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새물결플러스 출판사에서 출판하는 “Spectrum”이라는 시리즈가 있다. 이번에 리뷰할 책은 그것들 중 9번째 시리즈인 『최후 심판에서 행위의 역할 논쟁』이다.
사실 이 책을 고른 이유는 그다지 특별하지는 않다. 저자의 이름 중에 저명한 신약학자인 토마스 R. 슈라이너(Thomas R. Schreiner)와 제임스 D. G. 던(James D.G. Dunn)의 이름이 있었다. 그래서 어떤 내용일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게다가 책의 제목도 “~논쟁”으로 되어 있었다. 즉 이런 거물급의 신학자들이 한 가지 주제로 서로가 토론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 지갑을 열기에는 충분했다.
책의 구성이 조금 신박하다. 먼저 한 가지 주제에 대하여 대략 4명에서 5명의 다양한 스펙트럼에 위치한 나름의 ‘대표’ 학자들이 자신의 입장을 간략하게 서술한다. 그 다음 각자가 서술한 내용에 대하여 서로가 짧게 논평을 남긴다.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도 몇 권 샀는데, 보통은 보수적인 입장의 학자의 견해를 가장 앞에 싣는 것 같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실리는 학자의 입장은 대개 매우 진보적이거나 아니면 가톨릭의 견해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매우 흥미롭게도, 학자들이 위치해 있는 순서를 통해서 그 학자가 이 주제에 대해 어떤 입장에 위치하는지(보수적인지 진보적인지)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 놨다.
물론 이런 류의 책이 흔히 그렇듯이 다양한 신학적 입장이나 신학 쟁점들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들은 책의 내용을 다소 어려워할 수도 있다. 학자들은 대개 필드에서 논의되고 있는 신학적 쟁점들에 대해 일일이 설명할 지면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설명을 생략하거나, 혹은 읽는 독자가 그런 지식을 당연히 흥미를 갖고 공유하고 있을 것이라 전제하는 경우가 많다. 이 책 역시 그런 책에 속한다.
이 외에도 매우 보수적인 신학을 갖고 있는 사람의 경우 심하게는 책의 내용이 불경하다고, 반기독교적이라고, 비성경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런 분들은 이 책을 읽는 것이 굉장한 믿음의 시험(?)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독자들이 지지하는 교리적 한계를 지켜주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어떤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정말 다양한 견해들을 맛보기라도 짧게 알아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딱 좋다. 내용이 밀도 있고 알차면서도, 분량이 많지 않다. 게다가 학자들은 각주에서 많은 관련 신학 서적들을 인용하는데, 이런 문헌들을 통해 추가적으로 더욱 깊은 연구를 진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의 주제는 일반적인 개신교 입장에서 어쩌면 가장 민감하다고 할 수 있는 최종 심판에서 과연 우리 인간의 행위가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이다. 즉, 쉽게 말하자면 최후의 심판에서 인간을 의롭다고 판결을 내릴 때, 인간의 행위를 참작하느냐의 여부가 이 책의 주제이다.
아마 대부분의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은 이런 주제는 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은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은혜에 기반한 믿음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의 행위가 최종 구원의 판결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마치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인정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주제에 대한 사안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선 성경이 분명하게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행위에 따른 심판에 대한 성경 본문들은 굳이 구약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신약 내에서만 봤을 때 분명하게 존재한다. 따라서 이런 본문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이전에 필자가 썼던 샌더스의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가 촉발시킨 새관점의 등장으로 이 문제는 더욱 더 복잡한 양상을 띤다. 한국에서는 김세윤 교수가 “유보된 칭의론”이라고 흔히 불리는 칭의론을 주장하였다가 한국 교회로부터 질타를 받은 전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김세윤 교수와 같이 우리의 의롭다 하는 판결이 최종 심판에서 완전하게 결론이 날 것이라고 여기는 신약학자들이 상당히 많다. 이전에 필자가 말했듯이, 이런 논의들은 결코 쉽게 무시할 만한 것들이 아니다.
더욱이 성경이 행함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는 점도 이 문제를 우리가 단순한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분명 성경은 기독교인의 믿음은 행함과 분리될 수 없다고 증언한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자는 반드시 행함으로 그 믿음의 상태가 드러난다. 그러므로 어떤 점에서 우리의 행함은 충분히 평가 받을 위치에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아울러 이 책에 가톨릭 학자의 글이 올라가 있다는 점을 미리 말해야겠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가톨릭은 완전 이단과 같은 곳이기 때문에 그런 진영에 속한 학자의 글을 개신교 학자들의 글과 함께 싣는 것이 매우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카데믹한 필드에서는 이미 가톨릭과 개신교 학자들은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다. 특히 가톨릭 학자들 중에는 미국 개신교 신학교에 입학하여 개신교 신약학자들 아래에서 배우고 학위를 따는 경우들도 상당히 많다. 특별히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인 가톨릭 학자 마이클 B. 바버가 그런 케이스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선 나의 구원파적 배경 때문에 매우 흥미로웠는데, 왜냐하면 구원파에서는 믿는 즉시 의로움에 대한 판결이 종결되는 듯이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구원파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정말 매우 매우 불편한 책일 것이다.
더욱 재밌었던 것은 책의 저자 중 가장 보수적인 입장에 해당하는 로버트 N. 월킨의 견해가 구원파의 견해와 상당히 유사하고, 심지어 거의 똑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이 책을 읽는 당신이 구원파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면, 이 지점에서 매우 큰 흥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저자: 로버트 N. 월킨, 토마스 R. 슈라이너, 제임스 D. G. 던, 마이클 B. 바버
제목: 최후 심판에서 행위의 역할 논쟁
번역: 김귀탁
출판사: 새물결플러스
가격: 17,000
326 페이지.
로버트 N. 월킨의 보수적인 입장
로버트 월킨의 가장 보수적인 입장으로 이 책의 주제가 시작된다. 월킨은 내 생각에 거의 대침(구원파)이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즉 죄인과 의인의 심판대가 구별되며, 의인의 심판대는 최종적인 의롭다는 판결과 관련이 있는 심판대가 아니라 오로지 상급에 대한 판결과만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월킨은 성경에 등장하는 의인이 받을 것 같이 보이는 심판과 관련된 거의 모든 성경 본문들을 ‘상급 심판’에 대한 것으로 해석하려 한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정말 폭소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월킨의 성경 해석 방법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극단적으로 자신이 지지하고자 하는 교리적 사실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방식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에 등장하는 행위에 대한 심판과 관련된 거의 모든 본문들을 무시하며, 무시할 뿐만 아니라 성서 해석에서 결정적인 오류를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매우 자주 범한다. 심지어 어떤 본문들은 명백하게 자신의 견해와 반대되는데도, 그 본문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며 계속해서 억지를 부리기도 한다.
어찌나 이것이 비합리적이고 황당했는지, 나는 처음에 책을 잘못 산 줄 알았다. 만약 뒤에 나올 다른 소논문들도 이런 (다소 질이 낮은) 내용들 뿐이라면,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이다. 그래서 중간에 책을 던져버릴까 잠깐 고민하기도 했다.
월킨의 억지 주장이 끝난 뒤, 나머지 세 학자들이 월킨의 소논문에 대해 논평을 하는 글들이 이어졌다. 고백하건대, 필자는 여기서부터 정말 안도의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나와 비슷하게 세 명의 학자들 모두 월킨의 어처구니 없는 소논문 내용에 대해 적잖은 충격과 황당함을 느낀 것 같았다. 슈라이너는 월킨 자신의 견해를 지지하기 위한 그의 주석 작업이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평했고, 제임스 던은 “매우 극단적인 사례”로 평했다. 마이클 바버 역시 그의 성경 해석은 설득력이 없다고 평한다.
학자들이 월킨의 글에서 특히 주목한 부분은 그가 말하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에 대한 문제이다. 필자의 블로그에 자주 오는 분들이라면 잘 알다시피, 이것은 구원파가 좋아하는 구호이기도 하다. 세 학자들은 월킨이 말하는 구원이라는 것이 좀 이상하다고 지적한다.
특히 슈라이너가 날카롭게 지적한 부분은 “어떤 명제에 대한 지적인 동의는 그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소유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월킨은 마치 믿음을 어떤 교리에 대한 지적인 수용으로 정의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월킨은 믿으면 구원을 받은 것이라며, 그 사람은 결코 잃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우리가 과연 그 사람이 믿은 것이 정말 믿은 것인지 어떻게 아는가? 이 점에서 월킨이 서술하는 내용은 정말 구원파의 주장과 똑 닮아 있다.
특히 제임스 던이 말하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이 월킨의 글에서 간과되고 있다고 지적한 부분은 아직 구원파적인 사고관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 매우 유익하다. 던은 월킨이 ‘이미’ 얻은 구원에 대해 너무나 강조하다 못해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말한다. 성경은 분명하게 구원의 ‘아직’의 측면을 말하고 있으며, 우리는 성경의 이런 내용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반면에 월킨은 ‘이미’ 얻은 칭의를 위해 성경에서 말하는 각 사람이 행위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아직’의 본문들을 전부 무시한다.
토마스 R. 슈라이너와 제임스 D. G. 던의 입장
다음으로 슈라이너의 견해는 필자의 생각에 개혁주의적 관점에 가장 가까울 것 같다. 그는 행위가 분명 최종 심판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 말하지만, 이 행위는 믿음을 증명한다는 의미에서만 그렇다는 조건을 단다. 즉 그에게 행함이란 믿음에서 나오는 결과물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는 행함이 최종 심판에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을 판결에 대하여 참작될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는 이 점에서 성경의 두 가지 상반되어 보이는 증언들, 곧 오직 믿음으로 얻는 칭의와 각자의 행위대로 받는 심판에 대한 두 본문들을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제임스 던의 견해는 슈라이너와는 다르다. 던은 성경에서 상반되어 보이는 본문들이 있을 때 더 우세한 쪽을 위해 다른 한 쪽을 희생하는 것이 성경을 정당하게 다루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필자 역시 이 견해에 동의하는 편이다). 그래서 그는 상반되어 보이는 두 가르침을 굳이 억지로 조화시킬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는 과정에서 분명 둘 중 하나의 본문은 그 의미가 어느정도 희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을 최대한 순수하게 해석하려고 하는 태도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던은 성경을 어떤 도그마에 조화시키려 하기 보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즉, 던이 보기에 성경은 믿음으로 얻은 의롭다 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의 행위가 심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두 가지 모순되어 보이는 상황을 조화시키려 애쓰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칭의는 믿음으로 얻는다. 그러나 최종적인 판결에서는 믿음만 고려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는 우리들의 행함 역시 고려된다. 이것이 성경의 증언을 어느 한 부분을 희생시키지 않고 대우하는 것이다.
마이클 B. 바버의 가톨릭 입장
나는 개인적으로 마이클 바버의 글을 읽으면서 많은 새로움을 느꼈다. 가톨릭 신학에 대해서는 여러 책들을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개신교와의 핵심적 차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딱 요약적으로 말하기에는 뭔가 애매한 감이 계속해서 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마이클 바버의 소논문을 읽고, 그것에 대한 개신교 학자들의 논평을 읽으면서 필자는 가톨릭의 신학에 대해 더욱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가톨릭은 ‘칭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개신교처럼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여 설명하지 않는다. 가톨릭에게 있어 의롭다 함이란 ‘칭의’와 ‘성화’가 함께 섞여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의화’라고 부른다.
그래서 가톨릭에게 ‘의화’란 법정적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지위를 뜻하는 동시에 실제적으로 의로워지는 과정을 포괄한다. 그들은 이 두 가지 요소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보는 것이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라는 설명을 가톨릭에서는 믿음으로 의로운 지위를 얻는다고만 보지 않고 정말 실제적으로 의로워지는 과정을 시작했다고 본다.
그래서 가톨릭에게 행함은 당연히 최종 심판에서 고려될 수 있다. 물론 이 행함을 그들은 자기들이 온전히 성취한 어떤 순수한 공로로 여기지는 않는다. 그랬다면 자력 구원이자, 행위 구원이 됐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말하는 행함이란 은혜를 통해 신자들이 수행하는 것과 관련된다. 즉, 신자들이 의화 되면서 행하는 행위는 곧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 역시도 ‘은혜’인 것이다.
물론 개신교 학자들은 이 가톨릭 학자의 이러한 설명에 동의하지 않는다. 월킨은 그저 전통적인 근본주의 개신교 입장에서 이것을 반대하는 듯이 보이지만, 슈라이너와 던은 분명하게 (예상되는) 신약성경의 헬라어 용법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의롭다”에 사용하는 헬라어 용법들은 결정적으로 법정적 용어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나도 이 점에서는 개신교 진영의 신약학자들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라이너와 던은 가톨릭 신학자인 마이클 바버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 바버 역시도 자신이 김세윤 교수 아래에서 개신교 신학들을 배울 수 있었다며 애정 어린 신호를 보낸다. 물론 대중적인 차원에서는 개신교의 기독교인들이 가톨릭의 기독교인들을 향해 많은 오해와 악의에 찬 비난들을 계속하고 있지만, 보다 아카데믹한 영역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아래에서 한 형제가 된 것 같은 훈훈함이 있는 것 같아 괜스레 필자 역시도 기분이 좋아졌다.
다양한 입장들 속에서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최종 심판에서 행위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에 대해 누구의 입장을 따라야 할까? 그것은 자유이다. 본인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면 될 것이다. 월킨과 같이 한 번 얻은 구원은 절대 잃어버릴 수 없다며 다른 본문들을 이 틀에 맞춰 해석해도 좋고, 슈라이너처럼 온건한 개혁주의 관점에서 조화를 꾀할 수도 있다. 아니면 제임스 던처럼 상반되는 본문들을 억지로 다듬으려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마이클 바버와 같이 가톨릭의 견해에 끌린다면, 가톨릭의 신학에 대해 더 공부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나는 특별히 내 블로그에 오는 구원파 출신의 분들이 월킨에 대한 다른 학자들의 비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편집자인 앨런 P. 스탠리는 각 학자들의 입장을 정리하면서 월킨의 견해를 비판한다. 그는 월킨이 믿음을 복음의 진리에 대한 단순한 동의로 정의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하지만 월킨은 구원은 믿음을 통해 은혜로 얻는다고 말하는 것은 구원이 시간의 한 순간, 즉 회심의 순간으로 국한되고 또 국한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따라서 순종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대침(구원파)이 구원을 바라보는 견해와 거의 정확하게 동일하다. 그리고 이 책에서 월킨은 이런 교리적 틀이 성경의 본문들을 다룰 때 얼마나 많은 부분을 희생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 정말 잘 보여준다. (비록 그는 그럴 의도가 없었겠지만 말이다.)
솔직히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약간 밸런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월킨의 성경 해석은 너무 초보적이었기 때문이다. 월킨의 글과 다른 학자들의 글을 함께 놓고 읽는 것은 마치 유치원생을 가운데에 두고 대학원생들이 둘러 싼 것과 같은 효과를 일으킨다. 아마 이 책을 직접 사서 읽어본 분들 역시 필자와 동일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필자는 월킨이 좀 불쌍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아마 월킨이 갖고 있는 구원에 대한 이해가 너무 얕은 것이었기 때문에 성경 해석에서 이런 한계가 생겨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구원파가 자신의 교리적 틀에 성경을 맞춰 해석하다 보니 성경에서 말하는 심오한 내용들을 거의 전부 놓쳐버리고 마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구원파 출신들에게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이 책은 구원파적 사고관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에게 보다 더 나은, 그리고 충격적인, 틀을 깨는 사고를 소개할 것이다. 특히 구원파가 가르치는 복음, 구원파가 가르치는 구원의 교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이 책을 반드시 읽어봐야 한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학자들은 월킨의 구원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성경이 말하는 것과 다른지 조목 조목 친절하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책은 매우 얇기 때문에, 읽는 데에도 큰 부담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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