리고 있는 다수의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의아함”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바울은 물론 갈라디아 교인들을 성도라고 여기면서 대화의 포문을 열고 닫습니다. 그 편지의 시작과 끝에서 바울은 여전히 갈라디아 교인들을 성도라고 부르며 기도와 기쁨을 나누고자 마지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 편지 속에서 바울은 어쩔 수 없는 합리적인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그것은 갈라디아 교인들 중 어쩌면 일부는 실제로 거듭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닌, 자연인 상태의 비참함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어쩔 수 없는 의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바울의 의심은 일정 정도의 타당성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갈라디아 교인들의 주된 방향은 하나님에게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멀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바울의 입장에서 참된 복음을 그같이 빠르게 거절하고 거짓된 복음을 도리어 신속하게 환영하는 그들의 모습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갖고 있던 그에게 매우 의아하고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사역을 해 오면서 여러 가지 거짓 형제들의 위험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그것을 그는 고후 11:26에서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이라고 묘사하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바울이 겪었던 교묘한 모조품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경험은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의심하는 것을 매우 합당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행실들과 서로에 대한 사랑 없음, 그리고 자신을 가르치는 사도와 직분자들에 대한 의심과 질투, 참된 복음에 대한 빠른 거부감 등등은 그들의 믿음이 참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사기에 딱 알맞은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자,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본문 말씀을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앞서 바울은 3절에서 이미 “스스로 속이는 것”과 관련된 이야기를 한 번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라는 구절입니다. 해당 3절 구절에서 바울은 교만과 거짓 겸손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주제와는 사뭇 다른 뉘앙스가 돋보입니다. 바울은 7절에서는 교만과 겸손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3절에서 말했던 주제보다는 좀 더 무겁고 더 깊은, 어쩌면 사람으로서는 쉽게 파악하기 힘든 이면의 것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것을 앞의 3절과 묶어서 “자신의 현재 위치와는 다르게 자만하여 스스로를 속이는 교만”의 의미로 파악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8절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8절에서 바울은 매우 엄숙한 어조로 이런 말을 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이 8절의 내용은 차후에 자세히 다루겠지만, 여기서 앞서 엿볼 점은 “썩어질 것”과 “영생”의 의도된 대조입니다. 저는 바울이 여기서 암묵적으로 “영생”과 “영벌”을 대조함으로써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경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7절의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것은 8절의 내용으로 미뤄 볼 때에 당연히 “자신에게 그리스도인 다운 열매들이 맺혀 나오지 않는데도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착각하며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는 뜻이 되어야 자연스럽고 좋습니다.

 이런 “스스로 속이는” 행위는, 특히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민감한 주제일 것입니다. 모두들 이런 주제에 대하여 어렴풋이 느끼고 알고 있지만, 그 내용에 대하여 깊이 들어가고 그 교리적인 진실의 칼날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순간 얼굴을 붉히며 외면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참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사실상 매우 쉬운 시금석들을 성경에서 여럿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바울이 말했던 대로 성령의 열매라는 아주 좋게 정리된 형태를 띠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시금석들을 우리들은 그 본래의 용도에 맞게 사용하기는커녕, 어떤 구호나 슬로건이나 올해의 목표나 해야 할 일 리스트 등으로 치부해 버리곤 다시는 거들떠보지 않은 채 우리의 의식에서 적극적으로 몰아내 버립니다.

 이런 일련의 행동들과 외면들이 바로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한 “스스로 속이는” 행동들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오직 은혜로운 믿음으로 말미암는 복음에 율법의 행위라는 고상해 보이는 악독을 하나 추가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들은 자신 스스로의 상태에 대하여는 이러한 다소 엄격해 보이는 기준을 적용하고 있지 않는 모순을 보입니다. 어떤 종교적인 절차와 의식을 행하고 그것을 지켜야 구원에 이른다는 생각은 하지만, 자신들이 실제로 선하고 사랑스러운가, 이웃에 대하여 그 사랑을 나타내고 있는가, 그 성품은 모세와 같이 온유하고 상냥하여 배려심 깊고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을 희생하며 종국에는 예수님을 향하여 닮아가고 있는가에 대하여는 아무런 점검도 엄격한 기준도 들이대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 버립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이 편파적인 이중 잣대는 비단 그들 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현재 한국 교회에서도 경험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일들입니다. 우리는 마치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일들이 필요하고 그런 일들을 다 처리해야 할 것처럼 움직이면서도 반면에 자기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는 진지하게 재고해 보지 않습니다. 그 아무도 성령의 열매를 통해 자신의 믿음이 참된 것인지는 점검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행동들과 생각과 사상들은 분명하게 “반 하나님적”이며, 자신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고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은 싫어하면서도, 그래도 자신은 거듭났으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스스로 자기 위로를 합니다. 이들은 남을 속일 뿐 아니라 스스로도 속이는 매우 악한 상태에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은 선한 행동을 하지 않는데도 자신이 거듭났으며 중생했으며 하나님의 자녀이며 영생을 얻었다고(8절) 착각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들은 또한 자신의 믿음이 의심받는 것을 그 어떤 것 보다 견딜 수 없어하는 특징도 갖고 있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을 하도록 종용하는 그 대상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매우 격렬하게 널 뛸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 중 일부가 바울의 사도직의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의 직분을 공격하고 그의 메시지에 등을 돌리며 귀를 막은 것은 이 같은 특징들의 매우 적절한 예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스스로 속이는” 자들은 자신들의 행실과 악한 사상은 외면한 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믿음이 참된 것이라 증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증거들을 열심히 수집할 것입니다.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이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계속해서 쉬지 않고 수고할 것입니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입니다. 이들이 이렇게나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이유도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강력하게 아주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속입니다”.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바울이 이런 “스스로 속이는 자들”을 보면서 그들의 행동이 곧 뜻하는 바를 말하는 바는 매우 놀랍고 무서운 부분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자신들의 믿음이 참된 것이라 착각하며 그 착각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 열심히 부단히 움직이는 것을 바울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으로 단죄합니다. 이것은 “스스로 속이는 자들”입장에서는 매우 억울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생각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업신여기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말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대개 자신들의 믿음을 참된 것으로 묘사하려고 노력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생각들은 하나님 보다도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안위만을 향하곤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바로 이 점에 주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들 대다수가 하나님에게 관심을 끈 채 자기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며 하는 그 부단한 노력들이 참된 그리스도인 입장에서는 다소 불쾌하고 신성모독적으로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마치 인격체가 아닌 자신을 하늘로 올리기 위한 장치, 일종의 시스템의 하나로 간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발람과 발락이 자리와 장소를 옮겨가며 하나님에게 간구하면 그 내용이 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과 같습니다. 혹은 마치 미가가 자신만의 신당을 만들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 같습니다. 이런 자들과 같이 “스스로 속이는 자들”은 그 스스로 어떤 일정 조건을 달성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께서 어떤 상태와 지위를 보장해 주신다고 착각하곤 합니다. 또한 이들은 그런 조건들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추어 변형시켜 자신들이 매우 유리한 입지에서 천국에 도달할 수 있을 듯이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매우 심히 악하게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체이시기 때문에 어떤 자동적인 컴퓨터 입력과 산출처럼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을 속이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러나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속임을 당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들이 어떠한 궤변으로 자신의 믿음을 옹호하고 그들의 행실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혀 나오지 않더라도 자신은 천국에 도달할 것이라 스스로 속여도, 하나님은 그것에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진정한 상태를 아실뿐 아니라 그 상태를 정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스스로를 속이며 자신의 믿음과 상태를 옹호하면 옹호할수록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모독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들이 자신들만은 천국에 올라갈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하나님의 정의의 수준을 그 이하로 끌어내리는 행위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것은 자신들에게서 나오는 열매들과는 무관하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순간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된 것으로 만들고 교회 전체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선하게 변하는 것은 아니며 자신은 소위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일뿐이라고 안위하는 순간 그리스도인들을 선하고 거룩하게 변화시키시는 성령의 능력을 의심하고 욕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것임을 곧 깨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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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하나님께서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심은 그대로 거둘 것이라는 원칙 때문입니다. 이 원칙은 성경의 원칙일 뿐 아니라 당시 그리스 헬라 문화의 격언이기도 했던 만큼 매우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원칙이었습니다. 이같이 하나님께서도 일하신다는 것이 바울의 요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령을 그 요령이 원하는 방향으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노력한 자, 근면한 자에게는 상을 주시고 요령을 피우는 게으른 자에게는 있던 것도 거두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자신은 괜찮고 안전하다고 위로하는 그 행동은 차후에 좋지 않은 결실을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방식과 수단과 목적을 가지지 않고 심는 것은, 하나님의 결과를 낼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자신이 천국에 들어갈 방법을 스스로 정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잘못된 방법을 고집한다고 해서 실제로 영생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거두는 것”의 대상은 영생과 그것과 대조되는 영벌임이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바울이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명확하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안위를 위해 하나님의 방식을 무시하고 스스로 방향을 설정하여 심는 자들은 당연히 썩어질 것, 즉 영적 사망을 얻게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방식, 하나님을 목적으로 하는, 하나님을 위한 것을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두게 됩니다. 이런 영생과 썩어질 것의 의도적인 대조에 주목하십시오. 바울은 오직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천국에 가고자 하는 자들이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들이라고 암시합니다. 반면에 “성령을 위하여”,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심는 자들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과 모조품들 간의 극명한 차이가 강조됩니다. 자신들을 스스로 속이며 그리스도인들이라 자기 위로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 자체를 발상해내지 못합니다.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백이면 백 자신이 살기 위해, 지옥에 가기 싫기 때문입니다. 반면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점차 자신들의 구원의 이유에 대해 관찰하면서 새로운 인식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구원을 얻은 이유는 다름 아닌 하나님을 위해,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러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들의 구원의 주역이자 주인공이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시라는 점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큰 기쁨입니다. 반면 모조품들에게 그것은 불편한 사실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매우 매정하시고 냉정한 듯이 느껴지고, 자신은 소외된 것 같아 매우 불쾌하게 느낍니다. 그들은 “성령을 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이 때문에 그 모조품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행하게 됩니다. 교회 생활도, 자신의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서입니다. 전도 행위도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 주변인들에게 인정받기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을 매우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들은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얻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이런 대조를 볼 때, 우리는 새로운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것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움직이기 때문에 선한 열매를 맺으면서 인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얻는 것이 아닌, 성령에게서 무언가를 얻습니다. 당연하게도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무한히 힘을 제공하시며 무한히 우리를 돌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따라서 이런 권면은 매우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의 주된 업무는 바로 선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드러내는 것이고, 그 힘은 하나님에게서 발원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면서 낙심하지 않고 지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두리라”는 앞의 8절에 비춰볼 때 영생을 거두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선행은 결국에 그 끝에 영생이 기다리는 길입니다. 이것은 선행을 하였기 때문에 영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생의 길을 인도받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선한 열매를 맺을 능력이 생긴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 영생의 길은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굳고 단단하게 견인되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입니다. 그 길을 걷는 자들은 하나님께 철저하게 의지하며 선한 것을 즐거워하고 악한 것은 미워하며 끊임없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이 길을 걸으면서 선한 열매를 맺는 일을 중단할 수 없고, 또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영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 이렇게 말하는 셈이 됩니다:

“너희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스스로 속이는 행위가 아닌 진실된 것이라면, 너희는 낙심하지 않고 선을 행하며 포기하지 말라는 이 권면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 왜냐하면 너희의 길은 영생의 길이기 때문이다.”

 

쉼 없이 선을 행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존하시고 견인하시고 연단하시는 그분께 세세토록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이단 생활!>

 

이단 생활! -프롤로그- (기독교 이단 웹툰)

기독교 이단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일상(?) 웹툰입니다. 이단 생활! -1화- (기독교 이단 웹툰) littlebiblicaltheology.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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