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태복음 10장 16절
“보라(Ἰδοὺ)”
마태복음 및 공관복음서 전체에서 익숙한 독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시작된다. 그것은 이후에 나올 그분의 말에 듣는 이들로 하여금 집중하여 주목하게 하려는 목적이 있다.
우리가 만약 예수님의 그 말씀에 언제나 스스로의 감각을 향하도록 한다면, 그렇게 해서 우리들 각자의 시선을 그분의 가르침과 그분의 삶의 모범, 그것을 바라보도록 한다면, 거기서부터 바로 표적, 곧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을 발견할 것이다.
마치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라(Ἔρχου καὶ ἴδε)”라고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요 1:46).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이자 “이스라엘의 왕”을 발견하게 된다(σὺ εἶ 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 σὺ ⸂βασιλεὺς εἶ⸃ τοῦ Ἰσραήλ). 그러므로 보라. 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께서 하실 말씀을.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ἐγὼ ἀποστέλλω ὑμᾶς ὡς πρόβατα ἐν μέσῳ λύκων)”
‘내가 마치 늑대 가운데의 양 같이 너희를 보낸다.’
개역한글에서 “이리”라고 번역한 것은 “늑대”의 옛 말이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 “양”은 거의 언제나 순결하고 의로운 자들을 지칭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물론 양은 창세기에서 아벨의 제사에서부터, 유대 민족들의 희생 제물을 거쳐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나타내는 모형으로서 우리들의 인식 속에 박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께서는 성부께서 당신 자신에게 택정 하여 주신 신자들의 무리를 “내 양”이라고 지칭하셨다(요 17:6-8).
따라서 여기서는 ‘희생 제물로의 양’이라는 개념보다는 시편 23편에서 등장하는 “목자”의 개념과 상응하는 “푸른 초장”으로 ‘인도함을 받는 양’이라는 이미지로 독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것은 “양”에 대응하는 반대되는 상징인 “늑대”를 언급하신 것에서 확증된다. 특히 바우어의 헬라어 사전에서는 “늑대”가 거의 항상 신약성경에서 비유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만 사용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것을 적절하게 해석할 수 있다면, “늑대”는 ‘성도’들과 대비되는 존재들을 지칭할 것이다.
이 “늑대”에 해당하는 의미가 17절에서 23절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풀이된다. 그것은 “사람들”이요(17), “총독들과 임금들과 이방인들”이요(18), 우리의 “형제들, 아비, 자식들”이다(21). 그것은 바로 너의 주변, 너와 가까운 사람들, 바로 그들이다.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시 55:13).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도하시는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 그분의 식탁은 지금 가시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사방에서 우리를 에워싸고 잡아먹으려고만 하는 것 같다(시 22:12-13). 거기서 우리가 어떤 혁명이나 어떤 저항이나 어떤 반발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이웃들, 우리의 가족들, 우리의 친구들, 나와 가장 가까운 내 인생의 동반자들인데 말이다! 늑대들의 무리에 던져진 양은 저항할 힘도 없이 순식간에 그 목을 물리고 잔인하게 뜯겨 이빨 사이로 씹힐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이런 잔혹성의 폭력 앞에 노출되어 있다. 만약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른다면 말이다(2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두 인지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어려움과 잔인하게 찢길 운명을 철저하게 실감하시면서도, 그분께서는 우리를 그 악한 곳으로 보내신다(ἀποστέλλω).
“사도”를 뜻하는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의 어원이 바로 여기서 나타난다. 사도들은 모두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내신다는 것, “아포스텔로(ἀποστέλλω)”하신다는 것은 혹 “사도”의 직분에만 해당되는 것인가? 여기서 예수께서는 모든 제자들이 아닌 특정한 제자들, 곧 이후에 교회를 세울 사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인가?
그 같은 생각은 23절의 종말론적인 색체에 의하여 반박된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그분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은 이 동네, 저 동네로 옮겨 다니며 그분의 이름을 증거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으로 인하여 그들은 언제나 혐오의 대상이 될 것이며 물리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잔혹하게 살해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γίνεσθε οὖν φρόνιμοι ὡς οἱ ὄφεις καὶ ἀκέραιοι ὡς αἱ περιστεραί)”
“그러므로 되어라!(γίνεσθε οὖν)” 무엇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뱀”과 “비둘기”가 되어야 한다!
“뱀(ὄφεις)”은 여기서 “지혜(φρόνιμοι)”의 표본이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를 보여주는 목표가 된다. 헬라어 “프로니모스(φρόνιμος)”는 마치 창세기 3장에서 뱀의 간교함을 의미하는 듯 보인다. 우리의 원시적인 적, 오래된 원수인 뱀은 거기서 하와가 하나님을 향하여 반역하도록 만드는 것에 자신의 지혜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 뱀의 지혜는 매우 악한 결과, 곧 전 인류의 전적인 타락으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뱀이 아담을 통해 모든 인류를 죄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실 것이다(고전 15:22). 그러므로 뱀이 모든 사람을 타락으로 이끄는 것에 자신의 지혜를 사용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많은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해 지혜를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동일한 지혜가 한 편에서는 악하게 사용되나, 다른 편에서는 선하게 사용될 수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비둘기”는 고대 사회에서 순결함의 상징이었다. 바우어는 그의 헬라어 사전에서 비둘기를 의미하는 “페리스테라(περιστερά)”에 대하여 고전적인 자연과학자들에 의하면 비둘기에게 '쓸개가 없는 것' 때문에 모든 가능한 미덕의 상징으로 여겨졌다고 말한다(실제로 쥐, 사슴, 당나귀, 고래, 비둘기 등에는 쓸개가 없다고 한다. 물론 쓸개즙은 있다.). 쓴 것 혹은 신 것 등의 강하고 자극적인 것은 고대 유대 문화권에서 부정적인 것, 특히 고난의 상황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욥 20:14; 16:13; 20:25; 시 69:21; 신 32:32; 암 6:12).
하지만 트램퍼 롱맨 3세는 비둘기에 대한 고대 사회의 인식이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 우리가 확인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다만 그 “깃털의 부드러움” 따위의 특징들을 통해 추론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성령은 특히 복음서들에서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구체화되는데, D. A. 카슨은 랍비 벤 조마에게서 비둘기가 자기 새끼를 보호하는 포근함의 그 이미지를 본다.
따라서 만약 이 같은 배경들 속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뱀 같이 지혜로운 그 상황 속에서도 결코 부정적인 그 어떤 것도 허용해서는 안 되며 언제나 우리 스스로가 부드럽고 따뜻한 감정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즉, 물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고 그것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광 속으로 이끄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이기에, 비록 뱀의 지혜라도 그것을 사용해야 하지만, 단순히 지혜롭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에는 반드시 윤리적인 한계선과 기독교적인 미덕인 선한 마음이 필요하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단지 지혜만을 추구한다면, 모든 비도덕적인 방식들을 통해 최상의 효율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관심이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온갖 상상할 수 없는 악한 방식과 기만들이, 즉 실제로 뱀이 하와를 교묘하게 속였던 것과 같은 그 거짓된 것들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미명 아래에 자행될 것이다. 누구든지 기독교 역사를 유심히 바라본다면 이 부패와 가증스러운 악취들을 비교적 쉽게 발견할 수 있으리라!
우리에게는 ‘의로움’이 필요하다. 즉 도덕적이어야 하고 윤리적이어야 하며 탁월해야 한다. 나를 핍박하는 원수들, 늑대들에게도 유순하고 따뜻하며 부드러우며 선하며 사랑스럽게 대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불법적이고 부도덕적이도 기만적인 방식들은, 그것이 제 아무리 효과적일지라도, 결단코 복음을 전파하는 방식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
오오! 우리 거룩하신 왕께는 마땅히 가장 순수한 것만을 드려야 할지니! 그분의 이름이 널리 퍼지는 곳에는 그 어떠한 잡음도 들리지 않게 하라! 비록 그 모든 고난 중에 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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