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요한계시록 16장 19절
작년 중순부터 시작한 계시록에 대한 연구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다만 이제 16장의 끝을 보고 17장으로 간신히 넘어가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나의 부족함 때문에 성경을 연구하는 데에 굉장한 시간이 소요된다. 그것은 첫째로 나의 게으름 때문이요, 둘 째로는 나의 무식함과 총명함이 없음 때문이다. 내 주변에는 지혜롭고 명석하고 두뇌 회전이 굉장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한 편으로는 부럽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그들을 그렇게 창조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나도 그들처럼 조금의 은혜라도 하나님께 입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주님께서 아주 약간의 미소만 나를 향해 지어 주신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그 순간만큼은 가장 위대한 생각을 할 수 있다.
계시록은 내 생각에 가장 난해한 책이다. 이 말은 그 책이 내용상 애매 모호 하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내용은 매우 명확하고 탁월하고 깔끔하다. 그러나 그것을 해석하는 인간들의 부족으로, 그리고 그 해석자들의 해석에 대한 욕심, 특히 좀 더 색다르고 특출난 해석을 하기 위한, 유명해지려는 어떤 욕심 때문에 그 책은 모호하게 여겨질 수 있다. 계시록의 이런 부정적이라면야 부정적인 면 때문에 우리는 그 묵시를 설명하려 할 때에 언제나 주의를 기울여야 마땅하다.
먼저 이 16장의 부분은 전체적인 주제와 흐름을 먼저 파악하고 그것 안에서 해석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도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대 원칙을 반드시 고수하고, 그것이 너무 알레고리적이거나 혹은 너무 문자적이거나 혹은 너무 비유적으로 취급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이 16장의 해당 본문이 나오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21가지 재앙(그것은 그러나 21가지 보다는 적은 수로 요약될 수 있다.)의 마지막 여섯, 일곱 번째의 재앙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이 본문의 내용이 등장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18절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여기서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 지진”은 요한의 계시록에서 전반적으로 최후의 심판을 묘사하기 위해 쓰인 여러 표현을 재차 사용한 것이다. 그것은 6장에서 일곱 인의 여섯 번째 인을 떼는 장면에서 거의 처음으로 암시되고 11장의 일곱 나팔을 부는 장면에서 확장되며, 여기서 일곱 째 대접을 붓는 장면에서 또다시 표현된다. 이 장면은 주로 시내산의 하나님의 현현에서 따온 것이며,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세상이 종말을 고한다고 여기는 유대교의 문헌들과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18절의 마지막은 대략적으로 최후의 심판을 묘사하면서, 혹은 적어도 그 시작을 암시하면서 끝나는 셈이다.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이제 19절은 이 최후의 심판에서 암시된 “큰 지진”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말한다. 이 “큰 성”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 세 가지 관점이 존재한다.
첫 번째로 그것을 기원 후 70년에 멸망한 예루살렘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두 번째로, 그것을 당시의 가장 큰 도시였던 로마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합리적인 주장으로는, 이것을 하나님께 대항하는 세상의 통치체계로 보는 경우가 있다.
나는 세 번째의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으며, 해석에도 거의 무리를 주지 않는 견해라고 생각한다.
먼저 큰 성을 예루살렘으로 보는 견해는 뒤에 이어지는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에 대한 적절한 해석을 내놓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이 큰 성만이 아니라 그것에 동참했던 만국의 성들도 같이 무너지는 것은 이 큰 성의 속성이 어떠한가를 말해주는 가장 좋은 근거이다. 당시 예루살렘에 만국이 동참했다거나 아니면 사상적으로라도 동조했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주장이다. 오히려 당대에 유대인들은 그 배타성 때문에 여러 민족들로부터 시기와 배척을 받아왔고, 그들의 끊임 없는 독립 전쟁과 편협하고 오만한 독선으로 인해 심지어 로마에 있어서도 부정적인 인상을 주곤 했다는 것은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나 예루살렘 멸망사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몇몇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졌다는 것을 당시 유대인들이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센파로 나누어졌던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너무 극단적이다. 오히려 그 성이 세 갈래로 나누어진 것은 그것이 “완전하게” 망했다는 의미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 낫다. 3은 성경에서 완전함을 의미하는 데에 매우 자주 활용되며, 계시록의 비유적인 측면을 생각해 볼 때 그 숫자를 말 그대로 문자적으로만 고집하여 해석할 이유는 없다.
다음으로 로마로 보는 견해는 이 구절이 최후의 심판을 묘사하는 부분으로 사용되었으며, 로마의 멸망 당시에 이런 방식의 우주적인 종말을 암시하는 표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부정되어야 한다. 이 구절은 물론 이중적, 혹은 삼중적인 시대적 관점의 예언일 수도 있지만, 로마로 제한하여 보는 것은 적절치 않다. 마찬가지 이유로 예루살렘으로 여기는 것도 더더욱 부정된다. 이 본문들에서 묘사하는 최후의 날, 여호와의 큰 날에 대한 여러 내용들은 로마나 예루살렘의 멸망 당시로 한정지어서 볼 이유가 전혀 없다. 심지어 예수님의 예루살렘 멸망의 예언도 통시적인 관점에서 더 멀리 그 시각을 향하고 있으며 최후의 날까지 그 범위가 확장된다.
따라서 마지막 견해인 하나님께 반발하는 반하나님적 통치체계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낫다. 예를 들어 요한 당시의 로마에서는 주피터나 아폴로 신상이나 혹은 로마 황제의 신상에 절하여 숭배하지 않을 경우에 여러 상권 조합에 가입하여 경제 활동을 하는 것에 제재를 가하거나 아니면 시민권을 박탈하거나 아니면 처형함으로써 매우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배제하려는 움직임들이 있어왔다. 특히 요한 당시의 도미티안 황제 때에도 그런 박해가 있었다. 그것은 그러나 비단 로마에게만 국한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기독교 유사 이래 역사 속에서 기독교를 박멸하려는 여러 적극적인 노력들에 대한 역사적 증거들을 매우 많이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초대 교회 당시 뿐 아니라 지금 현대에도 몇몇 국가들에서 실제로 실행되고 있는 것들이다.
이러한 전 시대적인, 그리고 전 세계적인 모든 하나님에 대한 반항적 움직임들과 그 통치 체계와 제도들 전반이 모두 이 큰 성 바벨론에 포함된다. 이것은 마지막 시대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고, 과거의 1세기 말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고, 4세기의 기독교 국교화와 함께 끝나는 것도 아니고, 가톨릭으로 귀결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시대, 모든 문화, 모든 장소에서 하나님을 향한 적대적인 사상이 있는 그 어느 곳이라면 이 바벨론은 존재한다.
만국의 성들은 곧 이 바벨론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정의한다. 만국의 성이 곧 바벨론이다. 즉 온 세상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않는 모든 움직임이 곧 바벨론이다. 인간의 사상적인 반항성은 여기서 구체적인 대상인 큰 성으로 표현되고 있는 셈이다. 바벨론 뿐 아니라 만국의 성도 무너지는 것에서 우리는 인간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거의 언제나 하나님을 욕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여기서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었다는 부분에 주목하라.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기억이나 사실을 떠올리시는 과정을 갖고서 그것을 떠올리시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이 말은 인간들이 흔히 기억을 회상하듯이 과거에 있었던 일을 지금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그런 형태로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의미로 이것을 단순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시간적인 부분에서 기억을 떠올리시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취급하시며, 그 자신이 가장 완전한 형태의 사물들에 대한 정보를 갖고 계신다. 즉 어떤 한 대상으로부터 객체로서 떨어져서 하나님 편에서 기억을 회고하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서 그 기억을 확인하시고, 엄밀한 의미에서 확인이 아닌 규정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재정의" 활동을 여기서 마치 인간이 기억을 떠올리듯 인간적인 용어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하나님의 정의의 차이는 인간의 정의란 인간의 주관적인 경계에서 그것이 끝날뿐이라는 점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는 주관적인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은 곧 현실이 된다. 아니 현실을 바르게 인식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하시는 정의는 사실 곧 그 자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그 사물에 대해 그렇게 되도록 명하신 바로 그 장본인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드시고 그것을 부르신다는 것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 있다. 그분께서 만드시고 그것을 어떠한 정의로 부르실 때, 그것은 곧 실재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제로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반드시 하나님의 주관적인 판단이 곧 객관적인 것이라는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분은 언제나 의롭고 언제나 옳으시다. 그분은 곧 정의이며, 그분의 판단은 주관적인 견해가 아닌 사실 그 자체의 객관이다. 그분께서 그렇다고 하시면 그런 것이며, 그분께서 아니라 하시면 아닌 것이다. 이 점은 절대적이다. 결코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기억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대한 참된 것을 재정의 하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대하여 하신 정의는, 하나님의 주관적 판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한히 객관적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다. 바벨론은 그분의 판단대로, 실제로도 악하고 가증스럽다. 그것은 어떤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실체가 아닌 절대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범주에 있는 셈이다. 그것에 관하여 하나님과 다른 견해를 내는 것이 여기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분의 기억하심이란 이렇게 무서운 의미를 갖고 있다. 그분이 바벨론 뿐 아니라 다른 어떤 것들에 대하여 기억하실 때는 그분의 사물에 대한 판단, 결코 바뀌지 않는 완벽한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이 판단에 따라 최후의 백보좌에서 우리들도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우리 각자가 존재로서 하나님에게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에 대한 이 감당하기 힘든 사실은 내 생각에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두려운 사실들 중 하나다. 왜냐하면 그 판단은 곧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혹은 불경건한 자들이 심판을 받을 때, 특히 완전한 심판을 받을 때에 하나님 편에서 이들을 포도주로 취하게 만드신다는 것은 잘 알려진 비유이다. 여기서도 그와 같은 것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계시록 전반의 주제인 “미혹에 대항하는 믿음”이 곧 세상을 이기는 것이라는 사상의 연장선에서 요한이 사용한 것이다. 포도주에 의한 취함은 유대교의 여러 문헌에서도 사리 판단에 대한 제한과 함께 스스로의 올무에 빠지고 함정에 빠져서 심판을 받는 모습으로 많이 묘사된다. 영적으로 무지하여 가리어지고 멸망하게 된 여러 경우에도 이 비유가 사용된다.
따라서 불 경건한 자들은 포도주에 의하여 취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고 싶어도 얻을 수 없고, 갈급하여도 찾을 수 없으며, 회개하고 싶어도 할 수 없으며, 진리를 향하지만 구할 수 없고 스스로 속이고 스스로 망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인데, 왜냐하면 그 진노의 포도주잔을 건네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최후의 심판 때에 만이 아니라, 신약 시대의 전 시대에서 이런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잔에 취하는 자들은 매우 많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 보다는 극단적이고 편협한 것을 좇으면서 결국에 자기 자신에게 눈이 멀어 미혹되어 우상을 섬기고 진리를 배척하게 된다. 그것은 여러 이단적인 분파들의 극단적인 악한 교리들에서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의 끝은 바벨론적 사상과 함께 멸망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같은 마지막 최후의 날을 바라보면서 한 편으로는 높아지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며 즐거워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날에 있을 여러 상황들을 두려운 눈으로 살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극단적인 세대주의의 주장대로 곧 세상이 끝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백보좌 심판대에서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운 사실에 기인한다.
여호와의 큰 날에 심지어 하나님을 욕하고 대적하던 자들도 그분께서 찬란한 빛을 두르고 임재하실 때에 바위와 산들이 자신들을 덮쳐서 그분의 눈앞에서 가리어지길 빌 정도로 극도의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그러나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때가 너무 늦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미리 깨어 준비해야 한다. 심판대 앞에 설 때에는 이제 되돌릴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분의 판단은 언제나 정확하고, 그분은 그 판단대로 각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성경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글이 도움이 되었다면 ♡를 눌러 주세요. 익명성이 필요한 질문일 경우 Q&A 카페를 이용해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