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사랑하시듯 사랑하라: 초기 그리스도인들과의 대화』, 로버타 본디

책 리뷰

『주께서 사랑하시듯 사랑하라: 초기 그리스도인들과의 대화』, 로버타 본디

바잇 카탄 2025. 1. 28. 17:46

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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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리뷰할 책은 비아 출판사에서 펴낸 『주께서 사랑하시듯 사랑하라』이다. “오늘의 신학 공부라는 유튜브 채널에서 추천하던 책이라 장바구니에 넣어놓고 있었는데, 최근에 구매하여 읽게 되었다.

 

책을 읽을 때에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있다가 뜻밖의 보물을 발견하고 감동을 받거나 저자의 풍성한 식견으로 인해 마음이 눈 녹듯 녹아 무릎을 꿇게 되는 경우들이 종종 있는 것 같다. 나에게는 더글라스 무의 로마서 추석 2015년 판이 그러했고, 바클레이의 책도 그러했으며, 클린스의 욥기 주석도 그러했다. 특별히 이 책 역시 나에게 큰 감동을 주고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심지어 나는 이 책이 그 작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세계 안에서 극찬을 받아야 하는 명작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주께서 사랑하시듯 사랑하라』 사선 표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기독교의 사랑이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탐구한 책이다. 저자인 로버타 본디는 감리교 신학자인데, 초기 기독교 역사의 권위자이다. 따라서 이 책 역시 초기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기독교인들의 사랑의 방식이 어떠했는가에 대해서 다룬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의 기독교인들의 시각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에 대해서도 검토한다.

 

한국 교회에서는 초대 교회에 대한 막연한 로망이 존재한다. 초기 기독교는 무언가 순수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초기 기독교의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한다. 그런 로망에 이 책은 정말 잘 부응하는 편이다. 1, 2세기 무렵의 기독교인들 및 사막 교부들의 삶과 금언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 이 책은 독자들을 고대 세계의 교회의 배경으로 부드럽게 인도한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지루할 수도 있는 역사적 묘사를 매우 쉽고 이해할 만한 언어로 전달한다. 내 생각에 이 책은 심지어 학생들도 읽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고 명쾌하게 쓰여져 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으며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 사랑하시듯 사랑하라』 정면 표지
주께서 사랑하시듯 사랑하라

 

저자: 로버타 본디
제목: 주께서 사랑하시듯 사랑하라
번역: 황윤하
출판사: 비아
가격: 14,000
27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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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의 완전에 대한 추구


이 책은 주로 사막의 교부들, 은둔자들에 대한 금언집을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한다. 기독교 교회사에 대해서 공부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3세기까지 사막 지역에서 은둔형 수사들이 매우 큰 인기를 끌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본디가 다루는 초기 기독교의 시기는 바로 이 시기에 해당한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이전에는 사막의 교부들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교회사에서 묘사하는 사막 교부들은 지나치게 금욕주의를 지향하는 것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나는 교회사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수십년 동안 기둥 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는 어느 사막 수사의 이야기를 읽고서 저것이 기독교와 과연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하고 푸념하기도 했다. 또 대부분의 사막 교부들은 먹고 마시는 것이나 주거 환경 등에서 의도적인 고행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시험하거나 욕구를 끊어내기 위해 노력하곤 했다. 더욱이 사회와 격리되어 동굴이나 사막 한 가운데에 거주하기도 하는 것은 사회 안으로 들어가 이웃을 사랑하는 기독교의 사상과 반대되는 것으로 보였다.

 

이 때문에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에 시작부터 사막 교부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서 약간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나의 이러한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저자는 사막 교부들이 지나치게 금욕적이라는 비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저자는 그들의 그러한 금욕이 아무런 이유 없이 맹목적인 종교적 행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사막 교부들의 금욕주의는 단순히 욕구를 거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완전에 더욱 힘 있게 도달하기 위한 것이다.

 

완전은 도달 가능한 개념이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완전에 도달한다는 개념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물론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이것이 매우 생소한 개념일 것이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도무지 어떻게 하여도 (종교적으로든 도덕적으로든) 완전의 상태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그저 불가능한 것이라 여긴다. 반면에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러한 무기력한 생각 자체가 의문시 된다. 그들에게 기독교적 완전은 실제적으로 목표로 삼아야 할 대상이었다.

 

물론 사막 교부들도 죄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든가, 완전한 의를 행하는 삶을 살 수 있다든가 하는 것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함은 기독교인이 지향해야 할 삶의 결론이며 끊임 없이 분투하여 성취해야 할 목표이다.

 

이것을 현대인들은 마치 모든 면에서 완벽하여 신학적으로 치우침이 없고 윤리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강박에 가까운 그런 상태로 이해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막 교부들에게 완전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들은 인간은 사랑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완전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사랑하는 능력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사랑하는 인간은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막의 교부들은 기독교인들이 완전을 향해 달려야 한다고 보았다.

 

 

분투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심


언젠가 카페에 쓴 글에서 나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처지와 환경적 배경에 맞게 판단하실 것이라 믿는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우리 인간들은 자신이 나고 자란 사회와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이것은 우리가 죄를 짓거나 선행을 하는 것에도 당연히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것을 좌시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선행을 많이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이 사람은 선천적으로 성품이 조용하고 배려심이 많고 공감 능력이 탁월한 유전자를 물려 받았다. 그리고 풍족하며 교양 있고 모자라지 않은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외모도 호감형이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호의를 받았다. 그래서 이 사람은 상대적으로 선행을 하기 쉬운 입장에 있다. 어떤 통계가 보여주는 것처럼, 풍족한 사람일수록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더욱 착한 일을 하기 수월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다혈질이며 공감 능력이 부족하고 매사에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제대로 된 가정 교육을 받지 못했고 교양이 없으며 매일 힘든 중노동을 하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환경에 처해 있을 수 있다. 당장 하루 벌어 먹고 살기가 바쁘고 내일 일이 불확실하며 빚은 늘어만 가고 미래는 어두워 보이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언제든지 타인을 공격하고 화풀이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애초에 자신이 힘든데 남을 어떻게 돕는단 말인가? 그래서 이 사람은 매일 죄를 저지르며 살아간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두 사례의 환경적 배경을 모두 걷어내고 정말 순수하고 공정한 상태로 모든 것을 판단하실 것이라 믿는다. 우리가 보기에 매우 여유 있고 선하며 호감형이었던 사람이 사실은 자신이 받은 것 덕분에 선을 행한 것이고 이 모든 것이 배제되었을 때에는 매우 초라한 자기 교만과 허세만이 남을 수도 있다. 반면에 우리가 싫어하며 욕하고 경멸하던 대상이 사실은 그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분투하며 노력하고 매우 힘들고 어렵게 단 한 가지의 기적 같은 선행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나는 하나님께서 후자의 경우를 더욱 긍휼히 여겨주실 것이라 확신한다.

 

분투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

 


 

그래서 저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나는 그의 주장에 정말 기쁜 마음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났거나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환경이 열악하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생필품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 가자의 도로테우스는 하느님께서는 분투하는 이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그분은 아무런 고민 없는 신자보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유혹에 맞서 분투하는 살인자를 더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 설령 그가 그 유혹에 굴복한다 할지라도 말이지요.”

 

이것은 우리가 사랑을 향해 달려갈 때에 가져야 할 태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타인의 상태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잘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사랑과 부드러운 시각을 갖는 것이다.

 

 

무엇이 중요한가?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는 열심에 사로 잡혀서 가장 중요한 사랑의 성품의 본질적인 면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잘못된 열심은 때론 사람을 잔인한 냉혈한으로 만들면서도 자기 스스로는 의인이 분명하다는 종교적 교만으로 안내하기도 한다.

 

우리는 기독교는 법을 수호하는 종교가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종교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심지어 이 사랑의 행위는 어떤 관습이나 문화적 틀을 뛰어 넘는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 예수님께서는 1세기 유대인들의 정서에 반하는 일들을 정말 많이 하셨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대개 사랑의 의도로 행해졌다.

 

율법이나 규례를 초월하는 사랑의 태도는 특별히 인터넷 공간에서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우리는 인터넷에서 매우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며 이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한 기독교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글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이 기준을 토대로 타인을 판단하고 비판하며 정죄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어떤 것을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는 규례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은 사랑의 태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 약자에 대한 연민, 생명에 대한 풍성한 존중, 이 모든 것들이 우리 기독교인을 움직이는 기본 동력이 되어야 한다. 만약 어떤 지켜야 할 율법의 엄격함이 최상의 덕목이었다면, 우리들 중에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깨부수고 뛰어넘는 인류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이라는 말을 비로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이 존재한다.

 


 

저자가 소개하는 압바 암모나스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사랑을 핵심 가치로 설정하는 기독교인의 바람직한 태도란 무엇인가에 대해 정말 잘 보여준다:

“위대한 선으로 나아간 압바 암모나스에게는 어떤 사악한 흔적도 없었다. 그가 주교가 된 후 어떤 사람이 임신한 어린 소녀를 그에게 데려와서 말했다. ‘이 비참한 인간이 행한 바를 보십시오. 그녀에게 벌을 주십시오.’ 그러나 암모나스는 그 어린 소녀의 배에 십자 성호를 긋고, 고운 모시 세 벌을 그녀에게 주라고 명령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녀가 출산할 때 그녀나 아이가 죽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아 걱정이 되네요.’ 그런 암모나스에게 고발자들이 말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녀에게 벌을 주십시오.’ 암모나스가 말했다. ‘형제들이여, 보십시오. 그녀는 죽음이 가까웠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그러자 그들은 그녀를 돌려보냈고 누구도 더는 감히 암모나스를 비난하지 않았다.”

 

무엇이 정의란 말인가? 어린 소녀가 출산을 하다가 사망하는 것이 정의란 말인가? 기독교인은 공의를 위해서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그저 방관하거나 아니면 직접 형벌을 주는 것을 통해 더욱 부채질 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린 소녀가 앞둔 비참한 현실 앞에서 사랑의 마음을 갖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보살펴주는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적 사랑의 진정한 가치이다.

 

 

로버타 본디와 사랑


책의 말미에 다다르면 저자인 로버타 본디의 삶의 여정과 그것을 통해 얻은 사랑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는 짧은 단편을 만나게 된다. 나는 특별히 이 부분에 큰 감동을 받았는데, 사랑에 대해서 논의하는 저자 본인이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탐구하고 성찰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로버타 본디는 어린 시절부터 완벽주의적 성향의 부모 아래에서 정서적인 학대를 받으며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어린 저자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기 일쑤였으며 그러한 요구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때에는 분노로 폭발하곤 했다. 이 때문에 저자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용어에 그녀 자신이 경험한 아버지 상을 자연스레 투영하여 연상하였다.

 

더욱이 그녀의 남편은 일관성이 없고 계속해서 자신의 아내를 비난하는 사람이었다. 로버타 본디의 결혼 생활은 불행했으며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고 남편은 사소한 일로도 그녀를 나무라고 꾸짖었다. 한 번은 그녀가 신학자들의 모임에서 말 실수를 하자 남편이 당신은 초대 교회 이야기가 아닌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하면 상당히 바보 같을 때가 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은 그녀에게 깊은 상처가 되어 몇 년 동안 학술대회나 모임에서 계속 말조심을 하는 불안감에 그녀를 시달리게 했다.

 

로버타 본디는 결국 남편과 이혼을 결심했으며 후에 기독교 윤리학자 리처드 본디와 재혼하였다. 이 두번째 결혼생활에서 그녀는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으며 마음의 치유를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녀의 이러한 인생 여정으로 인해 그녀는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무게감 있고 깊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사랑이라는 개념을 이론적으로만 숙고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순례를 통해 체득하고 깨달은 이와 같은 경험은 그녀의 저서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큰 울림이 되는 원인일 것이다.

 

로버타의 이런 삶의 여정과 배경을 알고 난 이후에 다시 책을 읽는다면 그녀가 사랑에 대해 말한 내용들이 정말 다르게 다가온다. 그녀는 안락한 의자에 앉아 뜬 구름 잡는 희망 섞인 소리를 내뱉는 몽상가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사랑받아야 마땅한 대상들에게서 적절한 사랑을 받지 못한 채 결핍된 상태로 인생의 많은 시간을 헤매며 살아왔던 삶을 되돌아보는 신중한 전문가다. 사랑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사랑을 준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것이 기독교인인 우리에게 정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녀처럼 학문적으로도, 그리고 인생 속의 깨달음으로도 균형 있게 사색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드물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그녀가 결국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진정한 안식과 평화를 누리고 자신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여 타인을 향한 사랑을 말하고 실천할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때론 기독교인으로서의 의무감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기독교인이 신의 사랑 안에서 누리는 자기 사랑의 행복을 간과하는 경우들이 많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분명히 존재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존재에는 자기 자신의 존재 역시 포함된다.

 

기독교인은 인간은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는 당신 역시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 당신은 부족할 수도 있고 학대 당하고 있을 수 있으며, 누군가에게 핀잔과 비난과 모욕을 당하는 위치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분명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다. 적어도 우리 구주 예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실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신의 성품 안에서 사랑받는 경험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타인에게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란 그 자신의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일 것이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타인에게 나눠줄 수는 없다.

 

아이들의 교육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랑받는 경험을 많이 한 아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관심과 사랑을 주는 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반면에 사랑받아본 경험이 적은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때에 매우 서툴고 어색하다고 느낀다. 기독교인들 역시 신의 사랑을 듬뿍 받는 경험을 자주 해야 한다. 그렇게 한 뒤에서야 비로소 타인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난다.

 

로버타 본디의 이 책은 필자가 리뷰에 적은 내용들 외에도 정말 많은 유익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기도, 심리학, 겸손, 분노, 욕구 등 다양한 주제를 사랑이라는 관점과 초기 기독교의 사막 교부들의 금언들을 통해서 다룬다. 책은 매우 짧고 간명하며 명쾌하고 쉽기 때문에 정말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블로그에 오는 기독교인들에게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이 책은 가히 명작(masterpiece)이라 불릴 가치가 충분히 있다.

 

『주께서 사랑하시듯 사랑하라』 뒷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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